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 하나님의 거룩한 법정과 선으로 악을 이기는 복음의 위대한 능력

1. 자비의 온기와 내면의 법정을 무너뜨리는 사랑의 사건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심판』이 보여주는 인간의 실존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죄책감과 정죄의 차가운 공기 속에 갇힌 피고의 모습과 같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를 피고석에 앉히고 끊임없이 고발하는 내면의 은밀한 법정을 가지고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빅토르 위고의 명작 『レ・ミゼラブル(레 미제라블)』에서 주인공 장발장의 영혼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법률이 집행하는 형벌의 차가운 칼날이 아니라, 그의 모든 죄를 덮어주었던 미리엘 주교의 조건 없는 자비와 따뜻한 손길이었습니다. 이처럼 깨어지고 일그러진 한 인간을 근원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대개 힘의 과시나 강압적인 정죄가 아니라, 자신을 철저히 낮추어 타인의 허물을 덮어주는 희생적인 사랑의 사건입니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로마서 12장 16-21절 강해 설교는 그리스도인의 구체적인 삶이 과연 어떠한 토대 위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최종적으로 어디를 향해 전진해야 하는지를 신앙의 본질적 차원에서 깊이 있게 성찰하도록 인도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겸손은 단순히 외적으로 세련되게 꾸며진 낮은 태도의 장식품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거대한 악을 오직 하나님의 선으로 받아치고 이겨내기 위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 영혼의 중심에 가장 먼저 세워놓는 견고한 첫 자리이자 거룩한 영적 기초입니다.

본 성경 말씀의 논리적 흐름은 매우 정교하고 선명합니다. 공동체 내부에서 서로 마음을 같이하고, 세상의 높은 데 마음을 두지 않으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교만하지 말라는 사도 바울의 강력한 권면은 교회 안에서 참된 사랑이 어떠한 실천적 형태를 입고 나타나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설교는 이 구절을 단순히 도덕적인 인간관계의 예절이나 처세술로 격하시키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깨뜨려 낮추며 이웃의 형편을 온전히 수용하는 좁고 험난한 믿음의 길로 풀어냅니다. 그리스도인의 낮아짐은 세상 앞에 무력하게 무릎 꿇는 패배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복음이 가진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세상의 악한 방식과 폭력의 굴레에 휘말리지 않도록 우리 영혼의 중심을 견고하게 지켜내는 은혜의 보좌이자 승리의 자리입니다.

로마서 12장이 선포하는 메시지는 우리의 감정이 고요하고 환경이 평안할 때만 실천 가능한 낭만적인 이상주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삶의 현장에서 지독한 오해를 받고, 영혼을 찌르는 깊은 상처를 입으며, 본능적으로 상대방에게 피로써 되갚아주고 싶은 격렬한 분노가 일어나는 바로 그 모순적이고 비참한 자리에서 우리의 믿음이 가야 할 최종 방향을 준엄하게 질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설교는 단호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며, 신앙인의 내면 깊은 곳을 비추는 거룩한 진리의 거울이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내가 지금 누구를 사랑할 능력이 있는가”를 묻기 전에, “나는 과연 누구 앞에서 본능적으로 스스로를 높이고 왕좌에 앉으려 하는가”라는 아픈 질문을 정직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2. ‘Understand’의 신비: 타인의 아픔 아래에 서는 겸손의 성육신

성경이 명하는 “서로 마음을 같이하라”는 말씀은 공동체의 모든 지체가 획일화된 하나의 의견이나 기계적인 동질성을 가지라는 결코 얕은 수준의 요구가 아닙니다. 이것은 타인의 삶의 자리에 정직하게 동참하여, 그가 흘리는 눈물에 함께 아파하고 그가 누리는 기쁨에 진심으로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영적 감수성이자 마음의 거룩한 방향성을 뜻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세상의 이익 집단과 구별되는 참된 그리스도의 몸으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나의 주관적인 기준과 높은 자리에서 재단하고 판단하는 교만한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그 대신 연약한 형제의 눈높이와 삶의 자리 곁으로 묵묵히 걸어가 발을 맞춰주는 사랑의 움직임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참된 겸손은 내 존재를 무가치하게 지워버리는 자학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스러운 형편을 내 시야와 삶의 중심 안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가장 적극적인 신앙의 순종입니다.

이 지점에서 설교의 탁월한 통찰은 사랑과 지식의 깊은 상관관계를 날카롭게 짚어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누군가를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표면적인 정보나 프로필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말 못 할 아픔과 깊은 상처 아래에 내 무릎을 꿇고 서 보는 것이며, 그가 짊어진 무거운 인생의 짐을 나의 어깨로 함께 체휼하며, 그가 쓰러져 있을 때 아무런 조건 없이 실제로 나의 따뜻한 손을 내밀어 영혼을 붙들어주는 희생적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적 이해는 이성적인 차가운 분석이나 비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처럼 사랑으로 인해 기꺼이 자신을 깨뜨려 아래로 낮추는 거룩한 도덕적 도약입니다.

영어 단어 **’Understand(이해하다)’**의 어원이 보여주듯, 참된 이해는 언제나 타인의 아래(Under)에 서는(Stand) 태도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상대방을 복음으로 온전히 품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를 내 교만한 기준과 율법의 잣대 위로 억지로 끌어올려 채찍질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친히 그의 비참하고 연약한 삶의 자리 가장 낮은 곳으로 기꺼이 내려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요구하는 “낮은 데 처하라”는 말씀의 실제적인 영적 깊이이자 무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멀리 떨어진 안전한 조종석에서 타인의 인생을 해석하고 구경하는 차가운 시선이 아닙니다. 그것은 흙먼지 날리는 거친 삶의 한복판에서 고통받는 지체와 가까이 밀착하여 그의 고독과 상처를 온몸으로 함께 견뎌내는 신실한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서에서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와 그의 주인 빌레몬 사이에서 보여주었던 눈물겨운 중재의 태도 역시 이러한 복음적 낮아짐의 흐름 속에 존재합니다. 바울은 당시 사도로서 가졌던 막강한 영적 권위와 지위를 앞세워 빌레몬에게 엄하게 명령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에 근거하여 스스로를 낮추고 간절히 권면하며 깨어진 관계를 봉합하는 화해의 길을 열었습니다. 거대한 영적 권위를 소유한 자가 도리어 가장 낮은 자리에서 빌레몬에게 자비를 간청할 때, 복음은 군림하는 율법의 명령어가 아니라 영혼을 소생시키는 강력한 회복의 언어로 세상에 그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의 모든 인간관계와 영적 질서가 건강하게 세워지는 유일한 방식도, 결국 이와 같이 자기를 부인하는 그리스도적 낮아짐의 좁은 문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합니다.

