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장재형목사

1.유대인의 특권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로마서 3장 1-2절은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라는 물음에서 시작한다. 바울은 여기서 곧바로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라”고 대답한다. 즉,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부르심이 있었는데, 그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점이다. 이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도 유사하게 적용되는 중요한 영적 교훈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이 그 말씀을 보존했기에, 우리 역시 그 전통을 이어받아 성경을 소중히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장재형 목사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구원의 큰 그림을 이루시는 과정에서 특정 민족을 선택하셨고, 그들에게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그것이 곧 유대인의 특권이자 사명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성경을 소중히 여기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사랑을 발견하며, 그것을 세상에 전파해야 하는 의무를 부여받은 것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9장에서 유대인의 특권을 여럿 열거하는데, 거기에 따르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양자 됨, 영광, 언약, 율법 제정, 예배, 약속,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탄생했다는 영광스러운 자랑이 있다(롬 9:4-5).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인이 무조건 폐기되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점을 시사하며, 단지 그들이 의무에 합당치 못한 삶을 살았고 결국은 메시아를 영접하지 않는 선택을 했기에 문제가 생겼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논리는 바울의 전통적 배경인 유대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동시에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는 복음의 문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불순종이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했음을 드러내느냐”라는 물음이 뒤따른다. 바울은 로마서 3장 3-4절에서 단호히 말한다.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유대인이 믿음에서 실패하고 불순종한다고 해서, 그들의 “불신”이 곧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효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장재형 목사는 이런 본문을 설교하며 “인간은 언제나 흔들릴 수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흔들리거나 거짓을 행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의 신실하심은 어떠한 인간적 실패로도 취소되거나 무효화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바울은 시편 51편 4절, 그리고 시편 100편 5절 등의 구절들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시고 인자하시며, 그 성실이 대대에 미친다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라는 표현은, 인간이 자기 죄를 숨기고 하나님께 반론하거나 항변하려 해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즉, 아무리 인간이 “왜 하나님은 이러이러하시냐,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드시고 방치하시냐”고 하나님을 비난하더라도,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의로우심은 변하지 않고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신다는 것이다.

바울은 3장 5-8절에서 이러한 논리를 더욱 확장한다. 사람들은 “우리의 불의가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니, 이왕이면 더 죄를 짓는 게 낫지 않느냐?”라든지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자”라는 극단적이고 왜곡된 결론으로 치달을 수 있다. 바울은 이에 대해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확실하게 선을 그으며, 그런 식으로 복음을 왜곡하여 비방하는 자들은 오히려 정죄를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장재형 목사 또한 “하나님께서 악을 계획하셨다거나, 악을 일부러 허용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식의 해석은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악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사랑의 관계를 중시하시는 분이다. 악이 발생했을 때에도 그분이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절대 주권이 있지만, 그것이 곧 ‘악 자체가 하나님의 계획’이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따라서 악을 저지르면서 ‘결국은 하나님이 잘 되게 하실 것’이라고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 된다”라고 설교한다.

정리하자면, 로마서 3장 1-8절까지의 요지는 “유대인에게는 분명 특권이 있고, 그 특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으로 대표된다. 그러나 그들이 믿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인간이 악을 행함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선을 더 극적으로 드러낸다고 주장하거나, 그래서 악을 더 행해도 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궁극적 심판 주이시며 의로우시다”라는 바울의 선포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주제가 오늘날 교회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장재형 목사는 가르친다. 교회가 세상에 대해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실패한 모습이 드러나도, 그것이 곧 하나님의 권위나 신실하심이 손상되는 일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그러한 실패를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선택받은 이스라엘이 거룩한 사명을 지키지 못했을 때 멸망으로 치달았던 것처럼, 교회 역시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동일한 불순종을 반복한다면, 구약의 역사에서 보았던 심판이 우리에게도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 점이야말로 로마서 3장 초반부에서 강조하는 ‘특권과 책임’의 긴장감이며, 바울은 그 긴장 위에 하나님의 절대적 의와 신실하심을 놓는다.

따라서 첫 번째 소주제에서 우리는 다음을 요약해볼 수 있다. 유대인(이스라엘)이 받은 특권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 특권을 올바로 사용하지 못했음에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무너짐이 없다. 인간의 불신과 불순종은 하나님을 무효화할 수 없지만, 그러한 불순종을 “구원의 과정에서 필요한 단계” 혹은 “악조차도 하나님이 쓰시기에 우리는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된다”는 식으로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곧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2.인간의 죄에 대한 오해

로마서 3장 9-18절에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결국 모든 인간이 다 죄 아래 있다”는 사실을 천명한다. 그는 앞서 1장과 2장에서 이방인들의 죄와, 또 자랑하던 유대인들의 죄를 차례로 지적해왔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라고 말한다(롬 3:9). 이는 유대인뿐 아니라, 바울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죄의 지배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이 점은 장재형 목사도 여러 차례 설교에서 강조하는 바이다. “우리는 남의 죄를 보고 쉽게 정죄하지만, 사실은 내면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죄의 뿌리를 외면하고 싶어 한다. 바울은 죄가 이방인에게만 있는 것도, 유대인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라고 가르친다. 죄는 모든 인류가 공유하는 공통된 숙명 같은 것이며,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바울은 10-18절에서 유명한 ‘카라즈(charaz)’ 기법을 사용한다. 여러 시편과 예언서의 구절을 하나씩 인용해, 인간의 죄를 종합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10절)는 전도서 7장 20절, 시편 14편 및 53편에서 인용된 내용이다. 한마디로, 인간이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길 만한 조건은 전혀 없다는 절대 선언이다. 바울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구약의 다양한 본문을 꿰어(카라즈) 인용한다.

