장재형 목사 성경 묵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의 뜻 (Olivet University)

장재형목사
장재형목사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봉사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신앙의 수고를 구원의 자격으로 여기면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게 되고, 은혜와 삶을 떼어 놓으면 고백은 생활에서 멀어지기 쉽다. 장재형 목사의 로마서 10장 설교는 이 물음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에서 풀어 간다. 믿음은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응답이며, 예배와 순종은 받은 사랑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이다.

열심이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는 이유

바울은 동족의 구원을 바라며 하나님께 기도한다(로마서 10:1). 이스라엘의 불신을 다루는 그의 말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바라는 간절함에서 나온다. 그들이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밝히는 까닭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도록 돕기 위해서다.

로마서 10장 2~3절이 짚는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한 채 자기 의를 세우려 했다. 자기 의란 내가 지킨 규칙과 쌓아 온 수고를 근거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는 태도다. 열심이 크더라도 그것으로 자신의 구원을 보장하려 한다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

바울 자신도 회심 전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박해할 만큼 종교적 열심이 강했다. 그러나 빌립보서 3장 8~9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귀하게 여기며, 믿음으로 주어지는 의를 구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말씀을 오래된 신앙 경력과 교회 안의 헌신에도 적용한다. 예배와 봉사는 소중하지만, 그 수고가 하나님께 구원을 요구할 권리가 되지는 않는다.

율법의 마침이신 그리스도와 가까이 온 은혜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가르치고, 그 앞에 선 사람이 자신의 죄와 한계를 깨닫게 한다. 로마서 10장 5절이 말하는 율법의 의를 따라 살려면 그 요구를 행해야 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온전히 이루지 못한다.

바울은 그 답을 그리스도에게서 찾는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로마서 10:4). 이 설교는 ‘율법의 마침’을 율법이 향하던 목적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의미로 풀이한다. 내가 쌓은 공로를 얼마나 확신하는지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의지하는지가 중요하다.

로마서 10장 6~8절은 그 말씀이 입과 마음 가까이에 있다고 전한다. 복음은 이미 우리에게 들려온 하나님의 선물이며, 자격을 갖춘 뒤에야 나아갈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도 지금 들려오는 복음에 믿음으로 응답하도록 초청한다.

마음의 믿음과 입의 고백이 삶으로 이어질 때

로마서 10장 9~10절은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음을 마음으로 믿는 일을 말한다. 장재형 목사는 마음에 받아들인 믿음이 입의 고백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른다는 말에는 그분께 삶을 맡기고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는 태도도 여기서 구체화된다. 말씀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발견했을 때, 지난 헌신을 내세워 변명하기보다 회개하며 뜻을 돌이킬 수 있다. 이 관계를 이해하면 처음의 질문에도 답이 보인다. 예배는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신을 드리는 시간이 되고, 봉사는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는 일이 된다. 믿음은 이렇게 수고의 이유를 바꾸어 간다.

이 초청에는 혈통이나 종교적 배경의 장벽이 없다. 로마서 10장 11~13절은 유대인과 헬라인의 차별 없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이에게 구원이 열려 있음을 전한다.

은혜를 들은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길로 나아간다

로마서 10장 14~15절에서 바울은 믿기 위해서는 들어야 하고, 듣기 위해서는 전하는 사람이 필요하며, 전하는 사람에게는 보내심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전하고 보내는 일은 이웃의 구원을 바라는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전하는 사람도 계속 말씀을 들어야 한다. 바울은 믿음이 들음에서 나며, 그 들음이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가르친다(로마서 10:17).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순종한 것은 아니었다(로마서 10:16). 그럼에도 로마서 10장은 순종하지 않는 백성을 향해 종일 손을 펴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끝난다(로마서 10:21). 이 오래 참는 사랑은 처음에 동족을 위해 기도하던 바울의 마음과 이어진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은 받은 은혜에 응답하는 일상으로 이어진다. 오늘 내 입술의 고백은, 그 사랑을 아직 듣지 못한 누구의 곁으로 나를 이끌고 있을까.

davidjang.org

장재형목사 강론: 성전을 헐라, 복음이 빚어내는 참된 예배의 회복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인 장재형 목사가 깊이 있게 전파한 요한복음 2장의 강해 설교는 거룩한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린 채 인간의 욕망으로 가득 찬 종교적 현실에 날카로운 경종을 울립니다.

스페인의 거장 엘 그레코의 캔버스 위에 펼쳐진 성전 정화의 명화 속에는, 평화롭고 나태해진 종교적 공간의 결을 사정없이 찢고 들어오는 거룩하고 엄숙한 긴장감이 가득 서려 있습니다.

수많은 군중이 성전 마당의 이리저리한 구석에서 제물로 쓰일 동물들을 사고팔고, 쉴 새 없이 동전을 바꾸며, 눈에 익은 타성적인 질서 속에서 자신들의 평온한 하루를 무심히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의 한복판에 홀로 우뚝 서신 그리스도의 거침없는 몸짓과 단호한 눈빛은 그 모든 안일한 평온함을 한순간에 산산조각 내어버립니다.

그분의 불타는 듯한 거룩한 분노는 단순한 인간적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 한 분만을 온전히 예배해야 할 성전의 자리가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이권 다툼으로 더러워진 비참한 현실을 향한 엄중한 심판의 선언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의 기록 속에 등장하는 “이 성전을 헐라”는 주님의 파격적인 말씀은 바로 이러한 타락의 현장 한복판에서 묵직하게 울려 퍼집니다.

이 거룩한 선언은 단순히 인간의 손으로 쌓아 올린 돌무더기 건물을 무자비하게 무너뜨리라는 지엽적인 물리적 명령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과 영광을 독점한 채 철옹성처럼 굳어버린 부패한 종교적 권력,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경건의 외형 속에 교묘하게 숨어 있던 은밀한 야망,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세워 올린 거짓된 중심을 향해 겨누어진 가장 예리한 복음의 칼날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져 내려야 할 운명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죄악에 찌든 인간의 손에서 건져져 다시 온전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려져야 할 거룩한 곳이었기에 반드시 흔들려야만 했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깊이 있는 설교가 가장 먼저 예리하게 주목하는 지점은, 어째서 세상의 권력자들은 예수님을 그토록 억지로 붙잡아 사지로 몰아넣었는가 하는 뼈아픈 질문입니다.

요한복음 18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어두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끝나자마자 무자비하게 결박당한 채 대제사장 안나스의 법정으로 비참하게 끌려가십니다.

겉보기에는 대단히 합법적인 종교 재판의 외견을 띠고 있었지만, 그 잔인한 심판의 그늘 아래에는 성전의 거대한 이권을 독점하며 유지되던 부패하고 썩어 빠진 권력 구조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꽁꽁 묶어놓고 심문하던 자들은 표면적으로는 그분의 제자들의 정체성과 가르친 교훈들을 캐묻는 듯 보였으나, 실제로는 자신들이 평생토록 쌓아 올린 견고한 체제와 기득권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리는 그분의 생명의 말씀 앞에서 극심한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민족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의 기운이 짙어지면, 수많은 순례객들이 각처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구름처럼 몰려들곤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허물을 씻고 하나님께 합당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 흠 없는 소와 양, 그리고 비둘기를 정성껏 준비해 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 성전 안마당에서 이루어지던 제물의 공식적인 거래는 경건한 예배를 진심으로 돕기 위한 거룩한 장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먼 곳에서 힘들게 찾아온 가난한 순례자들까지 울며 겨자 먹기로 폭리가 매겨진 비싼 제물을 억지로 사도록 착취하는 거대한 상업 구조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성전 밖에서 예배자가 직접 정성껏 준비해 온 제물은 성전 관리들에 의해 사사로운 흠이 있다는 트집을 잡혀 매몰차게 거절당하기 일쑤였고, 결국 사람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성전 내부에서 바가지요금을 치르고 제물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의 마당을 휘저으며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준엄하게 꾸짖으신 것은, 은혜와 용서가 가득해야 할 거룩한 자리를 비정한 시장바닥으로 전락시킨 종교적 탐욕을 향한 가장 거룩하고 치열한 항의였습니다.