3. 교만의 지혜를 깨부수는 사랑의 분별력과 공동체의 성화

성경이 경고하는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는 준엄한 말씀은 신앙생활을 오래 한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을 가장 예리하게 찌르는 성령의 검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누구나 너무나 쉽게 자신의 편협한 판단과 경험을 ‘영적인 지혜’라 포장하고, 자신의 통제되지 않은 사사로운 감정과 분노를 ‘거룩한 공의와 정의’라는 이름으로 위장하곤 합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의 성경 묵상은 참된 하늘의 지혜가 결코 머리의 빠른 회전이나 신학적 지식의 양에서 나오지 않으며, 오직 영혼을 살리고자 하는 십자가의 사랑의 분별력에서만 흘러나온다고 강력히 선포합니다. 구약 잠언의 지혜로운 권면처럼,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는 어리석은 자의 미련함을 따라 대답하지 않음으로써 함께 죄에 빠지지 않아야 하고, 또 어떤 상황에서는 그 미련함을 진리로 따뜻하게 깨우쳐 그가 파멸의 길에서 돌이키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처신은 인간의 이성으로 볼 때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십자가의 거룩한 사랑 안에서는 완벽하게 일치하는 하나의 생명의 길이 됩니다. 신앙의 삶에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가 논쟁에서 이겨서 나의 옳음을 증명하느냐”가 아닙니다. 그 깨어지고 불편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선하심이 어떻게 영광스럽게 드러나는가”가 유일한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거세된 차가운 지식은 사람의 상태를 현미경처럼 날카롭게 분석하고 설명해 낼 수는 있을지언정, 정작 상처받아 피 흘리는 영혼을 단 한 사람도 살려내지는 못합니다. 반면에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에 철저히 붙들린 하늘의 지혜는, 성도로 하여금 말해야 할 때와 묵묵히 침로를 지키며 침묵해야 할 때를 알게 하고, 상대방에게 가까이 다가가 품어야 할 때와 그가 스스로 돌이킬 때까지 눈물로 기다려 주어야 할 때를 명확하게 분별하게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 설교가 제시하는 영적 지혜는 책상 위에서 논하는 추상적인 교리적 유희가 아니라, 거친 삶의 현장에서 피와 땀이 묻어나는 묵직한 삶의 질감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거친 말이 튀어나오려 할 때 호흡을 한 번 늦추고, 상대를 향한 판단의 속도를 의식적으로 줄이며, 나에게 상처를 준 원수 같은 사람을 위해 골방에서 은밀히 무릎 꿇고 눈물로 기도하는 그 작고 평범해 보이는 삶의 태도들이야말로 하늘의 지혜가 가진 진짜 얼굴이자 실체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복음의 지혜는 현란한 말잔치나 치열한 신학 논쟁의 승리를 통해 증명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십자가를 따르는 삶의 거룩한 방향성과 흔적을 통해서만 온전히 증명됩니다. 복음으로 낮아진 사람은 교만한 자가 보지 못하는 더 많은 영적 진실을 선명하게 보게 되며, 지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영혼의 깊이를 더 깊게 헤아려 알게 됩니다. 고결한 신학적 통찰과 성경의 신비는 인간이 높은 보좌에 앉아 오만하게 아래를 내려다볼 때는 철저히 가려지지만, 상처 입어 쓰러진 누군가의 아픔 곁에 자신의 무릎을 낮추어 함께 피를 묻힐 때 비로소 수정처럼 맑게 열리는 법입니다.

이 참된 지혜의 진위 여부는 다름 아닌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 가장 먼저 치열하게 시험대에 오르게 됩니다. 교회는 이미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완성된 의인들이 모여 자신의 거룩함을 뽐내는 화려한 사교장이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자비가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영적 문둥병자 같은 죄인들이 모여, 서로의 모나고 부족한 허물들을 날것 그대로 마주하며 십자가로 다듬어져 가는 거룩한 성화의 용광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참된 사랑은 나의 인간적인 좋은 감정이 아무런 방해 없이 오래도록 유지되는 안일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도저히 용납하기 힘들고 불편한 인간관계의 지옥 속에서도, 내 감정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평화를 먼저 구하며 묵묵히 십자가를 지는 피나는 순종의 과정입니다. 믿음은 바로 그 고통스러운 순종의 자리에서 우리의 말의 온도를 바꾸고 행동의 방향을 바꾸어 놓습니다.

4. 사사로운 보복의 칼날을 거둘 때 임하는 하늘의 평화와 공의의 신뢰

로마서 12장의 후반부 말씀은 우리를 겸손의 자리에서 더 전진시켜, 인간의 본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원수 사랑’의 극단적인 자리로 우리를 강력하게 밀어붙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바울의 장엄한 명령은 인간의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고 참으라는 수준의 유교적인 억제 윤리나 도덕적 훈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주적인 영적 전쟁의 관점에서, 악이 우리 영혼의 내부로 침투하여 다시금 무서운 속도로 번식하고 파괴적인 생명력을 얻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하라는 강력한 복음의 방역 명령입니다. 나에게 가해진 악에 대해 사사로이 보복하는 행위는 당장에는 정의의 실현처럼 보이고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복수의 순간에 우리 스스로가 악의 잔인한 언어와 방식을 빌려와 결국 내가 증오하던 그 악의 괴물과 똑같이 닮아가게 만드는 사탄의 가장 교묘한 덫입니다.

그렇기에 본문 성경은 우리에게 수동적인 인내를 넘어, 모든 사람 앞에서 적극적으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명령합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선은 우연히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일시적인 착한 감정이나 성격의 온유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감정이 갈기갈기 찢겨나간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의지적으로 선택해 내는 피 묻은 순종의 열매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자를 향한 원수 갚는 권리를 내가 행사하지 않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완전히 이양하는 행위는, 힘이 없어 당하는 무기력한 체념이나 비겁한 도피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우주의 최종 심판자이자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을 인간인 내가 감히 찬탈하지 않겠다는 신앙인의 가장 두렵고도 거룩한 영적 절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이 세상을 공의와 사랑으로 반드시 다스리시고 심판하신다는 절대적인 신뢰가 있을 때야만, 우리는 내 손으로 상대를 반드시 짓밟아 쓰러뜨려야만 내 영혼이 평안해질 수 있다는 세상의 거짓된 확신과 보복의 광기에서 비로소 자유롭게 해방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다윗이 자신을 광기 어린 시기로 군대를 동원해 추격하던 사울 왕을 굴 속에서 단칼에 베어버릴 수 있는 완벽한 기회를 얻고도, 도리어 옷자락만을 베며 칼을 거두었던 역사적 장면은 이러한 믿음의 실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위대한 증거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눈앞에 찾아온 절호의 찬스를 사사로운 복수를 감행하라는 하나님의 허락으로 아집 가득하게 오해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에 대한 최종 판결과 심판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 한 분에게만 속해 있다”라는 거룩한 신앙의 고백이, 그의 타오르는 분노와 손에 쥐어진 날카로운 칼날을 멈추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흘러나오는 초자연적인 평화는, 세상의 군사력과 힘의 균형이 가져다주는 깨어지기 쉬운 일시적인 평화와는 그 차원과 본질이 완전히 다릅니다.