인간의 죄는 주로 세 가지 영역에서 드러난다. 첫째, ‘생각과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죄다. 바울은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으며”(롬 3:11)라고 지적한다. 이는 곧 인간이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며, 하나님을 무시하는 교만에 사로잡혀 있다는 뜻이다. 사실 하나님을 떠나 죄의 본성대로 살면, 마음과 생각이 부패하여 하나님을 싫어하거나 무시하는 지경에 이른다.

둘째, ‘말’의 죄다. 바울은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롬 3:13-14)라고 말한다. 시편에서 이런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사람의 언어가 얼마나 쉽게 악독, 거짓, 저주로 채워질 수 있는지를 강변한다. 야고보서 3장도 혀를 지옥 불과 연결지어 설명할 만큼, 말의 문제는 심각하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본문을 다루며 “우리가 동일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을 저주하거나 거짓말을 일삼는 죄를 범한다면, 그 혀는 열린 무덤의 냄새와 다르지 않다”고 표현한다. 그만큼 죄가 마음에 뿌리내리면, 혀를 통해 죽이는 말, 상처 주는 말, 독설이나 거짓말이 솟아나는 것이다.

셋째, ‘행동’의 죄다. 바울은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르다.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다. 평강의 길을 알지 못했다”(롬 3:15-17)고 한탄한다. 인간의 마음이 부패하고 말이 독해지면, 결국 행동으로도 나타나게 된다. 살인, 폭력, 분쟁, 전쟁, 수많은 사회적·개인적 부패가 여기서 시작된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극단적 살인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해도, 근본적으로 인간이 ‘이기심’ ‘증오’ ‘탐욕’ 등의 마음에 사로잡히면 결국 행동으로 악이 분출된다.

바울이 마지막으로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롬 3:18)고 선언하는 것은, 이런 모든 죄가 결국 ‘불경건’, 즉 하나님을 무시하는 교만에서 연유함을 보여준다. 인간이 스스로를 주인 삼아 살고, 하나님의 통치를 부정한 결과가 바로 죄의 현주소라는 것이다. 이처럼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이 오직 자기 힘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이 대목에서 장재형 목사는 “교회 안에서도 신앙 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혹은 말씀을 조금 안다는 이유로, 자신이 의롭게 된 듯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직면해야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해진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기서 다시 오해에 빠질 수 있다. “인간이 다 죄인이고,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우리가 굳이 어떻게 사느냐는 중요하지 않은 것 아니냐?”라는 생각이다. 어떤 이들은 아예 “죄가 죄를 더해서 결국은 더 큰 은혜가 드러나지 않느냐”며 방종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바울은 앞서 3장 8절에서 이미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라며, 그런 주장은 말도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장재형 목사 역시 “악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선이 나타날 수는 있어도, 그것이 결코 악을 합리화하거나 미화해주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거듭 강조한다. 요셉의 경우처럼, 형들의 악한 행동을 하나님이 선으로 바꾸셔서 구원의 큰 그림을 이루게 하셨지만, 그것이 곧 ‘형들의 악행이 선한 의도로 미리 계획된 것’이라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바울이 3장 9-18절에서 말하는 핵심은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으며, 인간이 스스로 의롭다 여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론의 핵심 출발점이다. 죄인을 죄인이라 깨닫게 하는 일, 그래서 결국은 은혜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알게 하는 일이 바로 복음의 첫 단계다. 장재형 목사가 이에 대해 말하길, “교회가 가장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은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구원이 절실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죄가 죄인 줄도 모르고 사는 사람에게 그 죄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말씀의 역할이다. 여기서부터 참된 회개와 구원의 문이 열린다”고 한다.

따라서 두 번째 소주제의 요점은 ‘인간의 전적 타락’이라는 주제를 정확히 짚고, 우리가 모두 죄인임을 알 때라야 비로소 복음의 필요성이 분명해진다는 데 있다. 나아가 그것을 오해하여 “결국 죄가 큰 만큼 은혜도 커지니 마음껏 죄를 지어도 된다”거나, “악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왜곡해서도 안 된다. 그저 하나님의 절대적 거룩 앞에 서볼 때, 모든 사람은 무릎을 꿇어야 마땅하다. 이 강력한 메시지는 바울의 로마서 죄론을 지탱하는 핵심 기둥이며, 장재형 목사가 여러 설교와 강해에서 반복적으로 설명해온 주제이기도 하다.

3.율법과 죄 인식, 그리고 구원의 길

로마서 3장 19-20절은 바울의 죄론(3장 1-18절까지)을 마무리하며, 율법의 역할과 한계를 다시 한번 짚어준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유대인들이 자랑하던 율법은 사실상 그들을 ‘의’로 이끄는 완전한 통로가 되지 못했다. 물론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말씀이고, 그 속에는 인류가 걸어야 할 ‘의로운 길’이 담겨 있다. 하지만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은 그 율법을 완벽히 지켜낼 수 없다. 결국 율법은 죄를 ‘드러내고 고발’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 율법을 통해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죄인인가를 깨닫게 된다. 문제는 율법을 단순히 “나는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는 더 깊은 필요를 자극한다는 데 있다.