그분이 손수 매를 채찍 삼아 엎으신 것은 단순히 상인들의 돈궤나 나무 탁자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진실한 마음으로 나아오려는 영혼들의 어깨 위에 짓눌려 있던 부당하고 무거운 짐, 거룩한 예배의 이름을 악랄하게 팔아 사람들을 억누르는 구조, 그리고 영적인 거룩함을 개인의 배를 채우는 이익으로 바꿔치기한 왜곡된 신앙 질서 전체였습니다.

그러나 이 준엄한 성전 정화의 말씀은 단순히 먼 과거 고대 이사회에 존재했던 썩어 빠진 성전 권력만을 고발하는 박물관의 유물이 아닙니다.

오늘날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개개인의 은밀한 마음의 성전 안에도 이와 똑같이 우상처럼 떠받드는 수많은 것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와 사회적 권력,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체면과 고집스러운 전통, 그리고 스스로 쌓아 올린 종교적 자부심과 율법적인 자기 의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보다 앞서 자리를 차지할 때, 그것은 이미 신앙의 거룩한 이름을 걸치고 있는 또 하나의 추악한 우상이 됩니다.

우리 입술에서 아무리 거룩하고 은혜로운 언어가 흘러나온다 할지라도, 내 영혼의 중심이 온전히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지 않다면, 그 마음은 이미 이권에 눈이 먼 장사꾼의 집으로 기울어져 있는 셈입니다.

참된 믿음이란 내면의 그러한 거짓된 성전을 번지르르한 치장으로 더 단단하게 감추거나 꾸미는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이란 거룩하신 주님 앞에 엎드려 내 안에서 사정없이 무너져 내져야 할 허물들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직면하는 눈물의 회개에서 비로소 힘있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흔히 스스로를 불의한 안나스나 탐욕스러운 상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의로운 사람인 줄로 착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면, 나 자신의 편안함과 이익을 악착같이 지키기 위해 심지어 거룩한 하나님까지 내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 이기적인 본성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펴서 읽고 묵상하는 시간은 남의 허물과 죄악을 조목조목 분석하는 심판의 시간이 아니라, 내 마음속 제단이 과연 누구를 향해 바쳐져 있는지 뼈아프게 묻는 거울 앞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결정적인 대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교리적인 지식을 머리로 동의하고 받아들이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강조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친히 헐어내고자 하시는 우리의 타락하고 왜곡된 자아의 중심을 남김없이 내려놓는 십자가의 결단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낡은 성전을 무자비하게 헐라 명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파멸시키거나 죽이기 위함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새롭게 살려내기 위한 놀라운 사랑의 방식을 뜻합니다.

인간의 욕심으로 가득 찬 낡은 성전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그 빈폐허 위에서만 비로소 하늘의 진정한 은혜는 새 길을 낼 수 있습니다.

이 엄숙한 영적 적용은 개인의 은밀한 경건의 울타리에만 결코 머물지 않습니다.

부부의 완고한 자존심, 자녀를 향한 집착 어린 소유욕,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인정받고 싶어 하는 헛된 욕망 역시 우리 삶 속에서 종종 아주 작은 규모의 성전으로 변질되곤 합니다.

입으로는 사랑과 이해를 부르짖으면서도 실제로는 내 생각과 기준을 절대화하여 상대방을 옥죄일 때, 우리는 이웃과 온전한 화해를 이룰 수 없으며 하나님 앞에서도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주님은 바로 그 완악하고 굳어버린 우리의 중심을 향해 서슴없이 “그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비밀스러운 말씀을 던지셨을 때, 당시의 사람들은 그 심오한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어리둥절해했습니다.

그들은 헤롯 왕이 무려 4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공들여 지은 눈부신 건축물만을 떠올렸지만, 요한복음의 저자는 그 말씀의 진정한 실체를 분명하게 밝혀줍니다.

예수님께서 가리키신 성전은 돌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바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실 자기 육체 그 자체였습니다.

인간의 오해에서 비롯된 이 착각은 훗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 위한 빌거리를 찾던 자들의 거짓 증언의 주요 명분이 되었고, 초대 교회 순교자 스데반을 향한 부당한 고발 속에서도 끈질기게 반복되었습니다.

이 거대한 사건의 기저에는 복음이 지닌 가장 깊고 측량할 수 없는 신학적 통찰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구약의 성전을 단순히 폐기처분하신 것이 아니라, 그 성전이 오랜 세월 동안 간절히 가리키고 예표하던 궁극적인 실체를 당신의 거룩한 몸 안에서 완벽하게 성취하셨습니다.

언덕 위 십자가에서 그분의 거룩한 몸이 무참히 찢기실 때 성전의 휘장이 갈라졌고,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생명의 길이 비로소 활짝 열렸으며, 부활의 영광 안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새로운 예배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자리는 세상의 특정한 건물이나 특권을 가진 소수의 계층에 결코 갇혀 있지 않습니다.

이름 없는 죄인도, 삶에 지친 가난한 자도, 병들고 소외된 자도, 심지어 멀리 하나님을 떠나 있던 이방인까지도 이제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값없는 은혜의 보좌 앞에 거리낌 없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따뜻하고도 준엄한 태도는 이 복음의 빛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율법의 차가운 이름으로 여인을 돌로 쳐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돌을 손에 쥐었지만, 주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그들의 양심을 찌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에 떨던 여인에게 정죄의 벼락을 내리는 대신, 다시는 죄의 자리에 머물지 말고 새 삶을 살아가라는 은혜와 진리의 길을 온전히 열어주셨습니다.

주님은 율법의 근간을 무너뜨리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이 진정으로 가리키고 완성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와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십자가 위에서 온전히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헐라”는 주님의 음성은 단순히 모든 것을 파괴하고 무너뜨리겠다는 절망의 언어가 결코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을 멸망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참된 생명으로 다시 세우시기 위해 친히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다만 그분이 새롭게 세우시는 영원한 새 성전은 인간의 교만한 탐욕이나 얄팍한 자기 의의 토대 위에는 결코 세워질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절대적인 순종, 이웃을 향한 사랑의 희생, 그리고 사망의 권세를 깨부순 부활의 산 소망 위에서만 진정한 참된 예배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다시 세우시는 새로운 성전은 어느 한 개인의 내면적 평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던 차가운 담들을 여지없이 허물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대하고 아름다운 새로운 공동체를 세워나갑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주님은 우리의 진정한 화평이 되시며, 원수 되어 갈라졌던 둘을 하나로 만드시는 평화의 주인이십니다.

오성령의 강력한 임재 안에서 초대 교회는 인간의 손으로 정교하게 지은 어떤 웅장한 건물보다 훨씬 더 깊은 영적 의미를 지닌 성전, 곧 살아계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공동체로 지어져 갔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의 초대 교회의 모습은 바로 이 새 성전의 영광스러운 자화상을 세상에 남김없이 보여 주었습니다.

남종과 여종의 신분 차이가 사라지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오랜 장벽이 무너졌으며, 종과 자유인의 계급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온전히 하나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인간이 세상의 잣대로 만들어낸 온갖 계급과 차별의 장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앞에서 결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은 특정한 사람들을 배제하고 자기들만의 성을 쌓는 편협한 체제가 아니라, 모든 상한 심령을 주님 안에서 다시 화해시키고 하나 되게 만드는 치유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교회 역시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과거의 예루살렘 성전처럼 다시 타락하여 장사하는 집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거대한 제도가 복음의 생명력을 대신하고, 차가운 전통이 뜨거운 사랑을 억압하며, 세상의 권력과 물질적 자본이 영적인 섬김보다 우위에 설 때, 교회는 어김없이 낡은 성전의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뒷걸음질 치게 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성전을 헐라”는 주님의 준엄한 말씀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에 그치지 않고,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의 교회와 우리 개개인의 성도들에게도 여전히 뼈아픈 현재형의 경고와 초대

장재형 목사의 설교가 지닌 진짜 위력과 깊이는 바로 이 개혁의 칼날을 외부의 타협적인 세상을 향한 비판으로만 돌리지 않고, 먼저 설교자를 포함한 우리 자신을 향하게 만드는 정직함에 있습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새로워지기를 원한다면, 그 변화의 시작은 언제나 나 자신의 완악한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내가 세상 앞에서 움켜쥔 자기 의, 내면 깊은 곳에서 버리지 못한 은근한 우월감, 그리고 복음의 야성보다 세상의 안전을 더 소중히 여겼던 안일한 자리들이 십자가의 거룩한 불길 앞에서 남김없이 무너질 때, 주님은 그 상한 폐허의 자리 위에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새 성전을 든든히 세우십니다.