설교는 이 세상이 말하는 평화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주시는 평화를 명확하게 구별합니다. 세상의 힘과 권력으로 상대방을 철저히 억누르고 굴복시켜 얻어내는 평화는, 겉으로는 갈등이 잠시 종식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정작 그 사람의 마음속에 응어리진 증오와 적의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인의 낮아짐과 섬김, 그리고 희생을 통해 임하는 하늘의 평화는, 상대를 힘으로 무너뜨려 쟁취하는 정적(靜寂)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를 향해 다가오던 악의 치명적인 흐름을 내 몸을 제물 삼아 완전히 끊어버리고, 원수 되었던 관계 속에 하나님의 새로운 화해의 가능성을 힘차게 열어젖히는 거룩한 안식입니다. 그 십자가의 평화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지극히 연약하고 바보스러워 보이지만, 역사상 가장 깊은 자리에서 인간의 얼어붙은 영혼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유일한 하늘의 권능입니다.

5.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는 적극적인 사랑과 승리의 소망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는 사도 바울의 급진적인 선언은 타락한 인간의 생물학적 본능과 이기적인 자아의 흐름을 완전히 거스르는 영적 폭탄과 같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이처럼 인간의 육체적 본능이 철저히 꺾이고 거슬러 흐르는 처절한 순종의 자리에서,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신성한 초자연적 능력을 가장 찬란하게 드러냅니다. 나를 해한 원수의 굶주림과 목마름을 채워주는 적극적인 사랑은, 결코 그가 행한 악을 대수롭지 않게 묵인해 주거나 타협하는 값싼 온정주의나 비겁한 관용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에게 가해진 악이 나라는 존재를 오염시켜 또 다른 보복과 미움의 악으로 악순환되지 못하도록 온몸으로 저항하는, 복음이 가진 가장 강력하고도 공격적인 저항 방식입니다.

이때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결코 상대방의 명백한 잘못이나 범죄를 가볍게 여기며 은폐하는 도덕적 맹목주의가 아닙니다. 설교가 제시하는 복음의 논리는 오히려 세상의 법정보다 훨씬 더 엄격하고 엄위합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가해진 악을 똑같이 악으로 되갚아주지 않기 위해서는, 내면에서 화산처럼 치밀어 오르는 인간적인 분노와 두려움의 감정을 억지로 감추지 않고 십자가 제단 앞으로 그대로 가지고 나가 쏟아내야만 하며, 그 처절한 영적 탈진의 자리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선을 의지적으로 선택하는 뼈를 깎는 자기 부인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원수 사랑은 감정의 사치스러운 미화나 감상주의가 아니라,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 자신의 왜곡된 자아와 자존심을 쳐서 복종시키는 가장 깊고 치열한 영적 영성 훈련입니다.

장재형 목사가 본문을 통해 강력하게 선포하는 복음의 정수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악에게 지는 것은 단지 세상적인 싸움이나 경쟁에서 패배하여 손해를 보는 가시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악에게 패배하는 것은, 상대방이 내게 던진 미움과 보복의 불화살이 내 영혼을 전염시켜 내 안에 존재하던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과 평안을 완전히 무너뜨리도록 사탄에게 내 마음의 방어벽을 허락해 주는 일입니다. 반대로 성도가 선으로 악을 이겨낸다는 것은, 세상이 내게 어떠한 쓰레기와 증오를 던질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내 전인격과 반응을 완벽하게 통치하시도록 내 마음의 주권을 왕이신 주님께 온전히 양도하는 일입니다. 그 좁은 길 위에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위대한 용서와 진정한 화해의 기적이 있으며, 심령을 쪼개는 통회의 눈물과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작은 삶의 발걸음들이 존재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는다’는 신비로운 말씀의 의미 역시 이러한 맥락 속에서 명쾌하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내가 원수에게 베푼 예상치 못한 그리스도인의 선한 행동과 자비는, 도리어 상대방의 무뎌진 양심과 이성을 강력하게 흔들어 깨워 마침내 스스로의 죄를 부끄러워하고 하나님 앞에 고꾸라지게 만드는 성령의 뜨거운 불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끝까지 그 선한 사랑을 거부하고 완악하게 대적한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최종 말세의 날에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대 앞에서 그가 행한 악이 얼마나 흉악한지를 고스란히 드러나게 만드는 명백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이든 인류 역사의 최종적인 심판과 판단의 자리는 결코 우리 인간의 나약한 손에 쥐어져 있지 않습니다. 성도에게 허락된 유일한 몫은 세상이 부추기는 악의 추악한 방식에 가담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과 선함을 통해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의 실제와 복음의 가치를 묵묵히 증명해 내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은 결코 빠르거나 수월한 지름길이 아닙니다.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거룩한 성도일지라도 삶의 현장에서 수없이 넘어지고 낙심하며, 골방에서 분명히 원수를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기로 피눈물 흘리며 결단했던 마음이 눈앞에서 원수를 마주하는 순간 다시금 사정없이 요동치고 흔들리는 비참한 자기 자신을 매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진정한 회개는 나의 이러한 신앙적 실패와 연약함을 절망의 끝으로 몰고 가 영혼을 파산시키는 사탄의 정죄가 아닙니다. 참된 회개는 나의 불완전함보다 훨씬 더 크신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 보좌 앞으로 우리의 삶의 방향을 다시금 온전히 돌려놓는 거룩한 회복의 통로입니다. 오늘 내가 실천하는 단 한 번의 언어적 절제, 오늘 내가 내미는 단 한 번의 눈물 어린 용서, 그리고 원수를 향해 내미는 단 한 번의 따뜻한 손길이,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 속에서 마침내 거대한 화해와 부흥의 숲을 이루는 겨자씨 한 알의 신성한 씨앗이 될 것입니다.

결국 이 장엄한 설교가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가슴속에 아로새기는 복음의 소망은, 세상이 말하는 화려하고 소란스러운 승전보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철저히 낮아짐으로 시작하여 하늘의 사랑으로 세상을 분별하고, 모든 판단과 심판의 권리를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완전히 위탁하며, 마침내 쏟아지는 악을 선함으로 삼켜버리는 그리스도인의 조용하지만 세상을 뒤집는 영적인 능력입니다. 복음은 오늘도 우리에게 세상의 죄악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 승리하라고 외치지만, 주님이 가르쳐 주신 그 위대한 이김의 방식은 힘의 대결이 아니라 오직 낮아짐과 눈물의 사랑, 그리고 십자가의 선함뿐입니다.