바울은 율법이 가진 역할을 ‘성화(聖化)를 위한 하나의 거울’로도 본다. 율법이 없었다면, 인간은 스스로가 죄인이라는 사실조차 자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유대인들은 “우리는 율법을 받았으니, 이방인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해왔으나, 바울의 결론은 “율법을 줬어도 그것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에, 결국 너희도 죄인이며 심판 아래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의롭다 인정받을 수 없음을 선언하는, 복음 신학의 근본 진리로 자리 잡는다.

장재형 목사도 여러 강해와 저서에서 “율법의 행위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로마서의 메시지를 자주 강조한다. “율법이 좋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와 뜻을 나타내는 소중한 계시지만, 우리의 죄를 씻고 새 생명을 주는 능력까지 제공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율법은 죄를 폭로하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 역할을 할 따름이다”라고 한다.

3장 19-20절은 곧이어 바울이 말할 ‘이신칭의’(3장 21절 이하)로 넘어가기 직전의 결론부이다. 즉, 율법과 죄에 대해 충분히 논하고 나서,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 외에는 답이 없다”는 논리적 결론을 예고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바울은 인간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죄의 현실’을 조명한 뒤, 바로 이어서 21절 이하에서 그 죄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의를 선포한다.

물론 이 본문만 보면, 인간은 단지 율법 앞에 입이 막히고 심판이 두려운 존재로 비춰진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절망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함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새로운 소망의 길”에 대한 전제다. 즉, 인간이 정말 처절한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왜 필요한지를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 죄와 심판이라는 진단을 명확히 하지 않는다면, 복음 자체가 설득력을 잃는다. 인간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나는 죄인이며, 스스로 의롭게 될 길이 없다. 율법을 안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자각이 일어나야만, 복음이 복음답게 빛나게 되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에서도 “이 시대는 전반적으로 ‘죄책감’이나 ‘심판의 두려움’을 경시하며, 본질적 회개와 변화 없이도 신앙생활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풍조가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 심령에 뼈아픈 각성이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율법은 그 각성을 돕는 도구다. 어느 누구도 율법을 통해 의를 얻을 수 없으나, 율법을 통해 죄인임을 발견하고 결국은 그리스도께 나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율법의 선한 역할을 제대로 경험하는 길이다”라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율법은 불필요한 것인가?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로마서 7장에 가면, 바울은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고 단언한다(롬 7:12). 문제는 우리의 죄된 본성이 율법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율법이 인간을 정죄하기 때문에, 인간은 “어찌할꼬” 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가 말하는 복음의 질서다.

결국 바울의 논지에 따르면, 인간이 스스로 내세울 수 있는 의로운 행위는 아무것도 없고, 선천적/후천적 죄성 때문에 모든 부문에서 부패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달으면 오히려 길이 열린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죄 사함이 완성되었고,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를 새 피조물로 삼으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미 선포되었다. 율법을 통해 “나는 죄인”임을 절감한 자가,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이 베푸신 의”를 옷 입고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지점을 강조하며, “복음은 분명히 절망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그 절망은 우리를 진정한 소망으로 안내하기 위한 통로다. 율법에 의해 드러난 죄가 절망감을 가져오고, 스스로 의롭지 못함을 자인하게 만들며, 결국은 우리를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게 한다. 그 순간이야말로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턱이 된다”고 풀이한다. 동시에 그는 “이 메시지가 진정 교회 안에 깊이 울려 퍼져야 하며, 모든 성도가 매일 회개하고 다시 복음 앞에 선다면, 교회야말로 세상에 참된 빛이 될 수 있다”고 설파한다.

이렇듯 로마서 3장 1-20절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율법과 언약이었고, 오늘날 교회에는 복음과 성령의 임재일 수 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죄 아래 있음’,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지만, 율법 행위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긴밀히 이어 놓은 단락이다. 바울은 이어지는 3장 21절부터 드디어 인간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칭의)를 명확하게 설명할 예정이다. 하지만 그것에 앞서 반드시 필요한 전제는 ‘죄’를 깨닫는 일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찾지 않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교만’ ‘입술에 가득한 악독’ ‘발로 달려가는 불의’ 등, 총체적이고 보편적인 타락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직시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세 번째 소주제의 핵심은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지만, 스스로 의를 이룰 수는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함’을 선언하는 데 있다. 율법의 참뜻은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고, 동시에 우리 마음에 죄책을 일깨워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그 누구도 진정으로 의로워질 수 없다. 이 죄 문제를 바라보는 성도들이라면, 늘 “내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 교회에 전하고자 했던 복음의 전개이며, 교회사 속 여러 설교자들, 그리고 오늘날 장재형 목사가 독자와 성도들에게 반복해서 전달하는 메시지다.

결국 우리는 이 모든 결론을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로마서 3장 1-20절은 바로 그 전초(前哨)로서, 믿음으로 의를 얻게 되는 기쁨이 얼마나 크고 절대적인지 실감하도록 먼저 죄를 면밀히 들여다보게 만드는 장(場)이다. 이러한 바울의 논리 구조를 이해하면, 복음을 향한 우리의 감사와 감격은 훨씬 깊어질 것이다.

(단, 바울이 율법을 공격하거나 폐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살아야 함을 전제한다는 점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려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마 5:17)고 하셨던 진술이 그 토대를 단단히 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과 의를 보여주는 거울이자 기준이지만, 결국 우리의 죄를 고발하며, 예수님의 보혈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그 기준을 충족시킬 수 없음을 반증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볼 수 있다.)