성전이 무자비하게 헐리는 그 개혁의 과정은 우리의 자아를 부수기에 언제나 고통스럽고 눈물이 납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로 이 성전 개혁의 말씀을 선포하셨기에 유대 지도자들로부터 끊없는 오해와 살해 협박을 받으셨고, 초대 교회의 스데반 역시 성전과 율법의 틀을 거스른다는 거짓 증언과 돌멩이 세례 속에서 거룩한 순교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정한 복음은 바로 그러한 세상과의 피할 수 없는 충돌 속에서 더욱 눈부시게 선명해졌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때, 죄악과 위선으로 굳어져 버린 낡은 세계는 결코 그 평온한 상태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의 구체적인 적용은 우리의 일상과 아주 작은 공동체 속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투명한 재정의 흐름, 공정하고 정직한 섬김의 자세, 서로를 권력으로 억누르지 않고 존중하며 세워주는 거룩한 질서가 교회 안에 회복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결코 자신의 세속적 유익이나 성공을 위해 거룩한 복음을 교묘하게 이용하지 않아야 하며, 교회는 세상의 권력이나 자본의 논리에 마음을 빼앗겨 세속화되지 않아야 합니다.

진정한 새 성전 공동체는 화려한 외형과 거창한 규모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깊은 낮아짐과 섬김을 통해서만 세상에 비로소 증명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성전을 헐라고 명하셨지만, 그분의 구속 사역의 결말은 결코 황폐한 폐허가 아니었습니다.

그 파괴의 끝에는 사흘 만에 사망의 권세를 깨부수고 다시 일으키시는 찬란한 부활의 능력이 굳건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전을 헐라는 말씀은 우리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두려운 명령인 동시에,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풍성함으로 초대하시는 가장 깊고 다정한 부름입니다.

오늘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과연 무엇이 아직도 주님의 정화의 채찍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꼿꼿하게 버티고 서 있는가.

나는 정말 그분이 새롭게 세우시는 거룩한 새 성전의 돌이 되어 이 세상을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갈망하는가.

이 묵직한 질문 앞에 오래도록 머물며 자신의 연약함을 돌아보는 그 자리에서, 우리의 신앙은 형식적인 종교적 장식에서 벗어나 살아 있는 순종이 되고, 메마른 습관이 아니라 생명의 복음으로 온전히 거듭나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낡은 자아를 아프게 헐어 내시는 그 거룩한 손길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으로 견고하게 세워지는 공동체의 소중한 한 모퉁이 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교회의 진짜 모습은 세상의 이익을 좇는 삭살 한 시장바닥이 아니라,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영광을 세상 끝까지 드러내는 살아 숨 쉬는 성전으로 든든히 서게 될 것입니다.

gloryofgod.kr

www.davidjang.org

장재형목, 하나님의 거룩한 법정과 선으로 악을 이기는 복음의 위대한 능력

1. 자비의 온기와 내면의 법정을 무너뜨리는 사랑의 사건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심판』이 보여주는 인간의 실존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죄책감과 정죄의 차가운 공기 속에 갇힌 피고의 모습과 같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를 피고석에 앉히고 끊임없이 고발하는 내면의 은밀한 법정을 가지고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빅토르 위고의 명작 『レ・ミゼラブル(레 미제라블)』에서 주인공 장발장의 영혼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법률이 집행하는 형벌의 차가운 칼날이 아니라, 그의 모든 죄를 덮어주었던 미리엘 주교의 조건 없는 자비와 따뜻한 손길이었습니다. 이처럼 깨어지고 일그러진 한 인간을 근원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대개 힘의 과시나 강압적인 정죄가 아니라, 자신을 철저히 낮추어 타인의 허물을 덮어주는 희생적인 사랑의 사건입니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로마서 12장 16-21절 강해 설교는 그리스도인의 구체적인 삶이 과연 어떠한 토대 위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최종적으로 어디를 향해 전진해야 하는지를 신앙의 본질적 차원에서 깊이 있게 성찰하도록 인도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겸손은 단순히 외적으로 세련되게 꾸며진 낮은 태도의 장식품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거대한 악을 오직 하나님의 선으로 받아치고 이겨내기 위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 영혼의 중심에 가장 먼저 세워놓는 견고한 첫 자리이자 거룩한 영적 기초입니다.

본 성경 말씀의 논리적 흐름은 매우 정교하고 선명합니다. 공동체 내부에서 서로 마음을 같이하고, 세상의 높은 데 마음을 두지 않으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교만하지 말라는 사도 바울의 강력한 권면은 교회 안에서 참된 사랑이 어떠한 실천적 형태를 입고 나타나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설교는 이 구절을 단순히 도덕적인 인간관계의 예절이나 처세술로 격하시키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깨뜨려 낮추며 이웃의 형편을 온전히 수용하는 좁고 험난한 믿음의 길로 풀어냅니다. 그리스도인의 낮아짐은 세상 앞에 무력하게 무릎 꿇는 패배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복음이 가진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세상의 악한 방식과 폭력의 굴레에 휘말리지 않도록 우리 영혼의 중심을 견고하게 지켜내는 은혜의 보좌이자 승리의 자리입니다.

로마서 12장이 선포하는 메시지는 우리의 감정이 고요하고 환경이 평안할 때만 실천 가능한 낭만적인 이상주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삶의 현장에서 지독한 오해를 받고, 영혼을 찌르는 깊은 상처를 입으며, 본능적으로 상대방에게 피로써 되갚아주고 싶은 격렬한 분노가 일어나는 바로 그 모순적이고 비참한 자리에서 우리의 믿음이 가야 할 최종 방향을 준엄하게 질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설교는 단호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며, 신앙인의 내면 깊은 곳을 비추는 거룩한 진리의 거울이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내가 지금 누구를 사랑할 능력이 있는가”를 묻기 전에, “나는 과연 누구 앞에서 본능적으로 스스로를 높이고 왕좌에 앉으려 하는가”라는 아픈 질문을 정직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2. ‘Understand’의 신비: 타인의 아픔 아래에 서는 겸손의 성육신

성경이 명하는 “서로 마음을 같이하라”는 말씀은 공동체의 모든 지체가 획일화된 하나의 의견이나 기계적인 동질성을 가지라는 결코 얕은 수준의 요구가 아닙니다. 이것은 타인의 삶의 자리에 정직하게 동참하여, 그가 흘리는 눈물에 함께 아파하고 그가 누리는 기쁨에 진심으로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영적 감수성이자 마음의 거룩한 방향성을 뜻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세상의 이익 집단과 구별되는 참된 그리스도의 몸으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나의 주관적인 기준과 높은 자리에서 재단하고 판단하는 교만한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그 대신 연약한 형제의 눈높이와 삶의 자리 곁으로 묵묵히 걸어가 발을 맞춰주는 사랑의 움직임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참된 겸손은 내 존재를 무가치하게 지워버리는 자학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스러운 형편을 내 시야와 삶의 중심 안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가장 적극적인 신앙의 순종입니다.

이 지점에서 설교의 탁월한 통찰은 사랑과 지식의 깊은 상관관계를 날카롭게 짚어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누군가를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표면적인 정보나 프로필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말 못 할 아픔과 깊은 상처 아래에 내 무릎을 꿇고 서 보는 것이며, 그가 짊어진 무거운 인생의 짐을 나의 어깨로 함께 체휼하며, 그가 쓰러져 있을 때 아무런 조건 없이 실제로 나의 따뜻한 손을 내밀어 영혼을 붙들어주는 희생적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적 이해는 이성적인 차가운 분석이나 비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처럼 사랑으로 인해 기꺼이 자신을 깨뜨려 아래로 낮추는 거룩한 도덕적 도약입니다.