오늘, 우리의 손에는 여전히 내려놓지 못한 채 상대를 겨누고 있는 증오와 자존심의 칼날이 쥐어져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주님의 음성을 따라, 내가 다시금 하나님의 선으로 먹이고 마셔야 할 내 인생의 목마른 원수는 과연 누구입니까?

gloryofgod.kr

davidjang.org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강해를 통해 본 ‘먼저 찾아온 사랑’의 연대기

정죄의 법정을 넘어 은혜의 식탁으로: 로마서 5장이 선포하는 파격적 화해

은식기가 열어젖힌 혁명보다 거대한 용서의 세계

빅토르 위고의 걸작 『레미제라블』을 관통하는 가장 강렬한 동력은 성난 민중의 바리케이드도, 자베르 경감의 집요한 추격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한 인간의 영혼이 ‘설명할 수 없는 호의’ 앞에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찰나의 순간입니다. 은식기를 훔쳐 달아나다 붙잡힌 장발장에게 미리엘 주교는 수갑 대신 나머지 은촛대까지 건네며 “이것은 당신의 영혼을 사기 위해 내가 지불하는 값”이라고 말합니다. 정죄와 처벌이 당연시되던 자리에 ‘선물’이 먼저 도착했을 때, 평생을 증오로 버티던 인간의 방어기제는 비로소 해체됩니다.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로마서 5장 묵상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듭니다. 왜 우리는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여전히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심판관 앞에서 떨고 있는가? 왜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삶의 작은 파고 앞에서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런 벌을 받는가”라며 자책하는가? 이 설교는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복음이란 단순한 종교적 이론이 아니라 죄책감의 감옥에 갇힌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무죄 방면 선언’**임을 심오하게 역설합니다.


거룩한 종전 선언: 추격전은 끝났고 평화는 시작되었다

로마서 5장 1절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화평’은 단지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거나 근심이 일시적으로 잦아든 심리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근본적인 **’영적 전쟁’**이 종식되었다는 공식적인 종전 선언에 가깝습니다.

“복음의 화평은 나의 상태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내려진 하늘의 판결문을 받아들이는 영적 순종의 결과다.”

세상이 말하는 평화는 언제나 조건부입니다. 내가 남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거나, 환경이 안정적일 때만 겨우 유지되는 위태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복음의 화평은 그 출발점부터가 다릅니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었기에 얻어낸 성취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먼저 관계를 회복시키셨기에 주어지는 **’선포된 평화’**입니다. 마치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전히 가슴속에 애굽 군대의 말발굽 소리를 환청처럼 듣고 있을지라도, 실제로 그들을 뒤쫓던 군대는 이미 수장되어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성경 묵상의 깊이는 내 감정의 기복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끝난 재판의 결과를 신뢰하는 데서 판가름 납니다.


연단이라는 용광로를 지나는 소망의 무게

그렇다면 화평을 얻은 성도의 삶에는 더 이상 고통의 파도가 일지 않는가?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눈물의 골짜기가 면제되는 것은 아니며, 믿음이 깊다고 해서 인생의 시련이 비켜가는 것도 아닙니다. 장재형 목사의 강해가 울림을 주는 이유는 고난을 성급하게 미화하여 덮어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히려 고통의 한복판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영적 역설’**을 예리하게 포착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는 바울의 고백은 고통 자체를 즐기라는 가학적인 명령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가 흘리는 눈물을 단 한 방울도 헛되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것을 소망을 빚어내는 재료로 사용하신다는 장엄한 약속입니다.

  • 비워냄의 시간: 불속에 던져진 금이 불순물을 태워버리고 순도를 높이듯, 시련은 우리 안에 남아있는 지독한 자기 확신과 교만을 태워버립니다.
  • 영혼의 무게: 소망은 가벼운 낙관주의자가 던지는 구호가 아닙니다. 그것은 수많은 환난을 통과하며 빚어진 ‘연단된 인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묵직한 존재의 힘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아픈 시간마저도 결국은 선(善)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분의 섭리 앞에 겸손히 무릎 꿇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복음은 고난을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과하며 우리를 **’더 큰 사람’**으로 빚어냅니다.


적대적 상태에서 먼저 도착한 파격적 사랑

로마서 5장의 신학적 정점은 8절에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인간의 사랑은 대개 ‘이유’가 필요합니다. 상대가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거나, 적어도 나의 호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마음을 엽니다.

하지만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정반대의 지점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강력히 상기시킵니다.

  1.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스스로를 구원할 어떠한 힘도 의지도 없을 때.
  2.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을 배반하고 등을 돌린 그 순간에.
  3.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던 그때.

사랑은 우리가 회심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려 움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멀리 떠나 있던 그 밤에 먼저 출발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도덕적 성취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아무런 자격 없는 자를 향해 쏟아부으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모(思慕)’**의 사건입니다. 이 파격적인 사랑 앞에서 인간의 모든 방어기제는 무력화됩니다. 자기 의를 내세우던 바리새인도, 상처를 핑계로 마음을 닫았던 세리도, 결국은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계셨던 그 사랑 앞에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란 이 거대한 사랑을 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다 이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에 나를 온전히 맡기는 일입니다.


🍽️ 결론: 정죄의 문턱을 넘어 은혜의 잔치로

결국 로마서 5장은 우리를 차가운 신학 강의실이 아니라 따뜻한 **’은혜의 식탁’**으로 초대합니다. 이미 판결은 ‘무죄’로 끝났고, 화해는 성취되었으며, 심지어 우리의 상처와 환난조차 소망으로 인도하는 거룩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우리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여전히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법정 문 앞을 서성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미 차려진 은혜의 자리에 앉아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까?”

신앙의 성숙은 내가 더 강해지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얼마나 압도적인 사랑을 이미 받았는지를 깨닫고, 그 사랑 안에서 조금씩 더 깊이 안식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 나를 정죄하는 과거의 목소리보다 나를 긍정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더 크게 들리는가?
  • 환난의 폭풍 속에서도 그분이 나를 연단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미소 지을 수 있는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노력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도착한 **’화평’**을 믿음으로 수납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차려놓은 그 넉넉한 식탁에서 비로소 우리는 나 자신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사랑 때문에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됩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자신을 입증하는 피로한 전투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완벽한 사랑 안에서 평안을 배우는 **’거룩한 쉼’**입니다.

gloryofgo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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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 – 변질되지 않는 복음

1. 성탄절의 의미와 복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이는 단순히 연말의 축제 분위기나 장식,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울려 퍼지는 캐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본래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성탄절은 가장 중요한 절기 중 하나다. 왜냐하면 “왜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는가? 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가운데 오셔야 했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바로 이 시기에 더욱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장재형목사의 가르침에 비추어, 성경 본문 중 크리스마스에 가장 적합한 구절로 흔히 알려진 요한복음 3장 16절을 다시금 깊이 묵상할 수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은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알려 준다. 곧,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를 보내신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의 은혜를 통해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장재형(장다윗)목사의 강조에 따르면, 요즘 시대를 보면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점점 사라져 가는 듯하다. ‘연말 분위기’나 ‘휴일’ 정도로만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크리스마스는 단순히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가 아니라, “주님이 낮아지시고,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복음의 핵심이 선포되는 엄중한 날이다. 이 거룩한 날에 우리는 “왜 예수가 이 땅에 필요한가?”라는 물음에 성경적으로 답변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는 단지 교리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실제 신앙생활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기본적으로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 탄생 기사를 살피면서 아기 예수의 탄생 이야기, 천사들의 찬양과 목자들의 경배, 동방박사들의 예물 드림 등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넘어, “왜 예수님이 오셔야 했는가?”에 대한 풍성한 설명을 담아내는 곳으로서 로마서를 꼽을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과거 샌프란시스코에서 로마서 강해를 연속으로 진행하던 중 성탄절을 맞이했을 때, 로마서 8장의 메시지를 전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해 오신 주님”이라는 본래적 의미가 로마서를 통해 교리적으로, 이론적으로, 체계적으로 가장 잘 정리된다는 것이다. 사실 로마서 전체가 그러한 논리를 따라가지만, 특히 로마서1장, 5장, 8장 등에서는 ‘왜 주님이 이 땅에 오시게 되었는지’가 매우 선명하게 드러난다. 로마서 5장은 ‘새 아담론’이라고 불릴 정도로, 인류가 모두 죄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은 첫 사람 아담 때문이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 안에서 새 인류가 열렸다고 선언한다. 즉 “왜 오직 예수인가?”라는 질문에 답변을 제공하는 핵심 구절들이 이 로마서에 가득하다.