이로써 바울의 핵심적 메시지는 “모두가 죄 중에 있고, 아무도 율법 행위로는 의를 이룰 수 없으나, 그리스도 안에 희망이 있다”가 된다. 장재형 목사도 이러한 복음의 진리를 역설하며, 교회가 먼저 회개와 겸손으로 돌아서고,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함께 살아갈 때, 비로소 세상에 진정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결국 로마서 3장 1-20절은 죄와 은혜의 극명한 대비 속에서, 구원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를 직면하고 회개해야 한다는 불변의 사실을 일깨우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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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장 1-20절 강해를 소주제로만 구분하여 정리했다. 첫째로, 유대인의 특권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논하였고, 둘째로,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죄성과 그에 대한 오해들을 살폈으며, 셋째로, 율법과 죄 인식의 관계,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길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나, 하나님은 참되시고 신실하시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의를 베푸셨다”라는 복음의 절대적 선포에 있다. 인간은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지만, 죄를 자각하고 돌이켜 예수께 나아가는 길만이 구원의 답임을 로마서 3장은 힘있게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 메시지를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얼마나 절실하게 붙들어야 하는지를, 여러 시대의 설교자들과 마찬가지로, 장재형 목사 또한 거듭해서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천 가족을 위한 권면 – 장재형목사

에베소서 6장 속 관계의 재발견

에베소서 6장에 담긴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주인에 관한 가르침은 장재형(장다윗)목사가 꾸준히 강조해온 ‘천국 윤리’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는 오래도록 가정의 기초를 다지는 관계 회복의 중요성을 설파해 왔는데, 그 핵심은 단순한 도덕적 권면이 아니라 복음적 통찰에 있다. 즉 “취약해 보이는 이들에게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이라는 관점에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아내와 자녀, 종에게 먼저 권면하는 방식은 단순히 ‘순서가 역전된’ 표현을 넘어, 약자를 배려하시는 천국 가치관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해석할 때, 가정과사회와 교회 모든 영역에서 ‘힘의 역학관계’가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 서로를 세워 가는 것이야말로 “천대까지 이르는 복”을 여는 열쇠라고 역설한다.

장재형목사의 설교는 주로 성경 본문의 흐름을 따라가면서도 시대적 적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후반부부터 6장에 이어지는 말씀을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는 교훈과 맞물려 해설하며, 가족 공동체와 사회생활을 다시금 조명해 낸다. 그는 “가정의 기초가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원래라면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주인과 종”이라고 말해야 할 위계 질서가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주인” 순으로 제시된 점이야말로 “천국 윤리”이자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요구되는 역설적 세계관”이라 말한다. 그리고여기에 “관계의 비밀”이 숨어 있으며, 복음을 아는 이라면 심각하게 깨어진 가정사나 불화 속에서도 “주 안에서”라는 전제 아래 새로운 돌파가 가능함을 강조한다. 요컨대 “주 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전제하는 문구이기에, 이 말씀은 단순한 윤리 강의를 넘어 실제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적 약속이 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에베소서 6장을 통해 현대사회에 제시하는 핵심 주제는 크게 네 가지다. 첫째, 아내와 남편 관계 안에 깃든 창조의 비밀과 사랑의 책임. 둘째, 자녀와 부모의 관계가 보여 주는 공경과 축복의 접점. 셋째, 종과 주인의 관계가 시사하는 ‘섬김과 권위’의 역설. 넷째, 성령으로 충만해진 삶이 어떻게 일상을 뒤바꿔 가는가에 대한 실제적 적용이다. 그는 이러한 네 가지 주제를 통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정과직장, 사회 전체를 ‘천국 가치관’으로 변화시키는 도구임을 거듭 강조한다. “약한 자들을 먼저 일으키시는 주님”이라는 관점이야말로 네 주제를 관통하는 메시지이며, 이를 놓치면 기독교 윤리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자’는세상 수준에 머물게 된다고 지적한다. 이제 이 네 가지 주제를 중심축 삼아, 장재형목사의 관점과 설교 내용을6500단어 분량으로 풀어 보겠다. 소제목만 달았을 뿐, 다른 형식 구분은 두지 않고 연속된 흐름으로 정리한다.

아내와 남편의 관계 속 창조의 비밀과 사랑의 책임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5장 후반부터 6장에 걸쳐, 사도 바울이 “아내들과 남편”의 관계를 다룰 때 예상 밖으로“아내”를 먼저 언급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남편을 가정의 대표자라 여기는 전통적 문화에서라면, ‘남편이 먼저, 그다음 아내가 나중’이라는 흐름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바울은 아내에게 먼저 권면을 전한 후, 남편에게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성경은 익숙한 위계를 성령 안에서 새롭게 해석하도록 부르신다”고 해설한다. 통념에따르면 남편이 주도권을 쥐고 이끌어야 하지만, 복음적 관점은 “강자가 아니라 약자에게 먼저 말씀하시는” 신비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는 가정의 갈등이란 결국 남편과 아내가 서로 섬기고 존중하는 원리를 놓칠 때 생긴다고 본다. 이는 창세기 2장에 나타난 창조 원리, 곧 ‘둘이 합하여 한 몸을 이루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라’는 명령이 깨질 때 발생하는 비극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이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에 비유하며, 남편과 아내가 각각 상호 보완적으로 역할을 감당한다고 가르친다. 장재형목사는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듯 남편은 아내를 위해 헌신하라는 말씀과, 교회가 그리스도를 공경하듯 아내도 남편을 공경하라는 말씀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말한다.