영어 단어 **’Understand(이해하다)’**의 어원이 보여주듯, 참된 이해는 언제나 타인의 아래(Under)에 서는(Stand) 태도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상대방을 복음으로 온전히 품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를 내 교만한 기준과 율법의 잣대 위로 억지로 끌어올려 채찍질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친히 그의 비참하고 연약한 삶의 자리 가장 낮은 곳으로 기꺼이 내려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요구하는 “낮은 데 처하라”는 말씀의 실제적인 영적 깊이이자 무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멀리 떨어진 안전한 조종석에서 타인의 인생을 해석하고 구경하는 차가운 시선이 아닙니다. 그것은 흙먼지 날리는 거친 삶의 한복판에서 고통받는 지체와 가까이 밀착하여 그의 고독과 상처를 온몸으로 함께 견뎌내는 신실한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서에서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와 그의 주인 빌레몬 사이에서 보여주었던 눈물겨운 중재의 태도 역시 이러한 복음적 낮아짐의 흐름 속에 존재합니다. 바울은 당시 사도로서 가졌던 막강한 영적 권위와 지위를 앞세워 빌레몬에게 엄하게 명령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에 근거하여 스스로를 낮추고 간절히 권면하며 깨어진 관계를 봉합하는 화해의 길을 열었습니다. 거대한 영적 권위를 소유한 자가 도리어 가장 낮은 자리에서 빌레몬에게 자비를 간청할 때, 복음은 군림하는 율법의 명령어가 아니라 영혼을 소생시키는 강력한 회복의 언어로 세상에 그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의 모든 인간관계와 영적 질서가 건강하게 세워지는 유일한 방식도, 결국 이와 같이 자기를 부인하는 그리스도적 낮아짐의 좁은 문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합니다.

3. 교만의 지혜를 깨부수는 사랑의 분별력과 공동체의 성화

성경이 경고하는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는 준엄한 말씀은 신앙생활을 오래 한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을 가장 예리하게 찌르는 성령의 검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누구나 너무나 쉽게 자신의 편협한 판단과 경험을 ‘영적인 지혜’라 포장하고, 자신의 통제되지 않은 사사로운 감정과 분노를 ‘거룩한 공의와 정의’라는 이름으로 위장하곤 합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의 성경 묵상은 참된 하늘의 지혜가 결코 머리의 빠른 회전이나 신학적 지식의 양에서 나오지 않으며, 오직 영혼을 살리고자 하는 십자가의 사랑의 분별력에서만 흘러나온다고 강력히 선포합니다. 구약 잠언의 지혜로운 권면처럼,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는 어리석은 자의 미련함을 따라 대답하지 않음으로써 함께 죄에 빠지지 않아야 하고, 또 어떤 상황에서는 그 미련함을 진리로 따뜻하게 깨우쳐 그가 파멸의 길에서 돌이키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처신은 인간의 이성으로 볼 때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십자가의 거룩한 사랑 안에서는 완벽하게 일치하는 하나의 생명의 길이 됩니다. 신앙의 삶에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가 논쟁에서 이겨서 나의 옳음을 증명하느냐”가 아닙니다. 그 깨어지고 불편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선하심이 어떻게 영광스럽게 드러나는가”가 유일한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거세된 차가운 지식은 사람의 상태를 현미경처럼 날카롭게 분석하고 설명해 낼 수는 있을지언정, 정작 상처받아 피 흘리는 영혼을 단 한 사람도 살려내지는 못합니다. 반면에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에 철저히 붙들린 하늘의 지혜는, 성도로 하여금 말해야 할 때와 묵묵히 침로를 지키며 침묵해야 할 때를 알게 하고, 상대방에게 가까이 다가가 품어야 할 때와 그가 스스로 돌이킬 때까지 눈물로 기다려 주어야 할 때를 명확하게 분별하게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 설교가 제시하는 영적 지혜는 책상 위에서 논하는 추상적인 교리적 유희가 아니라, 거친 삶의 현장에서 피와 땀이 묻어나는 묵직한 삶의 질감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거친 말이 튀어나오려 할 때 호흡을 한 번 늦추고, 상대를 향한 판단의 속도를 의식적으로 줄이며, 나에게 상처를 준 원수 같은 사람을 위해 골방에서 은밀히 무릎 꿇고 눈물로 기도하는 그 작고 평범해 보이는 삶의 태도들이야말로 하늘의 지혜가 가진 진짜 얼굴이자 실체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복음의 지혜는 현란한 말잔치나 치열한 신학 논쟁의 승리를 통해 증명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십자가를 따르는 삶의 거룩한 방향성과 흔적을 통해서만 온전히 증명됩니다. 복음으로 낮아진 사람은 교만한 자가 보지 못하는 더 많은 영적 진실을 선명하게 보게 되며, 지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영혼의 깊이를 더 깊게 헤아려 알게 됩니다. 고결한 신학적 통찰과 성경의 신비는 인간이 높은 보좌에 앉아 오만하게 아래를 내려다볼 때는 철저히 가려지지만, 상처 입어 쓰러진 누군가의 아픔 곁에 자신의 무릎을 낮추어 함께 피를 묻힐 때 비로소 수정처럼 맑게 열리는 법입니다.

이 참된 지혜의 진위 여부는 다름 아닌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 가장 먼저 치열하게 시험대에 오르게 됩니다. 교회는 이미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완성된 의인들이 모여 자신의 거룩함을 뽐내는 화려한 사교장이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자비가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영적 문둥병자 같은 죄인들이 모여, 서로의 모나고 부족한 허물들을 날것 그대로 마주하며 십자가로 다듬어져 가는 거룩한 성화의 용광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참된 사랑은 나의 인간적인 좋은 감정이 아무런 방해 없이 오래도록 유지되는 안일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도저히 용납하기 힘들고 불편한 인간관계의 지옥 속에서도, 내 감정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평화를 먼저 구하며 묵묵히 십자가를 지는 피나는 순종의 과정입니다. 믿음은 바로 그 고통스러운 순종의 자리에서 우리의 말의 온도를 바꾸고 행동의 방향을 바꾸어 놓습니다.

4. 사사로운 보복의 칼날을 거둘 때 임하는 하늘의 평화와 공의의 신뢰

로마서 12장의 후반부 말씀은 우리를 겸손의 자리에서 더 전진시켜, 인간의 본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원수 사랑’의 극단적인 자리로 우리를 강력하게 밀어붙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바울의 장엄한 명령은 인간의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고 참으라는 수준의 유교적인 억제 윤리나 도덕적 훈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주적인 영적 전쟁의 관점에서, 악이 우리 영혼의 내부로 침투하여 다시금 무서운 속도로 번식하고 파괴적인 생명력을 얻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하라는 강력한 복음의 방역 명령입니다. 나에게 가해진 악에 대해 사사로이 보복하는 행위는 당장에는 정의의 실현처럼 보이고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복수의 순간에 우리 스스로가 악의 잔인한 언어와 방식을 빌려와 결국 내가 증오하던 그 악의 괴물과 똑같이 닮아가게 만드는 사탄의 가장 교묘한 덫입니다.

그렇기에 본문 성경은 우리에게 수동적인 인내를 넘어, 모든 사람 앞에서 적극적으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명령합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선은 우연히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일시적인 착한 감정이나 성격의 온유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감정이 갈기갈기 찢겨나간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의지적으로 선택해 내는 피 묻은 순종의 열매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자를 향한 원수 갚는 권리를 내가 행사하지 않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완전히 이양하는 행위는, 힘이 없어 당하는 무기력한 체념이나 비겁한 도피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우주의 최종 심판자이자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을 인간인 내가 감히 찬탈하지 않겠다는 신앙인의 가장 두렵고도 거룩한 영적 절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이 세상을 공의와 사랑으로 반드시 다스리시고 심판하신다는 절대적인 신뢰가 있을 때야만, 우리는 내 손으로 상대를 반드시 짓밟아 쓰러뜨려야만 내 영혼이 평안해질 수 있다는 세상의 거짓된 확신과 보복의 광기에서 비로소 자유롭게 해방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다윗이 자신을 광기 어린 시기로 군대를 동원해 추격하던 사울 왕을 굴 속에서 단칼에 베어버릴 수 있는 완벽한 기회를 얻고도, 도리어 옷자락만을 베며 칼을 거두었던 역사적 장면은 이러한 믿음의 실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위대한 증거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눈앞에 찾아온 절호의 찬스를 사사로운 복수를 감행하라는 하나님의 허락으로 아집 가득하게 오해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에 대한 최종 판결과 심판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 한 분에게만 속해 있다”라는 거룩한 신앙의 고백이, 그의 타오르는 분노와 손에 쥐어진 날카로운 칼날을 멈추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흘러나오는 초자연적인 평화는, 세상의 군사력과 힘의 균형이 가져다주는 깨어지기 쉬운 일시적인 평화와는 그 차원과 본질이 완전히 다릅니다.

