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드러난 대속의 길 – 장재형목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구원의 핵심이며, 동시에 인류의 죄와 하나님의 사랑이 극적으로 교차되는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 19장 17절부터 27절까지 기록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과정은 그 어느 복음서보다 간결하면서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해 줍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골고다라 불리는 해골의 언덕으로 가셔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장면이 매우 짧게 묘사되지만, 그 안에는 헤아릴 수 없는 비극과 동시에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을 묵상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혹독하고 처절한 것이었는지를 기억하며, 그 길이 곧 나를 위한 대속의 길이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드러난 모든 사건과 모습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무한한 겸손과 헌신, 그리고 죄로 얼룩진 세상의 잔혹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증언”임을 강조합니다. 이 말씀을 바탕으로, 십자가로 향하시는 예수님의 걸음과 그 곁을 지켰던 사람들, 그리고 그 자리에 동원되었던 로마 군인들의 모습까지 하나하나 천착해 보고자 합니다. 오직 하나의 소주제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라는 대주제 아래에서 모든 내용을 통합하여 정리하되, 그 속에 담긴 보편적이고도 영원한 복음의 진리와 교훈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넘겨지는 과정을 보면, 먼저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유대인들의 엄청난 압박과 거짓된 참소로 인해 사형 언도를 받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음을 어느 정도 직감했지만, 결국 로마 총독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지키고 유대 지도자들과 민중의 폭동을 방지하기 위해, 예수님께 십자가 형을 언도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도가 내렸던 결정 가운데 변화되지 않았던 한 가지가 있었는데, 바로 십자가 위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붙이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고 항의했지만, 빌라도는 “내가 쓸 것을 썼다”라고 단언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심을 오히려 선포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가리켜“아이러니 속에서 드러난 진리”라고 말합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정치적 계산에 의해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몰았지만, 동시에‘진실한 왕’이 예수님이심을 자기 손으로 선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판단과 죄악된 의도가 얽혀 있는 역사 한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섭리가 드러나는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신 골고다의 길은, 유대인의 전통적 죄의식과도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구약 레위기 16장에는‘속죄일’에 관한 규정이 나옵니다. 대제사장은 염소 두 마리를 준비해 하나는 여호와께 속죄제로 바치고, 다른 하나는 온 백성의 죄를 전가받아 광야로 내보내 버립니다. 죄 없는 짐승이 사람들의 죄를 대신 져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혹은 광야로 쫓겨나 죽임을 당하는 방식으로 이스라엘 공동체가 죄 사함의 은총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속죄양(scapegoat)’의 죽음을 통해 백성들의 죄가 사해진다는 유대 전통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궁극적이고 영원한 완성에 도달합니다. 이사야 53장 또한 이러한 ‘고난받는 종’의 이미지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사 53:5).” 주님은 마치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같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고난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완성하신 곳이 골고다 언덕이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사야 53장과 요한복음 19장을 함께 묵상하며 “예수님께서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실 때, 그것이야말로 이사야 선지자가 바라본 고난의 종 예언이 성취되는 현장이었다”고 강조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주님이 죄수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직접 지고 걸어가셨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형은 고대 로마의 사형 제도 중에서도 가장 잔인하고 치욕스러운 방법이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자는 이 형에 처해지지 않았고, 주로 피지배 민족이나 극악범들에게 선고되었으며, 사형수는 자신이 죽을 형틀인 십자가를 직접 지고 도시 곳곳을 돌아 처형장으로 갔습니다. 이는 죄인에게 최고의 치욕을 안기고, 동시에 시민들에게 ‘반역하면 이렇게 죽는다’라는 경고 효과를 주기 위한 잔혹한 의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이미 유대인들에게 매와 채찍, 조롱과 모욕을 당해 몸이 심각하게 지친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마태복음 27장과 마가복음 15장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너무 쇠약해져 쓰러지시자, 로마 병사들이 구레네 사람 시몬을 억지로 끌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합니다. 시몬은 북아프리카의 구레네, 곧 현재의 리비아 지역에서 왔는데,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순례차 왔다가 예수님의 극형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방인으로서 특별한 의도가 있던 것도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영광(?)스럽고도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마가는 시몬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소개하는데, 나중에 로마서 16장 13절에서 바울이 문안하는“루포”라는 인물이 시몬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를 통해 교회 전승은 시몬과 그의 가정이 십자가 사건 이후 기독교 공동체의 중요한 멤버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어떤 이는 십자가를 억지로 지지만, 그 억지의 상황에서도 주님의 고난을 함께 경험하게 되면 오히려 그것이 축복의 통로가 된다”라고 설명합니다. 시몬은 본디 여행자로서 잠시 예루살렘에 머무르다 돌아갈 예정이었을지 모르지만, 십자가를 짊어진 그 경험이 그의 인생과 가정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행렬은 인간의 악한 제도와 권력의 폭력성, 그리고 무관심한 군중들의 시선 속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옷이 벗겨지고, 가시면류관을 쓰신 채 조롱받고, 몽둥이와 채찍에 맞으시며, 갈보리 언덕까지 그 고통을 감내하셨습니다. 갈보리(골고다)는 히브리말로 해골이라는 뜻인데, 참혹한 형벌의 장소라는 이름에 걸맞게 사방은 처형된 자들의 뼈나 해골이 굴러다니는 흉측한 곳이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극악한 범죄자들과 동일 선상에 놓고 싶었기에, 두 강도를 예수님의 좌우편에 배치함으로써 예수님을 더욱 치욕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이 양쪽 강도 사이에 매달린 모습은 역으로 예수님의 무죄함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극적으로 부각하는 장면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수치와 조롱의 상징이었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도리어 구원의 능력과 은혜의 보좌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강도들과 똑같은 형벌을 받으셨지만, 실제로는 죄가 없으심에도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참된 희생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9절 이하에서는 빌라도가 작성한 명패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에 대해 대제사장들이 분개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고 빌라도에게 항의했으나, 빌라도는 “내가 쓸 것을 썼다”라고 못 박습니다. 이 짧은 대화 안에는, 이미 한 번 결정된 ‘유대인의 왕’이라는 호칭이 취소될 수 없음을 시사합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음에도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를 거부했고, 오히려 로마 총독인 빌라도를 통하여 그 표현을 철회하게 만들려 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자기 권위로 쓴 문구를 번복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온 세상에 “예수께서 진정한 왕이시다”라는 말을 로마어(라틴어), 헬라어(그리스어), 히브리어로 동시에 알려 버린 셈이 되었습니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이 사건에 담긴 상징적 의미를 분명히 인지했고, 독자들이 “십자가 위에서 완성된 하나님의 왕 되심”을 깨닫도록 기술하고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악의와 잔꾀조차도 당신의 구원 계획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나 어떤 다른 길로 갈 수 없는 존재이며,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는 불의한 행동마저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목적을 실현하는 경로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요한복음 19장 23절 이하에서는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지는 모습이 기록됩니다. 당시 십자가형을 집행하는 병사들은 사형수의 마지막 소지품을 자신들끼리 나누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옷도 그렇게 네 명의 군병이 각각 한 부분씩 차지했고, 통으로 짠 속옷에 대해서는 찢지 않고 제비를 뽑아 소유를 결정했습니다. 요한은 이 장면을 시편 22편18절(“그들이 내 옷을 나누며 내 겉옷을 제비 뽑나이다”)과 연결 지어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모습 속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한 가지 진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진 모든 것을 다 빼앗기셨고, 심지어 마지막 몸을 가릴 옷마저도 군병들이 나누어 가지려는 장면이 펼쳐졌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완전한 비움”의 극치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에도 머리 둘 곳이 없으셨다고 기록되지만(마 8:20), 마지막 운명하시기 직전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신 상태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기꺼이 전부를 버리셔서, 궁극적으로 우리를 위한 대속물이 되셨다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그 어떤 소유도 주장하지 않으시고, 오직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시는 희생으로 남으셨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두 가지 대조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옷까지도 제비뽑기로 차지하려는 군병들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내주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세상은 탐욕스러운 군병처럼 남의 것까지 빼앗으려 하지만, 예수님은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이 대비는 곧 인간 죄성의 극명한 단면과,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완전한 희생인가를 동시에 상기시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군병들의 모습이 아닌,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쏟아부으신 예수님의 삶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오늘날‘소유’에 집착하는 현대인에게 주는 강력한 도전입니다. 탐욕에서 벗어나,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겸손과 나눔, 그리고 자기 희생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종종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조차 각자 나눠 가질 몫을 찾아 다투는 모습과 비슷해지기도 한다”라고 지적하며, “우리는 언제나 십자가 아래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셨던’ 주님을 바라보며, 소유와 탐욕을 회개하고 버리는 결단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다음으로 요한복음 19장 25절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었던 몇몇 여인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이모 살로메(마가복음에 의하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가 그 현장에 서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당시 여성들은 사회적 지위가 낮았고, 남성 제자들처럼 공식적 제자로 부름받지 못했으나, 역설적이게도 십자가 최후의 현장에는 바로 이 여인들이 끝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그곳은 극악한 처형이 이뤄지고 있는 공포스러운 자리였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되는 죄인의 측근으로 보이면, 자칫 로마 당국자들로부터 연대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을 지키기 위해 그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이는“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요일 4:18)는 말씀을 생생히 보여 줍니다. 장재형목사는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떠한 위협과 공포도 그 발길을 붙잡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여인들을 바라보시며,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서로를 맡기십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2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육신의 어머니를 끝까지 돌보시는 깊은 효심을 드러내기도 하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믿음으로 맺어진 새로운 가족”의 개념을 제시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나님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마 12:48-5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마리아는 육적 어머니이면서도 주님의 길을 따라야 할 믿음의 제자 중 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상에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부르실 때, 이는 ‘단순히 육신적인 모자(母子) 관계’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서로를 돌봐야 하고, 주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가족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의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원리를 확립하시며, 남겨진 자들을 향한 사랑을 마지막까지 베푸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삶 전체가 마치 하나의 대서사시처럼 완성되는 순간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심으로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지니셨으나, 죄는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공생애 동안 하늘나라 복음을 전파하시며,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고치시고, 죄인들과 세리, 창녀들에게 다가가 구원의 소망을 선포하셨습니다. 결국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와 민중의 오해 속에서 극형을 선고받으셨으나,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고 십자가에서 운명하십니다. 인간이 보기에는 비극이었으나, 하나님의 시선에서는 죄악된 세상을 향해 독생자를 내어주신 최고의 사랑이었고, 거룩한 대속의 사건이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서로 입맞추는 자리”라고 표현하며, 그 이유를 “십자가는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이 드러나는 동시에, 죄값을 치루는 정의가 완성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라 설명합니다.

유월절 시기라는 배경 역시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합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중, 어린 양의 피로 죽음의 사자가 지나가도록 했고(출 12장), 이를 기념하여 해마다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바로 유월절 기간에 일어났습니다. 이는 단순한 역사적 우연이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신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값을 단번에 치루시는 것을 예표하고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말미암아, 죄인인 우리는 영원한 죽음의 형벌에서 해방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출애굽 사건에서 생명의 보호막이 되었듯이, 예수님의 피가 죄인을 구원하는 능력이 된다는 점이 극적으로 부각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길은 단순한 죽음의 행진이 아니라, 인류 구원의 사명을 완수하는 승리의 행진이기도 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롱과 모욕, 고통과 피가 가득한 처절한 패배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실제 영적 실재에서는 죄의 권세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승리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선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다 이루었다”(요19:30)였다는 사실에서도, 이 길이 패배가 아닌 완성임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단지 슬픔과 고통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너머에 있는 부활의 승리를 함께 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영원한 생명의 관문으로 전환되었고,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평강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기록된 십자가 사건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차원의 적용점을 깨닫게 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원수를 사랑하라”(마 5:44)고 하셨을 때, 이는 결코 추상적인 윤리적 명령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직접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 로마 군병들과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무리들의 조롱과 폭력을 몸소 겪으며, 그들을 향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말로만 사랑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악의 증오를 모두 받아내고도 끝내 저주와 복수를 외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분은 선으로 악을 이기셨고(롬 12:21), 원수에게조차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드러내셨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과 실제 삶이 완전히 일치했던 결정적 증거”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른다면, 가정과 직장, 사회와 인간관계 안에서 증오와 분노를 내려놓고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둘째, 십자가는 “서로의 짐을 지는 공동체”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2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저주, 그리고 연약함을 짊어지셨듯, 우리도 서로의 슬픔과 고통, 부족함과 상처를 함께 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철저히 타인을 위한 희생이고 나눔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십자가를 묵상하고 믿는다면, “나만 구원받았다”는 개인적 만족에 머무르지 않고, 교회와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 공동체 안에서 약한 지체가 있다면, 그것이 곧 내 문제임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야말로 십자가 정신의 구현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십자가 신앙은 결코 독립된 ‘나’의 신앙으로만 존재할 수 없다. 주님이 피 흘려 사신 공동체 속에서 서로 연대하며 서로의 짐을 나눌 때, 십자가가 교회 안에서 현재적 능력으로 살아 움직이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 있었던 여인들의 모습과 제자 요한의 모습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남성 제자들은 대부분 두려움에 도망쳤지만, 연약해 보이는 여성 제자들은 끝까지 남아 주님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와 당부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27)는 말씀은, 육신의 어머니를 위한 예수님의 마지막 가족적 사랑의 표현이자, 동시에 믿음 안에서 맺어진 영적 가족을 향한 선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시고, 그 믿음 안에서 서로를 돌보고 연합하는 교회를 탄생시키실 것입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어떤 마음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하는지를 더욱 선명히 알려 줍니다.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사건을 통해 요한복음 19장 17절부터 27절에 이르기까지 드러나는 핵심 메시지는, 첫째로는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죽음까지 감당하신 대속의 희생이며, 둘째로는 그러한 희생을 통해 인간의 구원이 가능하다는 사실이고, 셋째로는 그 희생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주님은 새로운 공동체의 가족애와 부활의 소망을 주신다는 점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시선은 애통함에 그쳐서는 안 되고, 그 깊은 고통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인식해야 합니다. 또한 십자가 사건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재현되도록, 원수를 사랑하고, 서로의 짐을 지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십자가 묵상의 결론으로 “우리도 자신이 지고 가야 할 십자가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자기 십자가’는 우리의 이기심, 죄성, 세상적 욕망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본받아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희생할 것을 의미합니다. 구레네 시몬처럼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게 되면, 그 속에서 뜻밖의 축복과 영적 각성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로서,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해야만 합니다.

