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인 장재형 목사가 깊이 있게 전파한 요한복음 2장의 강해 설교는 거룩한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린 채 인간의 욕망으로 가득 찬 종교적 현실에 날카로운 경종을 울립니다.
스페인의 거장 엘 그레코의 캔버스 위에 펼쳐진 성전 정화의 명화 속에는, 평화롭고 나태해진 종교적 공간의 결을 사정없이 찢고 들어오는 거룩하고 엄숙한 긴장감이 가득 서려 있습니다.
수많은 군중이 성전 마당의 이리저리한 구석에서 제물로 쓰일 동물들을 사고팔고, 쉴 새 없이 동전을 바꾸며, 눈에 익은 타성적인 질서 속에서 자신들의 평온한 하루를 무심히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의 한복판에 홀로 우뚝 서신 그리스도의 거침없는 몸짓과 단호한 눈빛은 그 모든 안일한 평온함을 한순간에 산산조각 내어버립니다.
그분의 불타는 듯한 거룩한 분노는 단순한 인간적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 한 분만을 온전히 예배해야 할 성전의 자리가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이권 다툼으로 더러워진 비참한 현실을 향한 엄중한 심판의 선언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의 기록 속에 등장하는 “이 성전을 헐라”는 주님의 파격적인 말씀은 바로 이러한 타락의 현장 한복판에서 묵직하게 울려 퍼집니다.
이 거룩한 선언은 단순히 인간의 손으로 쌓아 올린 돌무더기 건물을 무자비하게 무너뜨리라는 지엽적인 물리적 명령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과 영광을 독점한 채 철옹성처럼 굳어버린 부패한 종교적 권력,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경건의 외형 속에 교묘하게 숨어 있던 은밀한 야망,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세워 올린 거짓된 중심을 향해 겨누어진 가장 예리한 복음의 칼날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져 내려야 할 운명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죄악에 찌든 인간의 손에서 건져져 다시 온전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려져야 할 거룩한 곳이었기에 반드시 흔들려야만 했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깊이 있는 설교가 가장 먼저 예리하게 주목하는 지점은, 어째서 세상의 권력자들은 예수님을 그토록 억지로 붙잡아 사지로 몰아넣었는가 하는 뼈아픈 질문입니다.
요한복음 18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어두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끝나자마자 무자비하게 결박당한 채 대제사장 안나스의 법정으로 비참하게 끌려가십니다.
겉보기에는 대단히 합법적인 종교 재판의 외견을 띠고 있었지만, 그 잔인한 심판의 그늘 아래에는 성전의 거대한 이권을 독점하며 유지되던 부패하고 썩어 빠진 권력 구조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꽁꽁 묶어놓고 심문하던 자들은 표면적으로는 그분의 제자들의 정체성과 가르친 교훈들을 캐묻는 듯 보였으나, 실제로는 자신들이 평생토록 쌓아 올린 견고한 체제와 기득권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리는 그분의 생명의 말씀 앞에서 극심한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민족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의 기운이 짙어지면, 수많은 순례객들이 각처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구름처럼 몰려들곤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허물을 씻고 하나님께 합당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 흠 없는 소와 양, 그리고 비둘기를 정성껏 준비해 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 성전 안마당에서 이루어지던 제물의 공식적인 거래는 경건한 예배를 진심으로 돕기 위한 거룩한 장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먼 곳에서 힘들게 찾아온 가난한 순례자들까지 울며 겨자 먹기로 폭리가 매겨진 비싼 제물을 억지로 사도록 착취하는 거대한 상업 구조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성전 밖에서 예배자가 직접 정성껏 준비해 온 제물은 성전 관리들에 의해 사사로운 흠이 있다는 트집을 잡혀 매몰차게 거절당하기 일쑤였고, 결국 사람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성전 내부에서 바가지요금을 치르고 제물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의 마당을 휘저으며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준엄하게 꾸짖으신 것은, 은혜와 용서가 가득해야 할 거룩한 자리를 비정한 시장바닥으로 전락시킨 종교적 탐욕을 향한 가장 거룩하고 치열한 항의였습니다.