종종 교회 전통에서 “남편은 머리요, 아내는 순종하라”는 본문이 가부장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인용되곤 했지만, 장재형목사는 “바울이 아내 억압을 지지한 적은 결코 없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남편은 아내를 위해 목숨까지내줄 만큼 사랑하라”는 메시지 쪽에 더 큰 무게가 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아내의 ‘주께 하듯 순종하라’는 말과남편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은 떼어 낼 수 없으며, 상호성을 놓치면 큰문제가 생긴다는 이야기다. 장재형목사는 “성령 안에서 깨어나면 서로 높여 주려 한다. 하지만 성령의 능력이 없으면 한쪽이 권위를 과도하게 주장하거나 다른 쪽이 온전히 순종을 감당해 내기 어렵다”고 말한다.

에베소서 5장 33절 “아내도 남편을 존경하라”는 구절이 있지만, 그보다 앞서 남편에게 먼저 요구되는 것은 ‘자기희생적 헌신’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원리를 ‘헌신적 리더십’이라 부르며, 만약 이 희생적 사랑이 배제된 채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만 일방적으로 내세우면 가정이 무너진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동시에 아내가 진정으로 공경하는 태도를 보이면 남편이 더욱 기꺼이 헌신하려는 마음을 얻게 된다는 역설도 강조한다. 예컨대 가정의경제적 어려움이나 육아 부담 등 일상적 갈등에서, 아내가 남편을 무시하면 남편도 스스로 책임을 지려는 의지를잃어 간다는 것이다.

“성령에 취하라”는 말씀이 왜 중요한가에 대해서, 장재형목사는 “인간적 자원만으로는 기꺼이 헌신하는 사랑을지속하기가 어렵다”고 설명한다. 사람들이 피곤하고 감정적으로 지치면, 누구나 서로를 배려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 충만에 들어가면, 서로에게 먼저 희생을 베풀 수 있는 영적 힘이 생긴다. 술은 잠시 들뜨게 할수는 있어도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반면 성령이 부어지면, ‘주의 기쁨과 인내와 배려’가 공급되어 가정을 치유해 간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특별히 언급하는 또 다른 관점은 “창조 때 저녁이 시작”이라는 창세기의 표현이다. 우리는 “아침이하루의 시작”이라 여기지만, 성경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고 말한다. 그는 이것이 전통적인 인식과 반대되는 개념이라며, 가정에서도 ‘강자’가 아니라 ‘약자’를 먼저 세우시는 것이 성경적 창조 질서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아내에게 먼저 말씀하심”은 곧 “가정 안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남편, 그리고 남편을 주께 하듯 공경하는 아내” 사이의 상호 존중을 통해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창조 질서의 비밀이며, 가정의 사랑과 책임을 동시에 구현하는 길이다.

자녀와 부모의 관계가 보여주는 공경과 축복의 접점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6장 1~4절에 나오는 자녀와 부모의 관계가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는 십계명의 구조를통해 해석될 수 있다고 말한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라는 구절에서, 우선“주 안에서”라는 전제가 중요하다. 그는 이것이 단순히 조건부 문장이 아니라, 복음을 아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근본 선언이라고 주장한다. 세상에는 폭력적이거나 무책임한 부모도 많지만, “주 안에서”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전제한다. 믿지 않는 가정이라면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이 불가능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주 안에서”라는 토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6장 2절은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라고 말한다. 장재형목사는십계명 중에서 ‘부모 공경’이, 하나님께 드리는 계명(14계명다음에 오는 사람 사이 계명(510계명)을 잇는 핵심적다리라고 본다. 즉 “부모 공경”이야말로 하나님과 이웃을 연결하는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는 한국 사회가 급격한변화를 겪는 가운데 “부모 공경”이 점차 약화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교회 공동체가 이를 회복하기 위한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깨어진 가정 안에서 학대당한 자녀라도, 주 안에서 새로운 ‘아버지 되심’을 발견할 때, 용서와 화해가 가능해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장재형목사는 이어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6장 3절의 축복을 단순화하지 않는다. “부모에게잘하면 장수한다”는 피상적 해석이 아니라, “공경”이라는 개념이 ‘위로 올려드리는’ 행위임을 강조한다. 그는 자주 인용하는 예화를 들어, 손녀가 단 하나의 아이스크림을 사서 할머니께 드리자, 그 집의 아이가 “엄마는 왜 할머니만 좋아하냐”며 서럽게 우는 사례를 언급한다. 그러나 그 할머니는 미안함보다도 “지혜롭네”라 말하며 먹어 넘긴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에서 “공경은 위를 향해 올려드리는 실천”이자, 결국 그것을 본 다음 세대가 또다시공경함으로 선순환이 생긴다고 해설한다.

또한 마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이 “고르반” 전통을 책망하시는 장면을 인용하며, “부모에게 드릴 것을 다 하나님께 드렸으니 그만”이라고 주장하는 외식적 태도를 지적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지 말라”고 엄중히 말씀하셨고, 이는 곧 우리가 신앙에 열심을 낸다고 해서 부모 공경을 등한시하는 것이 합리화될 수 없음을 뜻한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이런 왜곡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며, “사랑이 모든 관계를 회복한다”는 복음의 본질을 강조한다. 그 사랑이 곧 주 안에서 흘러나오는 힘이므로, “부모 공경”은 단지 문화적 미덕이 아니라 ‘복음으로이어지는 명령’이라고 풀이한다.