이처럼 요한복음 19장 17-27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구약의 속죄 제사와 고난받는 종의 예언, 신약에서의 죄 사함과 구원의 성취,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출발을 집약적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골고다라는 해골의 언덕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처참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구원 경륜 속에서는 가장 영광스럽고도 승리의 자리입니다. 흑암과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빛과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셨고, 부활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믿는 모든 이에게 죄 사함과 영생, 새로운 삶의 기준과 희망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할 때마다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말씀을 나눌 때, “우리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2)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십자가 사건을 다시 묵상하면 할수록 우리 심령 깊은 곳에서 감격과 감사가 솟아나야 합니다. 예수님이 단지 위대한 스승이나 철학자가 아니라, “나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신 구주”라는 사실을 더욱 온전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 깨달음이야말로 우리 일상에 파급력을 가지며, 이기심과 탐욕, 분노와 미움, 두려움과 염려를 대속의 사랑으로 녹여 내는 원동력이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십자가를 붙든 자는 결코 예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며, “그리스도인이라면 십자가의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스스로의 십자가를 지고 죽음까지 감당하신 것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결정적 구원 행위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 날에 예수님의 죽음을 조롱하고, 서로 이득을 챙기며, 혹은 외면했지만, 소수의 여인들과 사랑하는 제자 요한은 끝까지 주님의 곁에서 그 고통과 슬픔을 함께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조차 자신을 못 박는 자들을 용서하시고, 어머니를 제자에게 부탁하시며, “다 이루었다”는 선포로 모든 대속의 사역을 완수하셨습니다. 십자가는 한 인간이 처참하게 죽어 간 사건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죄인을 다시 품으시는 사랑의 시작이며, 부활의 문을 여는 열쇠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 19장에 기록된 십자가 사건을 단순히 고통스러운 역사적 비극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는 우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거룩한 작정이 있고, 하나님의 공의가 있고, 무엇보다도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 있습니다. 교회가 붙들어야 할 핵심 진리는 바로 여기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이 십자가 위에서 완벽히 구현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한다면, 삶의 방향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탐욕과 물질주의, 무관심과 분노가 가득한 세상 속에서, 기꺼이 자신을 드리며 이웃을 섬기고 진리의 길을 걷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기억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길을 따라갈 때,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과 기쁨, 그리고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고, 십자가 없이는 생명이 없다”는 바울의 고백(갈 6:14)을 자주 인용하면서, “십자가가 교회의 모든 기초이며, 또한 모든 생명의 원천”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그 말대로, 교회와 성도의 참된 능력과 영광은 화려한 외형이나 세속적 부유함에 있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죽음과 고난을 끊임없이 기억하며, 그 사랑을 실천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죄인인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었고, 그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오늘도 회개하고 돌아서며, 은혜 안에서 새 생명을 누립니다. 이것이 없으면 기독교 신앙은 공허한 껍데기에 불과할 것입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 생명이 있고, 거기서 비로소 부활의 영광도 열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길을 따라가며, 다른 이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요한복음19장 17-27절에서 시작된 이 십자가 이야기는, 결국 부활의 아침까지 이어져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어젖히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성도들이 이 복음의 빛 속에 살아가며, 십자가의 사랑과 진리를 전파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요약하자면,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라는 위대한 사건은 죄인 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가장 극단적이며 결정적인 사랑의 표현이며, 동시에 죄와 사망의 세력을 영원히 파멸시키는 승리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두고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설의 현장”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죽음과 패배, 치욕과 모욕이 난무한 현장 같았지만, 사실은 그곳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 그리고 극진한 구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교만과 욕심, 불의와 잔혹함이 낱낱이 폭로되지만, 동시에 무한한 사랑과 은혜, 그리고 부활의 소망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대속의 현장인 십자가를 붙들고, 나 자신과 교회 공동체, 그리고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 ‘살아 있는 복음’으로 적용되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죄 용서와 구원이 임했다는 이 진리를 다시금 가슴에 새긴다면, 우리의 예배와 기도, 그리고 이웃 사랑과 봉사, 복음 전파가 모두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어둠에 속한 자들이 아니며, 탐욕과 이기심에 사로잡혀 살 존재들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자기를 버리는 사랑”을 삶 속에서 재현하고, 골고다 언덕에서 흘려주신 보혈의 의미를 붙들고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 각자의 인생과 교회가 참된 능력과 기쁨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정체성이요 사명입니다. 그리고 장재형목사는 이 사실을 언제나 가르쳐 왔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문턱마다, 십자가가 가장 앞서며, 십자가가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해야 한다.” 십자가 없이는 어느 것도 온전할 수 없음을 깊이 인식하면서, 매일의 걸음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묵상하고, 그 사랑을 이웃과 세상에 흘려보내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종교적 상징이나 형식적 장식물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마음 그 자체입니다. 성자 예수님의 순종과 희생, 성부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리고 성령님의 능력이 한꺼번에 결집된 사건이 곧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죄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감히 “주님,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고백이 우리의 입술에만 머무르지 않고 실제 삶이 되려면, 매일 십자가를 붙들고 예수님의 심장을 닮아 가는 꾸준한 영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 훈련 속에서 탐욕과 교만이 녹아지고, 무관심이 사랑으로 변화되며, 갈등이 화해로 이어지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따라서 요한복음 19장 17절부터 27절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역사상 가장 처절한 비극이면서 동시에 가장 찬란한 희망의 순간입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묵상할 때마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했듯 “십자가가 우리의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름받은 이상, 우린 다시금 결단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비웃던 군중이나, 십자가 아래서 마지막 옷까지 가져가려던 군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레네 사람 시몬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같이 지고, 여인들과 요한처럼 끝까지 주님 곁을 지키며, 그 사랑에 감사하고 자발적 헌신으로 답하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베풀어진 용서를 힘입어, 어떤 원수라도 사랑하고, 서로 짐을 져 주며,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는 일에 열정을 쏟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그분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보혈이 우리의 죄와 상처를 정결케 하고, 우리의 교회와 공동체, 사회와 열방까지도 회복시키는 능력이 됨을 믿음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라는 주제는 신앙의 본질을 압축해 놓은 결정체이자, 우리 신앙 여정의 출발점이자 목표 지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는 교회도, 구원도, 제자도도, 부활과 영생도 없습니다. 장재형목사가 여러 설교를 통해 거듭 강조해 온 바와 같이, 우리는 이 십자가를 늘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의 풍조가 바뀌고, 역사의 물결이 거세도, 십자가 위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 겸손히 엎드려 회개하고, 감격과 감사로 주님을 예배하며, 우리의 작은 삶 속에서라도 십자가의 은혜를 나누는 것이 우리가 지녀야 할 최고의 기쁨이자 특권입니다. 이 은혜를 날마다 기억한다면, 세상에 줄 수 없는 평강과 위로, 능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요한복음 19장 17-27절”이라는 짧은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더욱 깊이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길은 단지 1세기 예루살렘의 역사적 사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믿는 자의 심령과 공동체 안에 다시 살아나는 ‘현재진행형 은혜’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은혜가 교회와 성도를 계속해서 깨우고, 세상의 구석구석에까지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동력이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과해야만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 있으며,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진정한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십자가의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우리도 각자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결단을 새롭게 다지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참된 왕이시고, 대제사장이시며, 구원자이십니다. 그리고 그 왕의 백성으로, 그 대제사장의 맡긴 사역을 이어받는 자로, 그 구원자의 은혜를 세상에 선포하는 자로 살 때, 우리 역시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www.davidjang.org

십자가 사랑 – 장재형목사

이 글은 장재형(장다윗)목사의 요한복음 13장 1절의 말씀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를 중심으로, 고난과 사랑에 대한 성경적 통찰을 정리한 것이다. 특히 사순절 기간에 우리가 깊이 묵상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그리고 그 고난의 참된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의 ‘끝까지 사랑하심’에 있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본문에서 제시된 시편 119편, 로마서 5장, 빌립보서 1장과 3장, 골로새서 1장, 디모데후서 1장과 2장, 베드로전서 2장과 4장의 구절들을 함께 살피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단지 ‘저주나 불행’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도하는 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제자들이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여전히 세상적 가치관에 사로잡혀 누가 더 크냐를 다투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음을 보여 주심으로써, 우리 역시 섬김과 낮아짐의 삶을 통해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영광을 맛보게 될 것임을 가르치신다. 이러한 맥락에서 장재형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단순히 슬픔이나 인간적 연민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놀라운 섬김과 사랑의 본질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제자도의 핵심이라고 역설한다. 첫째로 ‘고난의 의미와 그리스도의 사랑’, 둘째로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의 실천적 적용’이라는 흐름으로 정리해 본다.

Ⅰ. 고난의 의미와 그리스도의 사랑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에 대해 우리는 사순절 기간마다 더욱 각별히 묵상하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사순절은 단지 슬프고 고통스러운 예수님의 수난을 바라보는 시간이 아니라, 그 고난 속에 담긴 초월적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기회라고 강조한다. 요한복음 13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한 발걸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장면이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증언한다(요 13:1). 여기서 “끝까지 사랑하신다”라는 말은 시간적 한계나 조건적 제약이 붙지 않은 ‘완전한 사랑’을 의미하며, 그 사랑이 바로 십자가로 이어지는 길 자체임을 보여 준다.

장재형 목사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흔히 ‘고난’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적 시선에서 보면 ‘저주’이거나 ‘괴로운 시련’인 듯 보이지만, 예수님의 시선에서 보면 이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결단’이다. 예수님은 고난을 피해 가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심으로써 인간의 죄와 한계를 짊어지셨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 곧 세상을 향한 구원의 의지를 드러내셨다. 성경은 이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이라고 말한다. 시편 119편 67절은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고백하고, 71절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말한다. 즉, 고난이라는 과정은 하나님 말씀이 진정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통로로서의 역할을 한다.

장재형 목사는 로마서 5장 3~4절에서 바울이 말한 “환난 중에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라는 구절 역시 같은 맥락에서 설명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알게 되는 과정은 인간적 고난을 통과할 때 더 온전히 일어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말은 단순히 고통을 맞닥뜨리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 속에 담긴 예수님의 섬김과 은혜, 그리고 죄인을 향한 용서의 깊이를 깨닫는다는 뜻이다. 빌립보서 1장 29절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한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오히려 은혜의 통로가 된다는 역설이 담겨 있다.

또한 빌립보서 3장 10~11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고백한 바울의 말은, 고난이 단지 목적 없이 주어지는 현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기 위한 거룩한 길임을 보여 준다.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낮아짐과 섬김, 그리고 자신을 철저히 내어 주신 사랑을 본받을 기회이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바울은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고 말함으로써, 고난이 교회를 세우고 공동체를 섬기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이는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고난은 홀로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확장이요 섬김의 기회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디모데후서에서도 바울은 반복해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한다(딤후 1:8, 2:3). 이 권면의 배경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긍정적 의미를 지닌다는 신학적 이해가 깔려 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두려움 속에서 고난을 피하려고만 해서는 안 되고, 그 안에 담긴 주님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2장 20~21절과 4장 13절에서도,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일이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장차 주님께서 영광 가운데 나타나실 때 큰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고난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필연적이며, 결국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해 주는 길”이라고 해설한다.

사실 이런 가르침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이를 실제 삶에 적용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성경에서 고난에 대한 말씀이 반복해서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교회와 성도들은 고난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장재형 목사는 “고난 없이 영광은 없다”라는 진리를 자주 언급한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룬 구원의 사역은, 바로 그 고난 자체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강력하게 증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고난을 너무 쉽게 저주나 벌로만 해석해 버리면,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끝까지 사랑하심”을 놓쳐 버리게 된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 즉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모습 속에는 ‘고난을 기꺼이 수용하시는 의지’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요한복음 13장 1절의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표현을 두고, 여기서 말하는 ‘끝까지’의 범주에는 시간적 한계가 없으며(“끝까지”=마지막 순간까지), 또한 희생이나 헌신의 제약이 없다고 설명한다. 즉, 제자들이 실수하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거나 심지어 부인하더라도, 예수님의 사랑은 멈추지 않고 그들을 향해 있었다. 그 사랑의 정점이 십자가의 희생이며, 바로 그 희생이야말로 예수님의 고난이 저주가 아니라 사랑임을 증명한다. 고난은 결국“사랑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임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우리가 요한복음 13장을 살펴볼 때, 그 첫 구절에서 이미 예수님의 이러한 결단이 선포된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곧 다가올 고통스러운 죽음을 뚜렷이 인식하셨음을 알려 준다. 그리고 그 죽음은 십자가라는 참혹한 형벌을 동반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향해 끝까지 사랑하시는 길을 선택하셨다. 이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초월적인 사랑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사람이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고난을 자초하는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은 본래 상대를 위한 희생과 헌신을 필연적으로 내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예수님의 고난은 자신을 낮추고 종의 모습으로 살아가신 주님의 사랑을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다.

이에 더해 마태복음 20장과 누가복음 22장에 기록된 제자들의 다툼 장면을 보면, 예수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세속적인 가치관, 즉 누가 더 크냐,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느냐에 집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마태복음 20장 20-27)고 선언하신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을 주목하며, “세상의 지배자들은 권세를 부리고 높아지는 것을 목표로 삼지만, 주님의 나라는 그 반대”라고 강조한다. 참된 제자라면, 낮은 자리에서 형제를 섬기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자신을 낮추는 마음으로 서로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보여 주신 발 씻김의 사건(요 13:4~5)은 바로 이러한 가르침을 삶으로 구현한 현장이다. 당시 제자들은 누구 하나 먼저 종의 역할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친히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물을 대야에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다. 이것은 중동의 풍습상 종이 해야 할 가장 낮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 아무도 먼저 나서서 형제의 발을 씻기거나, 사랑의 섬김을 실천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님께서 직접 본을 보이심으로써, 사랑은 결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섬김으로 입증’해야 함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장재형 목사는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은 인류에 대한 구원이 얼마 남지 않은 긴박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에게 오히려 ‘누가 더 크냐’가 아니라 ‘누가 진정 종처럼 섬기느냐’가 중요하다고 몸소 보여 주셨다”라고 설명한다.

요한복음 13장에 펼쳐진 예수님의 고난의 시작은, 그저 고통스러운 장면이 아니라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극적인 무대다. 예수님은 그 사랑을 말로만 선포하지 않으시고, 몸소 낮은 자리를 택하셨다. 그것이 십자가로 가는 길의 본질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기꺼이 지심으로써, 죄인인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신실하고 변함없다는 사실이 역사 속에 분명히 각인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장재형 목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고난 속에서도 사랑을 놓지 않는 것”이며, “섬김으로써 그 사랑을 증언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십자가는 고난이지만 동시에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다.

Ⅱ.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의 실천적 적용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고난은 사랑의 절정이며, 십자가는 바로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여 주는 현장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성경의 메시지를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에 대한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누가 크냐”라는 제자들의 세속적인 다툼을 마주했을 때, 발을 씻기는 섬김으로 답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끝까지 사랑하시는 삶’을 살려면 구체적인 적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라고 말씀하신다. 즉, 주님이 보여 주신 본을 따라 실천하는 것이 제자됨의 표지라는 의미다. 그런데 실상 우리의 내면에는 여전히‘누가 더 크냐’는 비교 의식,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 섬김을 받으려는 태도가 자리 잡고 있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날 교회 안에도 명예욕, 권력욕, 과시욕이 은연중에 만연해 있다. 하지만 주님의 나라에서는 오히려 낮아지고 더 섬기는 자가 참으로 큰 자다. 우리는 이 가치관의 급진적 전환을 경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예수님의 ‘끝까지 사랑하시는’ 모습을 본받을 수 있을까? 먼저, 우리는 사랑이란 감정이나 말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의지’임을 인식해야 한다. 요한복음 13장의 예수님은 제자들이 누가 더 크냐고 다투고 심지어 뒤이어 자신을 배반할 제자가 있음을 아셨음에도(요 13:2, 21~27),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 이는 사랑이 상대의 반응 여부나 착함에 좌우되지 않음을 보여 준다. 사랑은 곧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내 몫’이며, 고난을 동반하더라도 감당해야 할 부름이라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사랑은 상대가 그에 걸맞은 태도를 보이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또 인류에게 보여 주신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이라고 설명한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은 ‘실천적 섬김’으로 구체화된다. 발을 씻겨 주시는 행위는 단순히 겸손을 과시하는 제스처가 아니다.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먼지투성이가 된 발을 씻는 일은 매우 실질적인 섬김이었다. 예수님은 ‘말로만, 마음으로만’ 사랑하지 않으시고, 실제적인 행동으로 제자들의 필요를 채워 주셨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보살피고, 가족이나 이웃들에게 헌신적으로 다가가며, 혹은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타인의 필요를 살피고 기꺼이 돕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장재형 목사는“참된 사랑은 언제나 행동을 동반한다. 아무리 그럴듯한 말을 해도, 정작 주변의 사람들을 돕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사랑이라 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특히 누가복음 22장 14~2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기 전에 유월절을 제자들과 함께 지키기 원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떡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는 ‘주심’, ‘내어 주심’이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사랑이란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고, 그 내어 줌이 바로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성만찬을 기념할 때마다, 그분의 희생적 사랑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몸을 찢어 주시고 피를 흘려 주신 그 실제적 사랑을 묵상해야 한다. 그것은 단지 예식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렇게 서로 섬기라는 말씀 앞에 서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교회는 예수님의 희생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끝까지 사랑하는 삶’을 각 성도에게 권면해야 하며, 그 사랑이 세상으로 흘러 나가도록 격려해야 한다. 만약 교회가 이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은 공허한 구호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실제로 제자들은 초대교회 시절 서로의 필요를 채우고 재산을 기꺼이 나누며(행 2:44~45), 박해와 고난 가운데서도 서로를 돌보는 모습을 보였다. 그것이 로마 제국을 변화시키고, 복음의 능력을 드러낸 강력한 증거였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교회가 참된 사랑의 실천으로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할 책임이 있다. 그것이 곧 세상 사람들이 ‘아, 저들이 정말 예수의 제자이구나’라고 깨닫게 되는 결정적 표지”라고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변을 돌아보면 ‘발을 씻어 줘야 할’ 사람이 너무 많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소외된 이들, 이주민, 장애인 등 우리가 일상 속에서 외면하기 쉬운 존재들이 있다. 예수님이라면 그들의 발을 기꺼이 씻겨 주셨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을 돌아보면서도, 종종 ‘내가 더 중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끝내 외면하거나, 누가 섬겨 주겠거니 하고 미룰 때가 많다. 하지만 장재형 목사는 “예수님께서 소외된 사람들, 병자와 세리, 창기, 문둥병자와 함께하시고 그들을 치유하시며, 그들에게 다가가셨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시는 모습이 바로 십자가에 담긴 사랑의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는 ‘누가 나를 섬겨 줄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누구를 섬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더욱 깊이 체험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에 ‘종말론적 가치관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장재형 목사는 “새 하늘과 새 땅, 즉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이전의 가치관과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라는 역설이 바로 그 나라의 법칙임을 설명한다. 세상에서는 더욱 높아지고, 더욱 인정받으며,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성공으로 간주되지만, 하나님 나라는 낮아짐을 통해 오히려 높은 자리에 오르고, 자신을 버리고 남을 세워 줌으로써 참된 존귀를 얻는 세계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예수님은 바로 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장 실제적으로 보여 주신다.

