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 하나님의 거룩한 법정과 선으로 악을 이기는 복음의 위대한 능력

1. 자비의 온기와 내면의 법정을 무너뜨리는 사랑의 사건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심판』이 보여주는 인간의 실존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죄책감과 정죄의 차가운 공기 속에 갇힌 피고의 모습과 같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를 피고석에 앉히고 끊임없이 고발하는 내면의 은밀한 법정을 가지고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빅토르 위고의 명작 『レ・ミゼラブル(레 미제라블)』에서 주인공 장발장의 영혼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법률이 집행하는 형벌의 차가운 칼날이 아니라, 그의 모든 죄를 덮어주었던 미리엘 주교의 조건 없는 자비와 따뜻한 손길이었습니다. 이처럼 깨어지고 일그러진 한 인간을 근원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대개 힘의 과시나 강압적인 정죄가 아니라, 자신을 철저히 낮추어 타인의 허물을 덮어주는 희생적인 사랑의 사건입니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로마서 12장 16-21절 강해 설교는 그리스도인의 구체적인 삶이 과연 어떠한 토대 위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최종적으로 어디를 향해 전진해야 하는지를 신앙의 본질적 차원에서 깊이 있게 성찰하도록 인도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겸손은 단순히 외적으로 세련되게 꾸며진 낮은 태도의 장식품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거대한 악을 오직 하나님의 선으로 받아치고 이겨내기 위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 영혼의 중심에 가장 먼저 세워놓는 견고한 첫 자리이자 거룩한 영적 기초입니다.

본 성경 말씀의 논리적 흐름은 매우 정교하고 선명합니다. 공동체 내부에서 서로 마음을 같이하고, 세상의 높은 데 마음을 두지 않으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교만하지 말라는 사도 바울의 강력한 권면은 교회 안에서 참된 사랑이 어떠한 실천적 형태를 입고 나타나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설교는 이 구절을 단순히 도덕적인 인간관계의 예절이나 처세술로 격하시키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깨뜨려 낮추며 이웃의 형편을 온전히 수용하는 좁고 험난한 믿음의 길로 풀어냅니다. 그리스도인의 낮아짐은 세상 앞에 무력하게 무릎 꿇는 패배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복음이 가진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세상의 악한 방식과 폭력의 굴레에 휘말리지 않도록 우리 영혼의 중심을 견고하게 지켜내는 은혜의 보좌이자 승리의 자리입니다.

로마서 12장이 선포하는 메시지는 우리의 감정이 고요하고 환경이 평안할 때만 실천 가능한 낭만적인 이상주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삶의 현장에서 지독한 오해를 받고, 영혼을 찌르는 깊은 상처를 입으며, 본능적으로 상대방에게 피로써 되갚아주고 싶은 격렬한 분노가 일어나는 바로 그 모순적이고 비참한 자리에서 우리의 믿음이 가야 할 최종 방향을 준엄하게 질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설교는 단호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며, 신앙인의 내면 깊은 곳을 비추는 거룩한 진리의 거울이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내가 지금 누구를 사랑할 능력이 있는가”를 묻기 전에, “나는 과연 누구 앞에서 본능적으로 스스로를 높이고 왕좌에 앉으려 하는가”라는 아픈 질문을 정직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2. ‘Understand’의 신비: 타인의 아픔 아래에 서는 겸손의 성육신

성경이 명하는 “서로 마음을 같이하라”는 말씀은 공동체의 모든 지체가 획일화된 하나의 의견이나 기계적인 동질성을 가지라는 결코 얕은 수준의 요구가 아닙니다. 이것은 타인의 삶의 자리에 정직하게 동참하여, 그가 흘리는 눈물에 함께 아파하고 그가 누리는 기쁨에 진심으로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영적 감수성이자 마음의 거룩한 방향성을 뜻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세상의 이익 집단과 구별되는 참된 그리스도의 몸으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나의 주관적인 기준과 높은 자리에서 재단하고 판단하는 교만한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그 대신 연약한 형제의 눈높이와 삶의 자리 곁으로 묵묵히 걸어가 발을 맞춰주는 사랑의 움직임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참된 겸손은 내 존재를 무가치하게 지워버리는 자학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스러운 형편을 내 시야와 삶의 중심 안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가장 적극적인 신앙의 순종입니다.