에베소서 6장 4절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과 관련해, 장재형목사는 “아비들”에게 먼저 경고가 주어진 점이 흥미롭다고 말한다. 이는 부모가 자녀의 마음을 무시하고 가부장적 권위만 휘두르지 않도록 막아 주는 지침이라는 것이다. 현실에서 많은 자녀가 아버지를 불편하고 무서운 존재로 느끼기 쉬운데, 복음 안에서 “아버지”는 자녀를 존중하며, 주께서 주신 생명으로 대해야 한다. ‘주의교양과 훈계’란 세속적 지식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전제로 한 ‘엄격하지만 품어 주는 양육’을 가리킨다.

장재형목사는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부모에게 자녀를 억압할 권리가 주어진 것은아니다”라고 요약한다. 그는 이 관계를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관계”에 빗대어, ‘노엽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녀의 감정과 개성을 존중하고, 상처 주지 않으려 애쓰는 태도라고 설명한다. 또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한다’는것은 무조건적 방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끌되 늘 복음이 흘러나오도록 돕는 자세라는 것이다.

결국 에베소서 6장 속 자녀와 부모의 관계는 가정이 “천국의 기초 단위”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교회와 학교, 가정이라는 교육 삼각구도에서, 그 중심에 가정이 놓인다는 것이다. 가정이 무너지면 교회와 사회도 흔들릴 수밖에없다. 이때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부모”라는 두 축이 올바로 설 때라야건강한 기틀이 마련된다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주장이다. 그는 깨어진 가정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기에, 복음의 능력을 통해 이 틈이 메워질 수 있다고 호소한다. 교회는 “상처받은 자녀나 혼란을 겪는 부모에게 피난처가 되고, 그들을 복음으로 치유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종과 주인의 관계가 시대를 초월해 시사하는 섬김과 권위의 역설

에베소서 6장 5절 이하의 종과 주인의 관계는 오늘날 대부분 국가에서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기에 직접 적용이 어렵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바울 시대를 이해하되, 이 말씀이 21세기에도 직장이나 사회적 약자와강자의 관계를 관통하는 원리를 보여 준다고 말한다. 여기서도 바울은 “상전”이 아니라 “종”에게 먼저 말한다. 전통적으로라면 힘 있는 “주인”에게 권면이 향해야 할 텐데, 복음은 정반대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복음의 비밀이자 천국 윤리”라고 주장한다. 세상이라면 권력자에게 아부하거나 조심스레말해야 하지만, 복음의 방향은 “종들아”라고 먼저 부르며,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권면한다. 이는 종이 세상에서는 낮은 지위에 있더라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결코 가치가 뒤처지지 않음을 드러내며, 하나님께서는 “눈가림이나 사람 기쁘게 하려는 동기가 아닌, 진실한섬김”을 귀히 여기신다는 뜻이다.

그는 이를 “하나님 앞에서의 동기”라는 표현으로 자주 풀어낸다. 직장이나 조직 안에서 성도가 일하면서, 겉치레만 하고 속으로는 불성실하면 그 마음이 이미 하나님 앞에서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반면 하찮아 보이는 일도“주께 하듯”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된다. “종이나 자유자나 선을 행하면 주께로부터 보상을 받는다”(6:8)는 말씀도 이 원리를 뒷받침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성경은 ‘선을 행하면 하나님이 갚으신다’고 말하는 보상 신앙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이 보상이 세속적 성공이나 물질적 풍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하늘에서의 존귀’나 ‘영적 축복’은 반드시 뒤따른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6장 9절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는 명령이 얼마나 파격적인지 말한다. 당시 로마 법 아래서 노예는 주인의 재산이었고, 주인은 종의 목숨까지도 좌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 하나님”을 언급하며, 종과 주인이 모두 “하늘에 계신 상전” 아래 있다고 가르친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이 노예 제도를 곧바로 해방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회가 노예 제도를 묵인했다”는 오해가있지만, 복음이 노예와 주인을 형제로 삼고, 결국 제도 자체를 무너뜨리는 내적 동력을 제공했다는 점을 빌레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해설한다.

장재형목사는 현대사회에서도 누구나 ‘종’ 혹은 ‘주인’의 위치를 경험한다고 말한다. 어떤 조직에서는 상급자의지위에 있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누군가에게 지시받아야 하는 처지일 수 있다. 중요한 건 성령 안에서 늘 “주께 하듯” 일하고, “공갈”을 그쳐야 한다는 점이다. 세상 권위와 권력은 영원하지 않고, 모두가 결국 하나님 앞에 동등한존재다. 그러므로 ‘주인’이 된 이들은 ‘섬김의 리더십’을 실천해야 하며, ‘종’의 자리에 있는 이들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세’를 지켜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강조한다.

