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가 설립한 올리벳대학교가 유럽의 주요 기독교 대학들과 협력하여 유럽에 새로운 기독교 대학을 세우기 위한 노력을 진행 중입니다.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인 장재형목사와 함께 윌리엄 와그너 박사(올리벳대학교 진젠도르프스쿨 박사과정 공동회장), 토마스 존스 박사(올리벳대학교 진젠도르프스쿨 박사과정 고문, 체코 프라하 마르틴부쳐신학교 교수) 등은 독일 마르틴부쳐신학교, 본신학교, 비데네스트신학교 등 유럽의 우수한 신학교들의 지도자들과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독일 본에 위치한 마르틴부쳐신학교를 방문하여 해당 교의 총장 토마스 슈마허 박사와 만나 유럽에서 두 대학의 교수진이 공동으로 기독교 교육을 실시하는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마르틴부쳐신학교는 독일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 걸쳐 11개 캠퍼스를 두고 있습니다.
올리벳대학교 관계자들은 호르스트 애플러백 총장과 학교의 빠른 확장에 관한 논의를 진행하였으며, 비데네스트신학교 캠퍼스도 방문하여 역사적인 투어와 함께 그리스도 형제단에 대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또한 현재 올리벳대학교 신학대학 학장인 도날드 틴더 박사와 부인 에디 틴더가 기증한 책으로 알려진 비데네스트신학교 도서관도 방문하였습니다.
방문진은 본신학교 하인리히 더크센 총장과 앤디 위베 학장과의 협력 방안을 논의하였습니다. 한편, 미국에 위치한 본교를 둔 올리벳대학교는 유럽을 비롯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의 신학교육 플랫폼 개발에도 현재 진행 중입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심판』이 보여주는 인간의 실존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죄책감과 정죄의 차가운 공기 속에 갇힌 피고의 모습과 같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를 피고석에 앉히고 끊임없이 고발하는 내면의 은밀한 법정을 가지고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빅토르 위고의 명작 『レ・ミゼラブル(레 미제라블)』에서 주인공 장발장의 영혼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법률이 집행하는 형벌의 차가운 칼날이 아니라, 그의 모든 죄를 덮어주었던 미리엘 주교의 조건 없는 자비와 따뜻한 손길이었습니다. 이처럼 깨어지고 일그러진 한 인간을 근원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대개 힘의 과시나 강압적인 정죄가 아니라, 자신을 철저히 낮추어 타인의 허물을 덮어주는 희생적인 사랑의 사건입니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로마서 12장 16-21절 강해 설교는 그리스도인의 구체적인 삶이 과연 어떠한 토대 위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최종적으로 어디를 향해 전진해야 하는지를 신앙의 본질적 차원에서 깊이 있게 성찰하도록 인도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겸손은 단순히 외적으로 세련되게 꾸며진 낮은 태도의 장식품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거대한 악을 오직 하나님의 선으로 받아치고 이겨내기 위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 영혼의 중심에 가장 먼저 세워놓는 견고한 첫 자리이자 거룩한 영적 기초입니다.
본 성경 말씀의 논리적 흐름은 매우 정교하고 선명합니다. 공동체 내부에서 서로 마음을 같이하고, 세상의 높은 데 마음을 두지 않으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교만하지 말라는 사도 바울의 강력한 권면은 교회 안에서 참된 사랑이 어떠한 실천적 형태를 입고 나타나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설교는 이 구절을 단순히 도덕적인 인간관계의 예절이나 처세술로 격하시키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깨뜨려 낮추며 이웃의 형편을 온전히 수용하는 좁고 험난한 믿음의 길로 풀어냅니다. 그리스도인의 낮아짐은 세상 앞에 무력하게 무릎 꿇는 패배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복음이 가진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세상의 악한 방식과 폭력의 굴레에 휘말리지 않도록 우리 영혼의 중심을 견고하게 지켜내는 은혜의 보좌이자 승리의 자리입니다.
로마서 12장이 선포하는 메시지는 우리의 감정이 고요하고 환경이 평안할 때만 실천 가능한 낭만적인 이상주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삶의 현장에서 지독한 오해를 받고, 영혼을 찌르는 깊은 상처를 입으며, 본능적으로 상대방에게 피로써 되갚아주고 싶은 격렬한 분노가 일어나는 바로 그 모순적이고 비참한 자리에서 우리의 믿음이 가야 할 최종 방향을 준엄하게 질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설교는 단호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며, 신앙인의 내면 깊은 곳을 비추는 거룩한 진리의 거울이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내가 지금 누구를 사랑할 능력이 있는가”를 묻기 전에, “나는 과연 누구 앞에서 본능적으로 스스로를 높이고 왕좌에 앉으려 하는가”라는 아픈 질문을 정직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2. ‘Understand’의 신비: 타인의 아픔 아래에 서는 겸손의 성육신
성경이 명하는 “서로 마음을 같이하라”는 말씀은 공동체의 모든 지체가 획일화된 하나의 의견이나 기계적인 동질성을 가지라는 결코 얕은 수준의 요구가 아닙니다. 이것은 타인의 삶의 자리에 정직하게 동참하여, 그가 흘리는 눈물에 함께 아파하고 그가 누리는 기쁨에 진심으로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영적 감수성이자 마음의 거룩한 방향성을 뜻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세상의 이익 집단과 구별되는 참된 그리스도의 몸으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나의 주관적인 기준과 높은 자리에서 재단하고 판단하는 교만한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그 대신 연약한 형제의 눈높이와 삶의 자리 곁으로 묵묵히 걸어가 발을 맞춰주는 사랑의 움직임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참된 겸손은 내 존재를 무가치하게 지워버리는 자학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스러운 형편을 내 시야와 삶의 중심 안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가장 적극적인 신앙의 순종입니다.
이 지점에서 설교의 탁월한 통찰은 사랑과 지식의 깊은 상관관계를 날카롭게 짚어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누군가를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표면적인 정보나 프로필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말 못 할 아픔과 깊은 상처 아래에 내 무릎을 꿇고 서 보는 것이며, 그가 짊어진 무거운 인생의 짐을 나의 어깨로 함께 체휼하며, 그가 쓰러져 있을 때 아무런 조건 없이 실제로 나의 따뜻한 손을 내밀어 영혼을 붙들어주는 희생적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적 이해는 이성적인 차가운 분석이나 비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처럼 사랑으로 인해 기꺼이 자신을 깨뜨려 아래로 낮추는 거룩한 도덕적 도약입니다.
영어 단어 **’Understand(이해하다)’**의 어원이 보여주듯, 참된 이해는 언제나 타인의 아래(Under)에 서는(Stand) 태도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상대방을 복음으로 온전히 품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를 내 교만한 기준과 율법의 잣대 위로 억지로 끌어올려 채찍질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친히 그의 비참하고 연약한 삶의 자리 가장 낮은 곳으로 기꺼이 내려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요구하는 “낮은 데 처하라”는 말씀의 실제적인 영적 깊이이자 무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멀리 떨어진 안전한 조종석에서 타인의 인생을 해석하고 구경하는 차가운 시선이 아닙니다. 그것은 흙먼지 날리는 거친 삶의 한복판에서 고통받는 지체와 가까이 밀착하여 그의 고독과 상처를 온몸으로 함께 견뎌내는 신실한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서에서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와 그의 주인 빌레몬 사이에서 보여주었던 눈물겨운 중재의 태도 역시 이러한 복음적 낮아짐의 흐름 속에 존재합니다. 바울은 당시 사도로서 가졌던 막강한 영적 권위와 지위를 앞세워 빌레몬에게 엄하게 명령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에 근거하여 스스로를 낮추고 간절히 권면하며 깨어진 관계를 봉합하는 화해의 길을 열었습니다. 거대한 영적 권위를 소유한 자가 도리어 가장 낮은 자리에서 빌레몬에게 자비를 간청할 때, 복음은 군림하는 율법의 명령어가 아니라 영혼을 소생시키는 강력한 회복의 언어로 세상에 그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의 모든 인간관계와 영적 질서가 건강하게 세워지는 유일한 방식도, 결국 이와 같이 자기를 부인하는 그리스도적 낮아짐의 좁은 문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합니다.
3. 교만의 지혜를 깨부수는 사랑의 분별력과 공동체의 성화
성경이 경고하는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는 준엄한 말씀은 신앙생활을 오래 한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을 가장 예리하게 찌르는 성령의 검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누구나 너무나 쉽게 자신의 편협한 판단과 경험을 ‘영적인 지혜’라 포장하고, 자신의 통제되지 않은 사사로운 감정과 분노를 ‘거룩한 공의와 정의’라는 이름으로 위장하곤 합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의 성경 묵상은 참된 하늘의 지혜가 결코 머리의 빠른 회전이나 신학적 지식의 양에서 나오지 않으며, 오직 영혼을 살리고자 하는 십자가의 사랑의 분별력에서만 흘러나온다고 강력히 선포합니다. 구약 잠언의 지혜로운 권면처럼,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는 어리석은 자의 미련함을 따라 대답하지 않음으로써 함께 죄에 빠지지 않아야 하고, 또 어떤 상황에서는 그 미련함을 진리로 따뜻하게 깨우쳐 그가 파멸의 길에서 돌이키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처신은 인간의 이성으로 볼 때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십자가의 거룩한 사랑 안에서는 완벽하게 일치하는 하나의 생명의 길이 됩니다. 신앙의 삶에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가 논쟁에서 이겨서 나의 옳음을 증명하느냐”가 아닙니다. 그 깨어지고 불편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선하심이 어떻게 영광스럽게 드러나는가”가 유일한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거세된 차가운 지식은 사람의 상태를 현미경처럼 날카롭게 분석하고 설명해 낼 수는 있을지언정, 정작 상처받아 피 흘리는 영혼을 단 한 사람도 살려내지는 못합니다. 반면에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에 철저히 붙들린 하늘의 지혜는, 성도로 하여금 말해야 할 때와 묵묵히 침로를 지키며 침묵해야 할 때를 알게 하고, 상대방에게 가까이 다가가 품어야 할 때와 그가 스스로 돌이킬 때까지 눈물로 기다려 주어야 할 때를 명확하게 분별하게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 설교가 제시하는 영적 지혜는 책상 위에서 논하는 추상적인 교리적 유희가 아니라, 거친 삶의 현장에서 피와 땀이 묻어나는 묵직한 삶의 질감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거친 말이 튀어나오려 할 때 호흡을 한 번 늦추고, 상대를 향한 판단의 속도를 의식적으로 줄이며, 나에게 상처를 준 원수 같은 사람을 위해 골방에서 은밀히 무릎 꿇고 눈물로 기도하는 그 작고 평범해 보이는 삶의 태도들이야말로 하늘의 지혜가 가진 진짜 얼굴이자 실체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복음의 지혜는 현란한 말잔치나 치열한 신학 논쟁의 승리를 통해 증명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십자가를 따르는 삶의 거룩한 방향성과 흔적을 통해서만 온전히 증명됩니다. 복음으로 낮아진 사람은 교만한 자가 보지 못하는 더 많은 영적 진실을 선명하게 보게 되며, 지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영혼의 깊이를 더 깊게 헤아려 알게 됩니다. 고결한 신학적 통찰과 성경의 신비는 인간이 높은 보좌에 앉아 오만하게 아래를 내려다볼 때는 철저히 가려지지만, 상처 입어 쓰러진 누군가의 아픔 곁에 자신의 무릎을 낮추어 함께 피를 묻힐 때 비로소 수정처럼 맑게 열리는 법입니다.
이 참된 지혜의 진위 여부는 다름 아닌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 가장 먼저 치열하게 시험대에 오르게 됩니다. 교회는 이미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완성된 의인들이 모여 자신의 거룩함을 뽐내는 화려한 사교장이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자비가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영적 문둥병자 같은 죄인들이 모여, 서로의 모나고 부족한 허물들을 날것 그대로 마주하며 십자가로 다듬어져 가는 거룩한 성화의 용광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참된 사랑은 나의 인간적인 좋은 감정이 아무런 방해 없이 오래도록 유지되는 안일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도저히 용납하기 힘들고 불편한 인간관계의 지옥 속에서도, 내 감정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평화를 먼저 구하며 묵묵히 십자가를 지는 피나는 순종의 과정입니다. 믿음은 바로 그 고통스러운 순종의 자리에서 우리의 말의 온도를 바꾸고 행동의 방향을 바꾸어 놓습니다.
4. 사사로운 보복의 칼날을 거둘 때 임하는 하늘의 평화와 공의의 신뢰
로마서 12장의 후반부 말씀은 우리를 겸손의 자리에서 더 전진시켜, 인간의 본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원수 사랑’의 극단적인 자리로 우리를 강력하게 밀어붙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바울의 장엄한 명령은 인간의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고 참으라는 수준의 유교적인 억제 윤리나 도덕적 훈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주적인 영적 전쟁의 관점에서, 악이 우리 영혼의 내부로 침투하여 다시금 무서운 속도로 번식하고 파괴적인 생명력을 얻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하라는 강력한 복음의 방역 명령입니다. 나에게 가해진 악에 대해 사사로이 보복하는 행위는 당장에는 정의의 실현처럼 보이고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복수의 순간에 우리 스스로가 악의 잔인한 언어와 방식을 빌려와 결국 내가 증오하던 그 악의 괴물과 똑같이 닮아가게 만드는 사탄의 가장 교묘한 덫입니다.