장재형목사는 교회 지도자와 성도들이라면 성경에 등장하는 메시지를 교리적, 조직신학적으로 잘 이해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복음의 의미가 흐려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정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 “너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하여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고 권면한 대로, 복음이 무엇이며 예수의 오심이 왜 필요한지를 묻는 이들에게 우리가 제대로 답변해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장재형목사는 “만인이 성탄절의 문화적, 세속적 분위기에만 빠져 있을지라도,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자들은 이 날의 깊은 의미를 더 성찰하고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때 오히려 로마서를 본문으로 삼아 복음을 선포할 때, 수많은 사람에게 “주님의 오심이 곧 우리의 구원”임을 새삼 일깨울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바로 이 복음의 정수를 각 성도에게 제대로 가르쳐야만, 교회의 존재 이유가 분명해진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만 백성을 제자 삼는 것이며,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이다. 이런 소명은 그저 교회의 외형적 성장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가 ‘왜 예수가 필요한가?’라는 물음에 늘 답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태도에 달려 있다. 실제로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또, 크리스마스가 상업적인 시즌으로 치우치거나, 단지 연말연시의 축제 기간으로만 여겨지고 있는 현실에서, 진정한 메시지를 잃어버린 캐럴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허함만을 안기기 쉽다. 그런 까닭에, “교회가 살아 있고 생명력 있는 말씀을 제대로 전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더욱 강조된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면서 교회 전통에서 지켜져 온 강림절(대림절) 기간은 원래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그 의미를 새기고 기다리는 절기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그 해(본문에서 언급된 2021년 즈음), 갈라디아서 본문을 통해 말씀을 전하고자 마음먹었다고 한다. 갈라디아서가 주는 중요한 가르침은, 주님의 오심과 복음이 왜 다른 것과 절대로 섞일 수 없는 순수한 진리인지, 또 왜 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지켜야 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교회가 겪었던 상황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교회와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쁨 가운데에서도, 장재형목사는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진다. “왜 우리는 주님이 필요한가?” 이 질문은 개인 차원을 넘어, “우리가 교회를 왜 세웠는가? 세상에 이미 교회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가 따로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교회와 다른 교회들의 차이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전 세계 어딜 가든 교회는 참으로 많지만, 어째서 사회가 실질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증거가 희미한가?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바다와 소금의 비유처럼, 소수의 ‘진정한 소금’ 역할을 하는 교회가 있다면 세상은 썩지 않는데, 지금은 수많은 교회가 있음에도 세상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원의 복음을 깨닫고, 복음의 감격이 살아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세상을 바꿀 만한 능력도 점차 약해지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우리 교회를 “젊고 새로운 교회”라고 부르며, 개혁교회(Reformed Church)임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여기서 ‘개혁’(Re-formed)은 ‘다시 만들었다’는 말이고, 역사적인 종교개혁을 언급할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교회사는 크게 두 가지 신학적 논쟁의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기독론(Christology)의 논쟁, 다른 하나는 구원론(Soteriology)의 논쟁이다. 초대교회 시기에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비롯한 기독론 문제가 칼케돈 신조를 통해 “Vere Deus Vere Homo(참 하나님이면서 참 인간)”라는 결론에 이르렀다면, 그다음으로 역사적인 큰 논쟁이었던 구원론적 분쟁이 바로 종교개혁으로 이어진 것이다.

종교개혁은 교회가 본래 지켜야 할 복음의 진리가 변질되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이사야서 1장 22절의 표현으로 “포도주에 물이 타지고, 은에 찌끼가 끼었다”는 상징이 있는데, 이는 ‘복음에 다른 것이 섞여 오염되었다’는 뜻이다. 본래 순수해야 할 복음에 자꾸 사람이 추가한 전통이나 행위, 규례가 덧붙여지면서, 그 순수가 훼손되고 말았던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대로, 오직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다. 장재형목사는 오늘날에도 동일한 의미에서, 교회가 변질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갈라디아서나 로마서를 통해 바울의 구원론을 바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미 한 차례 갈라디아서를 강해했던 시점이 있었지만, 당시에는 아직 교회가 그 진리를 충분히 실감하고 받아들일 만큼 성숙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이제는 해외 선교 현장에서, 혹은 라틴 문화를 접하는 자리에서, 복음이 희미해지는 “영적 위기 상황”을 체감하고 있으므로, 갈라디아서 말씀이 더욱 절실하다는 것이다.

정통(Orthodox) 교회에서 구원론은 바울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가 중추를 이룬다. 여기에 핵심 요절을 뽑자면 바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며, 더 압축하면 “오직 믿음(Sola Fide)으로만”이 된다. 로마서 10장 10절에 따르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한다. 믿음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마음에는 사랑이 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음에서 깨닫고 믿고 고백할 때,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이 흐려졌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흐려졌다는 말과 동일하다. 사랑이 흐려진 교회는 힘이 빠지고,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을 잃는다.

그렇다면 개인의 전도가 잘되지 않고 결실이 없을 때는 왜 그럴까? 장재형목사는 그것은 “말씀의 칼이 무디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성경을 통해 끊임없이 성령의 검으로 단련되지 않으면, 사람 앞에서 복음을 예리하게 전할 수 없다. 세상 안에서 활동하는 직업인, 즉 세상과 접촉이 많은 성도라면 더욱 말씀의 근거가 필요하다. 사도행전 6~7장에 등장하는 스데반 집사를 예로 들면서, 그는 단지 교회에서 봉사만 했던 사람이 아니라, 구약 성경과 이스라엘 역사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치지 않고, 끝까지 선교하며, 최초의 순교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갈라디아서가 기록된 이유도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복음이 변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초대교회 때부터 바울이 강하게 경계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직면한 현실도 갈라디아서 시대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통찰이다.