성령으로 충만해진 삶이 가정과 사회를 뒤바꾸는 실제적 적용

장재형목사의 설교는 끝내 “술 취하지 말라 오직 성령 충만을 받으라”(엡 5:18)는 말씀과 연결된다.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주인의 관계에 결정적 전환을 일으키는 열쇠는 “성령의 내주하심”이다. 그는 “두려움, 걱정, 분노, 상처 속에서도 먼저 사랑할 힘은 오직 성령께서 임하실 때 생긴다”고 거듭 말한다. 그렇게 성령에 충만해진 개인이 가정과 교회와 일터에 선한 영향력을 흘려보낸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 안에도 갈등과 상처가 존재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특히 깨어진 가정의 자녀들이 교회로 몰려온다. 교회가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참된 ‘아버지 되심’을 경험하게 해야 할 책임이 크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교회가 먼저 “천국 윤리”를 실천해야 한다. 교회 지도자들도 ‘공갈’을 그치고, 외형적 치장보다는 섬김을 앞세우며, 부모와 자녀들 역시 서로를 보듬으려는 태도를 배워야 한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부모가 성령 안에서 먼저 회개하고, 남편이 아내에게 헌신하면, 아내가 그를 공경하기 시작한다. 그런 식으로 ‘순서의 역전’과 ‘사랑의헌신’이 진행될 때, 비로소 가정이 세워진다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은 어떻게 유지될까. 장재형목사는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는 습관이중요하다고 말한다.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이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하듯, 우리의 영혼은 매일 죄를 회개하고 성령의 능력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찬양과 감사가 충만한 예배 공동체에 속하는 것도 필수적이라고본다. 함께 모여 성령을 구하며 찬양할 때,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 되어 일하시는 성령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개인의 약함을 넘어서, 서로에게 “주께 하듯” 대하는 소위 ‘하나님 나라의 미리 맛보기’가 교회 안에서 구현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교회 생활에 치중하느라 가족을 돌보지 않는 “어긋난 열심”을 경계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고르반” 개념과도 맞닿는 문제다. 즉 “나는 하나님께 헌신했다”며 부모나 가족을 외면하는 태도는 복음의 정신이 아니며, 진정한 헌신이라면 오히려 가정부터 돌보도록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는 수많은 실제 사례를 예로 들어, “가정이 깨어져 버렸는데 교회 봉사만 열심히 한다면 세상이 교회를 어떻게 보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가정이 어렵더라도 부모나 배우자를 함부로 대하지 말고, 가능한 한 사랑과 공경을 실천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길을 여신다”고 격려한다.

결국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세 쌍의 관계, 곧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녀, 종과 주인은 “성령 충만이 실제 현장에서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보여 주는 사례다. 장재형목사가 거듭 언급하듯, 복음의 역설을 붙들면 우리의 삶터가 달라진다. 세상은 강자를 우선시하지만, 에베소서 6장과 복음은 “약자에게 먼저 말씀하심으로 강자를 바꾸어 가신다”는 길을 제시한다. 아내가 먼저, 자녀가 먼저, 종이 먼저 등장하고, 그들에게 먼저 권면하시는 순서가 바로 “천국의 순서”라는 말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약자의 억울함을 그냥 외면하라”는 뜻이 아니라고 덧붙인다. 오히려 “불의는 바로잡아야하지만, 복음적 해결책은 언제나 ‘먼저 나에게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아내든 자녀든 종이든, 하위 계층에 놓여 있다고 여겨지는 이들이 ‘주 안에서’ 순종과 공경을 실천하면, 그 선행을통해 “하늘에 계신 상전”이 직접 보응해 주신다는 믿음이 바울 서신의 골자다. 동시에 남편·부모·주인 같은 ‘위’에놓인 이들은 “공갈을 그치라”는 경고에 동일하게 직면한다.

복음은 이처럼 인간 세상의 상하 질서를 뒤흔들지만, 그 뒤흔듦 안에서 ‘더 높고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드러난다. 장재형목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여 준 것이 바로 이 역설적 승리”라고 한다. 예수께서는 로마 제국을 무력으로 전복하는 대신, 십자가를 지심으로 죗값을 거두고 영원한 생명을 여셨다. 이는 세상의 통념과 거꾸로 된 방식이며, 에베소서 6장의 윤리가 뿌리내린 기초이기도 하다.

그는 교회가 에베소서 6장의 메시지를 잘못 이해하여, “옛 노예 제도와 가부장적 권위를 옹호했다”는 과오를 경계한다. 복음의 참된 힘은 이런 왜곡을 뛰어넘어, 사랑과 존중과 섬김을 실천하는 공동체로 우리를 초대한다. 현대사회에서도 법과 제도는 평등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직장 내 갑질과 가정 폭력이 비일비재하다. 교회 안에서도‘성직자’ 대 ‘평신도’ 권위를 악용하는 문제가 생길 때가 있다. 그럴 때 교회는 어느 편을 들기보다, “서로 형제가되라”는 복음적 근본 메시지를 선포하고, 실제로 이행하도록 제도적·영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또, 궁극적 목표는 ‘적대’가 아니라 ‘화해와 화평’에 있음을 기억하라고 장재형목사는 덧붙인다.