그렇기에 본문 성경은 우리에게 수동적인 인내를 넘어, 모든 사람 앞에서 적극적으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명령합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선은 우연히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일시적인 착한 감정이나 성격의 온유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감정이 갈기갈기 찢겨나간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의지적으로 선택해 내는 피 묻은 순종의 열매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자를 향한 원수 갚는 권리를 내가 행사하지 않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완전히 이양하는 행위는, 힘이 없어 당하는 무기력한 체념이나 비겁한 도피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우주의 최종 심판자이자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을 인간인 내가 감히 찬탈하지 않겠다는 신앙인의 가장 두렵고도 거룩한 영적 절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이 세상을 공의와 사랑으로 반드시 다스리시고 심판하신다는 절대적인 신뢰가 있을 때야만, 우리는 내 손으로 상대를 반드시 짓밟아 쓰러뜨려야만 내 영혼이 평안해질 수 있다는 세상의 거짓된 확신과 보복의 광기에서 비로소 자유롭게 해방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다윗이 자신을 광기 어린 시기로 군대를 동원해 추격하던 사울 왕을 굴 속에서 단칼에 베어버릴 수 있는 완벽한 기회를 얻고도, 도리어 옷자락만을 베며 칼을 거두었던 역사적 장면은 이러한 믿음의 실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위대한 증거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눈앞에 찾아온 절호의 찬스를 사사로운 복수를 감행하라는 하나님의 허락으로 아집 가득하게 오해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에 대한 최종 판결과 심판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 한 분에게만 속해 있다”라는 거룩한 신앙의 고백이, 그의 타오르는 분노와 손에 쥐어진 날카로운 칼날을 멈추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흘러나오는 초자연적인 평화는, 세상의 군사력과 힘의 균형이 가져다주는 깨어지기 쉬운 일시적인 평화와는 그 차원과 본질이 완전히 다릅니다.
설교는 이 세상이 말하는 평화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주시는 평화를 명확하게 구별합니다. 세상의 힘과 권력으로 상대방을 철저히 억누르고 굴복시켜 얻어내는 평화는, 겉으로는 갈등이 잠시 종식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정작 그 사람의 마음속에 응어리진 증오와 적의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인의 낮아짐과 섬김, 그리고 희생을 통해 임하는 하늘의 평화는, 상대를 힘으로 무너뜨려 쟁취하는 정적(靜寂)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를 향해 다가오던 악의 치명적인 흐름을 내 몸을 제물 삼아 완전히 끊어버리고, 원수 되었던 관계 속에 하나님의 새로운 화해의 가능성을 힘차게 열어젖히는 거룩한 안식입니다. 그 십자가의 평화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지극히 연약하고 바보스러워 보이지만, 역사상 가장 깊은 자리에서 인간의 얼어붙은 영혼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유일한 하늘의 권능입니다.
5.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는 적극적인 사랑과 승리의 소망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는 사도 바울의 급진적인 선언은 타락한 인간의 생물학적 본능과 이기적인 자아의 흐름을 완전히 거스르는 영적 폭탄과 같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이처럼 인간의 육체적 본능이 철저히 꺾이고 거슬러 흐르는 처절한 순종의 자리에서,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신성한 초자연적 능력을 가장 찬란하게 드러냅니다. 나를 해한 원수의 굶주림과 목마름을 채워주는 적극적인 사랑은, 결코 그가 행한 악을 대수롭지 않게 묵인해 주거나 타협하는 값싼 온정주의나 비겁한 관용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에게 가해진 악이 나라는 존재를 오염시켜 또 다른 보복과 미움의 악으로 악순환되지 못하도록 온몸으로 저항하는, 복음이 가진 가장 강력하고도 공격적인 저항 방식입니다.
이때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결코 상대방의 명백한 잘못이나 범죄를 가볍게 여기며 은폐하는 도덕적 맹목주의가 아닙니다. 설교가 제시하는 복음의 논리는 오히려 세상의 법정보다 훨씬 더 엄격하고 엄위합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가해진 악을 똑같이 악으로 되갚아주지 않기 위해서는, 내면에서 화산처럼 치밀어 오르는 인간적인 분노와 두려움의 감정을 억지로 감추지 않고 십자가 제단 앞으로 그대로 가지고 나가 쏟아내야만 하며, 그 처절한 영적 탈진의 자리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선을 의지적으로 선택하는 뼈를 깎는 자기 부인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원수 사랑은 감정의 사치스러운 미화나 감상주의가 아니라,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 자신의 왜곡된 자아와 자존심을 쳐서 복종시키는 가장 깊고 치열한 영적 영성 훈련입니다.
장재형 목사가 본문을 통해 강력하게 선포하는 복음의 정수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악에게 지는 것은 단지 세상적인 싸움이나 경쟁에서 패배하여 손해를 보는 가시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악에게 패배하는 것은, 상대방이 내게 던진 미움과 보복의 불화살이 내 영혼을 전염시켜 내 안에 존재하던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과 평안을 완전히 무너뜨리도록 사탄에게 내 마음의 방어벽을 허락해 주는 일입니다. 반대로 성도가 선으로 악을 이겨낸다는 것은, 세상이 내게 어떠한 쓰레기와 증오를 던질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내 전인격과 반응을 완벽하게 통치하시도록 내 마음의 주권을 왕이신 주님께 온전히 양도하는 일입니다. 그 좁은 길 위에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위대한 용서와 진정한 화해의 기적이 있으며, 심령을 쪼개는 통회의 눈물과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작은 삶의 발걸음들이 존재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는다’는 신비로운 말씀의 의미 역시 이러한 맥락 속에서 명쾌하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내가 원수에게 베푼 예상치 못한 그리스도인의 선한 행동과 자비는, 도리어 상대방의 무뎌진 양심과 이성을 강력하게 흔들어 깨워 마침내 스스로의 죄를 부끄러워하고 하나님 앞에 고꾸라지게 만드는 성령의 뜨거운 불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끝까지 그 선한 사랑을 거부하고 완악하게 대적한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최종 말세의 날에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대 앞에서 그가 행한 악이 얼마나 흉악한지를 고스란히 드러나게 만드는 명백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이든 인류 역사의 최종적인 심판과 판단의 자리는 결코 우리 인간의 나약한 손에 쥐어져 있지 않습니다. 성도에게 허락된 유일한 몫은 세상이 부추기는 악의 추악한 방식에 가담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과 선함을 통해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의 실제와 복음의 가치를 묵묵히 증명해 내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은 결코 빠르거나 수월한 지름길이 아닙니다.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거룩한 성도일지라도 삶의 현장에서 수없이 넘어지고 낙심하며, 골방에서 분명히 원수를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기로 피눈물 흘리며 결단했던 마음이 눈앞에서 원수를 마주하는 순간 다시금 사정없이 요동치고 흔들리는 비참한 자기 자신을 매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진정한 회개는 나의 이러한 신앙적 실패와 연약함을 절망의 끝으로 몰고 가 영혼을 파산시키는 사탄의 정죄가 아닙니다. 참된 회개는 나의 불완전함보다 훨씬 더 크신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 보좌 앞으로 우리의 삶의 방향을 다시금 온전히 돌려놓는 거룩한 회복의 통로입니다. 오늘 내가 실천하는 단 한 번의 언어적 절제, 오늘 내가 내미는 단 한 번의 눈물 어린 용서, 그리고 원수를 향해 내미는 단 한 번의 따뜻한 손길이,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 속에서 마침내 거대한 화해와 부흥의 숲을 이루는 겨자씨 한 알의 신성한 씨앗이 될 것입니다.
결국 이 장엄한 설교가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가슴속에 아로새기는 복음의 소망은, 세상이 말하는 화려하고 소란스러운 승전보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철저히 낮아짐으로 시작하여 하늘의 사랑으로 세상을 분별하고, 모든 판단과 심판의 권리를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완전히 위탁하며, 마침내 쏟아지는 악을 선함으로 삼켜버리는 그리스도인의 조용하지만 세상을 뒤집는 영적인 능력입니다. 복음은 오늘도 우리에게 세상의 죄악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 승리하라고 외치지만, 주님이 가르쳐 주신 그 위대한 이김의 방식은 힘의 대결이 아니라 오직 낮아짐과 눈물의 사랑, 그리고 십자가의 선함뿐입니다.
오늘, 우리의 손에는 여전히 내려놓지 못한 채 상대를 겨누고 있는 증오와 자존심의 칼날이 쥐어져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주님의 음성을 따라, 내가 다시금 하나님의 선으로 먹이고 마셔야 할 내 인생의 목마른 원수는 과연 누구입니까?
빅토르 위고의 걸작 『레미제라블』을 관통하는 가장 강렬한 동력은 성난 민중의 바리케이드도, 자베르 경감의 집요한 추격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한 인간의 영혼이 ‘설명할 수 없는 호의’ 앞에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찰나의 순간입니다. 은식기를 훔쳐 달아나다 붙잡힌 장발장에게 미리엘 주교는 수갑 대신 나머지 은촛대까지 건네며 “이것은 당신의 영혼을 사기 위해 내가 지불하는 값”이라고 말합니다. 정죄와 처벌이 당연시되던 자리에 ‘선물’이 먼저 도착했을 때, 평생을 증오로 버티던 인간의 방어기제는 비로소 해체됩니다.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로마서 5장 묵상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듭니다. 왜 우리는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여전히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심판관 앞에서 떨고 있는가? 왜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삶의 작은 파고 앞에서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런 벌을 받는가”라며 자책하는가? 이 설교는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복음이란 단순한 종교적 이론이 아니라 죄책감의 감옥에 갇힌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무죄 방면 선언’**임을 심오하게 역설합니다.
거룩한 종전 선언: 추격전은 끝났고 평화는 시작되었다
로마서 5장 1절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화평’은 단지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거나 근심이 일시적으로 잦아든 심리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근본적인 **’영적 전쟁’**이 종식되었다는 공식적인 종전 선언에 가깝습니다.
“복음의 화평은 나의 상태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내려진 하늘의 판결문을 받아들이는 영적 순종의 결과다.”
세상이 말하는 평화는 언제나 조건부입니다. 내가 남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거나, 환경이 안정적일 때만 겨우 유지되는 위태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복음의 화평은 그 출발점부터가 다릅니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었기에 얻어낸 성취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먼저 관계를 회복시키셨기에 주어지는 **’선포된 평화’**입니다. 마치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전히 가슴속에 애굽 군대의 말발굽 소리를 환청처럼 듣고 있을지라도, 실제로 그들을 뒤쫓던 군대는 이미 수장되어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성경 묵상의 깊이는 내 감정의 기복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끝난 재판의 결과를 신뢰하는 데서 판가름 납니다.
연단이라는 용광로를 지나는 소망의 무게
그렇다면 화평을 얻은 성도의 삶에는 더 이상 고통의 파도가 일지 않는가?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눈물의 골짜기가 면제되는 것은 아니며, 믿음이 깊다고 해서 인생의 시련이 비켜가는 것도 아닙니다. 장재형 목사의 강해가 울림을 주는 이유는 고난을 성급하게 미화하여 덮어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히려 고통의 한복판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영적 역설’**을 예리하게 포착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는 바울의 고백은 고통 자체를 즐기라는 가학적인 명령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가 흘리는 눈물을 단 한 방울도 헛되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것을 소망을 빚어내는 재료로 사용하신다는 장엄한 약속입니다.
비워냄의 시간: 불속에 던져진 금이 불순물을 태워버리고 순도를 높이듯, 시련은 우리 안에 남아있는 지독한 자기 확신과 교만을 태워버립니다.
영혼의 무게: 소망은 가벼운 낙관주의자가 던지는 구호가 아닙니다. 그것은 수많은 환난을 통과하며 빚어진 ‘연단된 인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묵직한 존재의 힘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아픈 시간마저도 결국은 선(善)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분의 섭리 앞에 겸손히 무릎 꿇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복음은 고난을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과하며 우리를 **’더 큰 사람’**으로 빚어냅니다.
적대적 상태에서 먼저 도착한 파격적 사랑
로마서 5장의 신학적 정점은 8절에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인간의 사랑은 대개 ‘이유’가 필요합니다. 상대가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거나, 적어도 나의 호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마음을 엽니다.
하지만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정반대의 지점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강력히 상기시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스스로를 구원할 어떠한 힘도 의지도 없을 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을 배반하고 등을 돌린 그 순간에.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던 그때.
사랑은 우리가 회심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려 움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멀리 떠나 있던 그 밤에 먼저 출발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도덕적 성취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아무런 자격 없는 자를 향해 쏟아부으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모(思慕)’**의 사건입니다. 이 파격적인 사랑 앞에서 인간의 모든 방어기제는 무력화됩니다. 자기 의를 내세우던 바리새인도, 상처를 핑계로 마음을 닫았던 세리도, 결국은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계셨던 그 사랑 앞에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란 이 거대한 사랑을 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다 이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에 나를 온전히 맡기는 일입니다.