고난을 두려움으로만 대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사랑의 신비’를 깨닫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환경 속에서 끝까지 사랑하기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사람들이 우리를 몰라주고, 심지어 핍박하는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우리는 끝까지 사랑하는 삶을 포기하면 안 된다”고 거듭 역설한다. 왜냐하면 부활의 영광은 단지 고난을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채우는 것’을 통해 주어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마주했을 때, 제자들의 배반과 세상의 조롱을 마주했을 때, 자신을 철저히 내어 주는 사랑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그것이 부활을 이루는 능력으로 연결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사랑이 없이는 고난이 오히려 저주가 되겠지만, 사랑 안에서의 고난은 영원한 생명을 품고 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수동적 희생’이나 ‘억울함’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이고 능동적인 사랑의 표현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라는 가장 치욕스러운 형벌을 선택하신 것은, 인간의 죄와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 사랑의 깊이를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장재형 목사는 “십자가는 전적으로 사랑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을 전파하고 증언하는 증인으로 부름받았다. 그러나 그 사랑을 말로만 알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닮아 가야 한다”고 권면한다. 사랑은 고난을 동반한다. 하지만 바로 그 고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부활의 소망을 간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을 멀리서 관조하거나 예수님의 아픔에 대해 단순한 동정을 갖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동일한 사랑을 실천할 것인가’를 묵상하며 결단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때로는 교회 안에서조차 갈등과 상처를 경험하기도 한다. 지도자와 성도 간, 성도들 상호 간에 ‘누가 옳으냐’, ‘누가 더 인정받아야 하느냐’, ‘누가 먼저 대접받아야 하느냐’ 같은 문제로 다투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러한 다툼을 하는 우리를 향해 “너희는 종이 되라, 서로의 발을 씻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신다. 오늘날에도 이 말씀은 그대로 유효하다. 우리가 서로 발을 씻어 주고, 서로의 부족함을 감싸 주며, 형제자매를 섬기는 삶을 통해, 교회는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성도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종의 모습으로 헌신할 때에야 비로소, 세상이 교회를 보고 ‘아, 저들이 진정 예수의 제자들이구나!’ 하고 알게 된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모습이 오늘날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재현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랑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른다. 남을 살리고 세우는 일에는 언제나 고난이 동반된다. 하지만 그 고난은 ‘저주’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고난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 그리고 그분이 우리 각자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보다 깊이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를 위해서, 나의 욕심을 위해서” 감내하는 고생은 지치고 피곤하기만 할 때가 많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헌신하는 고난은 달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다. 요한복음 13장에 기록된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은, 그 사랑 안에 기쁨과 감사, 그리고 부활의 소망까지 담아 놓으셨다. 장재형 목사는 이 복음을 지속적으로 전하면서, 제자들이 예수님 곁에서 여러 해를 지냈음에도 결코 체화되지 못한 ‘섬김과 사랑’을, 현대 교회도 너무 쉽게 놓치고 있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이 점을 회복하지 않으면 교회가 본질을 잃어버리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한다고 역설한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보여 주신 제자들을 향한 태도—그들이 부족하고 심지어 자신을 버릴 것을 아셨음에도 “끝까지 사랑하시는” 모습—이 바로 교회와 성도들의 궁극적 모범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사랑의 결정체이며, 우리를 향한 그분의 희생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토대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을 단순히 관념적으로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발을 씻어 주는 모습, 즉 종의 태도와 섬김의 행동으로 드러내야 한다. 그런 교회, 그런 성도들이 모일 때 비로소 세상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는 예수님의 말씀이 참이라는 사실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예수님의 십자가, 그 고난은 끝까지 사랑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이며, 그것이 곧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여신 사건이다. 그러니 우리 역시 이 복음의 길을 걷기 위해 끝까지 사랑하는 삶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선택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세상은 계속해서 우리를 높아지려는 욕망과 자기중심적 가치관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미 예수님의 본이 있고, 성령의 도우심이 있다. 우리가 진실로 이 사랑을 붙들고, 서로에게 종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다시 십자가의 능력을 나타낼 것이며, 온전한 부활의 희망을 선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순절을 비롯해 우리의 일상 속에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이 고난과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삶에 적용하기를 결단한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을 닮아 서로의 발을 씻어 줄 수 있는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다.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는 요한복음 13장 1절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걸어가야 할 길이 ‘고난의 길’인 동시에‘사랑의 길’임을 선포하는 핵심 구절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사건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인간을 살리는 하나님의 가장 아름다운 계획이었고, 예수님의 자기 희생적 순종이었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점을 여러 설교와 저술에서 지속적으로 강조해 왔다. 그리고 고난을 단순히 피하거나 두려워하기보다,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사랑의 본질을 발견하고, 똑같이 따라가는 삶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한 부활의 능력, 곧 새로운 생명과 기쁨을 경험할 수 있다. 사랑이 없는 고난은 그저 쓰라린 절망이 될 수 있지만, 사랑으로 감싸인 고난은 신비한 생명의 문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것이 사순절에 우리가 되새겨야 할 가장 중요한 영적 메시지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난의 의미가 단순히 인간적 고통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 사랑을 ‘끝까지’ 베푸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고난이 저주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라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리고 그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이며 축복이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랑은 구체적 실천을 통해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의 일상 안에 재현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 주시며 보여 주신 섬김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가 서로의 발을 씻어 주고, 끝까지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세상은 교회를 통해 부활의 소망을 발견하게 된다. 장재형 목사가 끊임없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요한복음 13장에 기록된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말씀처럼, 우리 역시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겸손히 섬김의 종으로 살아가며, 이 땅에 참된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고 몸소 행하신 그 사건으로부터 출발한다. 제자들은 자신들끼리 높아지고자 분쟁을 일으켰고, 예수님은 이에 대해 ‘종의 모습’으로 답하셨다. 그리고 곧이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여셨다. 그 십자가는 고난이지만,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메시지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순절을 비롯해 신앙생활의 모든 시간 속에서,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말씀—“십자가는 고난이지만 결코 저주가 아니라 사랑이다”—를 깊이 묵상하며 끝까지 사랑하는 삶을 결단하기를 소망한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되어야 하며, 서로의 발을 씻기고 낮아지는 태도를 통해 드러난다. 그 길이 좁고 험할지라도, 예수님께서 이미 보여 주신 모범을 따를 때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부활의 소망을 누릴 수 있다.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선언이 우리의 삶과 공동체를 통해 오늘도 계속 울려 퍼지기를 바란다.

www.davidjang.org

정체성과 구원의 길 – 장재형목사

1.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삶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여러 차례의 설교와 강의, 그리고 목회 현장에서 일관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고난에 참여하는 삶”을 강조해 왔습니다. 특히 사순절 기간을 맞이할 때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걸어가신 고난의 길을 깊이 묵상하고, 그 길에 동참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합니다. 사순절은 부활절 이전 약 40일(주일 제외)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고, 회개와 기도로써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흔히 이 기간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성찰하고,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조금이라도 따라가고자 하는 열망을 새롭게 태동시키는 시점으로 삼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사순절에 대해 설교할 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금식의 교훈을 언급합니다. “너는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마 6:17)는 예수님의 말씀은 금식하는 자가 억지로 비참한 표정을 짓거나, 자신이 고난당함을 드러내려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세상적인 슬픔이나 개인적 고통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본래 의도하신 대로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겸손하게 서되, 사람들 앞에서는 평안과 담대함을 지니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세상은 고난의 때를 맞이하면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에 사로잡히기 쉽지만,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안에서도 하나님을 더 깊이 의지하고, 이 시기를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특히 사순절 기간이야말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내포된 구원의 메시지를 진지하게 묵상할 최적의 시기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예수님의 고난의 상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구속’과 ‘중보’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받았고, 그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 생명의 소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의미를 깊이 깨닫기 위해서는 기도와 말씀 묵상을 통해 예수님의 길을 체화하려는 노력이 필수적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설교 중 종종 현대 크리스천들이 고난의 때를 만났을 때, 세상에서 요구하는 방식으로만 반응하거나, 불필요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우울하게 지내는 모습을 지적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과 지나치게 얽혀 살며, 의지할 대상을 사람에게서 찾으려 하는 경향 때문이라고 봅니다. 예수 믿는 자라면 환난과 역경 중에서도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기쁨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이는 고난 자체를 가볍게 여기거나, 슬픔을 전혀 표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결국 이 고난의 시대에도 하나님의 섭리는 변함없이 역사하고 있음을 믿고, 사람의 눈에만 매달리지 말고 하나님께 더욱 집중해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실제로 많은 성도들이 코로나19와 같은 전 세계적인 재난 상황이나, 개인적 아픔과 위기를 경험할 때, 교회 공동체로부터 물리적으로 떨어지고 고립된 생활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장재형목사는 이 시간을 ‘하나님께 나아가는 아라비아 광야의 시간’으로 해석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뒤 아라비아에서 독립적이면서도 깊은 영적 수련의 시간을 가졌던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사회적 거리두기”나 “고독의 시간”을 단순한 우울과 소외감으로 치부하지 말고, 오히려 말씀을 더 깊이 연구하고, 기도를 더 많이 쌓으며,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기회로 삼으라는 권면입니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또 하나의 측면은, 이런 고난의 시간을 통해 자녀들과 후대 세대에게 신앙의 핵심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점입니다. 아이들이 학교나 각종 사교육 현장에서 지식을 쌓을 기회가 제한된 상황에서도, 부모가 먼저 말씀을 붙들고, 복음의 핵심(예: 사영리나 복음의 기초)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쉽게 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이 지닌 높은 이해력과 지적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말고, 성경의 주요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전해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 자판을 칠 때 기본 자리와 틀이 중요하듯, 신앙생활에서도 첫 단추를 올바르게 끼우는 일이야말로 매우 결정적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의해야 할 점은, 인터넷과 SNS가 발달된 시대에 성도들이 ‘영적 쓰레기통’을 뒤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음란물과 각종 유해 정보를 접하기 쉬운 세상에서, 한순간의 호기심이 우리의 영과 육 모두를 병들게 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특히 고독해지고 무료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필요한 인터넷이나 미디어 콘텐츠를 시간 때우기로 소비하는 유혹이 커집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두고 “쓰레기통 게헨나(지옥)”라는 표현을 쓰면서, 이처럼 해로운 것들에 우리 마음과 시간을 빼앗기지 말고, 오히려 시편이나 로마서 같은 말씀을 묵상하며 영적 정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결국 사순절은 ‘고난의 체험’을 기억하되, 그 고난을 두려워하거나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밝히 보는 영적 재정비의 계기로 삼으라는 초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선포하는 구원의 메시지는 결코 과거에 머무는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나와 내 가족,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새롭게 체험하고 누리는 은혜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장재형목사의 사순절 메시지는 바로 여기서 출발합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예수님이 직접 하신 이 말씀대로, 어떤 환난의 때에도 주님의 임재와 평안을 잃지 않고 그분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 그것이 사순절의 참된 정신이자 예수님의 길에 동참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복음의 정수를 붙들다

장재형목사는 사순절뿐 아니라 평소 설교와 강의에서 “로마서의 달통(達通)”을 자주 권면합니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서신 중에서도 기독교 교리의 정수가 담긴 책으로, 신학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매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은 죄와 은혜, 구원과 칭의,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그리고 교회의 삶까지 폭넓은 주제를 통찰력 있게 다룹니다. 그렇기에 로마서를 ‘완독’하고, 나아가 그 내용을 깊이 이해하고 삶에 적용하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장재형목사가 로마서를 특별히 강조하는 까닭은, 현대 교회와 성도들이 바울이 강조했던 복음의 핵심 개념을 종종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그분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죄인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칭의가 얼마나 중대한 변화인지를 체감하지 못한 채, 교회 생활을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모습이 많다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인 ‘죄와 은혜’, ‘율법과 복음’, ‘정죄와 구원’을 명확하게 대조하여,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 계획이 얼마나 완벽하고 위대한지를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우선 로마서 1장 18절 이하에서 바울이 다루는 ‘하나님의 분노’에 주목해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통해, 인간이 죄로 인해 얼마나 참혹한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고 설교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심판하시고 거룩함을 드러내시는 분노는 단순한 감정적 분출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公義)와 사랑이 동시에 작용하는 측면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죄로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우리의 죄악이 얼마나 보편적으로 만연해 있으며,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로운 분노와 심판을 초래하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줍니다.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의 분노”를 확실히 알아야,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참되게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인간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고백해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은 그저 교리적 지식으로 끝나고 맙니다. 따라서 로마서 1장부터 3장까지 이어지는 죄와 심판, 그리고 그 가운데서 선포되는 구원의 약속을 확실히 붙들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장재형목사는 2003년에 미국에서 로마서를 강의했던 경험과, 최근에 다시 그 강의 내용을 접하면서 큰 은혜를 받았다는 간증을 전합니다. 그는 그때의 강의 자료를 정리하여 널리 보급하고, 성도들이 ‘의무적’으로라도 그것을 공부하기를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로마서에는 그만큼 중요한 진리가 촘촘히 들어있고, 그 교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이 자칫 왜곡되거나,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실제로 로마서는 “이신칭의(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중심 주제로 삼습니다. 바울은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었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강변합니다. 이 교리는 구약의 언약과 선지자의 예언, 예수님의 성육신과 공생애, 십자가 죽음, 부활 사건을 모두 관통하는 핵심이며, 교회 역사를 통틀어 루터나 칼뱅 등 종교개혁자들이 대대적으로 회복한 중요한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거듭 강조하며, 로마서 전체가 이 ‘칭의의 복음’을 바탕으로 교회와 세상을 바라보도록 이끈다고 말합니다.

또한 로마서 8장에 이르러서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는 놀라운 선언이 나옵니다. 성도가 단지 죄 사함만 받은 존재가 아니라, 성령의 내주와 인도하심을 통해 매일 거룩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권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특히 이 부분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죄의 권세에 다시 얽매이거나 무기력한 상태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시므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결단이 요구됩니다.

이처럼 로마서는 구원론, 성령론, 그리고 교회론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루며, 종국에는 “성도가 어떻게 구원받은 자답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실천적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시합니다. 로마서 12장부터 이어지는 부분은, 교리적 토대를 바탕으로 한 실제적 삶의 지침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복음이 우리 안에 인카네이션(화육)되어야 한다”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즉,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 아니라, 삶 속에서 구현되는 복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을 많이 읽고 교리를 공부해도 실제 삶에 변화가 없는데, 그것은 말씀을 단지 ‘이해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장재형목사는 “로마서를 달통하라”는 말로, 말씀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체현하라는 뜻을 힘주어 전합니다.

요약하자면, 장재형목사가 권면하는 ‘로마서 달통 프로젝트’는 단순한 성경통독 과제가 아니라, 구원의 핵심 교리를 실질적으로 터득하여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는 과정입니다. 이를 통해 성도들은 ‘나의 원래 상태가 어떤 죄인이었는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어떤 구원의 은혜를 입게 되었는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이 깊어질수록, 예배와 기도, 교제와 봉사, 그리고 전도와 선교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실천될 수 있게 됩니다.