이 지점에서 설교의 탁월한 통찰은 사랑과 지식의 깊은 상관관계를 날카롭게 짚어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누군가를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표면적인 정보나 프로필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말 못 할 아픔과 깊은 상처 아래에 내 무릎을 꿇고 서 보는 것이며, 그가 짊어진 무거운 인생의 짐을 나의 어깨로 함께 체휼하며, 그가 쓰러져 있을 때 아무런 조건 없이 실제로 나의 따뜻한 손을 내밀어 영혼을 붙들어주는 희생적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적 이해는 이성적인 차가운 분석이나 비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처럼 사랑으로 인해 기꺼이 자신을 깨뜨려 아래로 낮추는 거룩한 도덕적 도약입니다.

영어 단어 **’Understand(이해하다)’**의 어원이 보여주듯, 참된 이해는 언제나 타인의 아래(Under)에 서는(Stand) 태도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상대방을 복음으로 온전히 품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를 내 교만한 기준과 율법의 잣대 위로 억지로 끌어올려 채찍질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친히 그의 비참하고 연약한 삶의 자리 가장 낮은 곳으로 기꺼이 내려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요구하는 “낮은 데 처하라”는 말씀의 실제적인 영적 깊이이자 무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멀리 떨어진 안전한 조종석에서 타인의 인생을 해석하고 구경하는 차가운 시선이 아닙니다. 그것은 흙먼지 날리는 거친 삶의 한복판에서 고통받는 지체와 가까이 밀착하여 그의 고독과 상처를 온몸으로 함께 견뎌내는 신실한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서에서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와 그의 주인 빌레몬 사이에서 보여주었던 눈물겨운 중재의 태도 역시 이러한 복음적 낮아짐의 흐름 속에 존재합니다. 바울은 당시 사도로서 가졌던 막강한 영적 권위와 지위를 앞세워 빌레몬에게 엄하게 명령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에 근거하여 스스로를 낮추고 간절히 권면하며 깨어진 관계를 봉합하는 화해의 길을 열었습니다. 거대한 영적 권위를 소유한 자가 도리어 가장 낮은 자리에서 빌레몬에게 자비를 간청할 때, 복음은 군림하는 율법의 명령어가 아니라 영혼을 소생시키는 강력한 회복의 언어로 세상에 그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의 모든 인간관계와 영적 질서가 건강하게 세워지는 유일한 방식도, 결국 이와 같이 자기를 부인하는 그리스도적 낮아짐의 좁은 문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합니다.