특히 최근 우리 교회가 중남미, 즉 라틴 지역으로 선교를 확장해 가는 상황은, 갈라디아서의 가르침을 실제로 적용할 기회를 제공한다. 라틴의 교회들은 전통적으로 로마 가톨릭이 강세였다. 종교개혁의 배경을 살펴보면, 가톨릭 교회가 성경 외에도 수많은 전통과 의식을 덧붙이는 과정에서 복음의 핵심이 희미해졌고, ‘전통+복음’의 형태로 가르치면서 면죄부, 연옥설 등 사람이 만든 추가적인 교리를 교인들에게 지우게 되었다. 이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는 바울의 구원론에 어긋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종교개혁자들은 “Sola Scriptura(오직 성경으로), Sola Fide(오직 믿음으로), Sola Gratia(오직 은혜로)”를 외치며 교회가 성경 본연의 메시지로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복음주의(Evangelical)는 바로 이런 신앙 고백을 지키려는 이들을 가리키며, 오늘날 라틴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이 중요한 이슈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에, 갈라디아서의 메시지를 더욱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명을 우리가 감당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라틴 지역으로 들어가는 길은 이미 여러 경로(미국 캘리포니아, 텍사스, 플로리다 등)로 열려 있고, 복음 전파의 기회 또한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그때 교회가 ‘복음+다른 무엇’을 가르치면, 결국 교회는 힘을 잃는다.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구원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고, 어떤 전통과 의식으로 구원에 덧붙이지 말아야 한다. 복음이 흐려지면, 사랑이 식어버린다. 주님의 사랑이 영원함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맥없이 식어지고 열매를 맺지 못할 때, 반드시 그 원인은 복음에 다른 요소가 침투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너희가 다른 복음으로 속히 떠나가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라고 했던 경고가, 지금도 유효한 것이다.

실제로 갈라디아서가 쓰인 당시, 교회 안에는 유대주의자들이 들어와서 복음을 왜곡했다. 그들은 “이방인도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를 먼저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고, 할례를 구원의 필수 조건처럼 만들었다. 바울은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은혜, 그리고 그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고 선언하며, 다른 조건을 붙여서는 안 된다고 단호히 가르쳤다. 이것은 중세 가톨릭 교회가 “교회의 전통이나 의식을 통해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식으로 복음을 훼손했을 때도 똑같이 적용되는 진리였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들이나 라틴 지역에서, 복음에 이것저것을 더하며 사람들을 혼란케 한다면, 갈라디아서의 경고가 다시금 살아나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말한다.

이어 그는 로마서 9~11장을 통해 “바울이 자기 동족인 유대인에 대해 가졌던 끊을 수 없는 사랑”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면서, 우리의 태도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를 구원으로 이끌고자 하는” 마음이어야 한다고 권면한다. 단순히 가톨릭이나 다른 교파를 정죄하거나 비판하는 데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흐려진 형제들에게 우리가 진정한 복음을 다시 전해서 그들도 회복하도록 돕는 것”이 바울의 열망이었고, 그것이 지금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교회 안을 측량하라는 계시록 11장의 권고도 언급한다. 이미 일어났던 왜곡과 오류를 냉철히 살피되, 결국에는 교회가 복음의 핵심으로 돌아와 회복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곧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의 정신과도 맞닿는다.

그런 면에서 그는 교회가 21주년을 맞이했을 때, “Sola Fide, Sola Gratia, Sola Scriptura”를 설교한 일을 상기시킨다. 바로 그해 하나님께서 “눈물의 땅을 기쁨의 땅으로 바꾸는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 땅에 복음주의 센터(Evangelical Center)를 세우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복음주의(Evangelical)란, 순수한 복음을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며, 오직 성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진리를 결코 타협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이처럼 갈라디아서가 주는 메시지는 초대교회부터 늘 있어 왔고, 종교개혁 시기에도 문제의 본질은 동일했다. “복음에 무엇을 더하거나, 복음 외에 다른 조건을 붙이는 순간, 교회는 순수성을 잃는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 8절에서는 하늘의 천사가 전하더라도,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까지 엄하게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왜 갈라디아서가 로마서와 함께 묶여서 교리서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지” 다시금 환기시키며, 라틴 선교 현장에서도 이것이 반드시 필요한 태도임을 설파한다.

최근에는 교회마다 새로운 부흥의 움직임이 감지된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복음의 본질을 절대 흐리지 말라”는 권면이 더욱 절실해진다. 새로운 교회가 시작되거나, 교회당을 입당하는 순간조차도, “우리는 율법적이고 형식적인 교회가 아니라 순수한 복음이 지배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뚜렷한 원칙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식지 않을 것이며, 교회는 불타는 열정으로 가득 차 세상을 향해 능력 있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지치지 않는 사역자들, 견인(堅忍)의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바로 “복음이 오염되지 않은 공동체” 안에서 자라나는 법이다.

장재형목사는 창립 이래 우리 교회가 걸어온 길을 거듭 언급하면서, “우리 교회가 왜 전 세계적으로 하나님의 눈동자처럼 지킴을 받는가?” 하고 자문해 보라고 한다. 그건 다른 것 없이 순수한 복음을 붙든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중남미에서도, 미국에서도, 아시아에서도 동일한 복음이 그대로 전해져야 한다. 우리의 사명은 “세계의 여러 지역을 복음으로 깨우고, 교회가 변화되어 세상을 살리는 구원의 방주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1장 본문을 잠깐 살피면, 바울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이는 복음의 권위가 결코 인간에게서 온 것이 아님을 선언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마찬가지로, 바울 역시 사람에게서 임명을 받거나 권한을 위임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사도가 되었다는 고백이다. 교회의 근거, 복음의 근거 역시 여기에 있다. 사람이 만든 체계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 말씀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6절 이하에서 “너희가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는 어떤 자들이 있다”고 지적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무언가를 더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혼란에 빠진 것을 강하게 책망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1장 8절~9절에서는 더 나아가 “우리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만큼 복음은 타협이 없고, 절대 다른 것으로 대체되거나 보충될 수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이야말로 오늘의 교회가 다시금 되새겨야 할 경고”라고 말한다. 교회가 성장하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만약 복음이 흐려지는 교회라면,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초대교회가 경험했던 똑같은 문제를 되풀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율법주의나 형식주의가 교회를 지배하면, 교회가 더 많아져도 세상은 여전히 바뀌지 않는다. 복음주의 교회, 개혁교회, 다시 말해 순수한 복음을 지키는 교회가 세상에 진정한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다.

성탄절을 맞이하는 모든 성도들은 “복음이 무엇이며, 왜 예수가 오직 유일한 구원의 길인가?”라는 질문을 생각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내용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풍부히 기록되어 있다고 역설한다. 로마서 8장에서 말하듯이“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신 생명의 성령의 법”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로마서 5장에서 설명하듯 “아담 안에서 죄가 들어온 인류는 새로운 아담이신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다.” 이것이 복음이며, 복음은 그 자체로 충분하다. 교회가 이것을 붙들 때,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더욱 또렷해지고, 그 거룩한 사랑은 결코 식지 않는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요, 우리 삶의 지치지 않는 동력이 된다고 말한다. 교회는 늘 사랑 안에서, 복음 안에서, 주님이 보여 주신 낮아짐과 섬김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만 성탄절이 그저 상업적 캐럴과 화려한 장식으로 끝나지 않고,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는 증거가 될 수 있다.