🍽️ 결론: 정죄의 문턱을 넘어 은혜의 잔치로
결국 로마서 5장은 우리를 차가운 신학 강의실이 아니라 따뜻한 **’은혜의 식탁’**으로 초대합니다. 이미 판결은 ‘무죄’로 끝났고, 화해는 성취되었으며, 심지어 우리의 상처와 환난조차 소망으로 인도하는 거룩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우리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여전히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법정 문 앞을 서성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미 차려진 은혜의 자리에 앉아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까?”
신앙의 성숙은 내가 더 강해지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얼마나 압도적인 사랑을 이미 받았는지를 깨닫고, 그 사랑 안에서 조금씩 더 깊이 안식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나를 정죄하는 과거의 목소리보다 나를 긍정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더 크게 들리는가?
환난의 폭풍 속에서도 그분이 나를 연단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미소 지을 수 있는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노력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도착한 **’화평’**을 믿음으로 수납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차려놓은 그 넉넉한 식탁에서 비로소 우리는 나 자신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사랑 때문에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됩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자신을 입증하는 피로한 전투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완벽한 사랑 안에서 평안을 배우는 **’거룩한 쉼’**입니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 복도에는 미켈란젤로가 남긴 ‘노예상(The Slaves)’ 연작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조각들은 이른바 ‘논 피니토(Non-finito)’, 즉 미완성 기법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형체는 대석석이라는 거친 물질 속에 반쯤 갇혀 있으며, 마치 그 무거운 돌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온몸을 비틀며 몸부림치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깎여 나가지 않은 육중한 돌덩이가 인물의 사지를 짓누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부에는 이미 완전한 생명력이 꿈틀거리고 있는 듯한 묘한 긴장감이 흐릅니다.
저는 이 조각상들 앞에 멈춰 서서 한참 동안 그 고통스러운 몸짓을 응시하다가, 문득 우리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마주한 것 같은 강렬한 전율을 경험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얻었으나(Already), 여전히 타락한 본성이라는 육체의 무거운 껍질을 다 벗어버리지 못한 채(Not Yet), 하늘의 거룩함을 향해 신음하며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저 돌 속에 갇힌 노예와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는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고뇌와 성화(Sanctification)의 긴 여정을 깊이 있는 신학적 통찰로 풀어냅니다. 그는 성령의 사역을 단순히 일시적인 초자연적 기적이나 감정적 신비 체험의 영역에 가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령의 역사를 거친 돌더미를 하나하나 깎아내어 그 안에 잠들어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마침내 밖으로 드러내는, 치열하면서도 본질적인 ‘조각의 과정’으로 정의합니다. 우리 삶에 불어오는 성령의 바람은 때로 지친 영혼을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미풍으로, 때로는 우리의 견고하고 모난 자아를 사정없이 깨뜨리는 강력한 망치질로 다가오며 우리를 빚어갑니다.
돌덩이 속의 천사를 발견하다: 육의 본성을 깨뜨리는 영적 투쟁
생전에 미켈란젤로는 **”나는 대리석 안에 갇혀 있는 천사를 보았고, 그 천사가 자유롭게 풀려날 때까지 돌을 깎아냈을 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장재형 목사가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 또한 이 위대한 예술적 영감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그는 죄로 말미암아 부패한 인간의 본성을 성경적 용어인 ‘육체의 일’이라 명명하며,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로막는 근본적이고도 거대한 장애물임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갈라디아서가 경고하는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그리고 분쟁과 시기 등은 단순한 윤리적 일탈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없이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려 했던 아담의 오래된 반역의 습관이며, 우리 영혼의 광채를 가로막고 있는 차갑고 두꺼운 돌덩어리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임재하신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견고한 자아의 돌덩어리에 마침내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 사이의 영적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수반하지만, 이는 생명이 살아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치열한 싸움을 결코 회피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사도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처절하게 탄식했던 바로 그 자리, 자신의 무능함을 뼈저리게 통감하는 그 지점에서 비로소 성령의 초자연적인 도우심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박약한 의지로는 절대로 끊어낼 수 없는 죄의 사슬을 푸는 유일한 열쇠이며, 타락한 본성을 하늘의 거룩한 성품으로 재창조하는 유일한 권능입니다.
진리의 닻을 내리고 은혜의 심연으로: 말씀과 성령의 동행
성령의 역사는 근거 없는 열광이나 일시적인 감정의 고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성령의 임재는 ‘기록된 말씀’이라는 견고한 암반 위에서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꽃을 피웁니다. 장재형 목사는 성령을 ‘진리의 영’으로 강조하며, 성령과 말씀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호보완적 관계를 역설합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밤바다를 항해하는 배에게 길을 안내하는 등대가 필수적이듯, 성령은 자칫 난해한 고대 문자로 남을 수 있는 성경의 텍스트에 신성한 조명의 빛을 비추십니다. 그리하여 그 말씀이 오늘 나에게 들려주시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음성(Rhema)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깊은 성경 묵상 가운데 글자 너머에 숨겨진 하나님의 타는 듯한 심정을 발견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은, 활자 사이사이에 역사하시며 우리의 지각을 깨우시는 성령의 조명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를 이 거친 세상에 고아처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십자가 사랑이 단지 2천 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일어난 박제된 역사적 사건에 머물지 않게 하십니다. 오히려 그 사랑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오늘 나의 삶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현재적 복음의 능력으로 다가오게 하십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이 성령을 가리켜 “우리 마음속에 신앙의 비밀을 여는 열쇠”라고 묘사했듯이, 장재형 목사 또한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그 어떤 인간도 구속의 은혜를 삶으로 번역해낼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자신의 추악한 죄를 자각하고, 그 서슬 퍼런 진리 앞에 순종하여 삶의 항로를 수정하게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방언이나 신유보다 더 확실하고 위대한 성령 충만의 증거일 것입니다.
개별적 조각을 넘어 사랑으로 완공되는 성전: 공동체적 성화
미켈란젤로의 조각이 한 예술가의 천재적인 영혼을 담은 단독적인 작품이라면, 성령께서 빚어내시는 궁극적인 걸작은 성도 개개인이 연결되어 이루는 ‘공동체’라는 거대한 유기적 성전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성령의 사역이 단순히 개인의 내면적 평안이나 수양의 차원에 머무르는 것을 경계합니다.
성령은 제각기 흩어진 이기적인 마음들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묶어 거룩한 연합을 이루게 하는 ‘천상의 접착제’와 같습니다. 오순절 다락방에 임했던 불의 혀는 각기 다른 언어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의 비전, 하나의 사랑으로 녹여내어 예루살렘 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과 같은 성령의 열매는 결코 혼자 골방에 앉아 도를 닦는다고 해서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완전한 사람들과 부대끼는 관계의 현장에서, 나를 아프게 하는 지체를 용서하고, 도저히 내어주기 힘든 것을 내어주는 처절한 사랑의 연습을 통해 서서히 영글어갑니다. 장재형 목사가 주창하는 ‘성령의 전으로서의 교회’는 건물의 웅장함이 아니라, 지체들이 서로를 향해 흘려보내는 희생적인 섬김의 깊이로 그 진가를 증명합니다. 세상의 차가운 냉소 속에서도 교회가 여전히 인류의 소망이 되는 이유는, 그 공동체 안에 성령이 주시는 따스한 위로와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은혜의 강물이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공사 중(Under Construction)인 존재들입니다. 구원은 이미 받았으나, 아직 완전한 영화(Glorification)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 거룩한 긴장 상태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미켈란젤로는 죽음 앞에 자신의 조각들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떠났을지 모르나, 우리 안에 이 착한 일을 시작하신 성령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성령께서는 우리의 모난 성품을 정으로 다듬으시고, 마음의 굳은 살을 제하시며, 마침내 흠도 점도 없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온전한 걸작으로 우리를 빚어가고 계십니다. 그 신실하신 창조주의 손길에 나의 전 존재를 온전히 내어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한 걸음씩 내디뎌야 할 영광스러운 성화의 길입니다.
로마서 1장 23~26절은 인류의 타락을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그릇된 대체’의 관점에서 진단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발하는 비극은 인간이 하나님을 잃고 공허하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빈자리를 다른 무언가로 반드시 채우려 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장재형(David Jang, 올리벳대학교 설립) 목사가 이 본문을 통해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핵심도 이와 같습니다. 인간은 본래 예배하는 존재이며, 예배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을 바꿔버리는 데서 모든 문제가 시작됩니다. 불경건이 우상숭배로 이어지고, 그 우상숭배가 결국 윤리적 감각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우상이 고대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날 더 정교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일상에 침투해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교환’된 영광과 현대판 우상숭배
장재형 목사는 로마서 1장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교환’이라는 동사에 주목합니다. 바울은 인간의 타락을 우발적인 실수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피조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은’ 사건으로 규정합니다. 우상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예배의 방향을 뒤틀어 인간의 영혼을 기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지고의 가치로 삼느냐에 따라 형성됩니다. 현대 문명은 나무나 돌로 신상을 만드는 대신, 욕망을 상품화하고 자아를 숭배의 제단에 올립니다. 성공, 권력, 재력, 심지어 ‘자신의 옳음’에 대한 확신조차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가 말하는 우상은 눈에 보이는 형상을 넘어 마음 깊은 곳의 가치 체계에 뿌리내린 존재론적 방향 상실을 의미합니다.
‘내버려 두심’: 심판과 비애 사이의 역설
바울이 언급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려 두셨다”는 선언은 섬뜩한 심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는 이를 차가운 방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비애로 해석합니다. 이는 강제로 굴복시키지 않는 하나님의 인격적 사랑이 겪는 고통스러운 거리두기입니다. 사랑은 대상을 도구화하거나 기계적으로 조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끝내 하나님을 거부할 때, 하나님은 그 선택의 결과를 스스로 감당하도록 허용하십니다. 이 ‘내버려 두심’은 반역의 결과인 동시에, 회개의 기회를 남겨두시는 하나님의 오래 참음이자 구원을 향한 지연된 은혜의 시간입니다.
상실된 인간성과 존재의 혼탁함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열매는 인간성의 상실입니다.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다”는 표현은 질서 없는 욕망이 인간을 지배하게 된 상태를 뜻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도덕적 잣대가 아닌 ‘존엄의 파괴’로 읽어냅니다. 중심을 잃은 인간에게 관계는 거래가 되고 타인은 소유물이 됩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더러움’은 존재의 방향이 비틀린 결과로 나타나는 혼탁함입니다. 다만, 장재형 목사는 이 본문을 타인을 정죄하거나 특정 집단을 혐오하는 도구로 삼는 것을 경계합니다. 복음의 칼날은 언제나 ‘우상으로 기우는 내 마음’을 향해야 하며, 본질적인 질문은 “누가 더 죄인인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하나님 자리에 놓았는가”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 중심의 신앙과 ‘겸손한 하강’
개혁교회(Reformed Church) 전통을 잇는 장재형 목사는 예배의 중심을 다시 ‘말씀의 하나님’께 돌려놓을 것을 촉구합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통제 아래 두려는 시각적 우상화를 경계하고, ‘들음’을 통해 하나님 말씀 앞에 서는 수동적 자리를 강조합니다. 삭개오에게 “내려오라”고 하신 예수님의 부르심처럼, 구원은 인간의 상승이 아니라 겸손한 하강에서 시작됩니다. 우상을 빚어내던 손을 멈추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회복의 출발점입니다.
깨진 질서와 ‘브레이크 고장 난 자동차’
진리를 알면서도 예배하지 않는 것은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사랑의 파열입니다. 조물주와 피조물의 자리가 뒤섞이면 가치의 위계가 무너지고, 모든 것이 절대화되거나 반대로 모든 것이 허무해지는 극단에 이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브레이크 고장 난 자동차”에 비유합니다. 죄에 무감각해진 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질주하는 인간의 실존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어둠의 한복판에서 “주는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라고 외칩니다. 이는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을 놓지 않으려는 신앙의 몸부림이자, 회복을 향한 소망의 선언입니다.
예술로 보는 우상숭배: 니콜라 푸생의 ‘황금 송아지’
니콜라 푸생의 작품 ‘황금 송아지 숭배’는 우상숭배가 인간의 심리와 대중의 광기 속에서 어떻게 폭발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신비를 기다리는 인내 대신 눈에 보이는 확실성을 선택합니다. 우상은 종종 ‘금’처럼 화려하고 대중의 환호처럼 달콤하지만, 결국 공동체를 파멸로 이끕니다. 장재형 목사는 우상이 대개 악의 탈을 쓰지 않고 안전, 성공, 종교적 열심의 모습으로 다가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라”고 유혹한다는 점을 경고합니다.