3. 정체성 회복

장재형목사는 사순절과 로마서 묵상을 강조하는 동시에, 이사야 43장 말씀을 통해 “정체성 회복”의 메시지를 설교합니다. “이사야 43장”은 바벨론 포로기 상황에서 절망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선언하시는 대목으로 유명합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이 구절은 당시 어둠과 절망에 잠겨있던 백성에게 “너희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며, 하나님의 소유다”라는 신분을 재확인시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에도 동일한 선언이 적용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종종 세상에서 겪는 어려움과 죄의식 속에서, 혹은 억눌린 영적 침체 속에서, 자신을 하찮게 여기고 신앙의 본질을 놓쳐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를 창조하신 이가 바로 나다. 너는 내 것이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놓치면, 상황에 끌려다니거나 세상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하나님이 지으신 존귀한 존재’로 바라보아야 하며, 동시에 ‘하나님이 구속하신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는 인간의 교만을 깎아내리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게 만드는 근본적인 영적 인식입니다.

또한 이사야 43장 2절에 언급된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불꽃이 너를 사르지 못하리라”는 약속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상징합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의 절망적 환경, 그리고 인생을 삼키려 드는 고난과 환난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여전히 희망을 붙들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을 지으신 하나님이 결코 그들을 잊지 않으신다는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두고,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올바로 인정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 되시며,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자 소유물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면, 인생의 어떤 폭풍우도 근본적으로 우리를 삼키지 못한다는 믿음 위에 서게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하나님의 주권을 현대적 맥락에서 풀어내며, 그것이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최종적인 권리를 갖고 계신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비유를 들자면, 한 건물이 있다면 그 소유주는 그 건물을 지은 사람입니다. 누구도 건물주가 아닌 이상, 함부로 그 건물을 개조하거나 부수거나, 용도를 바꿀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도 하나님이 지으셨기에, 그분께서 주인 되시는 것이 마땅하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자율성과 자기결정권을 강조하면서, 사실상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 삶의 기준을 정하고, 선악을 결정하며, 창조주의 뜻을 존중하지 않는 모습이 만연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43장은 바벨론 포로라는 역사적 비극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결코 망하지 않고 다시 회복될 것임을 예언합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그의 약속을 믿는 자들을 건져내신다”는 진리를 드러냅니다. 장재형목사는 우리 시대의 위기와 환난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했을 때, 많은 사람이 두려움과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이때 장재형목사는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는 말씀을 본문으로 설교하며,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정체성을 다시 확인하자고 촉구했습니다.

특히 43장 4절의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이라는 구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역설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거나, 다른 이들의 평가에 따라 정체성이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눈에 얼마나 보배로운 존재인지”를 분명히 선언합니다.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무조건 우리 편이 되어주시니,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자녀이며, 거룩을 향해 끊임없이 자라나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거룩한 정체성을 인식할 때, 우리의 말과 행실은 점점 더 하나님을 닮아가는 방향으로 변화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이사야 43장의 메시지를 토대로, 교회와 성도의 소명을 다시금 강조합니다. 구원의 길과 파멸의 길이 동시에 펼쳐져 있는 현실에서, 우리는 스스로 구원의 길을 선택해야 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그 길을 안내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21장 8절 말씀이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고 선언한 것처럼, 오늘날도 우리가 어떤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결말이 달라집니다. 사회적으로 ‘거리두기’를 하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과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며, 오히려 이 시간을 통해 영적으로 깊어지고,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재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장재형목사는 이 시기에 육신적 건강까지도 함께 회복하기를 권면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실내 생활이 늘어나고, 운동 부족으로 몸이 약해지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43장이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은 단지 영혼 구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우리의 삶 전반이 회복되는 총체적 구원을 지향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설교를 통해 종종“팔굽혀펴기 200번씩 하라,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다리 운동을 하라, 집에 문에 매다는 기구라도 달고 운동하라”며 실제적 권면을 아끼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이 강건해지면, 혼과 육도 함께 강건해진다”는 고린도후서 7장 1절의 권고를 바탕으로, 영육의 균형적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결국 이사야 43장은 절망과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주권자이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며,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재확인시키는 장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우리는 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구원이 어떻게 오늘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설교합니다. “너는 내 것이라” 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해방된 자로서 자유롭게 살아갈 뿐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로부터 오는 기쁨과 책임감을 함께 느끼게 됩니다.

정리하면, 장재형목사는 사순절을 맞이하는 성도들에게 로마서를 달통하기를 권면하고, 그 과정을 통해 죄와 은혜, 구원과 칭의라는 복음의 핵심을 확실히 붙들도록 합니다. 더 나아가 이사야 43장을 묵상함으로써, 우리의 정체성과 소속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식하고, 고난의 시간에도 낙망하지 말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시간을 가지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자녀에게도 신앙의 핵심을 제대로 전수하며, 육신을 돌보아 건강하게 가꾸라는 실천적 조언을 제시합니다. 요컨대, “장재형목사”라는 키워드로 정리되는 그의 설교와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순절의 의미, 로마서가 가르치는 복음의 정수, 그리고 이사야43장에서 선포되는 우리 정체성의 회복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관계를 맺고 성숙해가길 촉구하는 전체적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단발적 권면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며, 말씀으로 자신을 비추고, 성령 안에서 거룩을 추구하며, 교회와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복음적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갈 것을 요청하는 장기적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10장 6~8절에서 바울이 말하듯,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하늘에 오르거나 무저갱에 내려갈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신 것처럼, 이미 우리 가까이에 있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 안에 믿음과 생명이 있으며, 우리의 심령에 충만히 임하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참된 회복과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고 세상을 복되게 하는 길이 됩니다.

결국 장재형목사의 메시지는 전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 사순절을 통해 고난과 은혜의 길을 함께 묵상하며,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더 신뢰하고 기뻐하는 태도를 견지하자. 둘째, 로마서 달통을 통해 죄와 은혜, 구원과 칭의, 성령 안에서의 새 생명 등 기독교 신앙의 핵심 교리를 더욱 깊이 체득하자. 셋째, 이사야 43장의 “너는 내 것이라”는 선언을 마음 깊이 새겨, 우리의 정체성과 소속이 온전히 하나님께 있음을 자각하고, 모든 절망과 환난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신뢰하며 살자. 이 세 가지가 서로 긴밀히 연결되며, 우리의 신앙을 공고히 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동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환난 속에 빛나는 교회 – 장재형목사

1. 데살로니가 교회의 역사적·지리적 배경

데살로니가전서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떠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지역적 배경과 그로 인한 여러 도전과 핍박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장재형(장다윗)목사가 강조해온 복음 전파의 실제적 여정, 곧 사도 바울과 동역자들이 어떻게 도시마다 교회를 세우고 핍박 속에서도 믿음의 공동체를 유지해왔는지를 함께 살펴보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환난 속에서 피어나는 복음의 능력’을 생생히 느낄 수 있게 된다.

데살로니가는 고대 로마 제국의 중요한 도시 중 하나로, 마게도냐 주(州)에 속해 있던 지역의 수도 역할을 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당시에, 이 도시는 경제와 문화가 번성하여 인구가 20만 명가량 모여 살았다고 전해진다. 헬라인을 비롯하여 유대인까지 다양한 민족이 거주했는데, 헬레니즘의 영향을 깊게 받은 동시에 유대교 회당도 활발히 운영되던 다원적인 종교·문화 환경이었다. 로마 제국이 당시 전 세계(당시로서는 지중해 연안 중심의 ‘모든 세계’)를 연결하기 위해 깔아놓은 도로 중에서도 주요 간선도로가 지나가는 교통의 요충지였기에, 상업·무역 활동이 발달해 있었다. 그만큼 도시는 늘 외부의 사람들이 왕래하며, 여러 종교와 사상이 흐르는 복잡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도시적·역사적 배경을 매우 중시한다. 왜냐하면 복음이 단순히 ‘말’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실제 사람이 모여 살고, 매일의 삶이 벌어지는 구체적 공간 속에서 확산되고 뿌리를 내리기 때문이다. 그는 “복음이란 실제 삶을 통해 살아 움직이는 운동력 있는 말씀이며, 그 말씀이 구체적 도시에서 어떻게 꽃피우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해왔다. 이는 곧 데살로니가전서가 단순한 교리 서신이 아니라, ‘도시 한가운데서, 그리고 핍박의 상황 속에서 형성된 실제 공동체’에 대한 사도 바울과 동역자들의 편지임을 되새기게 만든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지기 전, 이미 사도 바울과 실라, 그리고 디모데는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큰 핍박을 받았다. 사도행전 16장에 따르면, 빌립보에서도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는 등 온갖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들은 결국 복음을 증거하고 교회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시련이 반드시 있지만, 시련이 깊을수록 성령의 역사도 강렬해진다”고 설파한다. 빌립보 이후로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로 도착한 사도 바울 일행은, 그곳에 있는 유대인 회당에서 3주간(세 안식일) 집중적으로 율법과 예언서를 풀어주며 복음을 강론했다. 사도행전 17장에는 그들이‘성경을 가지고 강론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성경이라 함은 율법과 예언서를 담은 두루마기였고, 바울은 랍비로서 이 말씀을 연결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복음의 핵심을 역설했다.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은 ‘3주’라는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회당을 중심으로 헬라인, 그리고 ‘적지 않은 귀부인’(사도행전17:4) 등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계층에게도 전해졌다. 문제는 바울이 전하는 이 복음에 적대감을 가진 유대인들이 매우 격렬하게 반발했다는 점이다. 당대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를 신격화했기에, 유대교나 기독교가 전하는 유일신 사상은 언제나 정치적 반발의 빌미가 될 수 있었다. 게다가 보수적인 유대인 입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믿는 자들이 유대교 전통과 율법을 파괴한다고 여겨 더더욱 공격의 대상이 된 것이다. 결국 바울과 실라는 그곳에서 격렬한 핍박을 받고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바울 일행은 핍박을 받는 그 교회를 완전히 방치하지 않았다. 디모데나 다른 동역자들을 다시금 보내어 교회를 돌보고, 바울은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2차 전도 여행 중)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향해 목자의 마음으로 편지를 쓰게 되었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러한 ‘교회를 향한 사도적 사랑’이 오늘날에도 교회 공동체에게 본받아야 할 핵심 정신이라고 역설한다. 도시 곳곳에 세워진 교회들이 안팎의 도전과 시련으로 흔들릴 때, 그냥 버려두고 떠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로, 편지로, 동역자를 다시 보내어 그들의 믿음을 살폈다. 사도 바울과 동역자들의 이 모습은, 장재형목사가 지속적으로 강조해온 “생명처럼 여기는 목양”과도 맞닿아 있다. 복음의 출발점은 한 도시에서 다음 도시로, 그리고 또 다른 지역으로 끝없이 이동하지만, 이미 씨앗이 뿌려진 공동체는 결코 버리지 않고,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데살로니가전서는 그러한 맥락 속에서 집필된 편지로, 초대 교회가 겪던 환난과 핍박,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타오르던 믿음·사랑·소망이 어떻게 성장하고 열매 맺었는지를 증언한다.

핍박의 양상은 다양했다. 우선, 유대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수용하는 이들을 곱지 않게 바라보았고, 정치적 통치자들 역시 “로마 황제 외에 또 다른 주를 섬긴다”는 명목으로 그들을 고소하거나 폭력적으로 내쫓았다. 이러한 상황을 장재형목사는“교회의 위기는 언제나 세상의 가치관과 충돌할 때 찾아오며, 그 순간 진정한 믿음과 복음의 능력이 드러난다”고 해석한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가 겪었던 고통은 단지 종교적 분쟁이 아니라, 실제 생존이 위협받는 수준이었다. 재산이나 가정이 파탄나거나, 감옥에 갇히고, 심할 경우 목숨까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붙잡은 희망은 오직 하나였는데, 바로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종말론적 소망이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이 환난으로부터 자유케 되리라는, 그 구원에 대한 기대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지탱해주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머물며 이런 소식을 듣고, 매우 걱정하고 또 동시에 감격했다. 걱정한 이유는, 지도자들이 떠난 뒤 남겨진 신자들이 혹시나 믿음을 잃어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고, 감격한 까닭은 작은 공동체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소식, 심지어 마게도냐와 아가야 온 지방에 ‘본이 될’ 정도로 충성스럽게 복음을 지키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감사와 기쁨의 눈물로 쓰인 편지”라고 표현한다. 그만큼 이 편지에는 사도 바울을 비롯한 실라와 디모데의 뜨거운 심정이 배어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을 살펴보면, 이들의 연대 서명이 명확히 드러난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이와 같은 도입부는 공동 집필 또는 공동 서신 형식을 표방하는데, 장재형목사는 이를 교회의 ‘공동체적 영성’과 연결시켜 설명한다. “이 편지는 한 사람의 사도적 권위만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함께 수고한 자들이 서로 한마음으로 섬기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실제로 초대교회는 결코 1인의 ‘카리스마’만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작은 가정교회와 회당, 그리고 수많은 동역자들의 네트워크로 확장되었다. 이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바울 서신을 읽을 때 사도행전의 관련 기록을 동시에 살펴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되는데, 예컨대 사도행전 17장이야말로 데살로니가 교회 탄생과 배경을 간략하게나마 그려준다.

장재형목사가 누차 강조하듯, “복음은 현장에서, 그리고 고난 속에서 체화된다.” 빌립보에서 옥에 갇히고, 위협당하고, 가는 도시마다 유대인 지도자들의 반발로 쫓겨나면서도, 그들은 교회를 ‘버리지’ 않았다. 어디서나 복음이 전해지고,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발생하면, 그곳을 하나님이 마련하신 ‘교회의 터전’으로 생각하고 반드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세워놓고 떠났다. 데살로니가 역시 그러한 원리에 따라 세워진 교회였다. 많은 환난과 핍박이 따를수록 성령의 역사가 더욱 강렬히 일어났고, 참된 복음은 그 어떤 폭력도 막아설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특히 장재형목사는 교회사 전체를 조망하면서,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전에 기독교가 어떻게 생존하고 확산되었는지를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이 극심한 핍박 아래서도 지켜낸 신앙의 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된다”고 말한다. 실제로 콘스탄티누스 대제(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라노칙령을 발표해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에, 기독교인은 불법 단체로 취급받는 시간이 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계속해서 증가했고, 소아시아, 마게도냐, 아가야 지방, 심지어 이탈리아 전역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 밑바탕에는 온갖 시험과 박해에도 흔들리지 않는 ‘부활 신앙’과 ‘재림 소망’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 대표적 예시 중 하나였던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어느 도시든 직접 현장을 찾아가 복음의 역사를 체득하기를 소망한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그리스 지역과 이스탄불(옛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밀라노 등을 직접 다니면서, 옛 교회의 흔적들을 눈으로 보고 발로 밟으며, “시간이 흐르고 정권과 이념이 바뀌어도 복음의 씨앗은 죽지 않고 이어진다”는 확신을 거듭 확인한다. 밀라노에서는 밀라노칙령이 선포된 기념 장소를 찾고, 또 로마 가톨릭의 전통이 남긴 유산을 보며, 거기서 얻은 교훈과 감동을 동시대 기독교에 접목하고자 힘써왔다. 그가 데살로니가 지역도 꼭 방문하고자 했던 열망은, 바로 이 서신이 들려주는 ‘환난 중에 있는 교회를 끝까지 돌보는 사랑과 믿음’을 현장에서 체감하고자 하는 열정과 맞닿아 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는 단순히 ‘옛날에 존재했던 작은 교회’가 아니다.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가 공존하는 큰 도시 한복판에서, 로마 제국의 압도적 권력과 지역 유대인들의 종교적 반발이라는 이중의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그럼에도 성도들은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으며, 서로 뜨겁게 사랑했고, 미래의 소망—즉 주님의 재림—을 붙들었다. 장재형목사가 계속해서 교회사를 강조하는 까닭은, 그러한 역사가 결코 과거의 한 사건으로만 끝나지 않고, 오늘날에도 유사한 형태로 반복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대에도, 자유롭고 풍요로운 지역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극심한 종교적·정치적 탄압을 받는 나라와 도시들이 존재한다. 전 세계 어딘가에서는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순교적 신앙을 지키며, 오직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이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데살로니가전서를 올바로 이해한다는 것은, ‘환난 중에도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동시에, ‘고통 가운데서 더 빛나는 복음의 진리’를 배우는 일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데살로니가 교회가 보여준 신앙의 생생한 표본”이라 부르며, “이 편지를 읽는 우리 역시 21세기의 데살로니가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도전한다. 단지 편하고 안락한 환경에만 머무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때로는 압박을 받아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주님이 다시 오시는 소망을 붙들며 사랑과 믿음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데살로니가 교회의 전반적 역사와 배경을 살펴보았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데살로니가전서 1장의 핵심 메시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과 재림에 대한 소망이 그들의 신앙의 근간을 이룬다면, 구체적으로 바울이 편지를 통해 전하고자 한 권면은 무엇이었으며, 초대 교회가 보였던 믿음·사랑·소망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집중적으로 살펴보자. 특히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환난 속에서의 믿음, 그리고 ‘공동체적 사랑과 수고’를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함께 나누어 볼 것이다.