설교는 이 세상이 말하는 평화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주시는 평화를 명확하게 구별합니다. 세상의 힘과 권력으로 상대방을 철저히 억누르고 굴복시켜 얻어내는 평화는, 겉으로는 갈등이 잠시 종식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정작 그 사람의 마음속에 응어리진 증오와 적의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인의 낮아짐과 섬김, 그리고 희생을 통해 임하는 하늘의 평화는, 상대를 힘으로 무너뜨려 쟁취하는 정적(靜寂)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를 향해 다가오던 악의 치명적인 흐름을 내 몸을 제물 삼아 완전히 끊어버리고, 원수 되었던 관계 속에 하나님의 새로운 화해의 가능성을 힘차게 열어젖히는 거룩한 안식입니다. 그 십자가의 평화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지극히 연약하고 바보스러워 보이지만, 역사상 가장 깊은 자리에서 인간의 얼어붙은 영혼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유일한 하늘의 권능입니다.

5.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는 적극적인 사랑과 승리의 소망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는 사도 바울의 급진적인 선언은 타락한 인간의 생물학적 본능과 이기적인 자아의 흐름을 완전히 거스르는 영적 폭탄과 같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이처럼 인간의 육체적 본능이 철저히 꺾이고 거슬러 흐르는 처절한 순종의 자리에서,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신성한 초자연적 능력을 가장 찬란하게 드러냅니다. 나를 해한 원수의 굶주림과 목마름을 채워주는 적극적인 사랑은, 결코 그가 행한 악을 대수롭지 않게 묵인해 주거나 타협하는 값싼 온정주의나 비겁한 관용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에게 가해진 악이 나라는 존재를 오염시켜 또 다른 보복과 미움의 악으로 악순환되지 못하도록 온몸으로 저항하는, 복음이 가진 가장 강력하고도 공격적인 저항 방식입니다.

이때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결코 상대방의 명백한 잘못이나 범죄를 가볍게 여기며 은폐하는 도덕적 맹목주의가 아닙니다. 설교가 제시하는 복음의 논리는 오히려 세상의 법정보다 훨씬 더 엄격하고 엄위합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가해진 악을 똑같이 악으로 되갚아주지 않기 위해서는, 내면에서 화산처럼 치밀어 오르는 인간적인 분노와 두려움의 감정을 억지로 감추지 않고 십자가 제단 앞으로 그대로 가지고 나가 쏟아내야만 하며, 그 처절한 영적 탈진의 자리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선을 의지적으로 선택하는 뼈를 깎는 자기 부인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원수 사랑은 감정의 사치스러운 미화나 감상주의가 아니라,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 자신의 왜곡된 자아와 자존심을 쳐서 복종시키는 가장 깊고 치열한 영적 영성 훈련입니다.

장재형 목사가 본문을 통해 강력하게 선포하는 복음의 정수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악에게 지는 것은 단지 세상적인 싸움이나 경쟁에서 패배하여 손해를 보는 가시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악에게 패배하는 것은, 상대방이 내게 던진 미움과 보복의 불화살이 내 영혼을 전염시켜 내 안에 존재하던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과 평안을 완전히 무너뜨리도록 사탄에게 내 마음의 방어벽을 허락해 주는 일입니다. 반대로 성도가 선으로 악을 이겨낸다는 것은, 세상이 내게 어떠한 쓰레기와 증오를 던질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내 전인격과 반응을 완벽하게 통치하시도록 내 마음의 주권을 왕이신 주님께 온전히 양도하는 일입니다. 그 좁은 길 위에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위대한 용서와 진정한 화해의 기적이 있으며, 심령을 쪼개는 통회의 눈물과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작은 삶의 발걸음들이 존재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는다’는 신비로운 말씀의 의미 역시 이러한 맥락 속에서 명쾌하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내가 원수에게 베푼 예상치 못한 그리스도인의 선한 행동과 자비는, 도리어 상대방의 무뎌진 양심과 이성을 강력하게 흔들어 깨워 마침내 스스로의 죄를 부끄러워하고 하나님 앞에 고꾸라지게 만드는 성령의 뜨거운 불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끝까지 그 선한 사랑을 거부하고 완악하게 대적한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최종 말세의 날에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대 앞에서 그가 행한 악이 얼마나 흉악한지를 고스란히 드러나게 만드는 명백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이든 인류 역사의 최종적인 심판과 판단의 자리는 결코 우리 인간의 나약한 손에 쥐어져 있지 않습니다. 성도에게 허락된 유일한 몫은 세상이 부추기는 악의 추악한 방식에 가담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과 선함을 통해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의 실제와 복음의 가치를 묵묵히 증명해 내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은 결코 빠르거나 수월한 지름길이 아닙니다.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거룩한 성도일지라도 삶의 현장에서 수없이 넘어지고 낙심하며, 골방에서 분명히 원수를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기로 피눈물 흘리며 결단했던 마음이 눈앞에서 원수를 마주하는 순간 다시금 사정없이 요동치고 흔들리는 비참한 자기 자신을 매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진정한 회개는 나의 이러한 신앙적 실패와 연약함을 절망의 끝으로 몰고 가 영혼을 파산시키는 사탄의 정죄가 아닙니다. 참된 회개는 나의 불완전함보다 훨씬 더 크신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 보좌 앞으로 우리의 삶의 방향을 다시금 온전히 돌려놓는 거룩한 회복의 통로입니다. 오늘 내가 실천하는 단 한 번의 언어적 절제, 오늘 내가 내미는 단 한 번의 눈물 어린 용서, 그리고 원수를 향해 내미는 단 한 번의 따뜻한 손길이,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 속에서 마침내 거대한 화해와 부흥의 숲을 이루는 겨자씨 한 알의 신성한 씨앗이 될 것입니다.

결국 이 장엄한 설교가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가슴속에 아로새기는 복음의 소망은, 세상이 말하는 화려하고 소란스러운 승전보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철저히 낮아짐으로 시작하여 하늘의 사랑으로 세상을 분별하고, 모든 판단과 심판의 권리를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완전히 위탁하며, 마침내 쏟아지는 악을 선함으로 삼켜버리는 그리스도인의 조용하지만 세상을 뒤집는 영적인 능력입니다. 복음은 오늘도 우리에게 세상의 죄악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 승리하라고 외치지만, 주님이 가르쳐 주신 그 위대한 이김의 방식은 힘의 대결이 아니라 오직 낮아짐과 눈물의 사랑, 그리고 십자가의 선함뿐입니다.

오늘, 우리의 손에는 여전히 내려놓지 못한 채 상대를 겨누고 있는 증오와 자존심의 칼날이 쥐어져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주님의 음성을 따라, 내가 다시금 하나님의 선으로 먹이고 마셔야 할 내 인생의 목마른 원수는 과연 누구입니까?

gloryofgod.kr

davidjang.org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강해를 통해 본 ‘먼저 찾아온 사랑’의 연대기

정죄의 법정을 넘어 은혜의 식탁으로: 로마서 5장이 선포하는 파격적 화해

은식기가 열어젖힌 혁명보다 거대한 용서의 세계

빅토르 위고의 걸작 『레미제라블』을 관통하는 가장 강렬한 동력은 성난 민중의 바리케이드도, 자베르 경감의 집요한 추격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한 인간의 영혼이 ‘설명할 수 없는 호의’ 앞에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찰나의 순간입니다. 은식기를 훔쳐 달아나다 붙잡힌 장발장에게 미리엘 주교는 수갑 대신 나머지 은촛대까지 건네며 “이것은 당신의 영혼을 사기 위해 내가 지불하는 값”이라고 말합니다. 정죄와 처벌이 당연시되던 자리에 ‘선물’이 먼저 도착했을 때, 평생을 증오로 버티던 인간의 방어기제는 비로소 해체됩니다.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로마서 5장 묵상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듭니다. 왜 우리는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여전히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심판관 앞에서 떨고 있는가? 왜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삶의 작은 파고 앞에서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런 벌을 받는가”라며 자책하는가? 이 설교는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복음이란 단순한 종교적 이론이 아니라 죄책감의 감옥에 갇힌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무죄 방면 선언’**임을 심오하게 역설합니다.