그분이 손수 매를 채찍 삼아 엎으신 것은 단순히 상인들의 돈궤나 나무 탁자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진실한 마음으로 나아오려는 영혼들의 어깨 위에 짓눌려 있던 부당하고 무거운 짐, 거룩한 예배의 이름을 악랄하게 팔아 사람들을 억누르는 구조, 그리고 영적인 거룩함을 개인의 배를 채우는 이익으로 바꿔치기한 왜곡된 신앙 질서 전체였습니다.
그러나 이 준엄한 성전 정화의 말씀은 단순히 먼 과거 고대 이사회에 존재했던 썩어 빠진 성전 권력만을 고발하는 박물관의 유물이 아닙니다.
오늘날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개개인의 은밀한 마음의 성전 안에도 이와 똑같이 우상처럼 떠받드는 수많은 것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와 사회적 권력,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체면과 고집스러운 전통, 그리고 스스로 쌓아 올린 종교적 자부심과 율법적인 자기 의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보다 앞서 자리를 차지할 때, 그것은 이미 신앙의 거룩한 이름을 걸치고 있는 또 하나의 추악한 우상이 됩니다.
우리 입술에서 아무리 거룩하고 은혜로운 언어가 흘러나온다 할지라도, 내 영혼의 중심이 온전히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지 않다면, 그 마음은 이미 이권에 눈이 먼 장사꾼의 집으로 기울어져 있는 셈입니다.
참된 믿음이란 내면의 그러한 거짓된 성전을 번지르르한 치장으로 더 단단하게 감추거나 꾸미는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이란 거룩하신 주님 앞에 엎드려 내 안에서 사정없이 무너져 내져야 할 허물들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직면하는 눈물의 회개에서 비로소 힘있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흔히 스스로를 불의한 안나스나 탐욕스러운 상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의로운 사람인 줄로 착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면, 나 자신의 편안함과 이익을 악착같이 지키기 위해 심지어 거룩한 하나님까지 내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 이기적인 본성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펴서 읽고 묵상하는 시간은 남의 허물과 죄악을 조목조목 분석하는 심판의 시간이 아니라, 내 마음속 제단이 과연 누구를 향해 바쳐져 있는지 뼈아프게 묻는 거울 앞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결정적인 대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교리적인 지식을 머리로 동의하고 받아들이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강조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친히 헐어내고자 하시는 우리의 타락하고 왜곡된 자아의 중심을 남김없이 내려놓는 십자가의 결단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낡은 성전을 무자비하게 헐라 명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파멸시키거나 죽이기 위함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새롭게 살려내기 위한 놀라운 사랑의 방식을 뜻합니다.
인간의 욕심으로 가득 찬 낡은 성전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그 빈폐허 위에서만 비로소 하늘의 진정한 은혜는 새 길을 낼 수 있습니다.
이 엄숙한 영적 적용은 개인의 은밀한 경건의 울타리에만 결코 머물지 않습니다.
부부의 완고한 자존심, 자녀를 향한 집착 어린 소유욕,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인정받고 싶어 하는 헛된 욕망 역시 우리 삶 속에서 종종 아주 작은 규모의 성전으로 변질되곤 합니다.
입으로는 사랑과 이해를 부르짖으면서도 실제로는 내 생각과 기준을 절대화하여 상대방을 옥죄일 때, 우리는 이웃과 온전한 화해를 이룰 수 없으며 하나님 앞에서도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주님은 바로 그 완악하고 굳어버린 우리의 중심을 향해 서슴없이 “그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비밀스러운 말씀을 던지셨을 때, 당시의 사람들은 그 심오한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어리둥절해했습니다.