2. 데살로니가전서 1장의 핵심 교훈

데살로니가전서 1장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향해 품은 깊은 감사와 사랑, 그리고 그들이 보여준 믿음·사랑·소망에 대한 칭찬이 핵심을 이룬다. 이 편지는 사도 바울과 실루아노(실라), 디모데가 공동 서명한 것으로, 세 전도자가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 계속되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환난 소식을 듣고 쓴 것이다. 이미 앞선 소주제에서 살펴보았듯, 그 환난은 로마 제국의 정치적 압력과 보수적 유대인들의 종교적 폭력이 뒤섞인 ‘지독한 핍박’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데살로니가 교회는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믿음과 사랑이 더 돈독해지고, 소망이 한층 더 간절해졌다. 바울은 이 사실을 전해 듣고 감격해 하며, 편지 첫머리에 뜨거운 감사를 기록한다. 이 안에는 장재형목사가 늘 강조하는 ‘핍박 속에서 성장하는 복음의 진정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장 2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한다”라고 표현한다. 이는 단순한 미사여구가 아니라, 실제 데살로니가 교회가 바울 일행의 기도 제목에서 빠지지 않고, 오히려 환난이 심할수록 더욱 간절히 그들을 위해 간구한다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진정한 복음 안에서는 고난받는 교회를 절대 외면하지 않는다”는 원리로 풀어낸다. 교회가 교회답게 살기 위해서는,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고통받는 형제자매들을 ‘항상 기도 가운데’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심각한 박해를 당하는 지역 교회들이 있음에 주목하면서, “데살로니가전서를 읽고 감동만 받을 것이 아니라, 우리도 동일하게 환난당하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필요한 도움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촉구한다.

3절은 아주 유명한 구절로, 초대교회가 가졌던 핵심 가치 ‘믿음, 사랑, 소망’을 제시한다. 바울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구체화한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기억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두고, “초대교회의 표본과도 같은 세 가지 덕목이지만, 특히 ‘수고’(사랑의 수고, labor of love)라는 단어가 강조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사랑이란 추상적 감정이 아니라, 실제 땀을 흘리고 고생하는 수고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환난이 닥치면 자기 보신에만 신경 쓰기 쉽지만,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오히려 서로를 돌보고, 필요를 채우며, 아픈 사람을 위로하고 함께 울어주는 사랑의 실천을 계속했다. 그것이 바로 이 교회가 “본이 되는 교회”로까지 명성을 얻게 된 이유다.

나아가 믿음은 ‘역사’(ἔργον, 일·행위·결과)를 낳고, 사랑은 ‘수고’(κόπος, 힘겨운 노동·고생)를 낳으며, 소망은‘인내’(ὑπομονή, 꿋꿋이 견딤)를 낳는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기독교 신앙이 단순히 머릿속 지식이 아니라, 삶에서 구체적 행동으로 드러나야 함을 보여주는 3단계”라고 해석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을 믿는 믿음이 실제 역경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역의 동력이 되고, 사랑이 고통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기 희생적 나눔을 계속하게 만들며, 종말론적 소망은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어 4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안다”고 말한다. 이는 환난 가운데 있는 교회를 향해, 하나님이 결코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더 깊은 사랑으로 붙드신다는 위로의 표현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구절을 읽을 때, 예수님이 팔복에서 말씀하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태복음5:10)를 떠올려야 한다고 조언한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실제 생명을 위협받는 한가운데서 이 ‘택하심’을 믿었고, 그 믿음 때문에 끝까지 인내할 수 있었다.

특히 5절과 6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며, “너희가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는 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복음은 단순한 말이나 이론이 아니라 ‘능력’(δύναμις)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능력은 성령을 통해 확신으로 이어진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오늘날도 복음이 진정한 능력이 되려면, 성령 안에서 확신이 뿌리내려야 한다”고 설명한다. 교회가 세상 풍조에 휘둘리거나, 핍박 앞에서 쉽게 무너지는 경우는, 많은 경우 말뿐인 지식 수준의 믿음에서 머물고, 실제 성령의 권능과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는 달랐다. 바울이 세 안식일간 집중적으로 전한 복음의 핵심—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재림—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쁨 가운데 받아들였고, 이후 참혹한 시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7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고 한다. 이는 바울이 지리적 구분을 통해 실제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문이 널리 퍼졌음을 시사한다. 바울이 “너희가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고 기록할 정도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단순한 생존 이상의 무언가를 이뤄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힘들게 하는 주변 환경을 원망하는 대신, 오히려 서로 믿음과 사랑으로 뭉쳐 이겨내었고, 이 소식이 퍼져 다른 지역 교회들에게도 큰 도전과 위로가 되었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교회는 환난을 통해 연단되어 정금같이 빛나며, 그 빛이 주변 교회로 전이된다”고 해설한다. 실제로 교회사가 증언하듯, 지독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1세기와 2세기 교회들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는데, 그 성장의 밑바탕에는 바로 이러한 ‘환난 중에 사는 공동체의 본’이 자리하고 있었다.

8절은 그 소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린 것이 아니라, 각처에 퍼져서 바울이 더 할 말이 없을 정도라고 언급한다. 그것은 곧 “바울의 지도가 없어도 그들은 믿음을 굳건히 지켰고, 입으로만이 아니라 실천으로 복음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강조하면서, “교회가 참된 복음의 열매를 맺을 때, 그 소문은 자연스럽게 전파되며, 굳이 교회가‘우리는 이렇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지 않아도 주변 사람들이 알아보게 된다”고 말한다. 오늘날에는 교회들이 미디어를 통해‘브랜딩’에 신경 쓰고, 특정 사역을 홍보하는 일이 많은데, 진정한 복음의 힘은 오히려 ‘말보다 삶의 증거’에서 나온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구절이다.

9절에서 바울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참되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내용을 언급한다. 데살로니가 교회 신자들은 과거에는 온갖 우상 숭배와 세속적 가치관에 물들어 있었을 테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복음을 붙드는 자들이 되었다. 특히 헬라인들이 다수였던 환경을 감안할 때, 이 ‘우상으로부터의 전환’은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사회 전체가 다신론적 문화였고, 황제 숭배와 도시 수호신 숭배도 일상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자신들의 옛 삶을 끊고, 오직 참 하나님만을 경외하게 되었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은혜가 죄의 사슬을 끊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는 결정적 증거”라고 강조한다. 교인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었고, 이는 주변 사람들에게 강력한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10절에서 바울은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린다”고 말한다. 헬라어 원문을 살펴보면, 데살로니가전서1장 10절에는 “τὸν υἱὸν αὐτοῦ ἐκ τῶν οὐρανῶν”(하늘로부터 그의 아들을)과 “ἀναμένειν”(기다리다, 간절히 고대하다)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즉,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예수님이 하늘로부터(ἐκ τῶν οὐρανῶν) 오실 것을 확신했고, 그분을 간절히 기다린다(ἀναμένειν)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 이는 신약에서 자주 쓰이는 “παρουσία(parousia)”라는 단어(2장 19절, 3장 13절, 4장 15절 등)로 ‘주님의 공식적인 오심’을 지칭하는 경우와는 달리, 1장 10절에서는 구체적으로‘하늘로부터 오시는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림’이라는 표현을 통해 재림 신앙을 내포한다. 그들은 종말론적 기대 속에서, 지금의 고난이 영원하지 않고, 언젠가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모든 불의를 심판하시고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을 믿었다. 그 믿음이야말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환난을 이겨낸 ‘영적 버팀목’이었다.

사실, 재림 신앙이 너무 극단적으로 치우치면 현실 도피적 태도나 날짜를 정하는 종말론적 광신으로 이어지는 위험이 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후반부와 데살로니가후서에 이르러서는 잘못된 종말 사상과 균형을 잡아줄 필요를 느꼈다. 그러나 적어도 1장에서는 이러한 **“하늘로부터 오시는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리는(ἀναμένειν) 소망”**이 환난 중의 교인들에게 산 소망이 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장재형목사도 “재림에 대한 건전한 믿음은 박해와 시련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커다란 위로이자 힘”이라고 말한다. 환난으로부터 ‘언제, 어떻게, 구체적으로’ 구원받을지를 인간이 미리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주님이 오셔서 악을 심판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자유를 허락하실 것”이라는 이 확신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지탱해준 것이다.

정리하자면, 데살로니가전서 1장은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교회가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모습을 담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가르친 복음이 말로만이 아니라 능력으로, 성령의 확신으로 그들에게 임했고, 그들은 사랑과 수고로 서로 섬기며,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ἀναμένειν)” 재림 신앙으로 인내하며 살아갔다. 이 과정에서 주변 교회들까지도 감동시키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토대로 오늘날 교회 공동체가 취해야 할 몇 가지 실천 방향을 제시한다.

  1. “고난받는 교회를 늘 기억하며 기도하라.”
    우리는 편안한 지역에 있을지라도, 이 세상 어딘가에는 여전히 극심한 박해를 당하는 형제자매가 있다. 그들의 상황을 무관심하게 넘기지 말고, 데살로니가 교회를 돕던 바울 일행처럼, 기도와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교회가 교회를 돌보지 않으면, 결국 복음 자체의 아름다운 능력도 희석되고 만다.
  2. “복음은 말이 아니라 능력임을 각성하라.”
    교회가 세워지고 성장하는 데 있어서, 화려한 프로그램이나 시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역사’와 ‘진정한 믿음의 실천’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초라하고 작은 공동체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는 선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오늘날 교회들도 수적 크기나 재정적 안정감에 앞서, 과연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확신’을 경험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돌아봐야 한다.
  3. “사랑에는 반드시 수고가 따른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서로를 위해 희생하며, 아픔을 함께 나누고, 적은 재원이라도 기쁨으로 나누었다. 교회가 진정한 가족 공동체가 되려면, ‘사랑의 수고’가 함께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늘 “입으로만 사랑을 외치지 말고, 예수님처럼 실제로 낮아지고 헌신하는 삶으로 사랑을 보여주자”고 강조해왔다.
  4. “재림 신앙은 절망 가운데서 힘이 된다.”
    재림을 왜곡해 시한부 종말론으로 흘러가는 것은 경계해야 하지만, 동시에 어떤 이유로든 재림 신앙을 무시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된다. 박해와 어려움이 심해질수록,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재발견해야 한다. 이 세상의 불완전함과 불의함을 결국 종결시키고, 신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안식을 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이 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노하심에서 건지시는 예수(살전 1:10)’를 바라보며 견딘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그 소망을 붙들어야 한다.
  5. “목회자는 교회와 긴밀한 유대 속에서 함께 고난을 겪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바울과 실라, 디모데가 보여준 공동 서신의 모습을 좋아한다. 그들은 함께 고난받았고, 함께 교회를 위해 눈물 흘렸고, 함께 간절히 기도했다. 교회는 ‘나 혼자’ 목회하거나, ‘나 혼자’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한 몸을 이루어 서로 격려하고 돌보며 자라는 장소이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보여준 아름다운 모습이란, 결코 그들만의 노력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바울 일행의 멈추지 않는 관심과 기도, 다시 동역자를 파견해주는 그 사랑이 있었기에, 성도들도“본이 되는 교회”가 될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교회가 공동체성을 잃지 않으려면, 목회자와 성도들이 서로 신뢰하고 고난까지도 함께 나누는 연합이 절실하다.

결국 데살로니가 교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도 바울이 우려했던 ‘잘못된 종말론’에도 잠시 흔들렸지만(그 문제는 데살로니가후서에 더 자세히 언급된다), 여전히 복음 안에서 성장했고, 교회사 속에서도 큰 의미를 남겼다. 이 편지를 통해 우리는, 박해와 환난이 교회를 부수지 못하고 오히려 더 강건하게 만들 수 있음을 본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사랑하심을 믿고, 성령의 능력으로 인내하며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는, 세상의 어떠한 시련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데살로니가 교회는 역사적으로 증언한다.

이 모든 점들을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삶 속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할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다. 장재형목사는“데살로니가전서가 단순한 옛날 편지가 아니라, 한국 교회와 전 세계 교회가 계속해서 곱씹으며, 우리의 목회와 신앙을 재점검하게 하는 살아 있는 말씀”이라고 설명한다. 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바울 서신들이 보여주는 ‘복음의 힘’은 결코1세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한, 그리고 주님의 재림(파루시아, παρουσία)이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 않은 시점에서, 우리는 항상 ‘데살로니가전서 1장’이 들려주는 음성을 들어야 한다. “믿음으로 역사를 이루고, 사랑으로 수고하며, 재림의 소망으로 인내하라.”

결론적으로, 오늘 우리의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본이 되는 교회’가 되려면, 그들이 보여준 세 가지 본질적 가치—믿음, 사랑, 소망—을 현실 속에서 생생하게 실천해야 한다. 특히 장재형목사가 계속해서 강조해온 바, “복음은 핍박 속에서 더 큰 빛을 발하며, 교회의 진정성이 환난을 통해 검증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직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하늘로부터 오시는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리는(ἀναμένειν) 재림 신앙이 있을 때, 교회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마게도냐와 아가야 온 지방, 그리고 ‘각처’로까지 소문이 퍼질 만큼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아내와 남편 – 장재형(장다윗)목사

1. 부부 관계의 본질

에베소서 5장 22절부터 시작되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많은 신학자들이 “해석하기 어려운 본문”이라 지적할 만큼 오늘날도 적잖은 논쟁의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말씀을 단순히 ‘순종’과 ‘복종’의 관점으로 축소하기보다, 그 근원에 담긴 ‘사랑’과 ‘서로 존경하는 마음’, 그리고 상호보완적 관계라는 관점에서 조망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실제로 교회 역사 속에서도 이 본문이 오용되어, 여성의 지위를 낮추고 남성의 절대적 권위를 옹호하는 지지의 근거로 쓰인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장재형목사가 주목하는 것은 이 본문이 말하려는 궁극적 목적—즉 가정이 서로를 살리고 세워주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진리입니다.

성경은 에베소서 5장에서 남편과 아내, 그리고 에베소서 6장으로 이어지는 부모와 자식, 주인과 종의 관계를 통해, 인간이 맺고 있는 모든 사회적·영적 관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줍니다. 장재형목사는 늘 강조해왔듯, “성경의 가르침은 일차적으로 윤리적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영적 차원에서 출발한다”고 말합니다. 특히 바울이 말하는 ‘복종’의 개념은 “피차 복종하라”(엡5:21)라는 전제 위에서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에베소서 5장 22절의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라는 구절은 결코 아내에게만 일방적 순종을 요구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21절이 내세우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명령 속에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존중과 경외를 표해야 한다는 상호성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해설하면서, 성령 충만과 상호복종을 연결해 해석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하고, 바로 이어 21절에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라고 권면하는데, 이는 성령 충만의 결과로 나타나는 구체적인 삶의 열매를 ‘서로에 대한 존중과 복종’이라는 관계적인 범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자기중심적 욕망을 내려놓고, 이웃을 섬기며 서로를 귀히 여길 수밖에 없다는 논리입니다.