결론적으로, 장재형목사가 에베소서 6장을 해설할 때 제시하는 사중(四重)의 메시지는 동일한 맥을 이룬다. 첫째, 아내와 남편 관계에서 “먼저 기초를 놓는 자”가 아내라는 역전적 사고는 복음의 역설적 순서를 드러낸다. 둘째, 자녀와 부모 관계에서 “주 안에서 공경”하라는 말은 약속 있는 첫 계명으로 천대까지 흐르는 축복의 물꼬를 튼다. 셋째, 종과 주인의 관계에서 “종에게 먼저 말하고, 주인에게는 공갈을 그치라”는 명령은 외형적 지위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마음 상태가 더 중요함을 일깨운다. 넷째, 이 모든 것을 실천하게 하는 동력은 “술 취하지 말고 성령충만하라”는 권면이며, 성령 충만이야말로 가정과 사회를 치유하는 열쇠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에서 “이 비밀이 크다”는 표현을 자주 인용한다. 이 ‘비밀’은 결코 감추어진 신비가 아니라, 십자가가 보여 준 ‘인간 이성 너머 하나님의 역설’이라는 의미다. 십자가처럼, 복음 역시 겉보기에 세상의 관념과 맞지 않지만, 그 길을 통해 가장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아내가 먼저, 자녀가 먼저, 종이 먼저라는 흐름은“강자가 먼저가 아니다”라는 하나님 음성을 상징하며, 사랑의 섭리가 실행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현대 교회가 이본문을 접할 때, 과거 잘못을 반복하지 않고 “복음이 지닌 전복적·치유적 능력”을 재발견해야 한다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강력한 주문이다.

그는 설교 말미마다 “이 말씀을 붙들고 삶으로 나아가라. 우리는 천국 백성이자 이 땅의 문화 속에서 성령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아내가 남편을 세워 주고,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며, 종이 주인을 섬기는 중에 주인까지도 복음앞으로 나오게 하자. 이것이 십자가의 역설이요, 새로운 피조물의 삶이다”라고 권면한다. 이런 관계 역전을 통해가정이 서고, 교회가 회복되며, 사회가 밝아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된다는 것이다. 성령에 충만해진 사람은그 사랑을 머금고만 있지 않고 반드시 흘려보내기 마련이기에, 부딪히는 현실마다 복음의 향기가 드러나게 된다는 결론이다.

이렇듯 장재형목사의 에베소서 6장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놀랍도록 유효하다. 그는 종종 “성경은 거꾸로 읽어야제맛”이라는 농담을 하는데,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주인과 종”이라는 위계를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주인”으로 읽어야 성경의 본의를 제대로 붙잡을 수 있다는 뜻이다. 겉보기엔 평등한 듯 보여도 실제로는 약자를 무시하기 쉬운 현대사회에서, 교회는 “약자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증언할 책임이 있다. 십자가가 증명한것처럼, 그 역설적 사랑이야말로 에베소서가 전하는 천국 윤리의 정수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유대인이나헬라인, 종이나 자유자, 남자나 여자의 구분이 없고, 우리는 모두 한 형제자매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종과주인이라는 구분은 이 땅에서 서로를 보듬고 “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을 학습하도록 주어진 자리일 뿐이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6장 설교를 마칠 때마다 “주여, 이 교훈을 실제로 살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며, 예배를 마친 뒤에도 “가정과 일터에서 이어지는 예배자가 되라”고 촉구한다. 이 예배의 현장이야말로 가정과 직장이며, 그곳에서부터 천국의 질서가 새롭게 흘러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가 수도 없이 강조해 온 메시지는, 오늘날 가정 붕괴와 세대 갈등, 직장 내 갑질이 흔한 현실에서 가장 근본적인 복음의 해답을 제시한다. “성령충만을 구하며, 약자를 먼저 배려하라”는 것이 요점이며, 아내와 남편이 서로 공경하며, 부모와 자녀가 사랑으로연결되고, 종과 주인이 섬김과 겸손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하늘에 계신 상전”께서 우리의작은 선행에도 반드시 신령한 보상을 내리신다는 믿음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의 기쁨이 된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에베소서 6장의 가르침은 1세기 지중해 세계의 노예 제도나 가부장적 문화에 타협한 것이아니며, 오히려 복음을 통해 그러한 구조들을 안에서부터 뒤집는 강력한 동력을 제공해 왔다고 장재형목사는 설파한다. 그 동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으며, 교회가 이 복음을 제대로 해석하고 실천한다면, 깨어진 가정과 왜곡된 사회를 치유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특히 다문화 가정이나 이민 공동체가 증가하는 현실에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먼저 약자에게 손을 내미시는 분’이기에, 교회는 낯선 문화나 난민 등 소외된 이들을 따뜻이 환대해야 한다. 그렇게 가정에서부터 시작된 복음의 실천이 교회와 사회 전체로 뻗어 나갈 때, 우리가 꿈꾸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실제로 확장된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장재형목사는 “이 비밀이 크다”는 고백 안에 담긴 경외심을 늘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이성을 훌쩍 뛰어넘는다. 순서가 거꾸로인 것 같고, 약자에게 먼저 말씀이 임하는 듯 보이지만, 이것이복음의 지혜이며 능력이다. 창조가 어둠 속 저녁부터 시작됐듯, 가정과 사회의 절망스러운 문제들 한가운데서도새로운 아침이 열릴 수 있다. 이는 “하늘에 계신 상전”께서 공의롭고 인격적인 사랑으로 모두를 보살피시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주인”이라는 세 쌍의 관계가 발산하는 복음의 빛은, 개인과 가정과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치유로 이어진다. 그것이 곧 “천대까지 흐르는 축복”이며, 술 취함 대신 성령 충만을옷 입은 사람들에게 약속된 새로운 삶의 패턴이라고 장재형목사는 강조해 왔다. 그렇게 수백 번, 수천 번 설교해도 달라지지 않는 그의 결론은, “성령 없이는 이 길을 갈 수 없지만, 성령과 함께라면 가정과 세상과 영혼이 바뀐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에베소서 6장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강력한 도전이자 위로라는 말로, 그는 늘설교의 문을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