정죄의 칼이 아닌 회복의 거울로
로마서 1장의 메시지는 타인을 정죄하는 무기가 아니라 나를 비추는 거울이어야 합니다. 회개는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전면적으로 수정하는 결단입니다. 예배의 회복은 주일의 형식을 넘어 삶의 전 영역을 하나님께 재정렬하는 사건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가 진노에서 시작해 복음으로 향하는 이유는 인간의 어둠이 깊을수록 하나님의 구원이 선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물주를 조물주로 모실 때 비로소 인간은 인간의 자리에서 존엄해지고 공동체는 생명력을 얻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날카로운 비판이 아니라 더 깊은 회개이며, 우상을 비웃기 전에 우상을 만드는 우리의 손을 돌아보는 겸손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씩 정성스럽게 씻겨 주신 뒤 다시 자리로 돌아와 던지신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라는 질문은 단순한 확인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자들의 마음 깊은 곳을 흔드는 영적 일깨움의 초대였다. 장재형(장다윗) 목사는 이 장면을 통해, 본래 섬김을 받으셔야 마땅한 주님이 종의 자리까지 스스로 내려가 제자들의 먼지 묻은 발을 씻기신 사건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의 구조와 얼마나 다른 차원에 놓여 있는지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말한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는 말씀은 도덕적 권면을 넘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다시 짜는 선언이다.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 앞에 무릎을 굽히신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위대함’의 기준을 송두리째 뒤엎는다. 높아지려 하면 낮아지고, 낮아질 때 참된 높임을 받는 하나님 나라의 역설이 그 장면 속에 응축되어 있다. 장재형(올리벳대학교 설립) 목사는 발 씻김을 통해, 세상이 말하는 ‘성공’이 아니라 자신을 비워 타인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는 것이 참된 영광의 길임을 강조한다. 주님의 손에는 왕홀도 금관도 없었다. 그분이 드신 것은 평범한 대야와 수건이었고, 그 손이 닿은 곳은 제자들의 가장 낮고 가장 지저분한 자리였다. 그 낮은 자리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숨어 있다.
요한복음 13장의 이 사건은 오래도록 미술 작품 속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어 왔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빵과 잔을 드시는 예수를 중심에 두고 제자들의 움직임과 긴장감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그 그림에는 발을 씻기는 장면이 보이지 않지만,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점에서 깊이 연결되어 있다. 성찬을 베푸시는 주님의 손과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주님의 손은 동일하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가 성만찬의 은혜는 사모하면서, 정작 발 씻김의 낮아짐은 외면하는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성찬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작은 이웃의 발 앞에 무릎 꿇지 못한다면 복음의 반쪽만 붙든 것에 불과하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의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라는 말씀을 요한복음의 사건과 연결하며, 그리스도의 법은 결국 ‘사랑의 법’이라고 강조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은 복잡한 지식을 습득하는 데 있지 않고, 서로의 짐을 함께 지는 삶을 선택하는 데 있다. 약함을 덮고 상처를 감싸며 실패한 이웃 곁에서 함께 울어 주는 행동 속에서 사랑의 법은 현실이 된다. 예수님의 발 씻김은 사랑이 추상적 감정이 아니라 실제로 몸을 낮추고 손을 더럽히는 행동임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시범이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감정적으로만 이해하지만, 장재형 목사는 예수님의 행위를 통해 사랑을 ‘짐을 함께 지는 방식’으로 재정의한다. 사랑은 “너의 짐이 나의 짐”이라고 말하는 선택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성숙은 화려한 은사나 많은 활동이 아니라, 타인의 무게 아래로 스스로 들어가 받쳐 줄 수 있는지로 드러난다. 주님의 손이 제자들의 발에 닿았던 것처럼 우리의 손도 남들이 숨기고 싶어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한다.
예수께서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하신 말씀도 장재형 목사는 도덕적 완벽주의로 오해되지 않도록 설명한다. 하나님의 온전함은 사랑의 온전함이다. 원수까지도 포용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함이 그 온전함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온전함도 차가운 완벽함이 아니라 따뜻한 사랑이다. 이 온전함으로 인도하는 길이 “서로 짐을 지라”는 초청이며, 예수께서 몸으로 보여주신 발 씻김의 자리다.
사순절은 이 길을 다시 배우는 시기다. 장재형 목사는 사순절을 단순히 고난을 떠올리는 감상적 시간이 아니라, 잃어버린 섬김의 자세를 회복하는 영적 훈련의 때로 본다. 고난의 절정은 십자가이고, 십자가의 중심은 비움과 낮아짐이다. 예수께서 죽기까지 자기를 비우셨듯 우리도 자기중심성을 내려놓지 않고는 십자가를 말할 수 없다. 십자가 없는 고난의 말은 감정의 연출일 뿐이며, 낮아짐 없는 섬김은 결국 자기 과시로 끝난다.
요한복음은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는 말로 마지막 만찬을 시작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도 ‘누가 더 큰가’를 놓고 다투고 있었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과 끝까지 높아지려 하는 제자들의 대비는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도 반복된다. 교회와 가정, 공동체의 갈등 이면에는 섬기기보다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깔려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뿌리 깊은 죄성이 오직 십자가에서만 해결된다고 말한다.
십자가의 길은 추상적 상징이 아니라 ‘끝까지 사랑하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고, 용서하고, 다시 무릎 꿇는 삶이다. 우회로는 없다. 서로의 발을 씻으며 서로의 짐을 지는 것뿐이다. 우리는 이미 주님의 큰 사랑을 경험했기에 더 이상 핑계할 수 없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손을 내미셨던 경험이 있다면 이제 우리도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는 섬김이 ‘행동’ 이전에 ‘존재의 방향성’임을 강조한다. 예수님의 섬김은 일회적 행동이 아니라 그분의 인격에서 흘러나온 삶의 방식이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는 말씀은 아는 신앙과 행하는 신앙의 차이를 보여준다. 오늘날 교회가 이 말씀 앞에서 스스로를 돌아볼 용기가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발 씻김 사건은 수치와 상처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발’—가장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을 숨기고 싶어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자리까지 오셔서 씻기신다. 주님께 자신의 발을 내어 맡겨 본 사람이 타인의 발도 씻길 수 있다. 그러므로 섬김의 영성은 반드시 회개와 치유의 경험과 함께 간다.
현대 사회는 경쟁과 서열에 익숙하며, 이러한 기준은 교회 안에도 스며들어 섬김이라는 말을 빌려 자기 확장을 추구하게 만들기도 한다. 장재형 목사는 다시 ‘발 앞에 무릎 꿇는 공동체’로 돌아가야 한다고 촉구한다. 직분은 특권이 아니라 대야와 수건을 드는 책임이고, 리더십은 먼저 무릎 꿇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다. 사순절은 이 질문 앞에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다.
“내가 너희에게 본을 보였노라”는 말씀에서 본은 단순한 모범이 아니라 삶의 패턴이다. 그리스도인은 작은 그리스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그 구체적 형태가 서로의 발을 씻기는 삶이다. 용서하기 어려운 이를 용서하고, 이해되지 않는 이를 위해 기도하며, 소외된 이웃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일상 속 발 씻김이다.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얼굴이 흔들리는 순간처럼,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는 말씀 앞에서 우리도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지금 누구의 발을 씻고 있는가? 혹은 누구의 발 앞에서는 끝까지 무릎 꿇지 못하고 있는가? 이 질문이 우리를 복음 앞에 세운다.
십자가의 길은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작은 순종의 반복이다. 시간 일부를 내어 연약한 이웃을 찾아가고, 자존심을 내려놓고 먼저 사과하며,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섬기는 행위다. 이 길을 따라갈 때 부활의 영광도 함께 주어진다. 낮아지고 섬기는 길을 온전히 걷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영광이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는 요한복음의 약속은 지금도 유효하다. 아는 데 머물러서는 복을 누리지 못한다. 행함으로 나아갈 때 복음의 생명력이 숨 쉬기 시작한다. 장재형 목사의 발 씻김 설교는 지식과 실천 사이의 거리를 좁히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오늘도 주님은 수건을 두르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우리의 초라한 발 앞에 무릎 꿇어 물을 붓고 손을 내미신다. 그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제 우리도 누군가의 발 앞에 무릎 꿇는 삶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는 길이며,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길이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오늘도 조용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우리에게 동일한 말씀을 들려준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의 대미를 여는 “종말로”라는 접속사는 단순한 결론의 신호가 아니라, 지금까지 선포된 은혜의 교리를 삶의 최전선으로 호출하는 전투명령에 가깝다. 장재형(장다윗) 목사는 이 전환을, 교리를 암송하는 지성의 단계에서 그 능력을 증명하는 실존의 단계로 옮겨 가라는 요청으로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에베소서 6장은 개인의 윤리와 공동체의 평화를 넘어, 보이는 현실의 이면에서 작동하는 적대적 영들의 질서를 폭로하는 계시이며, 그 구조를 분별하지 못한 채 싸움에 임하는 것은 시야를 가린 채 전장으로 나서는 것과 같다. 복음은 우리의 삶을 평온한 항해로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 새로 배치된 존재에게는 불가피하게 시작되는 대결구도가 있다. 이 전쟁은 혈과 육의 차원을 넘어, 정사와 권세,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실존적 씨름이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에 신앙의 관성으로 흐리게 된 초점, 곧 영적 세계에 대한 인식론적 맹목이 패배의 가장 큰 원인임을 강조한다. 적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그의 영향력은 약화된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장면들, 교회의 역사, 그리고 오늘의 목회 현장까지 관통해 온 경험칙은 분명하다. 폭로는 권세를 무력화한다. 영적 전쟁은 무엇보다 먼저 현실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바울이 제시하는 첫 처방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라”는 요청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명령을 두 축으로 설명한다. ‘주 안에서’는 우리의 존재론적 좌표를 재확인하는 선언이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는 연약한 피조물이 그리스도의 승리 안으로 피난하는 신앙의 결단이다. 동시에 ‘그의 힘의 능력’에 의존하라는 요구는 자기능력과 결별하라는 초대다. 기독교의 역설은 여기서 더욱 선명해진다. 약함의 자리에서 능력이 흘러나온다. 자아의 힘을 비우고 주의 능력으로 채워질 때, 신자는 수동적 회피에서 능동적 대치로 전환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전환을 “정체성의 재배치”라고 부른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의 신분은 이미 악한 영들 위에 승리하신 주의 통치에 연합되어 있고, 그 연합이 전투의 지위를 규정한다. 승리는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위치의 결과다.
그러나 위치만으로 전투가 끝나지는 않는다. 바울은 곧바로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한다. 여기서 ‘궤계’(methodeia)는 무질서한 폭력이 아니라 정밀한 심리전과 구조적 기만을 가리킨다. 사탄은 대놓고 덮치는 폭군이기보다 가장 취약한 균열을 찾아 파고드는 전략가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지점을 현대의 문화·이데올로기·서사들에 대한 분별과 연결한다. ‘공중 권세’란 단지 허공의 막연한 세력이 아니라, 시대의 공기처럼 우리의 사고와 감각을 형성하는 보이지 않는 지배적 담론들을 포함한다. 신자는 이 대기권 아래서 호흡하므로, 무엇을 들이마시고 내쉬는지 분별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방어체계는 단순한 장비 목록이 아니라, 새로운 생태로의 이식이다. 진리의 허리띠는 세계에 대한 최종 해석권을 말씀에 양도하는 결단이며, 의의 흉배는 복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가 죄책과 정죄의 화살을 가슴에서 튕겨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평안의 복음의 신은 갈등의 현장에 발을 들일 때마다 복음이 가져올 화해의 미래를 선취하는 발걸음이고, 믿음의 방패는 보이지 않는 결과를 보이듯 확신하는 수직적 신뢰로서 불화살을 소진시키는 장치다. 구원의 투구는 실패와 유혹의 소음 속에서도 ‘이미-아직’의 구원의 서사를 생각으로 재생하는 기억의 갑옷이며,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은 수동적 방어를 넘어 왜곡된 사고와 거짓을 절개하는 유일한 공격 무기다. 여기에 바울이 덧붙인 모든 기도와 간구는 전신갑주의 작동을 가능하게 하는 영적 호흡이다. 장재형 목사는 기도를 교회의 ‘전술통신’으로 설명한다. 기도가 끊기면 부대는 각개격파 된다. 기도가 연결되면 산개된 성도들이 동일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재결집한다.
전신갑주의 핵심은 조합이 아니라 통전성이다. 어느 한 요소만을 과도하게 부각시키면 전체의 균형이 무너진다. 진리 없이 열심만 강조될 때 광신이 생기고, 의를 내세우되 복음의 평안을 잃으면 공동체는 비판주의에 갇힌다. 믿음의 언어가 구원의 확증에서 유리되면 번영신학과 숙명론 사이에서 흔들린다. 말씀의 검을 휘두르되 기도와 눈물이 없다면, 지식은 교만을 낳을 뿐 사랑으로 역사하지 못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균형을 유지하는 길이 바로 ‘주 안에서’라는 첫 문장에 다시 귀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전신갑주란 포괄적 신앙 습관의 총합이다. 주일 예배와 성례, 매일의 묵상과 암송, 공동체적 권면과 회개, 실천적 사랑과 공의, 침묵과 금식과 자비의 훈련이 어우러질 때, 갑옷은 몸에 맞춰진다. 신자가 의복처럼 매일 입고 벗는 삶의 형태가 된다.