에베소서 5장 22절부터 시작되는 아내와 남편의 관계가 사실상 모든 인간관계의 기초를 제시한다는 점은, 창조의 질서가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묶어 ‘한 몸’(창 2:24)을 이루게 하는 데서 잘 드러납니다. 창세기 2장 24절의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육체를 이룰지로다”라는 본문을 바울이 그대로 인용한 것은(엡 5:31), 부부 관계가 단순히 사회적 계약이나 감정적 유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창조 섭리의 반영’임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가정은 모든 인간관계의 출발점이며, 교회 공동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소우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해설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내에게 먼저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많은 이들이 이 구절을 읽으며, 바울이 여성에게만 순종을 강요하고 남성에게 군림의 권위를 부여한 것은 아닌가 하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바울이 ‘아내들이여…’라고 먼저 말한 것은, 가정 안에서 사랑의 시작이 아내에게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풀이합니다. 전통적 관념 속에서 남성이 가정의 가장으로 인식되지만, 실제 삶에서는 섬세한 돌봄과 일상적인 배려가 여성에게서 비롯되는 일이 더 많다는 점을 지적하며, 바울 역시 이 현실을 반영해 “먼저 아내들에게 부탁한다”는 식으로 설교했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런 해설이 더 이상 남편의 책임을 경감시킨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이어지는 25절—“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에서 바울은 더욱 직접적으로 남편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교회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남편이 아내에게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시대의 다른 종교나 문화권에서 아내를 향해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은 흔했지만(그것은 그저 가부장제의 반영일 뿐이었습니다), 남편에게 “생명까지도 주를 위해, 아내를 위해 희생하라”고 요구하는 종교·사상은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의 가르침은 혁명적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이야말로 “남성 중심의 시대에서 여성과의 관계를 가히‘수평적·상호적 관계’로 끌어올린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강조합니다.

장재형목사는 또 유대교나 이슬람, 그리고 당대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여성의 위치가 어땠는지를 설명합니다. 일반적으로 여성은 재산처럼 간주되거나, 종교적으로도 ‘듣는 자리’에만 머물렀으며, 남편에게 배우는 수동적 존재로 규정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여성들은 오히려 교회에서 영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어떤 경우에는 지나치게 앞서 나가는 일도 있었을 정도였습니다(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이 “여자는 잠잠하라”고 자제시킨 배경이 이것입니다). 이는 기독교가 그 시대 여성들에게 해방구의 역할을 어느 정도 했음을 보여주는데, 장재형목사는 “기독교야말로 당시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하던 시대에 진정한 평등과 자유의 의미를 제시한 혁신적 믿음이었다”고 지적합니다.

나아가 관계의 문제—즉 결혼 생활에서의 갈등, 부모와 자식의 불화, 사회적 지위가 다른 이들 간의 충돌—는 언제나 인간 실존의 핵심적 고통으로 등장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모든 갈등의 해결책이 에베소서 전체, 특히 5장 후반부에서 드러난다고 해설합니다. 곧 모든 인간관계는 “피차 복종하라”는 상호성의 원리에 기초해야 하며,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전적으로 성령 충만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결심만으로는 자기 중심성을 버리기 힘들지만,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충만할 때 비로소 자기를 부인하고, 서로를 귀히 여기며, 궁극적으로 충만한 사랑에 이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장재형목사는 더 나아가 창세기 1장에서 반복되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말씀이 ‘충만함’과 ‘창조의 완성’을 암시한다며, 한자 “多(다)”가 “夕(석)” 두 개를 합친 글자라는 점을 짚어보면, 동양고전에서도 이 성경적 진리가 반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소개합니다. “저녁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창조가 계속되고, 결국 충만해지는 창조의 완성을 맞이한다”는 사실이, 한자에서 ‘많다(多)’라는 의미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부부 관계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가정을 이룰 때, 초반에는 기쁨과 설렘이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창조적 순환 과정처럼, 부부도 시간이 흐르면서 더 성숙해지고 충만해져야 진정한 ‘한 몸’으로서의 창조적 연합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부부는 누구나 충돌하게 마련이지만, 그것이 곧 파괴의 징조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진정한 사랑에 이르기 위한 필연적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결국 이 충돌 과정 속에서 내가 먼저 낮아지고 상대방에게 존중과 경외심을 표시할 수 있다면, 갈등은 폭발이 아니라 성숙과 변화의 계기가 됩니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개념이 “천생연분(天生緣分)”과 “운명”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잠언서 16장 1절과 9절을 자주 인용합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잠 16:1),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이는 인간이 자기 의지로 사랑하고 결혼을 선택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존재한다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곧 ‘예정’(Predestination)과 ‘섭리’(Providence)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혼인을 통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맺어지는 것을 중국어로 “천생연분”이라 하는데, 이는 ‘하늘에서 이미 내린 인연’이라는 뜻입니다. 잠언서의 가르침과 상통하는 이 개념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자유의지로 결혼을 결정하지만, 그 모든 과정 위에 이미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다고 믿을 때 부부는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결여되었을 때, 결혼을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나?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라고 상대화하기 쉬워지고, 그 순간부터 파괴적 갈등에 휩싸이기 쉽다고 경고합니다.

다시 말해, 장재형목사가 보는 부부 관계의 본질은 ‘운명적 만남’과 ‘자유의지적 결단’이 묘하게 교차하는 신비로운 영역에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결단해도 결국 그 선택을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일찍이 정해놓으신 섭리 안에서 우리가 기쁨으로 동행하기를 바라신다는 믿음이 결혼 생활을 든든히 지탱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갈등을 맞이하더라도, ‘우리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며, 천생연분이기에 귀하다’고 굳게 믿는다면 그 갈등을 해결할 힘을 얻게 됩니다.

결국 에베소서 5장 22절 이하가 강조하는,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와 “남편들은 아내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같이 사랑하라”는 두 개의 명령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쌍’임을 장재형목사는 거듭 강조합니다. 만약 어느 한쪽만 강조된다면, 그것은 가정의 균형을 깨트리고 폭력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복종과 희생은 늘 상호적이어야 하며, 그 원동력은 성령의 충만함에서 비롯됩니다. 이 사랑의 본질이 “피차 복종”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결혼이 단지 일상적 생활공동체가 아니라 거룩한 예배의 자리이자,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예표하는 ‘성스러운 언약’임을 알게 됩니다.

특히 31~32절—“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를 해설하면서,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말하는 부부의 합일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 차원을 넘어선다”고 설명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신비로운 연합’을 이루는 것처럼, 부부도 영혼 깊이 서로 하나로 이어지는 통합적 관계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 ‘하나 됨’은 결코 남편이 아내를 소유하거나 혹은 그 반대도 아니고, 서로를 억압하는 방식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섬김과 희생을 반영하는 부부의 상호성에서만, 진정으로 이 비밀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요약하면, 에베소서 5장 22절 이하를 향한 장재형목사의 시각은 매우 균형 잡혀 있습니다. 남편이 ‘머리’가 되어 아내를 통솔한다는 전근대적 오해를 지적하되, 동시에 아내에게서 시작되는 사랑의 섬김이라는 측면도 분명히 조명합니다. 무엇보다 바울의 본의는 ‘상호희생과 상호섬김’의 원리를 선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지닌 신비와 사랑이 부부에게서도 재현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실천은 오직 성령 충만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라 말합니다.

2 가정의 위기

결혼 생활에서 갈등을 겪는 부부들은 늘 서로를 탓하기 마련입니다. “내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느냐”, “내 성격이 원래 이렇지 않았다”라는 식의 반발이나 실망이 오가다 보면, 점차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게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럴 때야말로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에 대한 믿음”을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때라고 강조합니다. 우리가 자유의지로 결혼을 선택했지만, 그 뒤에는 이미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이 있었다는 믿음이야말로, 결혼 생활의 근간을 지키는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부부 관계를 ‘우연’으로 보느냐, ‘운명’으로 보느냐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잠언서 16장이 말하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해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는 말씀은, 아무리 인간이 앞을 내다보고 계산해도 결국 우리 삶의 결과와 결론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우리가 처음에는 사랑에 취해 마치 내가 주도적으로 이 결혼을 이끌었다고 생각하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그 모든 과정이 이미 ‘천생연분’으로 예정된 길이었음을 깨닫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우리 만남이 하나님의 깊은 뜻 안에 있었다고 믿는 순간, 결혼생활에 닥치는 갖가지 풍파를 대하는 태도 또한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곧 “하나님이 허락하신 인연인데, 결코 헛되이 끝나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나고, 그 믿음 속에서 우리는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게 됩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점들을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이런 차이를 주셨을까?’라는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면, 갈등은 곧 학습의 계기이자 성장의 기회가 됩니다.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그 차이 속에서 나를 돌아보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장재형목사는 “부자(父子)는 유친(有親)해야 하고, 부부(夫婦)는 유별(有別)해야 한다”는 동양고전의 개념도 인용합니다. 이는 유교 경전에서 흔히 말하는 ‘오륜’ 가운데 두 가지 관계의 핵심 요약인데, “부자는 멀었던 관계이기에 친밀해져야 하고, 부부는 지나치게 가깝기에 일정한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그만큼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애초에 세대 차이와 위치 차이가 있기에, 더욱 의도적인 친밀함이 필요하다는 뜻이고, 부부는 때로는 서로가 너무 일상적으로 붙어 있다 보니 각자의 개성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거리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이 대목에서 장재형목사는 “물론 부모 자식 간에도 거리가 필요하고, 부부 간에도 친밀함이 필요하다”며, 본문을 문자 그대로만 단순 해석하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사랑과 존중의 긴장감’을 포착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관계는 상호균형 속에 있을 때 건강해진다’는 원리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말한 부부 관계 또한, 일방적으로 여성이나 남성 한쪽만 희생하거나 복종하거나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피차 복종하라”는 원리 아래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는 관계여야 합니다.

가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다툼과 갈등은 결국 ‘사랑의 결핍’에서 오는데, 그 사랑이 결핍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먼저 변하려 하기보다 상대가 먼저 변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장재형목사는 진단합니다. 상대에게 변화와 희생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이 낮아지고 섬길 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 관계를 붙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내가 먼저 사랑을 시작하고, 내가 먼저 존경을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의 때에 합당한 열매를 거두리라”는 신앙적 확신에 근거합니다.

부부가 한 명은 ‘내가 옳다’는 입장을 끝까지 고수하고, 다른 한 명은 ‘절대 내가 양보할 수 없다’는 태도로 버틴다면, 아무리 작은 갈등도 쉽게 해결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내가 먼저 상대방의 필요와 상황을 이해해보겠다”고 마음먹는 순간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씩 부드러워집니다. 물론 자존심을 내려놓고 먼저 다가가는 일이 결코 쉽지 않기에, 성경은 이를 ‘성령의 충만’과 연결하여 이야기합니다. 인간적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자기를 부인하는 마음’이 생길 때, 우리는 진정으로 상호 존중의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가정이 곧 작은 교회라는 말을 즐겨 인용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가정 또한 부부와 자녀가 서로 사랑하고 섬기며, 한 몸의 지체로서 움직이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근본은 그리스도로부터 오는데,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셨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희생적 사랑을 남편이 아내에게도 실천하라고 강조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하며, 아내는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이 둘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가정은 불균형에 빠지게 됩니다.

에베소서 5장 26절과 27절에서 말하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는 표현은, 단지 결혼 예식 때의 상징적 의미가 아니라 부부가 결혼 생활 전반에서 서로를 영적으로 세워주어야 함을 상징합니다. 교회가 말씀으로 정결해지듯, 부부도 말씀 안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회개하고 성장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남편은 ‘머리’로서 이끄는 존재인 동시에,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듯이 아내의 ‘발’을 씻기고, 필요하면 자기 생명까지도 내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내는 그러한 남편을 ‘주께 하듯’ 존경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맞이해야 합니다.

결국 이 모든 ‘비밀’(엡 5:32)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반영한다는 사실이, 에베소서 5장이 전하고자 하는 가장 궁극적인 메시지입니다. 즉, 부부는 서로에게 맞춰가기 위해 노력하는 수준을 넘어, 서로의 영적 성장을 돕는 조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때로는 서로의 단점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며, 상처받은 마음을 보듬어주고, 또 다른 차원에서는 각자의 재능을 더욱 펼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그렇게 서로를 세워주고 ‘거룩하고 흠 없는 모습’으로 만드는 책임이 부부 양쪽에게 공히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본문을 통해 “결혼이란 단지 인간적 제도나 전통적 행사 이상의 영적 사건”이라 말합니다. 그 영적 사건은 선택의 자유를 가진 두 인격체가 만나지만, 그 만남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다는 신비가 깃들어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신비가 깨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한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만약 이 성령의 역사를 소홀히 여기고, 결혼 생활을 단지 세속적인 감정 교류나 이해관계의 문제로만 치부한다면, 하늘이 허락하신 귀한 인연을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성령 안에서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은, 가장 먼저 부부에게 적용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부모와 자식, 종과 주인의 관계 등 모든 수직적·수평적 관계가 이 원리로 이어집니다. 장재형목사는 흔히 현대인들이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는 거리 두면 된다”는 사고방식으로 관계를 단절하기 쉽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은 결코 성서가 말하는 ‘피차 복종하라’는 가르침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갈등이 생길 때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그 관계가 더 성숙해질 수 있도록 책임감을 가지고 노력해야 합니다. 부부 관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결론적으로, 장재형목사는 부부에게 “여러분이 하나님의 계획 아래 맺어진 존재라는 절대성을 잊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그 절대성이 무너지고 관계를 임의로 상대화할 때, 우리에게 무너짐과 파괴가 찾아온다”고 경고합니다. 한편으로 “그 절대성을 굳게 붙들고, 갈등 속에서도 성령의 능력을 구하며,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섬길 때, 결혼은 놀라운 기쁨과 축복의 통로가 된다”고 강조합니다.

3. 믿음과 가정(Faith & Family)의 조화

에베소서 5장 22절 이하를 중심으로 한 이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가족 해체 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가속화되고, 개인주의가 만연해지는 현대사회에서, 결혼 제도 자체가 ‘구시대적인 속박’으로 치부되는 시각도 있기 때문입니다. 장재형목사는 그러나 “신앙과 가정(Faith & Family)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영역”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이 가정 속에서 가장 기초적인 형태로 구현되기 때문입니다. 교회 공동체도 궁극적으로는 여러 가정이 모인 형태이기 때문에, 가정이 무너지면 교회 역시 제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고 그는 강조합니다.

이 연장선에서, 장재형목사는 결혼 주례를 서게 될 때마다 반드시 잠언 16장 1절과 9절을 본문으로 읽어준다고 말합니다. 바로“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16:1),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16:9)입니다. 이 본문은 결혼이란 당사자들이 ‘자의적으로 선택하고 맺는 언약’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일찍이 예비하시고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상징적 메시지입니다.

결혼서약을 할 때, 서로에게 ‘내가 자발적으로 당신을 배우자로 선택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결코 누가 강제로 강요해서 이뤄진 결합이 아닙니다. 그런데 동시에 “왜 이 사람이 내 배우자가 되었나?”라는 질문을 곱씹어보면, 결코 내 자유의지로만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가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점에서, 결혼은 곧 우리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섭리가 교차하는 지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기에 부부가 살아가면서 갈등이 생길 때, 또는 실망스러운 순간이 닥쳐올 때마다, “그래도 우리를 맺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라는 절대적 믿음이 있으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작할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예정’(Predestination), ‘섭리’(Providence)라는 교리의 가정 생활에서의 구체적 적용입니다. “Pro-vidence”에서 “Pro”가 ‘미리’라는 뜻이고, “vidence”가 ‘본다(video)’는 의미를 가진다 해서, ‘미리 보고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교리적 설명이 단지 머릿속 지식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큰 위로와 지지대가 된다고 강조합니다. 흔히 결혼 생활을 하다 보면, “다른 사람을 만났으면 더 행복했을까?”라는 의문을 품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 자체가 ‘하나님의 예정’을 가벼이 여기고, ‘천생연분’의 가치를 스스로 흩뜨려 버리는 위험한 발상일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결혼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가회(信家會)’—곧 믿음의 가정—라는 의식을 굳게 지키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신앙의 기초 위에 가정을 세우고, 그 가정이 다시금 교회 공동체로 연결되어, 서로를 격려하며 세워주는 순환 구조가 형성될 때, 개인과 사회 모두가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차원에서 살펴보면,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는 표현을 오해하여, 남편이 가정에서 일방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과거에도, 또 지금도 적지 않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에 대해 “바울이 말한 ‘머리’ 개념은 ‘주권자’라기보다 ‘섬기는 리더’로서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즉 머리는 몸 전체를 코디네이트(coordinate)하고 보호하며, 필요하면 최전선에서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문화권에서든 ‘남편의 권위’를 오용하여 가정폭력이나 심리적 학대를 저지르는 일들이 벌어지는데, 이는 에베소서 5장 25절 이하의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는 명령을 전면으로 거부하는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세미나나 설교를 통해 “만약 교회가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부정하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밟고, 멸시하고, 착취한다면 이미 그것은 ‘교회’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라며, “마찬가지로 남편이 아내를 희생시키며 군림한다면, 그는 이미 ‘머리’가 아니라 폭군”이라고 일갈합니다. ‘머리’는 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몸을 착취하기 위한 기관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진정한 신앙 안에서의 부부 관계는, 남편이 아내에게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기꺼이 돌보고 보호하며 스스로 낮아져 섬기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남편을 존경하며 세워주는 것이 아내가 보여주어야 할 ‘복종’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결국 에베소서 5장 22절 이하의 말씀은, 서로를 얽어매고 구속하기 위한 속박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를 허락하는 사랑의 원칙을 제시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사랑은 상대를 종속시키고 지배하는 데서 오는 쾌감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창조적 연합’에서 오는 충만함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홀로 있지 않게 하겠다’며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고, 이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결혼이 결코 인간이 임의로 만든 제도가 아니며, 거룩한 창조 질서 안에 포함된 것임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 결혼의 의미가 무너지고, 개인주의가 만연하며, ‘결혼은 선택일 뿐’ 혹은 ‘결혼은 구속’이라는 인식이 강해지는 현실에서, 교회는 더욱 적극적으로 성경적 결혼관을 재조명해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결혼은 단지 둘이 사랑해서 만든 가족이 아니라, 그 사랑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고백하는 삶의 자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고백은 결혼 생활의 위기 순간에 더욱 빛을 발합니다. 사람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수습되지 않는 감정적 혼란이나 경제적 어려움, 자녀 양육 문제 등이 닥쳐올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고, 이 가정을 인도하신다”는 믿음이 참된 희망을 줍니다.