거룩한 종전 선언: 추격전은 끝났고 평화는 시작되었다

로마서 5장 1절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화평’은 단지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거나 근심이 일시적으로 잦아든 심리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근본적인 **’영적 전쟁’**이 종식되었다는 공식적인 종전 선언에 가깝습니다.

“복음의 화평은 나의 상태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내려진 하늘의 판결문을 받아들이는 영적 순종의 결과다.”

세상이 말하는 평화는 언제나 조건부입니다. 내가 남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거나, 환경이 안정적일 때만 겨우 유지되는 위태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복음의 화평은 그 출발점부터가 다릅니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었기에 얻어낸 성취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먼저 관계를 회복시키셨기에 주어지는 **’선포된 평화’**입니다. 마치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전히 가슴속에 애굽 군대의 말발굽 소리를 환청처럼 듣고 있을지라도, 실제로 그들을 뒤쫓던 군대는 이미 수장되어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성경 묵상의 깊이는 내 감정의 기복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끝난 재판의 결과를 신뢰하는 데서 판가름 납니다.


연단이라는 용광로를 지나는 소망의 무게

그렇다면 화평을 얻은 성도의 삶에는 더 이상 고통의 파도가 일지 않는가?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눈물의 골짜기가 면제되는 것은 아니며, 믿음이 깊다고 해서 인생의 시련이 비켜가는 것도 아닙니다. 장재형 목사의 강해가 울림을 주는 이유는 고난을 성급하게 미화하여 덮어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히려 고통의 한복판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영적 역설’**을 예리하게 포착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는 바울의 고백은 고통 자체를 즐기라는 가학적인 명령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가 흘리는 눈물을 단 한 방울도 헛되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것을 소망을 빚어내는 재료로 사용하신다는 장엄한 약속입니다.

  • 비워냄의 시간: 불속에 던져진 금이 불순물을 태워버리고 순도를 높이듯, 시련은 우리 안에 남아있는 지독한 자기 확신과 교만을 태워버립니다.
  • 영혼의 무게: 소망은 가벼운 낙관주의자가 던지는 구호가 아닙니다. 그것은 수많은 환난을 통과하며 빚어진 ‘연단된 인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묵직한 존재의 힘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아픈 시간마저도 결국은 선(善)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분의 섭리 앞에 겸손히 무릎 꿇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복음은 고난을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과하며 우리를 **’더 큰 사람’**으로 빚어냅니다.


적대적 상태에서 먼저 도착한 파격적 사랑

로마서 5장의 신학적 정점은 8절에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인간의 사랑은 대개 ‘이유’가 필요합니다. 상대가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거나, 적어도 나의 호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마음을 엽니다.

하지만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정반대의 지점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강력히 상기시킵니다.

  1.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스스로를 구원할 어떠한 힘도 의지도 없을 때.
  2.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을 배반하고 등을 돌린 그 순간에.
  3.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던 그때.

사랑은 우리가 회심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려 움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멀리 떠나 있던 그 밤에 먼저 출발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도덕적 성취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아무런 자격 없는 자를 향해 쏟아부으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모(思慕)’**의 사건입니다. 이 파격적인 사랑 앞에서 인간의 모든 방어기제는 무력화됩니다. 자기 의를 내세우던 바리새인도, 상처를 핑계로 마음을 닫았던 세리도, 결국은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계셨던 그 사랑 앞에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란 이 거대한 사랑을 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다 이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에 나를 온전히 맡기는 일입니다.


🍽️ 결론: 정죄의 문턱을 넘어 은혜의 잔치로

결국 로마서 5장은 우리를 차가운 신학 강의실이 아니라 따뜻한 **’은혜의 식탁’**으로 초대합니다. 이미 판결은 ‘무죄’로 끝났고, 화해는 성취되었으며, 심지어 우리의 상처와 환난조차 소망으로 인도하는 거룩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우리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여전히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법정 문 앞을 서성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미 차려진 은혜의 자리에 앉아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까?”

신앙의 성숙은 내가 더 강해지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얼마나 압도적인 사랑을 이미 받았는지를 깨닫고, 그 사랑 안에서 조금씩 더 깊이 안식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 나를 정죄하는 과거의 목소리보다 나를 긍정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더 크게 들리는가?
  • 환난의 폭풍 속에서도 그분이 나를 연단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미소 지을 수 있는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노력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도착한 **’화평’**을 믿음으로 수납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차려놓은 그 넉넉한 식탁에서 비로소 우리는 나 자신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사랑 때문에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됩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자신을 입증하는 피로한 전투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완벽한 사랑 안에서 평안을 배우는 **’거룩한 쉼’**입니다.

gloryofgod.kr

davidjang.org

거친 대리석에서 천사를 해방하듯: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의 성화와 성령론

이탈리아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 복도에는 미켈란젤로가 남긴 ‘노예상(The Slaves)’ 연작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조각들은 이른바 ‘논 피니토(Non-finito)’, 즉 미완성 기법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형체는 대석석이라는 거친 물질 속에 반쯤 갇혀 있으며, 마치 그 무거운 돌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온몸을 비틀며 몸부림치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깎여 나가지 않은 육중한 돌덩이가 인물의 사지를 짓누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부에는 이미 완전한 생명력이 꿈틀거리고 있는 듯한 묘한 긴장감이 흐릅니다.

저는 이 조각상들 앞에 멈춰 서서 한참 동안 그 고통스러운 몸짓을 응시하다가, 문득 우리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마주한 것 같은 강렬한 전율을 경험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얻었으나(Already), 여전히 타락한 본성이라는 육체의 무거운 껍질을 다 벗어버리지 못한 채(Not Yet), 하늘의 거룩함을 향해 신음하며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저 돌 속에 갇힌 노예와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는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고뇌와 성화(Sanctification)의 긴 여정을 깊이 있는 신학적 통찰로 풀어냅니다. 그는 성령의 사역을 단순히 일시적인 초자연적 기적이나 감정적 신비 체험의 영역에 가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령의 역사를 거친 돌더미를 하나하나 깎아내어 그 안에 잠들어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마침내 밖으로 드러내는, 치열하면서도 본질적인 ‘조각의 과정’으로 정의합니다. 우리 삶에 불어오는 성령의 바람은 때로 지친 영혼을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미풍으로, 때로는 우리의 견고하고 모난 자아를 사정없이 깨뜨리는 강력한 망치질로 다가오며 우리를 빚어갑니다.


돌덩이 속의 천사를 발견하다: 육의 본성을 깨뜨리는 영적 투쟁

생전에 미켈란젤로는 **”나는 대리석 안에 갇혀 있는 천사를 보았고, 그 천사가 자유롭게 풀려날 때까지 돌을 깎아냈을 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장재형 목사가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 또한 이 위대한 예술적 영감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그는 죄로 말미암아 부패한 인간의 본성을 성경적 용어인 ‘육체의 일’이라 명명하며,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로막는 근본적이고도 거대한 장애물임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갈라디아서가 경고하는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그리고 분쟁과 시기 등은 단순한 윤리적 일탈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없이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려 했던 아담의 오래된 반역의 습관이며, 우리 영혼의 광채를 가로막고 있는 차갑고 두꺼운 돌덩어리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임재하신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견고한 자아의 돌덩어리에 마침내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 사이의 영적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수반하지만, 이는 생명이 살아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치열한 싸움을 결코 회피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사도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처절하게 탄식했던 바로 그 자리, 자신의 무능함을 뼈저리게 통감하는 그 지점에서 비로소 성령의 초자연적인 도우심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박약한 의지로는 절대로 끊어낼 수 없는 죄의 사슬을 푸는 유일한 열쇠이며, 타락한 본성을 하늘의 거룩한 성품으로 재창조하는 유일한 권능입니다.