에베소서 6장은 우리의 적을 “혈과 육”이 아니라고 못을 박는다. 이 선언은 갈등의 상대를 인간에서 분리해 냄으로써, 미움의 악순환을 끊는다. 장재형 목사는 고난의 현장에서 사람을 원수로 삼지 않는 태도가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용기를 증명한다고 말한다. 상대가 아니라 배후의 거짓을 겨냥할 때, 싸움은 파괴가 아니라 구원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교회의 영적 전쟁은 사람을 무너뜨리는 전투가 아니라, 사람을 자유케 하는 해방전이다. 복음의 검은 살상을 위한 칼이 아니라, 속박을 끊는 칼이다. 그 칼끝은 언제나 회개와 화해를 향한다. 죄를 미워하되 죄인을 끌어안는 지점에서, 그리스도의 몸은 어둠의 권세를 무력화한다.
사탄의 제국이 성립한 기원에 대해 장재형 목사는 성경의 큰 서사를 따라 교만의 반역을 지목한다. 창조주와 같이 되려는 피조물의 자기 고양, 곧 하강 대신 상승을 지향한 욕망은 타락의 원형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케노시스가 정반대로 응답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우고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높임을 받았다. 상승의 폭력이 아니라 하강의 사랑이 승리를 가져왔다. 십자가는 어둠의 권세를 무력화한 하나님의 전략이다. 그 승리는 부활과 승천에서 보편화되었고, 에베소서 1장과 3장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정사와 권세 위에 높아지셨으며, 교회를 통해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가 드러난다고 증언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을 교회의 존재이유와 직결한다. 교회는 세상 속의 안전지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승리를 현장화하는 증거공동체다. 설교, 성례, 선교, 섬김, 정의의 실천은 모두 승리의 전개이며, 예배는 전장 한복판에서 울리는 승전가다.
그 승리의 권세는 신자에게 위임되었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를 해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선언하시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신 장면은, 교회의 사명이 방어를 넘어 해방이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장재형 목사는 ‘예수’라는 이름을 주술적 구호가 아니라 통치의 좌소로 설명한다. 신자는 아들의 영을 받은 양자이기에, 상속자로서 복음의 권세를 합법적으로 집행한다. 그러나 권세의 사용은 성품을 전제한다. 케노시스를 따르는 겸손과 사랑, 성령의 열매로 가다듬어진 인격이 없을 때, 권세의 언어는 이름만 남은 빈 껍데기가 된다. 그래서 그는 영적 권세와 영적 성품이 맞물리는 지점, 곧 십자가 아래서 자신을 비우고 이웃을 살리는 자리에 전신갑주가 가장 밝게 빛난다고 강조한다.
현대의 영적 전장은 복잡하다. 디지털 미디어의 과잉 자극, 정체성과 욕망을 재구성하는 알고리듬, 분노를 증폭하는 정치적 담론, 쾌락과 성과를 숭배하는 경제 질서, 외로움과 냉소를 양산하는 생활 리듬이 한 몸처럼 얽혀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구조적 악과의 싸움을 개인 경건의 강화만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그는 말씀과 기도가 사회적 윤리와 공적 선행으로 확장될 때, 교회가 ‘공중 권세’의 대기질을 바꾼다고 본다. 가난한 자를 돌보고, 약자를 보듬고, 정직과 정의를 실천하며, 진실한 소통과 화해를 일상에서 구현할 때, 복음의 평안의 신이 남긴 흔적이 도시의 골목과 가정과 직장에서 냄새처럼 스민다. 전신갑주는 예배당 안에서만 빛나지 않는다. 직업윤리, 소비습관, 관계맺음, 언어, 미디어 사용, 시간관리의 미시적 결에서 그 실체가 드러난다. 신자는 하루를 설계할 때 복음의 호흡으로 리듬을 맞추고, 하루를 마감할 때 말씀으로 사고를 정리하며, 갈등의 순간마다 기도로 반응을 바꾼다. 이것이 생활의학으로서의 전신갑주다.
실천적 제언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무엇보다 정체성의 루틴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아침마다 복음의 핵심 문장을 소리 내어 고백하고, 구원의 투구로 생각을 보호하기 위해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는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진다. 낮에는 진리의 허리띠를 위해 ‘사실 확인—의도 점검—말씀 대조’의 3단계 검증을 습관화하고, 관계 충돌 앞에서는 평안의 복음이 제시하는 화해의 미래를 상상하며 말을 선택한다. 유혹과 불안의 불화살이 날아오를 때는 믿음의 방패로 하나님의 성품을 상기하는 짧은 기도로 응수하고, 저녁에는 말씀의 검으로 하루의 왜곡과 과장을 절개하는 회개와 감사의 묵상을 실천한다. 여기에 공동체의 동행이 더해져야 한다. 서로의 갑옷을 점검하고, 균열을 발견하면 사랑으로 메우며, 시험에 든 지체에게는 말씀과 눈물로 동행한다. 장재형 목사는 기도회를 ‘전술회의’로, 소그룹을 ‘재정비소’로 비유한다. 전쟁은 개인전이 아니라 연대전이다.
결국 에베소서 6장 강해에서 장재형 목사가 독자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단순명료하다. 현실을 영적으로 다시 읽고, 그리스도의 승리 안에 자신을 재배치하며, 하나님이 주신 전신갑주를 삶의 양식으로 입으라는 요청이다. 적의 궤계는 정교하지만 승리는 이미 선포되었다. 교만으로 올라가려는 영의 전략은 겸손으로 내려오신 주의 사랑 앞에서 좌초되었다. 이제 교회는 그 승리를 복음으로 현장화해야 한다.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거짓을 겨냥하며, 무너뜨리기보다 살려내는 방식으로 싸워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름받은 성도의 품격이다. “종말로”라는 바울의 마지막 접속사는 오늘의 첫 명령이 된다. 어둠을 과대평가하지 말고, 빛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진리와 의, 평안과 믿음, 구원과 말씀, 그리고 모든 기도로 호흡하는 삶을 통해, 신자는 공중의 대기질을 바꾸는 작은 지속을 시작할 수 있다. 전신갑주는 주일의 의례가 아니라 월요일의 습관이며, 전쟁의 피로를 덜어 주는 무게 중심이다. 장재형 목사가 제시하는 이 통전적 영성은, 불안과 분열이 일상이 된 시대 속에서 복음이 어떻게 실제의 힘으로 작동하는지를 보여 준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고, 그 이름으로 사랑하며, 그 이름으로 해방을 선포할 때, 정사와 권세는 그 발아래 복종할 것이다. 승리는 실제이며, 우리의 일상 속에서 펼쳐져야 할 오늘의 과업이다.
로마서 13장 13–14절은 한 인간의 내면과 교회의 역사를 동시에 뒤흔든 말씀으로 기억된다. 성 어거스틴이 《고백록》에서 들려준 장면은 유명하다. 정원에 앉아 괴로움 속에 있던 그는 “톨레 레게(tolle lege), 집어서 읽어라”라는 아이의 노랫소리를 듣고 성경을 펼쳤고, 눈앞에 마주한 구절이 바로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였다. 그 순간 그는 과거의 방황을 내려놓고 삶의 방향을 돌렸다. 장재형목사는 이 이야기를 단지 옛 성인의 일화로 끝내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명령을 신자의 정체성을 바꾸는 실제적 힘으로 해석하며, 은혜가 사람을 어떻게 새롭게 이끄는지를 오늘의 언어로 차분히 설명한다.
옷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신분을 드러내는 표지다. 의사가운을 입으면 몸가짐이 달라지듯,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은 자연히 그분의 마음과 걸음에 맞추어 살아가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진정한 은혜를 입은 사람은 세마포를 더럽히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자신을 단정히 지킨다”고 말한다. 억지로 끌고 가는 금욕이 아니라, 은혜의 끌림에 응답하는 방향성의 변화가 핵심이라는 뜻이다. 그 변화는 일회성 각성이 아니라 삶 전체를 부드럽게 재배치하는 힘으로 나타난다. 예배에서 받은 감동이 월요일의 선택으로 번역되고, 작은 선택이 쌓여 인격의 윤곽을 새긴다. 은혜는 번개처럼 임할 수 있으나, 성품의 변화는 보슬비처럼 스며든다.
바울이 이 권면을 보낸 시대의 풍경은 오늘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로마 제국은 강력했지만 도덕은 해이했고, 고린도는 번영했지만 방종이 일상이었다. 바울은 그 시대의 죄를 세 쌍으로 요약한다. 방탕과 술 취함은 밤낮을 가리지 않는 쾌락의 연쇄를, 음란과 호색은 양심이 마비돼 부끄러움을 잃은 성적 타락을, 다툼과 시기는 관계를 허무는 외적 폭력과 내적 부패를 가리킨다. 장재형목사는 이 목록을 오늘의 장면으로 옮겨 적는다. 무한 스크롤과 과도한 자극, 댓글 전쟁과 비교의 문화, 상업화된 욕망의 공급망은 로마의 광장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라”는 요청은 더 절실해졌다. 여기서 ‘낮’은 모든 것이 드러나는 하나님 앞의 공간을 뜻한다. 빛의 자녀는 숨김 없이 산다. 드러냄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삶은 간결해지고, 간결함이 지속되기에 공동체는 신뢰를 회복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씀이 “하지 말라”로만 채워진 금욕의 규칙집은 아니다. 바울의 결론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다. 비움보다 채움이 먼저라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갈라디아서 5장을 함께 펼쳐 보인다. 육체의 일은 의지력만으로는 끊기 어렵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같은 성령의 열매는 노력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머무를 때 ‘맺히는’ 결과다. 그는 회개를 “마음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라 부른다. 행동으로 드러나기 전에 생각과 욕망이 손을 맞잡기 마련인데, 말씀과 기도로 그 손을 먼저 붙잡아 끊어내는 일이 회개라는 것이다. 그래서 장재형목사의 강해에는 매일의 리듬이 따라붙는다. 짧고 잦은 기도로 욕망의 흐름에 브레이크를 걸고, 말씀 묵상으로 생각의 프레임을 바꾸며, 공동체의 상호 권면과 돌봄 속에서 드러난 죄를 즉시 고백하고 끊어내는 습관을 쌓으라고 권한다. 이렇게 준비된 마음에서는 죄의 계획이 자라기 어렵다.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이 바로 그 지점을 겨냥한다. 도모는 계획이고, 계획은 시스템이다. 거룩도 시스템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공동체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 장재형목사는 교회를 ‘대조적 공동체’로 묘사한다. 세상과 등을 지는 도피처가 아니라, 세상 가운데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함으로 복음을 비추는 등대라는 뜻이다. 소비와 효율이 전부인 질서 속에서 나눔과 안식을 회복하고, 경쟁과 비교가 일상인 공간에서 축복과 격려를 일상의 언어로 만들며, 실패를 숨기는 문화에서 회개와 용서를 숨기지 않는 질서를 세우는 공동체. 대조가 선명해질수록 복음의 향기는 진해진다. 그는 에베소서 6장의 전신갑주와 로마서의 ‘빛의 갑옷’을 나란히 읽으며, 기도와 말씀, 의의 실천과 평안의 복음이 공동체의 표준 복장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옷은 매일 바꿔 입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결단도 매일 새로워져야 한다. 어제의 결단은 오늘의 방심을 막아 주지 못한다. 오늘의 기도만이 오늘의 유혹을 이긴다.
디지털 시대의 특수성도 놓칠 수 없다. 알림은 우리의 취약 지점을 정확히 찌르고, 알고리즘은 욕망의 약한 연결고리를 학습한다. 장재형목사는 ‘영적 사분면’이라는 간단한 설계를 제안한다. 무엇을 끊을지(디지털 금식, 알림 비우기, 취침 전 스크린 오프), 무엇을 채울지(시편 낭독, 말씀 오디오, 짧은 감사 기도), 누구와 함께 갈지(멘토, 동행자, 소그룹)를 미리 정하라는 것이다. 회개는 결심이 아니라 설계라는 말이 여기서 힘을 얻는다. 설계가 바뀌면 생활 패턴이 바뀌고, 패턴이 바뀌면 욕망의 흐름이 달라진다. 흐름이 달라지면 죄의 씨앗은 자라지 못한다. 이렇게 시스템으로 구현된 거룩은 꾸준하고 현실적이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책임의 감각도 자라난다. 장재형목사는 그리스도로 옷 입은 교회가 공적 선을 증언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터에서 정직을 선택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타인의 성공을 축하하는 문화가 강단의 설교와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한다. 다툼과 시기가 지배하는 자리에서 화해와 격려를 실천하는 소수의 용기는 놀라운 전염력을 갖는다. 초대교회가 혹독한 핍박 속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았던 이유는, 개인의 영성이 공동체의 돌봄과 만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신약의 자주 쓰이는 단어 ‘서로’를 강조한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납하며, 서로 짐을 지는 삶이야말로 세상을 향한 가장 강력한 변증이라는 것이다. 거룩은 혼자서 완성되지 않는다. 함께 살 때 증명된다.
넘어짐은 누구에게나 있다. 중요한 것은 넘어짐의 빈도가 아니라 돌아섬의 속도다. 장재형목사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한다. 옷이 더러워졌다면 곧바로 갈아입으면 된다. 회개에는 유효기간이 없고, 성령은 우리를 다시 일으키시는 분이다. 죄책감에 매여 주저앉을 이유가 없다. 신자는 매일 새 옷을 입는다. 그 옷의 이름이 곧 예수 그리스도다. 이 단순한 진리가 일상의 리듬이 될 때, 빛의 자녀들은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다.