나아가 장재형목사는 “가정이 흔들릴수록 교회가 서로 부부생활의 어려움을 나누고, 성경적 지혜를 함께 모색할 수 있는 장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과거에는 가족 내 문제를 외부에 알리지 않는 문화가 강했지만, 현대 교회는 ‘서로 짐을 지라’(갈6:2)는 말씀에 따라, 가정의 문제를 신앙 안에서 함께 나누고 돕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오늘날에는 성도들이 결혼생활에 대한 교육, 상담, 기도를 함께 나눌 기회가 많아져야 합니다. 결혼이 힘겹고 외로운 싸움이 아니라, 교회가 함께 짐을 나누어지는 과정이 될 때, 가정은 지치지 않고 회복할 에너지를 얻게 됩니다.

이렇듯 믿음과 가정(Faith & Family)은 언제나 맞물려 돌아가는 두 축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가정을 꾸리면, 결국 인간적 한계와 이기심이 가정에 침투해 심각한 갈등을 일으킬 때가 많습니다. 반대로 가정이 건강하게 세워지지 못하면, 교회 공동체 역시 분열과 갈등으로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피차 복종하라”는 언급 뒤에, 곧바로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식, 종과 주인의 관계를 차례차례 설명합니다. 이는 교리적이고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이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매우 구체적인 지침입니다.

정리하면, 장재형목사가 에베소서 5장 22절 이하를 강해할 때, 가장 강조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인간의 모든 관계는 서로를 살리고 세워주는 상호성 속에서만 온전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 그 상호성은 성령의 충만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바탕으로 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셋째, 부부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상징하는 ‘신비로운 연합’이기에, 결코 단순한 사람끼리의 계약이 아니며,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아래 있음을 믿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넷째, 부부가 서로 갈등을 겪을 때마다 이 믿음을 붙들고, “천생연분”이라는 절대성을 놓치지 않을 때, 그 가정은 오히려 더욱 성숙하고 충만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고대의 가부장제와는 분명 구별됩니다. 기독교가 전하는 결혼관은, 남편과 아내가 ‘같은 인간적 존엄을 가진 존재’로서 서로를 위하고 지켜주도록, 최초로 혁명적인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지금도 사회·문화적 상황은 계속 변하지만, 인간의 근원적 문제—즉 이기심, 고립, 불화, 욕망 등—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22절 이하의 메시지는 여전히 살아 있으며, 장재형목사의 설교나 강연을 통해 현대인들에게도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합니다.

마지막으로, 장재형목사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부부로 만나서 살다 보면,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반드시 온다. 그때 ‘우리 만남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붙들라. 그리고 ‘내가 먼저 상대를 존경하고, 내가 먼저 상대를 사랑하겠다’고 결단하라. 그 결단 위에 성령이 임하실 때, 우리의 가정은 하늘의 모형을 지니게 된다. 평생 서로의 발을 씻어주고, 서로에게 천국의 기쁨을 맛보게 하는 복된 부부로 살아가길 바란다.”

바울이 그토록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단지 신학적·추상적인 범주가 아니라, 우리의 실제 가정에서 살아 움직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장재형목사의 해설도 그 핵심을 놓치지 않습니다. 사랑은 서로를 마주보는 관계, 서로에게 먼저 낮아지고 먼저 섬기는 관계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메시지, 그것이 에베소서 5장 22절 이하에 대한 장재형목사의 가르침이자, 현대 교회를 향한 중요한 권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장재형목사

1.유대인의 특권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로마서 3장 1-2절은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라는 물음에서 시작한다. 바울은 여기서 곧바로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라”고 대답한다. 즉,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부르심이 있었는데, 그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점이다. 이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도 유사하게 적용되는 중요한 영적 교훈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이 그 말씀을 보존했기에, 우리 역시 그 전통을 이어받아 성경을 소중히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장재형 목사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구원의 큰 그림을 이루시는 과정에서 특정 민족을 선택하셨고, 그들에게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그것이 곧 유대인의 특권이자 사명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성경을 소중히 여기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사랑을 발견하며, 그것을 세상에 전파해야 하는 의무를 부여받은 것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9장에서 유대인의 특권을 여럿 열거하는데, 거기에 따르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양자 됨, 영광, 언약, 율법 제정, 예배, 약속,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탄생했다는 영광스러운 자랑이 있다(롬 9:4-5).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인이 무조건 폐기되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점을 시사하며, 단지 그들이 의무에 합당치 못한 삶을 살았고 결국은 메시아를 영접하지 않는 선택을 했기에 문제가 생겼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논리는 바울의 전통적 배경인 유대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동시에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는 복음의 문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불순종이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했음을 드러내느냐”라는 물음이 뒤따른다. 바울은 로마서 3장 3-4절에서 단호히 말한다.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유대인이 믿음에서 실패하고 불순종한다고 해서, 그들의 “불신”이 곧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효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장재형 목사는 이런 본문을 설교하며 “인간은 언제나 흔들릴 수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흔들리거나 거짓을 행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의 신실하심은 어떠한 인간적 실패로도 취소되거나 무효화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바울은 시편 51편 4절, 그리고 시편 100편 5절 등의 구절들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시고 인자하시며, 그 성실이 대대에 미친다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라는 표현은, 인간이 자기 죄를 숨기고 하나님께 반론하거나 항변하려 해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즉, 아무리 인간이 “왜 하나님은 이러이러하시냐,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드시고 방치하시냐”고 하나님을 비난하더라도,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의로우심은 변하지 않고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신다는 것이다.

바울은 3장 5-8절에서 이러한 논리를 더욱 확장한다. 사람들은 “우리의 불의가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니, 이왕이면 더 죄를 짓는 게 낫지 않느냐?”라든지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자”라는 극단적이고 왜곡된 결론으로 치달을 수 있다. 바울은 이에 대해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확실하게 선을 그으며, 그런 식으로 복음을 왜곡하여 비방하는 자들은 오히려 정죄를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장재형 목사 또한 “하나님께서 악을 계획하셨다거나, 악을 일부러 허용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식의 해석은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악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사랑의 관계를 중시하시는 분이다. 악이 발생했을 때에도 그분이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절대 주권이 있지만, 그것이 곧 ‘악 자체가 하나님의 계획’이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따라서 악을 저지르면서 ‘결국은 하나님이 잘 되게 하실 것’이라고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 된다”라고 설교한다.

정리하자면, 로마서 3장 1-8절까지의 요지는 “유대인에게는 분명 특권이 있고, 그 특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으로 대표된다. 그러나 그들이 믿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인간이 악을 행함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선을 더 극적으로 드러낸다고 주장하거나, 그래서 악을 더 행해도 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궁극적 심판 주이시며 의로우시다”라는 바울의 선포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주제가 오늘날 교회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장재형 목사는 가르친다. 교회가 세상에 대해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실패한 모습이 드러나도, 그것이 곧 하나님의 권위나 신실하심이 손상되는 일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그러한 실패를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선택받은 이스라엘이 거룩한 사명을 지키지 못했을 때 멸망으로 치달았던 것처럼, 교회 역시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동일한 불순종을 반복한다면, 구약의 역사에서 보았던 심판이 우리에게도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 점이야말로 로마서 3장 초반부에서 강조하는 ‘특권과 책임’의 긴장감이며, 바울은 그 긴장 위에 하나님의 절대적 의와 신실하심을 놓는다.

따라서 첫 번째 소주제에서 우리는 다음을 요약해볼 수 있다. 유대인(이스라엘)이 받은 특권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 특권을 올바로 사용하지 못했음에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무너짐이 없다. 인간의 불신과 불순종은 하나님을 무효화할 수 없지만, 그러한 불순종을 “구원의 과정에서 필요한 단계” 혹은 “악조차도 하나님이 쓰시기에 우리는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된다”는 식으로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곧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2.인간의 죄에 대한 오해

로마서 3장 9-18절에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결국 모든 인간이 다 죄 아래 있다”는 사실을 천명한다. 그는 앞서 1장과 2장에서 이방인들의 죄와, 또 자랑하던 유대인들의 죄를 차례로 지적해왔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라고 말한다(롬 3:9). 이는 유대인뿐 아니라, 바울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죄의 지배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이 점은 장재형 목사도 여러 차례 설교에서 강조하는 바이다. “우리는 남의 죄를 보고 쉽게 정죄하지만, 사실은 내면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죄의 뿌리를 외면하고 싶어 한다. 바울은 죄가 이방인에게만 있는 것도, 유대인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라고 가르친다. 죄는 모든 인류가 공유하는 공통된 숙명 같은 것이며,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바울은 10-18절에서 유명한 ‘카라즈(charaz)’ 기법을 사용한다. 여러 시편과 예언서의 구절을 하나씩 인용해, 인간의 죄를 종합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10절)는 전도서 7장 20절, 시편 14편 및 53편에서 인용된 내용이다. 한마디로, 인간이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길 만한 조건은 전혀 없다는 절대 선언이다. 바울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구약의 다양한 본문을 꿰어(카라즈) 인용한다.

인간의 죄는 주로 세 가지 영역에서 드러난다. 첫째, ‘생각과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죄다. 바울은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으며”(롬 3:11)라고 지적한다. 이는 곧 인간이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며, 하나님을 무시하는 교만에 사로잡혀 있다는 뜻이다. 사실 하나님을 떠나 죄의 본성대로 살면, 마음과 생각이 부패하여 하나님을 싫어하거나 무시하는 지경에 이른다.

둘째, ‘말’의 죄다. 바울은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롬 3:13-14)라고 말한다. 시편에서 이런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사람의 언어가 얼마나 쉽게 악독, 거짓, 저주로 채워질 수 있는지를 강변한다. 야고보서 3장도 혀를 지옥 불과 연결지어 설명할 만큼, 말의 문제는 심각하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본문을 다루며 “우리가 동일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을 저주하거나 거짓말을 일삼는 죄를 범한다면, 그 혀는 열린 무덤의 냄새와 다르지 않다”고 표현한다. 그만큼 죄가 마음에 뿌리내리면, 혀를 통해 죽이는 말, 상처 주는 말, 독설이나 거짓말이 솟아나는 것이다.

셋째, ‘행동’의 죄다. 바울은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르다.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다. 평강의 길을 알지 못했다”(롬 3:15-17)고 한탄한다. 인간의 마음이 부패하고 말이 독해지면, 결국 행동으로도 나타나게 된다. 살인, 폭력, 분쟁, 전쟁, 수많은 사회적·개인적 부패가 여기서 시작된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극단적 살인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해도, 근본적으로 인간이 ‘이기심’ ‘증오’ ‘탐욕’ 등의 마음에 사로잡히면 결국 행동으로 악이 분출된다.

바울이 마지막으로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롬 3:18)고 선언하는 것은, 이런 모든 죄가 결국 ‘불경건’, 즉 하나님을 무시하는 교만에서 연유함을 보여준다. 인간이 스스로를 주인 삼아 살고, 하나님의 통치를 부정한 결과가 바로 죄의 현주소라는 것이다. 이처럼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이 오직 자기 힘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이 대목에서 장재형 목사는 “교회 안에서도 신앙 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혹은 말씀을 조금 안다는 이유로, 자신이 의롭게 된 듯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직면해야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해진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기서 다시 오해에 빠질 수 있다. “인간이 다 죄인이고,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우리가 굳이 어떻게 사느냐는 중요하지 않은 것 아니냐?”라는 생각이다. 어떤 이들은 아예 “죄가 죄를 더해서 결국은 더 큰 은혜가 드러나지 않느냐”며 방종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바울은 앞서 3장 8절에서 이미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라며, 그런 주장은 말도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장재형 목사 역시 “악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선이 나타날 수는 있어도, 그것이 결코 악을 합리화하거나 미화해주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거듭 강조한다. 요셉의 경우처럼, 형들의 악한 행동을 하나님이 선으로 바꾸셔서 구원의 큰 그림을 이루게 하셨지만, 그것이 곧 ‘형들의 악행이 선한 의도로 미리 계획된 것’이라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바울이 3장 9-18절에서 말하는 핵심은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으며, 인간이 스스로 의롭다 여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론의 핵심 출발점이다. 죄인을 죄인이라 깨닫게 하는 일, 그래서 결국은 은혜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알게 하는 일이 바로 복음의 첫 단계다. 장재형 목사가 이에 대해 말하길, “교회가 가장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은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구원이 절실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죄가 죄인 줄도 모르고 사는 사람에게 그 죄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말씀의 역할이다. 여기서부터 참된 회개와 구원의 문이 열린다”고 한다.

따라서 두 번째 소주제의 요점은 ‘인간의 전적 타락’이라는 주제를 정확히 짚고, 우리가 모두 죄인임을 알 때라야 비로소 복음의 필요성이 분명해진다는 데 있다. 나아가 그것을 오해하여 “결국 죄가 큰 만큼 은혜도 커지니 마음껏 죄를 지어도 된다”거나, “악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왜곡해서도 안 된다. 그저 하나님의 절대적 거룩 앞에 서볼 때, 모든 사람은 무릎을 꿇어야 마땅하다. 이 강력한 메시지는 바울의 로마서 죄론을 지탱하는 핵심 기둥이며, 장재형 목사가 여러 설교와 강해에서 반복적으로 설명해온 주제이기도 하다.

3.율법과 죄 인식, 그리고 구원의 길

로마서 3장 19-20절은 바울의 죄론(3장 1-18절까지)을 마무리하며, 율법의 역할과 한계를 다시 한번 짚어준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유대인들이 자랑하던 율법은 사실상 그들을 ‘의’로 이끄는 완전한 통로가 되지 못했다. 물론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말씀이고, 그 속에는 인류가 걸어야 할 ‘의로운 길’이 담겨 있다. 하지만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은 그 율법을 완벽히 지켜낼 수 없다. 결국 율법은 죄를 ‘드러내고 고발’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 율법을 통해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죄인인가를 깨닫게 된다. 문제는 율법을 단순히 “나는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는 더 깊은 필요를 자극한다는 데 있다.

바울은 율법이 가진 역할을 ‘성화(聖化)를 위한 하나의 거울’로도 본다. 율법이 없었다면, 인간은 스스로가 죄인이라는 사실조차 자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유대인들은 “우리는 율법을 받았으니, 이방인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해왔으나, 바울의 결론은 “율법을 줬어도 그것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에, 결국 너희도 죄인이며 심판 아래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의롭다 인정받을 수 없음을 선언하는, 복음 신학의 근본 진리로 자리 잡는다.