3. 교만의 지혜를 깨부수는 사랑의 분별력과 공동체의 성화

성경이 경고하는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는 준엄한 말씀은 신앙생활을 오래 한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을 가장 예리하게 찌르는 성령의 검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누구나 너무나 쉽게 자신의 편협한 판단과 경험을 ‘영적인 지혜’라 포장하고, 자신의 통제되지 않은 사사로운 감정과 분노를 ‘거룩한 공의와 정의’라는 이름으로 위장하곤 합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의 성경 묵상은 참된 하늘의 지혜가 결코 머리의 빠른 회전이나 신학적 지식의 양에서 나오지 않으며, 오직 영혼을 살리고자 하는 십자가의 사랑의 분별력에서만 흘러나온다고 강력히 선포합니다. 구약 잠언의 지혜로운 권면처럼,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는 어리석은 자의 미련함을 따라 대답하지 않음으로써 함께 죄에 빠지지 않아야 하고, 또 어떤 상황에서는 그 미련함을 진리로 따뜻하게 깨우쳐 그가 파멸의 길에서 돌이키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처신은 인간의 이성으로 볼 때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십자가의 거룩한 사랑 안에서는 완벽하게 일치하는 하나의 생명의 길이 됩니다. 신앙의 삶에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가 논쟁에서 이겨서 나의 옳음을 증명하느냐”가 아닙니다. 그 깨어지고 불편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선하심이 어떻게 영광스럽게 드러나는가”가 유일한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거세된 차가운 지식은 사람의 상태를 현미경처럼 날카롭게 분석하고 설명해 낼 수는 있을지언정, 정작 상처받아 피 흘리는 영혼을 단 한 사람도 살려내지는 못합니다. 반면에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에 철저히 붙들린 하늘의 지혜는, 성도로 하여금 말해야 할 때와 묵묵히 침로를 지키며 침묵해야 할 때를 알게 하고, 상대방에게 가까이 다가가 품어야 할 때와 그가 스스로 돌이킬 때까지 눈물로 기다려 주어야 할 때를 명확하게 분별하게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 설교가 제시하는 영적 지혜는 책상 위에서 논하는 추상적인 교리적 유희가 아니라, 거친 삶의 현장에서 피와 땀이 묻어나는 묵직한 삶의 질감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거친 말이 튀어나오려 할 때 호흡을 한 번 늦추고, 상대를 향한 판단의 속도를 의식적으로 줄이며, 나에게 상처를 준 원수 같은 사람을 위해 골방에서 은밀히 무릎 꿇고 눈물로 기도하는 그 작고 평범해 보이는 삶의 태도들이야말로 하늘의 지혜가 가진 진짜 얼굴이자 실체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복음의 지혜는 현란한 말잔치나 치열한 신학 논쟁의 승리를 통해 증명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십자가를 따르는 삶의 거룩한 방향성과 흔적을 통해서만 온전히 증명됩니다. 복음으로 낮아진 사람은 교만한 자가 보지 못하는 더 많은 영적 진실을 선명하게 보게 되며, 지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영혼의 깊이를 더 깊게 헤아려 알게 됩니다. 고결한 신학적 통찰과 성경의 신비는 인간이 높은 보좌에 앉아 오만하게 아래를 내려다볼 때는 철저히 가려지지만, 상처 입어 쓰러진 누군가의 아픔 곁에 자신의 무릎을 낮추어 함께 피를 묻힐 때 비로소 수정처럼 맑게 열리는 법입니다.

이 참된 지혜의 진위 여부는 다름 아닌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 가장 먼저 치열하게 시험대에 오르게 됩니다. 교회는 이미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완성된 의인들이 모여 자신의 거룩함을 뽐내는 화려한 사교장이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자비가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영적 문둥병자 같은 죄인들이 모여, 서로의 모나고 부족한 허물들을 날것 그대로 마주하며 십자가로 다듬어져 가는 거룩한 성화의 용광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참된 사랑은 나의 인간적인 좋은 감정이 아무런 방해 없이 오래도록 유지되는 안일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도저히 용납하기 힘들고 불편한 인간관계의 지옥 속에서도, 내 감정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평화를 먼저 구하며 묵묵히 십자가를 지는 피나는 순종의 과정입니다. 믿음은 바로 그 고통스러운 순종의 자리에서 우리의 말의 온도를 바꾸고 행동의 방향을 바꾸어 놓습니다.

4. 사사로운 보복의 칼날을 거둘 때 임하는 하늘의 평화와 공의의 신뢰

로마서 12장의 후반부 말씀은 우리를 겸손의 자리에서 더 전진시켜, 인간의 본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원수 사랑’의 극단적인 자리로 우리를 강력하게 밀어붙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바울의 장엄한 명령은 인간의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고 참으라는 수준의 유교적인 억제 윤리나 도덕적 훈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주적인 영적 전쟁의 관점에서, 악이 우리 영혼의 내부로 침투하여 다시금 무서운 속도로 번식하고 파괴적인 생명력을 얻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하라는 강력한 복음의 방역 명령입니다. 나에게 가해진 악에 대해 사사로이 보복하는 행위는 당장에는 정의의 실현처럼 보이고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복수의 순간에 우리 스스로가 악의 잔인한 언어와 방식을 빌려와 결국 내가 증오하던 그 악의 괴물과 똑같이 닮아가게 만드는 사탄의 가장 교묘한 덫입니다.