2. 갈라디아서를 통한 개혁신앙과 교회의 방향

갈라디아서가 교회에 주는 경고와 도전은 중세 시대 종교개혁에 그대로 적용되었고,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달라지지 않는다. “복음에 무엇을 더하는가?”의 문제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건이 가진 무한한 가치를 온전히 인정하지 못하고, 인간의 전통이나 공로를 보태어야 한다고 믿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바울의 서신과 종교개혁 신앙고백이 일관되게 말하는 바는, “복음은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은 단지 교회 조직을 바꾼 혁신이 아니었다. 구원론의 문제, 즉 “어떻게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었다. 가톨릭 교회가 점차 교리에 사람의 전통을 가중시키고, 면죄부나 연옥설 같은 것들을 성도들에게 요구함으로써, 교회가 ‘구원의 통로’를 독점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는 바울의 가르침, 곧 “구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 얻어진다”는 진리를 왜곡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루터, 칼뱅, 쯔빙글리 등 종교개혁가들이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자(Sola Scriptura)”고 외치며, 복음주의(Evangelical) 운동을 일으켰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Re-formed(개혁)”이라는 단어로 다시금 되짚는다. 우리 교회가 단순한 새 교회가 아니라, “복음으로 돌아가자는” 개혁교회라는 정체성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듯 교회가 얼마든지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초기 교회부터 이미 영지주의자나 유대주의자 등, 복음에 다른 것을 덧붙이거나 복음을 왜곡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바울은 각 서신에서 이런 도전을 강력히 반박했고, 갈라디아서에서는 “다른 복음을 좇는 것”에 대해 가장 직접적이고 단호한 표현으로 책망하고 있다.

장재형목사는 갈라디아서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며, 특히 1장과 2장, 그리고 3장 전체를 통해 “어떻게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가?”를 주목해 보라고 권면한다. 율법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미 율법을 완성하시고, 새로운 길을 여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가 핵심 고백이 된다. 우리 행위의 ‘조금 더함’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개혁신앙이며, 종교개혁 이후로도 복음주의 교회가 수호해야 할 가장 본질적인 원리다.

오늘날 라틴교회 안에서, 때로는 “종교적 의무를 지켜야만 구원을 유지할 수 있다”거나, 전통 의식을 지키는 것과 성례에 참여하는 것이 곧 구원의 필수 요건인 양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전통과 성례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교회 전통은 풍부한 신앙의 유산을 담고 있으며, 예배 의식도 하나님께 경외심을 표하는 소중한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복음+α”의 형태로 구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처럼 teach(가르침)되고 있다면, 바로 갈라디아서적 비판을 면치 못한다. 바울이 말하듯, “할례+복음”이 아니라 “오직 복음”이어야 한다. “주님이 주신 은혜+인간의 전통”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충분하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현대교회 맥락에 구체적으로 적용한다. 우리 교회만의 규례나 조직, 혹은 문화적 요소가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는다면, 그것 역시 복음의 순수성을 흐리는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전통이나 제도를 통해 성도를 섬기고 질서를 세우는 것은 중요하지만, 절대로 구원의 조건처럼 남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개혁교회의 정신은 끊임없이“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을 되새기며, 시대가 바뀌어도 복음이 오염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맥락에서, 장재형목사는 갈라디아서가 초대교회부터 2000년 동안 교회가 부딪쳐온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으므로, 오늘날 세계 선교 현장에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이 서신을 깊이 연구하고 묵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글로벌 사역 네트워크(OC)의 확장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복음을 접하고 교회를 형성하는 라틴의 성도들이 갈라디아서의 메시지를 듣게 된다면, 처음부터 “다른 복음”이 섞이지 않은 순수하고 건강한 교회를 세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우리가 교회를 개척할 때,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핵심 구원론을 기초로 삼으면, 불필요한 율법주의나 형식주의가 교회 안에 들어올 틈이 줄어든다. 그러면 교회는 처음부터 복음에 기반한 자유와 기쁨, 열정이 충만한 공동체가 된다. 이런 교회는 세상을 향해 활짝 열린 모습을 보이고, 사랑과 선교의 동력이 끊임없이 솟아오른다. 장재형목사는 성령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교회가 자라나고, 라틴 지역은 물론 세계 곳곳으로 생명의 강이 흘러가기를 소망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장재형목사가 말한 “Evangelical Center(복음주의 센터)”의 역할이다. 우리는 복음주의자(Evangelicals)로서,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의 핵심을 지키는 것에 생명을 건 사람들이다. 교회사를 크게 나누면, 구교(가톨릭)와 신교(개신교)로 구분할 수 있고, 신교 안에서도 자유주의(liberals)와 복음주의(Evangelicals/Conservatives)로 분류할 수 있다. 복음주의는 말 그대로 “복음을 지키고 전파하는 데 집중하겠다”는 움직임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체성은 단지 ‘우리는 가톨릭이 아니다’, ‘우리는 자유주의가 아니다’라는 수준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우리는 오직 복음, 오직 성경의 권위 아래 살아가는 공동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래서 전 세계로 흩어진 복음주의 센터들은 각 지역에서 복음전도, 말씀 교육, 제자 양육을 통해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구체적인 사역을 감당해 나가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최근 여러 교회에서 견신례(Confirmation)나 세례식을 통해 수십 명이 새로운 신앙고백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거기에는 똑똑한 사람들, 이슬 같은 청년들,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이 가득하다”고 말했다. 참된 복음이 들어가면 젊은 영혼들이 기꺼이 마음을 열고 예수를 고백하기 때문이다. 구약 호세아 14장 5절에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라는 말이 있는데, 이슬 같은 은혜로 시들어가던 영혼이 살아나고, 마른 밭이 촉촉해지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선교지에 “성령받는 장소”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Evangelical Center이며, 교회에 대한 바울의 비전이기도 하다.

교회가 이렇게 “오직 예수, 오직 복음”을 전할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라틴의 한 교회가 새 건물로 입당하고, 거기에 모인24명이 견신례를 받는 등, 새 출발을 하는 광경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단지 ‘눈에 보이는 건물’의 문제나 ‘수적 증가’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 교회가 어떤 신앙고백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선포하는가?”가 훨씬 더 중요한 이슈다. 갈라디아서 1장 8절 이하의 “하늘의 천사라도 복음에 다른 것을 더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강력한 선언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복음이 조금이라도 변질되면, 교회는 결국 힘을 잃는다. 반면, 순수한 복음을 지키면, 그 교회는 “전 세계를 변화시킬 만한 능력”을 가지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예전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는 시편 133편 말씀을 자주 인용하며, 성도들이 은혜 안에서 교제하고 하나를 이루는 공동체를 구축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강조했다. 그러한 공동체는 “주님이 사랑하시는 교회”가 되며, 성령의 열매가 충만한 교회가 된다. 거기엔 사랑이 식거나 사역자가 지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복음의 불길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르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가 보여주듯, 교회가 “복음에 무언가를 더하려는” 사람들을 단호히 경계하고, “오직 예수와 그분의 십자가”를 붙들 때, 그 사랑의 능력이 계속 확산되어 간다.