결국 이 본문은 ‘하지 말라’의 목록으로 시작해 ‘입으라’는 초대로 완성된다. 비움만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채움이 있을 때 비움은 의미를 얻는다. 장재형목사의 강해는 이 균형을 삶으로 이끈다. 말씀은 욕망의 근육을 재구성하고, 기도는 하루의 리듬을 조율하며, 사랑의 섬김은 삶의 나침반을 북쪽으로 고정한다. 이렇게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이 모이면 대조적 공동체가 되고, 그 공동체는 세상 한복판에서 복음의 실재를 비춘다. 어거스틴에게 들렸던 “톨레 레게”의 초청은 오늘도 유효하다. 성령께서 귀를 열어 주실 때, 말씀은 다시 들리고 우리는 다시 일어선다. 방탕과 음란, 다툼과 시기의 낡은 옷을 벗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길. 이것이야말로 오늘의 신자에게 주어진 가장 현실적이고도 영광스러운 부르심이며, 그 부르심을 맑은 목소리로 안내하는 설교 가운데 장재형목사의 로마서 강해는 유난히 선명하다. 은혜는 사람을 새롭게 하고, 회개는 길을 열며, 공동체는 그 길을 함께 걷게 한다. 이 세 겹의 끈이 하나로 묶일 때, 우리는 빛의 갑옷을 입은 자로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변해 간다.
À l’approche de Noël, il nous vient spontanément à l’esprit de repenser à la signification de la venue de Jésus sur cette terre. Ce n’est pas seulement un moment de festivité de fin d’année, d’illuminations ou de cantiques entonnés à travers le monde. Pour les chrétiens, Noël est l’une des célébrations les plus essentielles, car c’est précisément en cette période que la question fondamentale – « Pourquoi Dieu a-t-Il envoyé Son Fils sur cette terre ? Pourquoi Jésus-Christ devait-Il venir parmi nous ? » – se pose avec plus d’acuité. À la lumière de l’enseignement du pasteur David Jang, nous sommes invités à méditer de nouveau l’un des passages bibliques les plus souvent évoqués pour Noël : Jean 3.16. Ce verset – « Car Dieu a tant aimé le monde qu’Il a donné Son Fils unique, afin que quiconque croit en Lui ne périsse point, mais qu’il ait la vie éternelle » – indique clairement où se trouve le véritable sens de Noël : Dieu a envoyé Jésus sur terre parce qu’Il nous aimait, et c’est par la grâce rédemptrice du Christ que nous obtenons la vie éternelle.
Selon l’insistance du pasteur David Jang, en regardant la société actuelle, on a l’impression que le sens profond de Noël s’efface peu à peu. Beaucoup ne le perçoivent plus que comme un moment de « fin d’année festive » ou de « congé ». Pourtant, pour ceux qui croient en Jésus-Christ, Noël n’est pas seulement une phase de clôture de l’année, mais un jour solennel où l’on proclame le cœur même de l’Évangile : « Le Seigneur S’est humilié et est venu sur terre pour apporter le salut à l’humanité tout entière. » En ce jour saint, nous devons être préparés à répondre bibliquement à la question : « Pourquoi Jésus était-Il nécessaire sur cette terre ? » Et ce, non seulement sur un plan dogmatique, mais aussi dans notre vie de foi quotidienne.
On peut bien sûr évoquer le récit de la nativité tel que le rapportent Matthieu ou Luc – la naissance du bébé Jésus, les anges louant Dieu et les bergers L’adorant, ou encore les mages d’Orient offrant leurs présents. Toutefois, pour développer plus en profondeur « pourquoi Jésus a dû venir », l’épître aux Romains se révèle particulièrement riche. Le pasteur David Jang raconte qu’au cours d’une série de prédications sur l’Épître aux Romains à San Francisco, alors que Noël approchait, il avait prêché sur Romains 8. Selon lui, cette épître présente l’exposé doctrinal, théorique et systématique le plus abouti sur « le Seigneur venu pour nos péchés et nos fautes ». Certes, l’ensemble de l’Épître aux Romains suit cette logique, mais les chapitres 1, 5 et 8 exposent avec une netteté particulière les raisons de la venue du Seigneur sur cette terre. Le chapitre 5, connu pour sa « théologie du nouvel Adam », montre que si toute l’humanité est vouée à la mort à cause du péché introduit par le premier Adam, Jésus est venu résoudre ce problème et ouvrir, en Lui, la voie à une nouvelle humanité. Autrement dit, l’Épître aux Romains renferme de nombreux versets qui répondent à la question : « Pourquoi Jésus est-Il l’unique voie ? »
Le pasteur David Jang souligne que les dirigeants d’Église et les fidèles doivent étudier avec persévérance la Parole de Dieu, de manière doctrinale et théologique, pour que le sens de l’Évangile ne se dilue pas. Comme l’affirme 1 Pierre 3.15 : « Soyez toujours prêts à défendre l’espérance qui est en vous », nous devons être capables d’expliquer à ceux qui questionnent la nécessité de la venue de Jésus et la nature de l’Évangile. C’est précisément dans cette perspective que le pasteur David Jang insiste : « Même si le monde entier se contente de l’aspect culturel et profane de Noël, ceux qui croient véritablement en Jésus doivent méditer plus profondément sur le sens profond de ce jour et le transmettre autour d’eux. » Prêcher justement l’Évangile à Noël, en prenant comme texte l’Épître aux Romains, peut rappeler aux foules que « la venue du Seigneur est synonyme de notre salut ».
En outre, il ajoute que lorsque l’Église enseigne rigoureusement l’essentiel de l’Évangile à chaque croyant, la raison d’être même de l’Église s’éclaire. Notre mission est de faire des disciples de toutes les nations, d’enseigner et de proclamer la Parole. Il ne s’agit pas simplement d’un accroissement quantitatif de l’Église, mais d’une disposition de cœur : être prêts à répondre à la question « Pourquoi avons-nous besoin de Jésus ? » En effet, aujourd’hui encore, beaucoup dans le monde ignorent l’Évangile de Jésus-Christ. Dans un contexte où Noël est récupéré commercialement ou confondu avec la simple euphorie de fin d’année, les cantiques dénués de leur message authentique ne laissent qu’un sentiment de vide dans le cœur des gens. C’est pourquoi la responsabilité de l’Église, qui doit transmettre une Parole vivante et dynamique, est d’autant plus forte.
La période de l’Avent est, dans la tradition ecclésiale, censée préparer la venue du Seigneur, la méditer et L’attendre. Le pasteur David Jang dit qu’en cette année (vers 2021, d’après le contexte du texte), il avait décidé de prêcher sur l’épître aux Galates, parce que cette lettre met clairement en évidence à quel point l’Évangile est un message pur, qui ne peut se mélanger à rien d’autre, et combien il importe que l’Église préserve l’essence de l’Évangile. Il relève la similarité entre la situation de l’Église de Galatie à l’époque de l’apôtre Paul et la nôtre au XXIᵉ siècle.
Toutefois, au-delà de la joie que suscite Noël, le pasteur David Jang interpelle chacun par une question profonde : « Pourquoi avons-nous besoin du Seigneur ? » Cette question, élargie, touche aussi à « Pourquoi avons-nous établi une Église ? Alors qu’il en existe déjà tant dans le monde, quelle est la raison d’être de notre Église ? Qu’est-ce qui nous distingue d’autres communautés ? » Malgré le grand nombre d’Églises à travers le monde, pourquoi la société ne semble-t-elle pas réellement transformée ? Comme dans l’allégorie de l’histoire (avec la mer et le sel), il suffirait de quelques Églises authentiquement « sel de la terre » pour empêcher la société de se corrompre ; alors pourquoi le monde s’assombrit-il malgré le nombre d’Églises ? Le pasteur David Jang répond : c’est parce que ces Églises, en s’éloignant de la compréhension de la croix du Christ et de l’Évangile du salut, ont perdu la capacité de transformer le monde. Sans la ferveur suscitée par l’Évangile, la puissance de changer la société faiblit.
Le pasteur David Jang qualifie notre Église de « jeune et nouvelle », tout en soulignant à maintes reprises notre identité d’« Église réformée ». Le terme « réformé » (Re-formed) suggère l’idée d’avoir été « refaçonné », et c’est ce sens-là qui est en jeu lors de la Réforme protestante. Dans l’histoire de l’Église, deux grandes controverses doctrinales majeures ont eu lieu : l’une cristallisée autour de la christologie (« Qui est Jésus ? »), l’autre autour de la sotériologie (la doctrine du salut). Au IVᵉ siècle, la controverse christologique, questionnant la nature de Jésus, trouva son dénouement dans le symbole de Chalcédoine : « Vrai Dieu et vrai homme » (Vere Deus, Vere Homo). Plus tard, la grande controverse de la sotériologie mena à la Réforme protestante.
La Réforme fut déclenchée parce que la vérité de l’Évangile, que l’Église devait sauvegarder, s’était altérée. Dans Ésaïe 1.22, on lit : « Ton argent s’est changé en scories, ton vin a été coupé d’eau », une image suggérant qu’on a ajouté de l’eau au vin pur, autrement dit que l’Évangile avait été dilué par des éléments humains. En accumulant des traditions, des rites, des mérites à la pureté première de l’Évangile, on l’avait corrompu. Les réformateurs ont alors appelé l’Église à revenir à l’Écriture seule (Sola Scriptura). Selon le pasteur David Jang, c’est toujours d’actualité : pour éviter toute corruption, l’Église doit sans cesse se replonger dans Galates et Romains, afin de bien comprendre la doctrine du salut telle que Paul l’a exposée. Il raconte qu’il avait déjà prêché sur Galates par le passé, mais qu’alors, l’Église n’était pas encore suffisamment mûre pour saisir pleinement et vivre cette vérité. Désormais, confrontés aux « crises spirituelles » que l’on ressent sur les champs missionnaires à l’étranger ou au contact de la culture latine, il estime que l’épître aux Galates est devenue plus que jamais indispensable.
Dans l’Église orthodoxe (au sens large de la Tradition ancienne) comme dans le protestantisme historique, la sotériologie s’appuie principalement sur l’Épître aux Romains et l’Épître aux Galates. Un verset clé en la matière est : « Le juste vivra par la foi » (cf. Romains, Galates), qu’on peut résumer par la devise « Sola Fide » (la foi seule). Romains 10.10 déclare : « C’est en croyant du cœur qu’on parvient à la justice, et c’est en confessant de la bouche qu’on parvient au salut. » La foi émane du cœur, où réside l’amour. Ainsi, lorsque nous réalisons, croyons et confessons l’amour du Christ dans notre cœur, nous recevons le salut. Dire que l’Évangile s’est estompé signifie que l’amour du Christ s’est estompé. Quand l’amour disparaît dans une Église, c’est elle-même qui perd sa force et sa capacité à transformer le monde.
Alors, pourquoi la prédication personnelle n’aboutit-elle pas et reste-t-elle stérile ? Le pasteur David Jang diagnostique « un manque d’efficacité de l’épée de la Parole ». Sans un affûtage constant par la Parole de Dieu et par l’épée de l’Esprit (Éphésiens 6.17), on ne peut pas annoncer l’Évangile avec force. Les fidèles qui travaillent dans le monde, et sont quotidiennement en contact avec lui, ont particulièrement besoin de ces bases bibliques. Le pasteur David Jang cite l’exemple d’Étienne dans Actes 6-7 : il n’était pas seulement un serviteur chargé de la distribution des biens ; il avait une connaissance approfondie de l’Écriture et de l’histoire d’Israël, ce qui lui a permis de persévérer jusqu’au martyre, devenant ainsi le premier témoin à donner sa vie pour Christ. L’Épître aux Galates a justement été rédigée pour prévenir toute déformation de l’Évangile, contre laquelle Paul mettait déjà vivement en garde l’Église primitive. Et le pasteur David Jang souligne que la situation de notre époque est en tout point comparable à celle des Galates.
D’autant que notre Église s’engage de plus en plus en mission en Amérique latine, une nouvelle opportunité d’appliquer concrètement les enseignements de l’Épître aux Galates. Les Églises latines sont traditionnellement liées au catholicisme romain. Historiquement, ce dernier, en rajoutant traditions et rites humains à l’Écriture, a fini par estomper le centre de l’Évangile, imposant aux croyants des dogmes ajoutés comme les indulgences ou le purgatoire. Cela contredit la sotériologie paulinienne qui proclame « Sola Fide, Sola Gratia » (la foi seule, la grâce seule). Les réformateurs ont réagi en affirmant « Sola Scriptura, Sola Fide, Sola Gratia », rappelant que l’Église doit retourner à la Parole, la seule authentique. Le pasteur David Jang définit ainsi l’« évangélisme » (ou le mouvement évangélique) : ceux qui s’en tiennent à cette confession de foi, aujourd’hui encore, et qui perçoivent la même problématique au sein des Églises latines, y voyant une répétition du même problème qu’à l’époque de la Réforme.