그들은 헤롯 왕이 무려 4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공들여 지은 눈부신 건축물만을 떠올렸지만, 요한복음의 저자는 그 말씀의 진정한 실체를 분명하게 밝혀줍니다.
예수님께서 가리키신 성전은 돌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바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실 자기 육체 그 자체였습니다.
인간의 오해에서 비롯된 이 착각은 훗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 위한 빌거리를 찾던 자들의 거짓 증언의 주요 명분이 되었고, 초대 교회 순교자 스데반을 향한 부당한 고발 속에서도 끈질기게 반복되었습니다.
이 거대한 사건의 기저에는 복음이 지닌 가장 깊고 측량할 수 없는 신학적 통찰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구약의 성전을 단순히 폐기처분하신 것이 아니라, 그 성전이 오랜 세월 동안 간절히 가리키고 예표하던 궁극적인 실체를 당신의 거룩한 몸 안에서 완벽하게 성취하셨습니다.
언덕 위 십자가에서 그분의 거룩한 몸이 무참히 찢기실 때 성전의 휘장이 갈라졌고,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생명의 길이 비로소 활짝 열렸으며, 부활의 영광 안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새로운 예배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자리는 세상의 특정한 건물이나 특권을 가진 소수의 계층에 결코 갇혀 있지 않습니다.
이름 없는 죄인도, 삶에 지친 가난한 자도, 병들고 소외된 자도, 심지어 멀리 하나님을 떠나 있던 이방인까지도 이제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값없는 은혜의 보좌 앞에 거리낌 없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따뜻하고도 준엄한 태도는 이 복음의 빛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율법의 차가운 이름으로 여인을 돌로 쳐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돌을 손에 쥐었지만, 주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그들의 양심을 찌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에 떨던 여인에게 정죄의 벼락을 내리는 대신, 다시는 죄의 자리에 머물지 말고 새 삶을 살아가라는 은혜와 진리의 길을 온전히 열어주셨습니다.
주님은 율법의 근간을 무너뜨리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이 진정으로 가리키고 완성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와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십자가 위에서 온전히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헐라”는 주님의 음성은 단순히 모든 것을 파괴하고 무너뜨리겠다는 절망의 언어가 결코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을 멸망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참된 생명으로 다시 세우시기 위해 친히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다만 그분이 새롭게 세우시는 영원한 새 성전은 인간의 교만한 탐욕이나 얄팍한 자기 의의 토대 위에는 결코 세워질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절대적인 순종, 이웃을 향한 사랑의 희생, 그리고 사망의 권세를 깨부순 부활의 산 소망 위에서만 진정한 참된 예배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다시 세우시는 새로운 성전은 어느 한 개인의 내면적 평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던 차가운 담들을 여지없이 허물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대하고 아름다운 새로운 공동체를 세워나갑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주님은 우리의 진정한 화평이 되시며, 원수 되어 갈라졌던 둘을 하나로 만드시는 평화의 주인이십니다.
오성령의 강력한 임재 안에서 초대 교회는 인간의 손으로 정교하게 지은 어떤 웅장한 건물보다 훨씬 더 깊은 영적 의미를 지닌 성전, 곧 살아계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공동체로 지어져 갔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의 초대 교회의 모습은 바로 이 새 성전의 영광스러운 자화상을 세상에 남김없이 보여 주었습니다.