복음의 본질이 분명하면, 교회는 사회를 향해 강력한 빛이 된다. 지금 사회가 어두워져 가는 것은, 교회가 많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미 교회 수는 매우 많다. 하지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잃어버리거나, 복음 외에 다른 것들에 에너지를 빼앗긴다면, 교회가 본연의 능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이 교회가 정말 ‘Re-formed’, 곧 바울이 말한 순수 복음을 붙들고 있느냐?”를 계속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개혁은 한 번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교회가 늘 복음으로 돌아가는 “지속적 개혁(Semper Reformanda)”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함께 보면, 바울이 말하는 구원이 얼마나 놀랍고 광대하며, 또한 인간의 모든 공로를 무의미하게 만드는지를 깨닫게 된다. 로마서 5장의 “새 아담” 사상은 인류 죄의 근원을 아담에게서 찾고, 그 해결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는 논리로 이어진다. 거기엔 “오직 예수”를 독선적으로 보지 않는 신학적 뒷받침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첫 사람 아담 안에서 타락했고, 그 죄와 사망이 전 인류에 이르렀으나, 둘째 아담이신 예수 안에서 비로소 새롭게 창조된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인간도 자력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고, 따라서 율법이나 전통 같은 것들이 구원을 보장할 수 없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에서만 온다.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구원의 길은, 할례나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는 삶의 고백이다.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으로 죄값을 치르셨고, 우리는 그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이다. 종교개혁 때나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문제나, 모두 이 핵심에서 빗나갔기 때문에 생긴다. 교회가 점점 세상적 힘과 권세를 소유하면, 종교적 제도로써 사람을 통제하거나, 재정적 이익을 위해 면죄부 같은 것을 만들고, 복음에 다른 것들을 추가해 영혼들을 짓누르는 일이 벌어진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5장 1절은 “자유를 주려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으니”라고 선언하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강조한다. 여기에 바로 복음의 해방적 힘이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복음의 교리를 지키는 공동체가 되려면, 성도 개개인이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각성하고, 또 서로에게 복음을 일깨워 주는 ‘형제애’를 유지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교회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자칫 형식과 제도에 익숙해져서 “복음의 사랑”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탄절과 같은 절기에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재확인한다면, 우리의 신앙이 식을 틈이 없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다시 읽을 때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엄청난 사랑인지 깨닫게 되고, 거기에 우리가 감히 더하거나 뺄 것이 없음을 고백하게 된다. 그때 교회는 한없이 겸손해지면서, 동시에 세상을 향한 담대한 비전도 품게 된다.

크리스마스는 그래서 교회로 하여금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촉구이기도 하다. “[마 24:12]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는 예언처럼, 세상 끝날이 가까울수록 사람들의 사랑이 식는다고 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교회 안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이 식는다는 것은 곧 복음이 흐려진다는 의미다. 교회가 다시 복음으로 돌아오면, 성탄절이 매년 반복될 때마다 오히려 더 뜨거운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포도주가 더 귀해지듯, 진짜 복음은 변질되지 않는다. 물을 타거나, 잡다한 것들이 스며들 때만 교회가 싱거워지고 식어 버리는 법이다.

장재형목사가 갈라디아서 서론(1장)을 인용하면서 강조하는 메시지는,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바울이 사도가 된 것도, 교회가 존재하는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이기 때문에, 사람의 시선이나 전통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성경과 성령의 권위에 따라야 한다. 이것이 “개혁신앙”이며, “복음주의 교회”의 존재 이유다.

교회가 이 길을 갈 때, 하나님은 “우리 눈에 기이할 만큼” 놀라운 일을 이루신다. 장재형목사는 “Evangelical Center가 세워진 것은 실로 기이한 일”이라며, 이것이 하나님께서 큰 사명을 맡기신 증거라고 말한다. 실제로 교회가 순수한 복음을 지킨다면, 지리적, 문화적 경계를 넘어서는 선교가 훨씬 수월해진다. 사랑의 원동력이 복음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인간적인 율법이나 전통이 사람들을 얽매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아시아에서도, 아프리카에서도, 복음이 동일하게 전해지고 동일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확신을 품게 된다.

크리스마스 기간에 갈라디아서를 함께 공부하자는 것은, 지금까지 말해 온 복음의 본질을 다시금 확고히 하자는 의미다. 성탄절이 단지 “아기 예수”만 바라보는 동화적 서사가 아니라, “낮아지신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의 길, 그리고 우리를 향한 무한한 사랑의 약속”을 재차 묵상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또한, 그 사랑을 왜곡하거나, 은혜에 다른 무언가를 추가하여 성도들을 짓누르고 지치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경계다. 그러면 성탄은 1년에 한 번 반복되는 행사로 끝나지 않고, 교회를 개혁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동력이 된다.

장재형목사의 말처럼, “복음이 순수하게 전해지는 곳에는 늘 기쁨과 열정이 넘친다.” 교회가 사람의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져 갈 때, 그 교회는 해마다 성탄절이 올 때마다 더 깊어지고 성숙해진다. 교리적 지식과 결합된 실제 삶의 변화가 뒤따른다. 그러므로 올바른 교리 교육, 성경연구, 지속적인 제자훈련이 매우 중요하며, 교회가 ‘복음의 군사들’을 계속 양성해야 한다. 그렇게 준비된 자들은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증언하고, “왜 예수가 필요한가?”를 묻는 자들에게 언제든 소망의 이유를 알려 줄 수 있는 이들이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는 성탄절의 의미를 바탕으로, “왜 교회가 오직 예수를 붙들어야 하고, 왜 예수는 유일한 구원의 길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풍성한 답변을 제공한다.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누차 강조한 핵심 메시지다. 교회가 이 진리를 붙들면, 수많은 캐럴 중에도 생명력 있는 찬양이 있고, 형식적 예배 속에도 꺼지지 않는 열정이 깃들 수 있다. 특히 갈라디아서의 도전은 “오직 예수의 복음만이 교회에 능력과 활력을 준다”는 점이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복음이 살아 있다면 교회는 늙지 않는다. 오히려 더 진하고 귀한 향기를 풍기게 된다. 성탄절은 그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절기이고, 복음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세상에 선포하는 날이다.

바라건대, “갈라디아서 1장 8절의 심정”으로, 복음에 무언가를 보태려는 유혹을 강력히 거절하고, 온전히 예수의 사랑을 붙드는 교회라면, 어떤 문화권이든, 어떤 언어권이든, 그 교회를 통해 수많은 영혼이 구원의 길로 나아오게 될 것이다. 그날을 기대하며, 크리스마스에 선포되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마음 깊이 새기고, 한 해를 마감하며 새해를 준비하는 소중한 계기로 삼자. 성경이 약속한 ‘복음의 능력’이 세상을 어떻게 뒤바꾸는지 체험할 교회가 바로 우리 교회,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모든 믿음의 공동체가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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