Il nous encourage alors à assumer pleinement cette mission. Les voies s’ouvrent déjà vers l’Amérique latine (depuis la Californie, le Texas, la Floride, etc.), offrant d’innombrables occasions d’annoncer l’Évangile. Mais si l’Église enseigne un « Évangile + quelque chose d’autre », elle en perdra toute sa force. Il faut attester clairement que « seul Jésus-Christ, seule la foi, seule la grâce » suffisent au salut, sans y adjoindre des traditions ou des rites. Quand l’Évangile se brouille, l’amour se refroidit. Malgré l’infinie constance de l’amour du Seigneur, si l’Église se dessèche et ne porte plus de fruit, c’est forcément parce que des éléments étrangers ont filtré dans son message. L’avertissement de Paul en Galates – « Je m’étonne que vous vous détourniez si vite vers un autre Évangile » (Ga 1.6) – résonne de nos jours avec la même pertinence, rappelle le pasteur David Jang.
Il attire aussi l’attention sur Romains 9-11 : Paul manifeste un attachement indéfectible envers son peuple, les Juifs, alors même qu’il sait qu’ils se sont éloignés de l’Évangile. Cela démontre l’attitude que nous devons adopter : « au lieu de condamner ou de critiquer le catholicisme ou une autre confession, il s’agit plutôt de leur annoncer l’Évangile authentique pour qu’ils puissent être restaurés ». Tel était l’ardent désir de Paul envers ceux qui déformaient la vérité, et c’est cette disposition de cœur qui devrait nous animer. C’est dans cet esprit que le pasteur David Jang cite aussi Apocalypse 11, qui appelle à « mesurer le temple » : examiner lucidement les déviances et les erreurs dans l’Église, pour ensuite conduire cette dernière à revenir au cœur de l’Évangile. C’est l’orientation même de la Réforme, « revenir à la Parole de Dieu ».
Il rappelle qu’à l’occasion du 21ᵉ anniversaire de l’Église, il avait prêché sur « Sola Fide, Sola Gratia, Sola Scriptura ». Cette même année, dit-il, Dieu a confié à notre communauté « la mission de transformer une terre de larmes en terre de joie », en y établissant un Centre Évangélique (Evangelical Center), événement historique. Être « évangélique », c’est affirmer sa volonté de préserver l’Évangile dans sa pureté et de ne jamais transiger sur la doctrine que la foi seule, soutenue par l’Écriture seule, nous justifie devant Dieu.
Ainsi, le message de l’Épître aux Galates demeure, depuis l’époque de l’Église primitive jusqu’à l’ère de la Réforme et jusqu’à aujourd’hui, le même : « Aussitôt qu’on ajoute quoi que ce soit à l’Évangile, on le dénature. » C’est pourquoi Galates 1.8 déclare que, fût-ce un ange du ciel, s’il annonce un autre Évangile, qu’il soit anathème. Le pasteur David Jang rappelle que Galates, au même titre que Romains, est un texte doctrinal central, essentiel pour résister à toute forme d’altération du message du salut. Dans nos engagements missionnaires en Amérique latine, cela est particulièrement crucial.
Il semble qu’un renouveau soit en marche dans plusieurs communautés, et cela exige plus que jamais d’être fermes : « N’édulcorez jamais l’essence de l’Évangile. » Même lorsque l’on fonde une nouvelle Église ou que l’on emménage dans un nouveau sanctuaire, il faut se souvenir : « Nous ne serons pas une Église légaliste, formaliste, mais une Église où règne l’Évangile pur. » Dans ces conditions, l’amour de Christ ne se refroidit pas et la communauté s’embrase d’une passion ardente, avancée puissante vers le monde. Des serviteurs infatigables, des croyants doués de persévérance spirituelle grandissent dans un tel milieu « préservé de toute corruption de l’Évangile ».
Le pasteur David Jang évoque souvent le chemin parcouru depuis la fondation de notre Église, et nous invite à nous interroger : « Pourquoi Dieu protège-t-Il notre communauté comme la prunelle de Ses yeux ? » Sans doute parce que nous nous attachons fermement à l’Évangile. Partout dans le monde – en Amérique latine, aux États-Unis, en Asie – nous devons annoncer le même Évangile, sans aucune déformation. Notre mandat est de « réveiller les peuples par l’Évangile, et amener l’Église à incarner l’arche de salut qui transforme le monde ».
En parcourant Galates 1, on remarque comment Paul se présente : « non de la part des hommes, mais par Jésus-Christ et Dieu le Père qui L’a ressuscité d’entre les morts » (Ga 1.1). L’autorité de l’Évangile ne procède pas de l’homme. De la même façon que Jésus est venu selon la volonté de Dieu, Paul est devenu apôtre par Sa seule vocation. Le fondement de l’Église, de l’Évangile, est donc divin et non humain.
Dans Galates 1.6 et suivants, Paul écrit : « Je m’étonne que vous vous détourniez si vite… Il n’y a pas d’autre Évangile, mais il y a des gens qui troublent et veulent renverser l’Évangile du Christ. » Il reproche vivement aux Galates de se laisser égarer par l’idée qu’il faudrait ajouter quelque condition humaine pour être sauvé. Puis, aux versets 8-9, Paul renchérit : « Si quelqu’un, fût-ce nous-mêmes ou un ange venu du ciel, vous prêche un autre Évangile que celui que nous vous avons prêché, qu’il soit anathème ! » C’est dire à quel point l’Évangile ne se négocie pas et ne peut être complété ou remplacé par quoi que ce soit ; il est, en lui-même, le parfait don de Dieu.
Le pasteur David Jang considère ce texte comme un sérieux avertissement pour l’Église actuelle. Il est certes réjouissant de constater l’expansion de l’Église dans le monde, mais si celle-ci se met à diluer l’Évangile, nous retomberons dans les mêmes travers que l’Église primitive, confrontée aux Judaïsants. Le légalisme ou le ritualisme dénué de l’amour et de la puissance de l’Évangile ne transforment pas le monde. Seules les Églises évangéliques et réformées, gardant la pureté de la Bonne Nouvelle, peuvent être « sel et lumière » pour la société.
En cette période de Noël, chaque croyant est invité à réfléchir : « Qu’est-ce que l’Évangile, et pourquoi Jésus est-Il l’unique chemin de salut ? » Le pasteur David Jang insiste sur le fait que Romains et Galates regorgent de réponses à ces interrogations. Comme le déclare Romains 8, « la loi de l’Esprit de vie en Jésus-Christ nous a affranchis de la loi du péché et de la mort », ce qui devient possible parce que Jésus est venu. Et, selon Romains 5, « si par Adam le péché a envahi l’humanité, en Jésus, nouvel Adam, nous recevons une nouvelle vie. » Voilà l’Évangile, un message qui se suffit à lui-même. Quand l’Église s’y attache, Noël acquiert un sens encore plus limpide, et l’amour sacré ne s’éteint jamais.
Pour le pasteur David Jang, c’est là la mission essentielle de l’Église et la source inépuisable de notre dynamisme. L’Église doit vivre dans l’amour, dans l’Évangile, en suivant l’exemple de l’humilité et du service du Seigneur. Ainsi, Noël ne sera plus une fête commerciale parée de lumières, mais le témoignage lumineux de l’amour de Dieu pour le monde.
2. La foi réformée selon l’Épître aux Galates et l’orientation de l’Église
L’avertissement et le défi que l’Épître aux Galates adresse à l’Église se sont appliqués à l’époque médiévale lors de la Réforme, et ils demeurent valables de nos jours. La question cruciale est « Qu’ajoutons-nous à l’Évangile ? ». Quand l’Église ne reconnaît pas pleinement la valeur infinie de l’œuvre expiatoire de Jésus-Christ et suppose qu’il faut y mêler traditions ou mérites humains, elle tombe dans le piège dénoncé par Paul : « On ne peut pas compléter l’Évangile. » Or, tout au long de ses épîtres et dans les confessions de foi de la Réforme, on martèle la même vérité : « Le salut s’obtient Sola Fide, Sola Gratia, Sola Scriptura. »
La Réforme ne fut pas qu’un remaniement structurel de l’Église. Elle portait sur la question fondamentale : « Comment le pécheur est-il justifié devant Dieu ? » L’Église catholique, en surajoutant peu à peu rites et traditions, en imposant la vente d’indulgences ou la croyance au purgatoire, prétendait monopoliser le « canal » de la rédemption. Ainsi, elle détournait l’Évangile de la doctrine paulinienne : « Le salut est entièrement fondé sur la grâce du Christ, reçue par la foi seule. » Luther, Calvin, Zwingli et d’autres réformateurs ont alors crié : « Revenons à la Bible (Sola Scriptura) », lançant le mouvement évangélique (Evangelical).
Le pasteur David Jang rattache cela à l’idée de « Re-formed ». Notre Église n’est pas seulement une nouvelle communauté, mais une « Église réformée », c’est-à-dire ramenée à l’Évangile, car l’histoire nous enseigne qu’une déviance est toujours possible. Dès le tout début, des courants comme le judaïsme chrétien ou le gnosticisme cherchaient déjà à pervertir le message de l’Évangile. Paul y a fermement répondu dans ses diverses lettres, et dans Galates, il condamne le plus fermement le fait de suivre un « autre Évangile ».
Le pasteur David Jang nous invite à scruter plus spécifiquement Galates 1, 2 et 3, qui montrent de manière concrète « comment l’Évangile transforme les gens ». Paul ne rejette pas la Loi en soi, mais il affirme que Christ l’a accomplie, ouvrant ainsi une nouvelle voie. Voilà pourquoi Galates 2.20 – « J’ai été crucifié avec Christ… » – est une confession centrale. Ce n’est pas notre « petit surcroît d’efforts » qui nous sauve, mais le fait que nous devenons une nouvelle créature en Jésus. C’est cela la foi réformée, et depuis la Réforme, c’est le fondement que les Églises évangéliques défendent.
Dans les Églises latines d’aujourd’hui, il arrive souvent qu’on considère des « obligations religieuses » comme indispensables pour « conserver son salut », ou que l’adhésion à certaines traditions devienne une condition incontournable. Les traditions ou rites ne sont pas en soi condamnables ; ils peuvent être riches de signification. Le véritable problème, c’est quand on en fait une forme de « Évangile + alpha », comme au temps des Galates, où l’on disait : « Pour qu’un païen soit sauvé, il doit d’abord être circoncis. » Paul s’élève contre cette idée : le salut repose sur « Jésus-Christ seul », pas sur « Jésus + autre chose ». L’Église catholique médiévale et ceux qui insistent aujourd’hui pour adjoindre des préceptes à l’Évangile se heurtent au même reproche. Le pasteur David Jang souligne : de la même façon, même dans nos milieux évangéliques, si l’on fait peser une culture ou une tradition d’Église comme une condition d’accession à Dieu, on retombe dans une dérive semblable. Organiser la vie ecclésiale n’est pas un mal, mais ne jamais le présenter comme un critère supplémentaire pour être sauvé.
Ainsi, la vocation de l’Église réformée est de se rappeler sans cesse : « Sola Fide, Sola Gratia, Sola Scriptura. » À chaque époque, l’épître aux Galates soulève la même problématique que celle rencontrée par les premiers chrétiens. Selon le pasteur David Jang, c’est la raison pour laquelle les serviteurs de Dieu engagés dans l’évangélisation du monde doivent étudier intensément cette lettre. Et quand, dans le contexte du réseau mondial (OC) qui s’étend, les nouveaux convertis latinos découvrent d’emblée ce message central des Galates, ils peuvent bâtir une Église pure et solide, à l’abri du légalisme et du formalisme. Alors, elle restera un lieu de liberté, de joie et d’enthousiasme, ouverte au monde, manifestant un amour et un zèle missionnaire inépuisables.
Le pasteur David Jang se réjouit de constater, sur le terrain, la croissance de ces nouvelles communautés, et il encourage la mise en place de centres évangéliques (Evangelical Centers), dans lesquels l’Évangile est annoncé clairement, la Parole enseignée et les disciples formés. Le mouvement évangélique (Evangelical) est composé de ceux qui placent la Bonne Nouvelle au centre, en affirmant la souveraineté de l’Écriture et le principe du « par la foi seule » quant au salut. Historiquement, dans le christianisme, on distingue le catholicisme et le protestantisme, et au sein de ce dernier, le protestantisme libéral et l’évangélisme. Être évangélique ne consiste pas seulement à dire « Nous ne sommes pas catholiques ni libéraux », mais à proclamer positivement : « Nous sommes un peuple soumis à la seule autorité de l’Écriture, consacré à l’annonce de l’Évangile. » Dispersés à travers le monde, les centres évangéliques doivent évangéliser, former et conduire les âmes à Jésus-Christ.
Le pasteur David Jang raconte que lors de confessions de foi (confirmation) ou de baptêmes récents, de nombreux jeunes gens, brillants et pleins de ferveur, se sont engagés : signe que lorsqu’on annonce l’Évangile authentique, les cœurs s’ouvrent d’eux-mêmes pour confesser Jésus. Comme l’illustre Osée 14.5 : « Je serai comme la rosée pour Israël », la grâce rafraîchit les âmes desséchées et fait reverdir la terre assoiffée. Pour favoriser cette effusion de la rosée divine, il faut un « lieu où l’on reçoit le Saint-Esprit » : c’est la vision de l’Evangelical Center, rejoignant l’aspiration de Paul pour l’Église.