진리의 닻을 내리고 은혜의 심연으로: 말씀과 성령의 동행

성령의 역사는 근거 없는 열광이나 일시적인 감정의 고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성령의 임재는 ‘기록된 말씀’이라는 견고한 암반 위에서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꽃을 피웁니다. 장재형 목사는 성령을 ‘진리의 영’으로 강조하며, 성령과 말씀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호보완적 관계를 역설합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밤바다를 항해하는 배에게 길을 안내하는 등대가 필수적이듯, 성령은 자칫 난해한 고대 문자로 남을 수 있는 성경의 텍스트에 신성한 조명의 빛을 비추십니다. 그리하여 그 말씀이 오늘 나에게 들려주시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음성(Rhema)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깊은 성경 묵상 가운데 글자 너머에 숨겨진 하나님의 타는 듯한 심정을 발견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은, 활자 사이사이에 역사하시며 우리의 지각을 깨우시는 성령의 조명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를 이 거친 세상에 고아처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십자가 사랑이 단지 2천 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일어난 박제된 역사적 사건에 머물지 않게 하십니다. 오히려 그 사랑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오늘 나의 삶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현재적 복음의 능력으로 다가오게 하십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이 성령을 가리켜 “우리 마음속에 신앙의 비밀을 여는 열쇠”라고 묘사했듯이, 장재형 목사 또한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그 어떤 인간도 구속의 은혜를 삶으로 번역해낼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자신의 추악한 죄를 자각하고, 그 서슬 퍼런 진리 앞에 순종하여 삶의 항로를 수정하게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방언이나 신유보다 더 확실하고 위대한 성령 충만의 증거일 것입니다.


개별적 조각을 넘어 사랑으로 완공되는 성전: 공동체적 성화

미켈란젤로의 조각이 한 예술가의 천재적인 영혼을 담은 단독적인 작품이라면, 성령께서 빚어내시는 궁극적인 걸작은 성도 개개인이 연결되어 이루는 ‘공동체’라는 거대한 유기적 성전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성령의 사역이 단순히 개인의 내면적 평안이나 수양의 차원에 머무르는 것을 경계합니다.

성령은 제각기 흩어진 이기적인 마음들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묶어 거룩한 연합을 이루게 하는 ‘천상의 접착제’와 같습니다. 오순절 다락방에 임했던 불의 혀는 각기 다른 언어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의 비전, 하나의 사랑으로 녹여내어 예루살렘 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과 같은 성령의 열매는 결코 혼자 골방에 앉아 도를 닦는다고 해서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완전한 사람들과 부대끼는 관계의 현장에서, 나를 아프게 하는 지체를 용서하고, 도저히 내어주기 힘든 것을 내어주는 처절한 사랑의 연습을 통해 서서히 영글어갑니다. 장재형 목사가 주창하는 ‘성령의 전으로서의 교회’는 건물의 웅장함이 아니라, 지체들이 서로를 향해 흘려보내는 희생적인 섬김의 깊이로 그 진가를 증명합니다. 세상의 차가운 냉소 속에서도 교회가 여전히 인류의 소망이 되는 이유는, 그 공동체 안에 성령이 주시는 따스한 위로와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은혜의 강물이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공사 중(Under Construction)인 존재들입니다. 구원은 이미 받았으나, 아직 완전한 영화(Glorification)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 거룩한 긴장 상태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미켈란젤로는 죽음 앞에 자신의 조각들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떠났을지 모르나, 우리 안에 이 착한 일을 시작하신 성령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성령께서는 우리의 모난 성품을 정으로 다듬으시고, 마음의 굳은 살을 제하시며, 마침내 흠도 점도 없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온전한 걸작으로 우리를 빚어가고 계십니다. 그 신실하신 창조주의 손길에 나의 전 존재를 온전히 내어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한 걸음씩 내디뎌야 할 영광스러운 성화의 길입니다.


gloryofgod.kr

davidjang.org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저널리즘 학생들이 뉴스 편집 과정에서 출판물 레이아웃과 디자인을 탐구합니다.

장재형목사
올리벳대학교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OSMC(Olivet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에서 제공하는 뉴스 편집 과정의 마지막 주에는 저널리즘 학생들이 출판 레이아웃과 디자인의 기초를 학습했습니다.

출판물 디자인은 뉴스 기사와 마찬가지로 매우 중요합니다. 스토리와 이미지가 강력할 뿐만 아니라 매력적이고 효과적으로 배열되어야 합니다. 디자인, 페이지나 화면의 스토리, 헤드라인, 사진, 비디오, 그래픽의 시각적 배열은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합니다. 편집자는 디자인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미래의 디자인을 고민하고 뉴스를 더욱 효과적으로 계획하고 패키징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디자인 원칙인 시각적 앵커, 대비, 비율, 균형, 조화/통합 및 흰색(또는 빈) 공간의 사용은 웹 및 인쇄 출판물 모두에서 중요합니다. 이러한 원칙은 독자가 정보를 쉽게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디자인은 또한 브랜드에 대한 핵심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각각의 미디어가 고유한 디자인 스타일을 갖고 있으며, 이는 해당 브랜드의 정체성과 목표를 반영합니다. 예를 들어, Wall Street Journal과 Time 잡지는 일반적으로 진지하고 전통적인 이미지를 유지하며, 반면 USA Today와 Wired 잡지는 보다 다채롭고 대화형 스타일을 채택합니다.

타이포그래피는 디자인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저널리즘 학생들은 수업 중에 PBS 다큐멘터리 “Helvetica”를 시청하여 타이포그래피의 중요성과 효과를 더 깊이 이해합니다. 이 영화는 학생들에게 그래픽 디자인의 역할과 영향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장재형목사 설립|올리벳대학 캠퍼스 개발 추진

장재형목사 설립|올리벳대학에 랄프 윈터 도서관 개원

장재형 목사 설립한 WOA에 기독일보 방미단 방문

장재형목사 설립 WETIA, 세계 복음주의 신학대 네트워크

장재형목사 설립한 WEC 한교연 미국연수단 내방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유럽 신학교들과 협력 논의

장재형목사 설립한 진젠도르프 2023 박사과정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OIT 교수진 CES 2022 컨퍼런스 참석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대표단, ABHE 연례 회의 참석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진젠도르프 박사과정에 전세계 학생들 참여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리버사이드 캠퍼스 최신 랜더링 공개

장재형목사 설립 OTCS 기독교 변증학 과정 신앙의 이유 탐구

장재형목사 (장다윗,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로마서 강해’를 읽고나서…로마서 1장1절

장재형목사 (장다윗,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로마서 강해’를 읽으며…[로마서2장]

장재형목사 (장다윗,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로마서 강해’를 읽으며….

장재형목사 (장다윗,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로마서 강해’를 읽고나서…

장재형목사 (장다윗,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로마서 강해’를 읽고나서…

베드로의 고백과 부인 – 장재형목사 사순절 ‘십자가의길’

장재형 갈라디아서 강해를 듣고 – 바울 사도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글로리오브갓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 TESOL 수업에서는 ESL 교사의 문화적 대응에 대해 논의합니다.

장재형목사
올리벳대학교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 Olivet School of Language Education(OSLE)의 TESOL 교수인 Lisa Baer에 따르면 문화적 이해는 모든 ESL 교사에게 필수적인 수업 내용입니다.

Baer 교수는 최근 강의에서 문화의 개념을 설명했습니다. 자신의 교육 경험을 바탕으로 Baer 교수는 일반적으로 ESL 수업이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갖춘 학생들로 구성되며, 이러한 다양성을 이해하면 학생들의 학습 경험이 향상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TESOL 학생들은 수업 중에 종종 서로의 다른 배경을 공유하며 소통합니다. 이러한 상호작용에서는 수용과 비수용의 차이를 극복하는 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문제를 해결하고 공통점을 찾으려는 노력을 통해 서로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고 전했습니다.

Baer 교수는 또한 ESL 학생들이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보다 생산적이고 포용적인 학습 환경을 조성할 수 있는 몇 가지 전략을 제안했습니다.

장재형목사 설립|올리벳대학 캠퍼스 개발 추진

장재형목사 설립|올리벳대학에 랄프 윈터 도서관 개원

장재형 목사 설립한 WOA에 기독일보 방미단 방문

장재형목사 설립 WETIA, 세계 복음주의 신학대 네트워크

장재형목사 설립한 WEC 한교연 미국연수단 내방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유럽 신학교들과 협력 논의

장재형목사 설립한 진젠도르프 2023 박사과정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OIT 교수진 CES 2022 컨퍼런스 참석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대표단, ABHE 연례 회의 참석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진젠도르프 박사과정에 전세계 학생들 참여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리버사이드 캠퍼스 최신 랜더링 공개

장재형목사 설립 OTCS 기독교 변증학 과정 신앙의 이유 탐구

장재형목사 (장다윗,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로마서 강해’를 읽고나서…로마서 1장1절

장재형목사 (장다윗,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로마서 강해’를 읽으며…[로마서2장]

장재형목사 (장다윗,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로마서 강해’를 읽으며….