그렇기에 본문 성경은 우리에게 수동적인 인내를 넘어, 모든 사람 앞에서 적극적으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명령합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선은 우연히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일시적인 착한 감정이나 성격의 온유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감정이 갈기갈기 찢겨나간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의지적으로 선택해 내는 피 묻은 순종의 열매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자를 향한 원수 갚는 권리를 내가 행사하지 않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완전히 이양하는 행위는, 힘이 없어 당하는 무기력한 체념이나 비겁한 도피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우주의 최종 심판자이자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을 인간인 내가 감히 찬탈하지 않겠다는 신앙인의 가장 두렵고도 거룩한 영적 절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이 세상을 공의와 사랑으로 반드시 다스리시고 심판하신다는 절대적인 신뢰가 있을 때야만, 우리는 내 손으로 상대를 반드시 짓밟아 쓰러뜨려야만 내 영혼이 평안해질 수 있다는 세상의 거짓된 확신과 보복의 광기에서 비로소 자유롭게 해방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다윗이 자신을 광기 어린 시기로 군대를 동원해 추격하던 사울 왕을 굴 속에서 단칼에 베어버릴 수 있는 완벽한 기회를 얻고도, 도리어 옷자락만을 베며 칼을 거두었던 역사적 장면은 이러한 믿음의 실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위대한 증거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눈앞에 찾아온 절호의 찬스를 사사로운 복수를 감행하라는 하나님의 허락으로 아집 가득하게 오해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에 대한 최종 판결과 심판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 한 분에게만 속해 있다”라는 거룩한 신앙의 고백이, 그의 타오르는 분노와 손에 쥐어진 날카로운 칼날을 멈추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흘러나오는 초자연적인 평화는, 세상의 군사력과 힘의 균형이 가져다주는 깨어지기 쉬운 일시적인 평화와는 그 차원과 본질이 완전히 다릅니다.

설교는 이 세상이 말하는 평화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주시는 평화를 명확하게 구별합니다. 세상의 힘과 권력으로 상대방을 철저히 억누르고 굴복시켜 얻어내는 평화는, 겉으로는 갈등이 잠시 종식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정작 그 사람의 마음속에 응어리진 증오와 적의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인의 낮아짐과 섬김, 그리고 희생을 통해 임하는 하늘의 평화는, 상대를 힘으로 무너뜨려 쟁취하는 정적(靜寂)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를 향해 다가오던 악의 치명적인 흐름을 내 몸을 제물 삼아 완전히 끊어버리고, 원수 되었던 관계 속에 하나님의 새로운 화해의 가능성을 힘차게 열어젖히는 거룩한 안식입니다. 그 십자가의 평화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지극히 연약하고 바보스러워 보이지만, 역사상 가장 깊은 자리에서 인간의 얼어붙은 영혼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유일한 하늘의 권능입니다.

5.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는 적극적인 사랑과 승리의 소망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는 사도 바울의 급진적인 선언은 타락한 인간의 생물학적 본능과 이기적인 자아의 흐름을 완전히 거스르는 영적 폭탄과 같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이처럼 인간의 육체적 본능이 철저히 꺾이고 거슬러 흐르는 처절한 순종의 자리에서,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신성한 초자연적 능력을 가장 찬란하게 드러냅니다. 나를 해한 원수의 굶주림과 목마름을 채워주는 적극적인 사랑은, 결코 그가 행한 악을 대수롭지 않게 묵인해 주거나 타협하는 값싼 온정주의나 비겁한 관용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에게 가해진 악이 나라는 존재를 오염시켜 또 다른 보복과 미움의 악으로 악순환되지 못하도록 온몸으로 저항하는, 복음이 가진 가장 강력하고도 공격적인 저항 방식입니다.

이때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결코 상대방의 명백한 잘못이나 범죄를 가볍게 여기며 은폐하는 도덕적 맹목주의가 아닙니다. 설교가 제시하는 복음의 논리는 오히려 세상의 법정보다 훨씬 더 엄격하고 엄위합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가해진 악을 똑같이 악으로 되갚아주지 않기 위해서는, 내면에서 화산처럼 치밀어 오르는 인간적인 분노와 두려움의 감정을 억지로 감추지 않고 십자가 제단 앞으로 그대로 가지고 나가 쏟아내야만 하며, 그 처절한 영적 탈진의 자리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선을 의지적으로 선택하는 뼈를 깎는 자기 부인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원수 사랑은 감정의 사치스러운 미화나 감상주의가 아니라,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 자신의 왜곡된 자아와 자존심을 쳐서 복종시키는 가장 깊고 치열한 영적 영성 훈련입니다.