Quand l’Église annonce « Jésus seul, l’Évangile seul », elle déclenche une transformation radicale. Par exemple, voir une Église d’Amérique latine emménager dans un nouveau bâtiment, célébrer l’initiation chrétienne de 24 fidèles, marquant une nouvelle étape, témoigne de l’action de Dieu. Mais le pasteur David Jang met en garde : ne nous focalisons pas uniquement sur les bâtiments ou l’augmentation numérique. Il est prioritaire de savoir « quelle confession de foi porte cette Église, comment y proclame-t-on l’Évangile du Christ ». Galates 1.8 résonne encore : « Fût-ce un ange venu du ciel, s’il annonce un autre Évangile, qu’il soit anathème. » L’Église, même en forte expansion, perdra sa vitalité si elle altère un tant soit peu l’Évangile. Tandis que si elle se tient fermement à la vérité pure, elle recevra le « pouvoir de transformer le monde entier ».
Le pasteur David Jang cite souvent le Psaume 133 : « Oh ! qu’il est doux, qu’il est agréable pour des frères de demeurer ensemble ! » Il insiste sur la joie d’une communauté unie dans la grâce, ce qui constitue « l’Église aimée de Dieu », où abondent les fruits de l’Esprit. Une telle Église ne voit pas l’amour s’éteindre, ni ses serviteurs s’épuiser, car le feu de l’Évangile ne cesse de brûler. C’est précisément ce que l’Épître aux Galates nous apprend : rester à l’affût de ceux qui voudraient « ajouter autre chose à l’Évangile », et s’en tenir fermement au Christ et à Sa croix. Ainsi, la puissance de l’amour rayonne sans relâche.
Quand l’Évangile conserve toute sa force, l’Église brille d’une lumière puissante dans la société. Le problème, de nos jours, n’est pas qu’il manque d’Églises. Elles sont nombreuses. Mais si les croyants perdent l’amour de Christ ou s’épuisent dans des ajouts qui détournent leur énergie, alors ils ne peuvent plus déployer la force qui transforme le monde. D’où l’appel du pasteur David Jang à vérifier continuellement si notre Église est vraiment « Re-formed » et s’aligne sur l’Évangile que Paul a prêché. La Réforme n’est pas un événement révolu mais un processus permanent, « Semper Reformanda », un retour constant à l’Évangile.
En lisant Galates et Romains de concert, nous voyons combien le salut décrit par Paul est grandiose et radical, et combien il anéantit nos efforts méritoires. Romains 5 développe la notion de « nouvel Adam » : le péché et la mort sont entrés dans l’humanité par le premier Adam, mais la solution se trouve dans le second Adam, Jésus-Christ, qui inaugure une nouvelle création. Personne ne peut sortir de son péché par lui-même ; ni la Loi, ni les traditions ne garantissent le salut. Seul le sacrifice, la mort et la résurrection de Jésus-Christ sauvent. Galates s’inscrit dans la même ligne : ce n’est pas la circoncision ni l’observance de la Loi qui justifient, mais « J’ai été crucifié avec Christ » et « désormais ce n’est plus moi qui vis, c’est Christ qui vit en moi » (Ga 2.20). Les dérives de l’Église, au temps de la Réforme comme aujourd’hui, viennent d’un éloignement de ce fondement. Quand l’Église s’enrichit et conquiert un pouvoir mondain, elle peut tomber dans l’excès d’imposer des règles et des coutumes, de vendre des indulgences, et de rajouter toutes sortes de conditions humaines au salut. Pourtant, Galates 5.1 proclame : « C’est pour la liberté que Christ nous a affranchis. » Voilà le potentiel libérateur de l’Évangile.
Le pasteur David Jang affirme qu’une Église réellement attachée à cet Évangile doit, pour rester fidèle, veiller à ce que chaque croyant renouvelle sans cesse sa conscience de la grâce, et que tous s’exhortent mutuellement. Avec le temps, on peut facilement s’habituer à la forme extérieure du culte et délaisser « l’amour de l’Évangile ». Or, si nous saisissons à nouveau, dans la période de Noël, « pourquoi le Seigneur est venu », notre foi se ravive. Chaque relecture de Jean 3.16 nous saisit à nouveau de l’immensité de l’amour de Dieu qui a offert Son Fils unique, et nous rappelle que nous n’avons rien à y ajouter ni retrancher. Alors l’Église éprouve une humilité infinie et en même temps une audace renouvelée pour rayonner dans le monde.
Noël devient ainsi un appel à « retrouver l’amour premier ». Matthieu 24.12 avertit qu’à l’approche de la fin des temps, l’amour du plus grand nombre se refroidira. Cela peut se produire même au sein de l’Église. Or, l’affaiblissement de l’amour signifie l’affaiblissement de l’Évangile. Mais si l’Église revient à l’Évangile, chaque Noël, au lieu de tomber dans la monotonie, renforce la ferveur de l’amour. Comme un vin qui se bonifie avec le temps, le véritable Évangile ne s’altère pas. C’est seulement quand on y mêle de l’eau ou d’autres éléments qu’il perd sa saveur.
Le pasteur David Jang, reprenant l’introduction de Galates (chapitre 1), insiste : « Cela ne vient pas de l’homme, mais de Dieu. » La venue de Jésus, l’apostolat de Paul, l’existence de l’Église procèdent tous de l’initiative divine. Ce n’est pas l’opinion des hommes ou la tradition qui compte, mais l’autorité de l’Écriture et du Saint-Esprit. C’est le fondement de la foi réformée et de l’Église évangélique.
Lorsque l’Église avance ainsi, Dieu accomplit des œuvres « merveilleuses à nos yeux ». Le pasteur David Jang souligne à quel point l’établissement de centres évangéliques est surprenant, comme un signe que Dieu nous confie une grande mission. Quand l’Église préserve la pureté de l’Évangile, les frontières géographiques ou culturelles se traversent bien plus aisément. Puisque l’amour découle de l’Évangile, on ne lie pas les fidèles par des rites ou coutumes humains. De ce fait, la même Bonne Nouvelle peut se diffuser partout, en Amérique latine, en Asie, en Afrique, produisant des fruits similaires.
L’idée d’étudier l’Épître aux Galates durant la période de Noël vise à raffermir le cœur du message évangélique. Noël ne consiste pas seulement à chanter un récit enfantin sur « le bébé Jésus », mais à méditer « Le Christ humilié, Son chemin de croix et de résurrection, et Son amour infini pour nous ». Cela nous incite à rester sur nos gardes pour ne pas opprimer les croyants par de nouvelles lois ou traditions qui altéreraient la grâce. Alors Noël ne sera plus une simple fête annuelle, mais un moteur puissant qui réforme l’Église et transforme le monde.
Comme le dit le pasteur David Jang : « Là où l’Évangile est prêché dans sa pureté, la joie et l’enthousiasme abondent toujours. » Une Église édifiée non sur des doctrines humaines, mais sur la Parole de Dieu, se fortifie chaque Noël qui passe. L’alliance entre une connaissance doctrinale saine et une vie transformée se réalise concrètement. C’est pourquoi l’enseignement doctrinal, l’étude biblique et la formation de disciples sont cruciaux, et pourquoi l’Église doit former « des soldats de l’Évangile ». Ces personnes seront prêtes à témoigner du Christ avec assurance dans la société et à exposer les raisons de l’espérance qui les habite à quiconque s’interroge : « Pourquoi avons-nous besoin de Jésus ? »
Galates et Romains, en lien avec la signification de Noël, offrent une abondante réponse à la question : « Pourquoi l’Église doit-elle s’attacher exclusivement à Jésus ? Pourquoi Jésus est-Il la seule voie de salut ? » C’est le cœur du message que le pasteur David Jang ne cesse de mettre en avant. Quand l’Église saisit cette vérité, les cantiques de Noël prennent vie, et la liturgie, même traditionnelle, s’enflamme d’une passion toujours renouvelée. L’épître aux Galates nous met en garde : « Seul l’Évangile de Jésus apporte à l’Église la puissance et la vitalité. » Même après des siècles, l’Église ne vieillit pas si l’Évangile reste vivant. Elle ne fait que dégager un parfum plus riche et plus précieux. À Noël, nous proclamons cette réalité : l’amour de Dieu est venu sur terre en Jésus, et c’est une merveilleuse nouvelle pour tous.
Puisse l’Église, fidèle à Galates 1.8, rejeter fermement toute tentative d’ajouter quoi que ce soit à l’Évangile, et s’attacher pleinement à l’amour de Jésus. Alors, quelle que soit la culture ou la langue, d’innombrables âmes seront amenées au salut à travers cette Église. Dans cette espérance, accueillons Noël en méditant la grandeur inouïe de l’amour divin. Que ce moment de clôture d’année et de préparation à la nouvelle soit pour nous une occasion de vivre la puissance de l’Évangile qui bouleverse le monde. Puissent notre Église et toutes les communautés de foi qui lisent ces lignes expérimenter l’accomplissement de la promesse biblique : « L’Évangile est une force pour le salut de quiconque croit » (Romains 1.16). Amen.
张大卫牧师多次称呼我们的教会是“年轻而崭新的教会”,并强调我们是改革宗教会(Reformed Church)。这里的“Re-formed”意思是“被重新塑造”,与历史上的宗教改革密切相关。纵观教会史,出现过两大主要神学争议:其一是基督论(Christology),其二是救恩论(Soteriology)。早期教会在“耶稣是谁?”这一基督论争议中,最终经由迦克墩信经确定“他是真神,也是真人”(Vere Deus, Vere Homo)。随后历史上另一重大争议便是救恩论,直接催生了宗教改革。
因此,他回忆在教会21周年时,自己曾讲道“Sola Fide, Sola Gratia, Sola Scriptura(唯独因信、唯独恩典、唯独圣经)”。正是在那一年,上帝赐给我们“将哭泣之地变为喜乐之地”的使命,并在那里建立了“福音派中心(Evangelical Center)”这一历史性事件。福音派(Evangelical)意味着守护纯正福音的信念,同时也是宣告不妥协地坚守“唯独圣经的教导”和“唯独因信称义”的真理。
張ダビデ牧師は私たちの教会を「若く新しい教会」と呼び、改革教会(Reformed Church)であることを再三強調しています。ここで「改革」(Re-formed)とは「再び形作られた」という意味で、歴史的な宗教改革を指し示すときに注目すべき要素でもあります。教会史には大きく二つの神学的論争の流れがありました。一つはキリスト論(Christology)の論争で、もう一つは救済論(Soteriology)の論争です。初代教会の時代、「イエスはどなたか?」という問いから始まったキリスト論の問題は、カルケドン信条を通して「Vere Deus, Vere Homo(まことに神であり、まことに人)」という結論に達しました。それに続く歴史的な大きな論争が救済論に関するものであり、これが宗教改革につながったのです。
正統(オーソドックス)教会において救済論はパウロのローマ書とガラテヤ書が中核をなしています。その鍵となる聖句は「義人は信仰によって生きる」という御言葉であり、さらに要約すれば「オOnly by faith(Sola Fide)」です。ローマ書10章10節によれば、人は心に信じて義とされ、口で告白して救いに至るとあります。信仰は心から出るものであり、その心には愛があります。つまり、キリストの愛を心で悟り信じて告白するとき、私たちは救いにあずかるということです。ですから「福音がかすんだ」というのは、イコール「キリストの愛がかすんだ」ということと同じです。愛がかすんだ教会は力を失い、世を変える能力を失います。
特に最近、私たちの教会が中南米、つまりラテン地域に宣教を拡大していく状況は、ガラテヤ書の教えを実際に適用する機会を与えています。ラテンの教会は伝統的にローマ・カトリックが強い地域でした。宗教改革の背景を見てみると、カトリック教会が聖書以外にも数多くの伝統や儀式を付け加える過程で福音の核心がかすんでしまい、「伝統+福音」の形で教えられ、免罪符や煉獄説など、人間が作った付加的な教理を信徒たちに課すようになりました。これは「オOnly by faith, Only by grace」というパウロの救済論に反する結果をもたらしました。宗教改革者たちは「Sola Scriptura(ただ聖書のみ)、Sola Fide(ただ信仰のみ)、Sola Gratia(ただ恵みのみ)」を叫び、教会が聖書本来のメッセージに立ち返るべきだと主張しました。張ダビデ牧師の言う「福音主義(Evangelical)」とは、まさにこの信仰告白を守ろうとする人々を指すのであり、今日のラテン教会の中でもいまだにこの重要な問題が繰り返されているがゆえに、ガラテヤ書のメッセージにさらに注目すべきだというのです。
この点で、彼は教会が21周年を迎えたとき、「Sola Fide, Sola Gratia, Sola Scriptura」を説教したことを思い出させます。まさにその年、神が「涙の地を喜びの地へ変える使命」を私たちに与え、その土地に福音主義センター(Evangelical Center)が建てられるという歴史的な出来事があったのです。福音主義(Evangelical)とは、純粋な福音を守ろうという意思の表明でもあり、ただ聖書の教えを土台に「ただ信仰によって義とされる」という真理を決して妥協しないという宣言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