남종과 여종의 신분 차이가 사라지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오랜 장벽이 무너졌으며, 종과 자유인의 계급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온전히 하나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인간이 세상의 잣대로 만들어낸 온갖 계급과 차별의 장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앞에서 결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은 특정한 사람들을 배제하고 자기들만의 성을 쌓는 편협한 체제가 아니라, 모든 상한 심령을 주님 안에서 다시 화해시키고 하나 되게 만드는 치유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교회 역시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과거의 예루살렘 성전처럼 다시 타락하여 장사하는 집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거대한 제도가 복음의 생명력을 대신하고, 차가운 전통이 뜨거운 사랑을 억압하며, 세상의 권력과 물질적 자본이 영적인 섬김보다 우위에 설 때, 교회는 어김없이 낡은 성전의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뒷걸음질 치게 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성전을 헐라”는 주님의 준엄한 말씀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에 그치지 않고,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의 교회와 우리 개개인의 성도들에게도 여전히 뼈아픈 현재형의 경고와 초대
장재형 목사의 설교가 지닌 진짜 위력과 깊이는 바로 이 개혁의 칼날을 외부의 타협적인 세상을 향한 비판으로만 돌리지 않고, 먼저 설교자를 포함한 우리 자신을 향하게 만드는 정직함에 있습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새로워지기를 원한다면, 그 변화의 시작은 언제나 나 자신의 완악한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내가 세상 앞에서 움켜쥔 자기 의, 내면 깊은 곳에서 버리지 못한 은근한 우월감, 그리고 복음의 야성보다 세상의 안전을 더 소중히 여겼던 안일한 자리들이 십자가의 거룩한 불길 앞에서 남김없이 무너질 때, 주님은 그 상한 폐허의 자리 위에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새 성전을 든든히 세우십니다.
성전이 무자비하게 헐리는 그 개혁의 과정은 우리의 자아를 부수기에 언제나 고통스럽고 눈물이 납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로 이 성전 개혁의 말씀을 선포하셨기에 유대 지도자들로부터 끊없는 오해와 살해 협박을 받으셨고, 초대 교회의 스데반 역시 성전과 율법의 틀을 거스른다는 거짓 증언과 돌멩이 세례 속에서 거룩한 순교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정한 복음은 바로 그러한 세상과의 피할 수 없는 충돌 속에서 더욱 눈부시게 선명해졌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때, 죄악과 위선으로 굳어져 버린 낡은 세계는 결코 그 평온한 상태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의 구체적인 적용은 우리의 일상과 아주 작은 공동체 속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투명한 재정의 흐름, 공정하고 정직한 섬김의 자세, 서로를 권력으로 억누르지 않고 존중하며 세워주는 거룩한 질서가 교회 안에 회복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결코 자신의 세속적 유익이나 성공을 위해 거룩한 복음을 교묘하게 이용하지 않아야 하며, 교회는 세상의 권력이나 자본의 논리에 마음을 빼앗겨 세속화되지 않아야 합니다.
진정한 새 성전 공동체는 화려한 외형과 거창한 규모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깊은 낮아짐과 섬김을 통해서만 세상에 비로소 증명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성전을 헐라고 명하셨지만, 그분의 구속 사역의 결말은 결코 황폐한 폐허가 아니었습니다.
그 파괴의 끝에는 사흘 만에 사망의 권세를 깨부수고 다시 일으키시는 찬란한 부활의 능력이 굳건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전을 헐라는 말씀은 우리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두려운 명령인 동시에,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풍성함으로 초대하시는 가장 깊고 다정한 부름입니다.
오늘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과연 무엇이 아직도 주님의 정화의 채찍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꼿꼿하게 버티고 서 있는가.
나는 정말 그분이 새롭게 세우시는 거룩한 새 성전의 돌이 되어 이 세상을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갈망하는가.
이 묵직한 질문 앞에 오래도록 머물며 자신의 연약함을 돌아보는 그 자리에서, 우리의 신앙은 형식적인 종교적 장식에서 벗어나 살아 있는 순종이 되고, 메마른 습관이 아니라 생명의 복음으로 온전히 거듭나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낡은 자아를 아프게 헐어 내시는 그 거룩한 손길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으로 견고하게 세워지는 공동체의 소중한 한 모퉁이 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교회의 진짜 모습은 세상의 이익을 좇는 삭살 한 시장바닥이 아니라,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영광을 세상 끝까지 드러내는 살아 숨 쉬는 성전으로 든든히 서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