장재형목사 (장다윗,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로마서 강해’를 읽고나서…

장재형목사 (장다윗,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로마서 강해’를 읽고나서…

베드로의 고백과 부인 – 장재형목사 사순절 ‘십자가의길’

장재형 갈라디아서 강해를 듣고 – 바울 사도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글로리오브갓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Jubilee College of Music 연례 콘서트에서 천상의 음악을 가상으로 전송하다

올리벳대학교
장재형목사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 Jubilee College of Music (JCM)의 연례 학생 콘서트가 리버사이드 캠퍼스에서 성공적으로 열렸습니다. 이번 콘서트는 온라인 라이브 방송을 통해 세계 각지의 관객들에게 천상의 음악을 선사했습니다.

매년 봄 분기에 개최되는 JCM의 학생 콘서트는 음악 학생들이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발전을 발표하는 장으로 확립되어 있습니다. 이번 콘서트에는 엄선된 학생들이 다양한 음악 설정으로 공연했습니다. 기타 솔로,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 등 다양한 형태의 클래식 음악이 선보였습니다. 온라인 중계를 통해 누구나 어디에서나 콘서트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최근의 폐쇄로 인해 학생들은 개별적으로 또는 가상으로 파트너와 공연 리허설을 진행해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번 콘서트를 통해 음악적 역량을 향상시키고 예배 리더로 성장하는 소중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JCM 1학년 학생인 Jincheng Qiu는 “JCM의 연례 콘서트에 처음 참여했습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수용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난 경험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기술과 스타일을 바탕으로 서로를 칭찬하며 멋진 공연을 선보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이 서로 협력하여 일하는 방식이라고 믿습니다.”

또 다른 대학원생인 디양은 “오늘의 음악에 감동받았습니다. 음악은 인간의 마음을 여는 문입니다. 기독교 음악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JCM은 이번 콘서트에 참여한 모든 연주자들에게 성공적이고 보람찬 행사를 위해 축하를 전합니다. 함께한 모든 분들의 노력으로 아름다운 음악이 세상에 전해졌습니다.

장재형목사 설립|올리벳대학 캠퍼스 개발 추진

장재형목사 설립|올리벳대학에 랄프 윈터 도서관 개원

장재형 목사 설립한 WOA에 기독일보 방미단 방문

장재형목사 설립 WETIA, 세계 복음주의 신학대 네트워크

장재형목사 설립한 WEC 한교연 미국연수단 내방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유럽 신학교들과 협력 논의

장재형목사 설립한 진젠도르프 2023 박사과정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OIT 교수진 CES 2022 컨퍼런스 참석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대표단, ABHE 연례 회의 참석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진젠도르프 박사과정에 전세계 학생들 참여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리버사이드 캠퍼스 최신 랜더링 공개

장재형목사 설립 OTCS 기독교 변증학 과정 신앙의 이유 탐구

장재형목사 (장다윗,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로마서 강해’를 읽고나서…로마서 1장1절

장재형목사 (장다윗,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로마서 강해’를 읽으며…[로마서2장]

장재형목사 (장다윗,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로마서 강해’를 읽으며….

장재형목사 (장다윗,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로마서 강해’를 읽고나서…

장재형목사 (장다윗,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로마서 강해’를 읽고나서…

베드로의 고백과 부인 – 장재형목사 사순절 ‘십자가의길’

장재형 목사의 갈라디아서 강해를 듣고 – 바울 사도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글로리오브갓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OTCS 샌프란시스코, 겨울 분기에 “조직신학 II” 과정 개설

장재형목사
올리벳대학교

다가오는 겨울 분기에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 OTCS 샌프란시스코는 OU 온라인 및 OU 샌프란시스코 학생들을 위해 “조직 신학 II” 과정을 제공합니다. 이 과정에서는 이요셉 박사님이 주로 기독론과 구원론에 관한 강의를 하십니다.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일’에 대한 연구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마태복음 16:15) 이처럼 그리스도의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구원론은 구원의 교리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리스도의 속죄가 인간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한 특징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과정은 칭의, 성화 ​​등 구원의 다양한 측면을 검토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구원’을 심오하게 건설하기 위한 우리의 신학적 여정을 인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다른 조직신학 과정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주요 원천은 성경의 증언이어야 합니다.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관점에서 신학의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라고 Joseph Lee 박사는 논평했습니다.

이 과정은 다음 10주 동안 학생들이 성경에 기초한 위의 교리에 대한 이해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도록 하고, 학생들이 거짓 교리를 반박하여 성경 학자이자 효과적인 사역자가 될 수 있도록 준비시킬 것입니다.

장재형목사 설립|올리벳대학 캠퍼스 개발 추진

장재형목사 설립|올리벳대학에 랄프 윈터 도서관 개원

장재형 목사 설립한 WOA에 기독일보 방미단 방문

장재형목사 설립 WETIA, 세계 복음주의 신학대 네트워크

장재형목사 설립한 WEC 한교연 미국연수단 내방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유럽 신학교들과 협력 논의

장재형목사 설립한 진젠도르프 2023 박사과정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OIT 교수진 CES 2022 컨퍼런스 참석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대표단, ABHE 연례 회의 참석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진젠도르프 박사과정에 전세계 학생들 참여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리버사이드 캠퍼스 최신 랜더링 공개

장재형목사 설립 OTCS 기독교 변증학 과정 신앙의 이유 탐구

글로리오브갓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 공과대학 AI 연구소 프로토타입 스마트 로봇 자동차

장재형목사
올리벳대학교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Olivet Institute of Technology Artificial Intelligence Lab은 첫 번째 스마트 로봇 자동차 프로토타입의 진행 상황을 발표했습니다. 이 Arduino 기반의 스마트 차량은 장애물을 피해 자율주행하고 목표물을 추적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정보 기술 석사 졸업생인 Peixin Wu는 Thomas Kong 교수의 지도를 받아 이 프로젝트를 수행했습니다. Wu는 사물 인터넷 과정에서 Arduino를 활용한 실습을 진행하면서 스마트 로봇 자동차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스마트 차량의 핵심 모듈은 사람 위치 파악, 장애물 감지, 동적 경로 계획, 모터 드라이버 및 Bluetooth 통신 시스템입니다.

이 스마트 자동차는 Arduino의 UNO R3을 기반으로 하며 초음파 센서와 초음파 홀더가 장착되어 자동차와 휴대폰 간의 통신을 담당합니다. 실시간 객체 감지 알고리즘 ‘YOLO(You Only Look Once)’가 최신 자동차 칩에 구현되었으며, 이를 통해 스마트 차량은 걷는 사람을 식별하여 추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Wu는 앞으로 자동차가 보다 복잡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알고리즘을 적용할 계획입니다.

Kong 교수는 “이 프로젝트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통합의 미래적인 응용 분야를 탐색하는 중요한 기회입니다. 완성 예정인 프로토타입을 보게 되어 매우 기쁘다”고 밝혔습니다. 이 프로토타입은 스마트 모빌리티 및 인공 지능 기술의 발전을 촉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장재형목사 설립|올리벳대학 캠퍼스 개발 추진

장재형목사 설립|올리벳대학에 랄프 윈터 도서관 개원

장재형 목사 설립한 WOA에 기독일보 방미단 방문

장재형목사 설립 WETIA, 세계 복음주의 신학대 네트워크

장재형목사 설립한 WEC 한교연 미국연수단 내방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유럽 신학교들과 협력 논의

장재형목사 설립한 진젠도르프 2023 박사과정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OIT 교수진 CES 2022 컨퍼런스 참석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대표단, ABHE 연례 회의 참석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진젠도르프 박사과정에 전세계 학생들 참여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리버사이드 캠퍼스 최신 랜더링 공개

장재형목사 설립 OTCS 기독교 변증학 과정 신앙의 이유 탐구

글로리오브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