장재형 목사가 본문을 통해 강력하게 선포하는 복음의 정수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악에게 지는 것은 단지 세상적인 싸움이나 경쟁에서 패배하여 손해를 보는 가시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악에게 패배하는 것은, 상대방이 내게 던진 미움과 보복의 불화살이 내 영혼을 전염시켜 내 안에 존재하던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과 평안을 완전히 무너뜨리도록 사탄에게 내 마음의 방어벽을 허락해 주는 일입니다. 반대로 성도가 선으로 악을 이겨낸다는 것은, 세상이 내게 어떠한 쓰레기와 증오를 던질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내 전인격과 반응을 완벽하게 통치하시도록 내 마음의 주권을 왕이신 주님께 온전히 양도하는 일입니다. 그 좁은 길 위에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위대한 용서와 진정한 화해의 기적이 있으며, 심령을 쪼개는 통회의 눈물과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작은 삶의 발걸음들이 존재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는다’는 신비로운 말씀의 의미 역시 이러한 맥락 속에서 명쾌하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내가 원수에게 베푼 예상치 못한 그리스도인의 선한 행동과 자비는, 도리어 상대방의 무뎌진 양심과 이성을 강력하게 흔들어 깨워 마침내 스스로의 죄를 부끄러워하고 하나님 앞에 고꾸라지게 만드는 성령의 뜨거운 불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끝까지 그 선한 사랑을 거부하고 완악하게 대적한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최종 말세의 날에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대 앞에서 그가 행한 악이 얼마나 흉악한지를 고스란히 드러나게 만드는 명백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이든 인류 역사의 최종적인 심판과 판단의 자리는 결코 우리 인간의 나약한 손에 쥐어져 있지 않습니다. 성도에게 허락된 유일한 몫은 세상이 부추기는 악의 추악한 방식에 가담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과 선함을 통해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의 실제와 복음의 가치를 묵묵히 증명해 내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은 결코 빠르거나 수월한 지름길이 아닙니다.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거룩한 성도일지라도 삶의 현장에서 수없이 넘어지고 낙심하며, 골방에서 분명히 원수를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기로 피눈물 흘리며 결단했던 마음이 눈앞에서 원수를 마주하는 순간 다시금 사정없이 요동치고 흔들리는 비참한 자기 자신을 매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진정한 회개는 나의 이러한 신앙적 실패와 연약함을 절망의 끝으로 몰고 가 영혼을 파산시키는 사탄의 정죄가 아닙니다. 참된 회개는 나의 불완전함보다 훨씬 더 크신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 보좌 앞으로 우리의 삶의 방향을 다시금 온전히 돌려놓는 거룩한 회복의 통로입니다. 오늘 내가 실천하는 단 한 번의 언어적 절제, 오늘 내가 내미는 단 한 번의 눈물 어린 용서, 그리고 원수를 향해 내미는 단 한 번의 따뜻한 손길이,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 속에서 마침내 거대한 화해와 부흥의 숲을 이루는 겨자씨 한 알의 신성한 씨앗이 될 것입니다.

결국 이 장엄한 설교가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가슴속에 아로새기는 복음의 소망은, 세상이 말하는 화려하고 소란스러운 승전보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철저히 낮아짐으로 시작하여 하늘의 사랑으로 세상을 분별하고, 모든 판단과 심판의 권리를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완전히 위탁하며, 마침내 쏟아지는 악을 선함으로 삼켜버리는 그리스도인의 조용하지만 세상을 뒤집는 영적인 능력입니다. 복음은 오늘도 우리에게 세상의 죄악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 승리하라고 외치지만, 주님이 가르쳐 주신 그 위대한 이김의 방식은 힘의 대결이 아니라 오직 낮아짐과 눈물의 사랑, 그리고 십자가의 선함뿐입니다.

오늘, 우리의 손에는 여전히 내려놓지 못한 채 상대를 겨누고 있는 증오와 자존심의 칼날이 쥐어져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주님의 음성을 따라, 내가 다시금 하나님의 선으로 먹이고 마셔야 할 내 인생의 목마른 원수는 과연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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