장재형 목사도 여러 강해와 저서에서 “율법의 행위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로마서의 메시지를 자주 강조한다. “율법이 좋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와 뜻을 나타내는 소중한 계시지만, 우리의 죄를 씻고 새 생명을 주는 능력까지 제공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율법은 죄를 폭로하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 역할을 할 따름이다”라고 한다.

3장 19-20절은 곧이어 바울이 말할 ‘이신칭의’(3장 21절 이하)로 넘어가기 직전의 결론부이다. 즉, 율법과 죄에 대해 충분히 논하고 나서,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 외에는 답이 없다”는 논리적 결론을 예고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바울은 인간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죄의 현실’을 조명한 뒤, 바로 이어서 21절 이하에서 그 죄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의를 선포한다.

물론 이 본문만 보면, 인간은 단지 율법 앞에 입이 막히고 심판이 두려운 존재로 비춰진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절망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함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새로운 소망의 길”에 대한 전제다. 즉, 인간이 정말 처절한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왜 필요한지를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 죄와 심판이라는 진단을 명확히 하지 않는다면, 복음 자체가 설득력을 잃는다. 인간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나는 죄인이며, 스스로 의롭게 될 길이 없다. 율법을 안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자각이 일어나야만, 복음이 복음답게 빛나게 되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에서도 “이 시대는 전반적으로 ‘죄책감’이나 ‘심판의 두려움’을 경시하며, 본질적 회개와 변화 없이도 신앙생활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풍조가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 심령에 뼈아픈 각성이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율법은 그 각성을 돕는 도구다. 어느 누구도 율법을 통해 의를 얻을 수 없으나, 율법을 통해 죄인임을 발견하고 결국은 그리스도께 나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율법의 선한 역할을 제대로 경험하는 길이다”라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율법은 불필요한 것인가?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로마서 7장에 가면, 바울은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고 단언한다(롬 7:12). 문제는 우리의 죄된 본성이 율법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율법이 인간을 정죄하기 때문에, 인간은 “어찌할꼬” 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가 말하는 복음의 질서다.

결국 바울의 논지에 따르면, 인간이 스스로 내세울 수 있는 의로운 행위는 아무것도 없고, 선천적/후천적 죄성 때문에 모든 부문에서 부패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달으면 오히려 길이 열린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죄 사함이 완성되었고,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를 새 피조물로 삼으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미 선포되었다. 율법을 통해 “나는 죄인”임을 절감한 자가,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이 베푸신 의”를 옷 입고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지점을 강조하며, “복음은 분명히 절망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그 절망은 우리를 진정한 소망으로 안내하기 위한 통로다. 율법에 의해 드러난 죄가 절망감을 가져오고, 스스로 의롭지 못함을 자인하게 만들며, 결국은 우리를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게 한다. 그 순간이야말로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턱이 된다”고 풀이한다. 동시에 그는 “이 메시지가 진정 교회 안에 깊이 울려 퍼져야 하며, 모든 성도가 매일 회개하고 다시 복음 앞에 선다면, 교회야말로 세상에 참된 빛이 될 수 있다”고 설파한다.

이렇듯 로마서 3장 1-20절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율법과 언약이었고, 오늘날 교회에는 복음과 성령의 임재일 수 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죄 아래 있음’,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지만, 율법 행위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긴밀히 이어 놓은 단락이다. 바울은 이어지는 3장 21절부터 드디어 인간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칭의)를 명확하게 설명할 예정이다. 하지만 그것에 앞서 반드시 필요한 전제는 ‘죄’를 깨닫는 일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찾지 않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교만’ ‘입술에 가득한 악독’ ‘발로 달려가는 불의’ 등, 총체적이고 보편적인 타락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직시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세 번째 소주제의 핵심은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지만, 스스로 의를 이룰 수는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함’을 선언하는 데 있다. 율법의 참뜻은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고, 동시에 우리 마음에 죄책을 일깨워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그 누구도 진정으로 의로워질 수 없다. 이 죄 문제를 바라보는 성도들이라면, 늘 “내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 교회에 전하고자 했던 복음의 전개이며, 교회사 속 여러 설교자들, 그리고 오늘날 장재형 목사가 독자와 성도들에게 반복해서 전달하는 메시지다.

결국 우리는 이 모든 결론을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로마서 3장 1-20절은 바로 그 전초(前哨)로서, 믿음으로 의를 얻게 되는 기쁨이 얼마나 크고 절대적인지 실감하도록 먼저 죄를 면밀히 들여다보게 만드는 장(場)이다. 이러한 바울의 논리 구조를 이해하면, 복음을 향한 우리의 감사와 감격은 훨씬 깊어질 것이다.

(단, 바울이 율법을 공격하거나 폐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살아야 함을 전제한다는 점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려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마 5:17)고 하셨던 진술이 그 토대를 단단히 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과 의를 보여주는 거울이자 기준이지만, 결국 우리의 죄를 고발하며, 예수님의 보혈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그 기준을 충족시킬 수 없음을 반증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볼 수 있다.)

이로써 바울의 핵심적 메시지는 “모두가 죄 중에 있고, 아무도 율법 행위로는 의를 이룰 수 없으나, 그리스도 안에 희망이 있다”가 된다. 장재형 목사도 이러한 복음의 진리를 역설하며, 교회가 먼저 회개와 겸손으로 돌아서고,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함께 살아갈 때, 비로소 세상에 진정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결국 로마서 3장 1-20절은 죄와 은혜의 극명한 대비 속에서, 구원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를 직면하고 회개해야 한다는 불변의 사실을 일깨우는 말씀이다.

──────────────────────────────────────────

로마서 3장 1-20절 강해를 소주제로만 구분하여 정리했다. 첫째로, 유대인의 특권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논하였고, 둘째로,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죄성과 그에 대한 오해들을 살폈으며, 셋째로, 율법과 죄 인식의 관계,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길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나, 하나님은 참되시고 신실하시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의를 베푸셨다”라는 복음의 절대적 선포에 있다. 인간은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지만, 죄를 자각하고 돌이켜 예수께 나아가는 길만이 구원의 답임을 로마서 3장은 힘있게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 메시지를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얼마나 절실하게 붙들어야 하는지를, 여러 시대의 설교자들과 마찬가지로, 장재형 목사 또한 거듭해서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천 가족을 위한 권면 – 장재형목사

에베소서 6장 속 관계의 재발견

에베소서 6장에 담긴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주인에 관한 가르침은 장재형(장다윗)목사가 꾸준히 강조해온 ‘천국 윤리’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는 오래도록 가정의 기초를 다지는 관계 회복의 중요성을 설파해 왔는데, 그 핵심은 단순한 도덕적 권면이 아니라 복음적 통찰에 있다. 즉 “취약해 보이는 이들에게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이라는 관점에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아내와 자녀, 종에게 먼저 권면하는 방식은 단순히 ‘순서가 역전된’ 표현을 넘어, 약자를 배려하시는 천국 가치관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해석할 때, 가정과사회와 교회 모든 영역에서 ‘힘의 역학관계’가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 서로를 세워 가는 것이야말로 “천대까지 이르는 복”을 여는 열쇠라고 역설한다.

장재형목사의 설교는 주로 성경 본문의 흐름을 따라가면서도 시대적 적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후반부부터 6장에 이어지는 말씀을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는 교훈과 맞물려 해설하며, 가족 공동체와 사회생활을 다시금 조명해 낸다. 그는 “가정의 기초가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원래라면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주인과 종”이라고 말해야 할 위계 질서가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주인” 순으로 제시된 점이야말로 “천국 윤리”이자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요구되는 역설적 세계관”이라 말한다. 그리고여기에 “관계의 비밀”이 숨어 있으며, 복음을 아는 이라면 심각하게 깨어진 가정사나 불화 속에서도 “주 안에서”라는 전제 아래 새로운 돌파가 가능함을 강조한다. 요컨대 “주 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전제하는 문구이기에, 이 말씀은 단순한 윤리 강의를 넘어 실제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적 약속이 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에베소서 6장을 통해 현대사회에 제시하는 핵심 주제는 크게 네 가지다. 첫째, 아내와 남편 관계 안에 깃든 창조의 비밀과 사랑의 책임. 둘째, 자녀와 부모의 관계가 보여 주는 공경과 축복의 접점. 셋째, 종과 주인의 관계가 시사하는 ‘섬김과 권위’의 역설. 넷째, 성령으로 충만해진 삶이 어떻게 일상을 뒤바꿔 가는가에 대한 실제적 적용이다. 그는 이러한 네 가지 주제를 통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정과직장, 사회 전체를 ‘천국 가치관’으로 변화시키는 도구임을 거듭 강조한다. “약한 자들을 먼저 일으키시는 주님”이라는 관점이야말로 네 주제를 관통하는 메시지이며, 이를 놓치면 기독교 윤리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자’는세상 수준에 머물게 된다고 지적한다. 이제 이 네 가지 주제를 중심축 삼아, 장재형목사의 관점과 설교 내용을6500단어 분량으로 풀어 보겠다. 소제목만 달았을 뿐, 다른 형식 구분은 두지 않고 연속된 흐름으로 정리한다.

아내와 남편의 관계 속 창조의 비밀과 사랑의 책임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5장 후반부터 6장에 걸쳐, 사도 바울이 “아내들과 남편”의 관계를 다룰 때 예상 밖으로“아내”를 먼저 언급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남편을 가정의 대표자라 여기는 전통적 문화에서라면, ‘남편이 먼저, 그다음 아내가 나중’이라는 흐름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바울은 아내에게 먼저 권면을 전한 후, 남편에게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성경은 익숙한 위계를 성령 안에서 새롭게 해석하도록 부르신다”고 해설한다. 통념에따르면 남편이 주도권을 쥐고 이끌어야 하지만, 복음적 관점은 “강자가 아니라 약자에게 먼저 말씀하시는” 신비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는 가정의 갈등이란 결국 남편과 아내가 서로 섬기고 존중하는 원리를 놓칠 때 생긴다고 본다. 이는 창세기 2장에 나타난 창조 원리, 곧 ‘둘이 합하여 한 몸을 이루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라’는 명령이 깨질 때 발생하는 비극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이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에 비유하며, 남편과 아내가 각각 상호 보완적으로 역할을 감당한다고 가르친다. 장재형목사는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듯 남편은 아내를 위해 헌신하라는 말씀과, 교회가 그리스도를 공경하듯 아내도 남편을 공경하라는 말씀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말한다.

종종 교회 전통에서 “남편은 머리요, 아내는 순종하라”는 본문이 가부장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인용되곤 했지만, 장재형목사는 “바울이 아내 억압을 지지한 적은 결코 없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남편은 아내를 위해 목숨까지내줄 만큼 사랑하라”는 메시지 쪽에 더 큰 무게가 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아내의 ‘주께 하듯 순종하라’는 말과남편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은 떼어 낼 수 없으며, 상호성을 놓치면 큰문제가 생긴다는 이야기다. 장재형목사는 “성령 안에서 깨어나면 서로 높여 주려 한다. 하지만 성령의 능력이 없으면 한쪽이 권위를 과도하게 주장하거나 다른 쪽이 온전히 순종을 감당해 내기 어렵다”고 말한다.

에베소서 5장 33절 “아내도 남편을 존경하라”는 구절이 있지만, 그보다 앞서 남편에게 먼저 요구되는 것은 ‘자기희생적 헌신’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원리를 ‘헌신적 리더십’이라 부르며, 만약 이 희생적 사랑이 배제된 채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만 일방적으로 내세우면 가정이 무너진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동시에 아내가 진정으로 공경하는 태도를 보이면 남편이 더욱 기꺼이 헌신하려는 마음을 얻게 된다는 역설도 강조한다. 예컨대 가정의경제적 어려움이나 육아 부담 등 일상적 갈등에서, 아내가 남편을 무시하면 남편도 스스로 책임을 지려는 의지를잃어 간다는 것이다.

“성령에 취하라”는 말씀이 왜 중요한가에 대해서, 장재형목사는 “인간적 자원만으로는 기꺼이 헌신하는 사랑을지속하기가 어렵다”고 설명한다. 사람들이 피곤하고 감정적으로 지치면, 누구나 서로를 배려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 충만에 들어가면, 서로에게 먼저 희생을 베풀 수 있는 영적 힘이 생긴다. 술은 잠시 들뜨게 할수는 있어도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반면 성령이 부어지면, ‘주의 기쁨과 인내와 배려’가 공급되어 가정을 치유해 간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특별히 언급하는 또 다른 관점은 “창조 때 저녁이 시작”이라는 창세기의 표현이다. 우리는 “아침이하루의 시작”이라 여기지만, 성경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고 말한다. 그는 이것이 전통적인 인식과 반대되는 개념이라며, 가정에서도 ‘강자’가 아니라 ‘약자’를 먼저 세우시는 것이 성경적 창조 질서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아내에게 먼저 말씀하심”은 곧 “가정 안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남편, 그리고 남편을 주께 하듯 공경하는 아내” 사이의 상호 존중을 통해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창조 질서의 비밀이며, 가정의 사랑과 책임을 동시에 구현하는 길이다.

자녀와 부모의 관계가 보여주는 공경과 축복의 접점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6장 1~4절에 나오는 자녀와 부모의 관계가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는 십계명의 구조를통해 해석될 수 있다고 말한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라는 구절에서, 우선“주 안에서”라는 전제가 중요하다. 그는 이것이 단순히 조건부 문장이 아니라, 복음을 아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근본 선언이라고 주장한다. 세상에는 폭력적이거나 무책임한 부모도 많지만, “주 안에서”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전제한다. 믿지 않는 가정이라면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이 불가능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주 안에서”라는 토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6장 2절은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라고 말한다. 장재형목사는십계명 중에서 ‘부모 공경’이, 하나님께 드리는 계명(14계명다음에 오는 사람 사이 계명(510계명)을 잇는 핵심적다리라고 본다. 즉 “부모 공경”이야말로 하나님과 이웃을 연결하는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는 한국 사회가 급격한변화를 겪는 가운데 “부모 공경”이 점차 약화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교회 공동체가 이를 회복하기 위한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깨어진 가정 안에서 학대당한 자녀라도, 주 안에서 새로운 ‘아버지 되심’을 발견할 때, 용서와 화해가 가능해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장재형목사는 이어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6장 3절의 축복을 단순화하지 않는다. “부모에게잘하면 장수한다”는 피상적 해석이 아니라, “공경”이라는 개념이 ‘위로 올려드리는’ 행위임을 강조한다. 그는 자주 인용하는 예화를 들어, 손녀가 단 하나의 아이스크림을 사서 할머니께 드리자, 그 집의 아이가 “엄마는 왜 할머니만 좋아하냐”며 서럽게 우는 사례를 언급한다. 그러나 그 할머니는 미안함보다도 “지혜롭네”라 말하며 먹어 넘긴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에서 “공경은 위를 향해 올려드리는 실천”이자, 결국 그것을 본 다음 세대가 또다시공경함으로 선순환이 생긴다고 해설한다.

또한 마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이 “고르반” 전통을 책망하시는 장면을 인용하며, “부모에게 드릴 것을 다 하나님께 드렸으니 그만”이라고 주장하는 외식적 태도를 지적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지 말라”고 엄중히 말씀하셨고, 이는 곧 우리가 신앙에 열심을 낸다고 해서 부모 공경을 등한시하는 것이 합리화될 수 없음을 뜻한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이런 왜곡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며, “사랑이 모든 관계를 회복한다”는 복음의 본질을 강조한다. 그 사랑이 곧 주 안에서 흘러나오는 힘이므로, “부모 공경”은 단지 문화적 미덕이 아니라 ‘복음으로이어지는 명령’이라고 풀이한다.

에베소서 6장 4절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과 관련해, 장재형목사는 “아비들”에게 먼저 경고가 주어진 점이 흥미롭다고 말한다. 이는 부모가 자녀의 마음을 무시하고 가부장적 권위만 휘두르지 않도록 막아 주는 지침이라는 것이다. 현실에서 많은 자녀가 아버지를 불편하고 무서운 존재로 느끼기 쉬운데, 복음 안에서 “아버지”는 자녀를 존중하며, 주께서 주신 생명으로 대해야 한다. ‘주의교양과 훈계’란 세속적 지식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전제로 한 ‘엄격하지만 품어 주는 양육’을 가리킨다.

장재형목사는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부모에게 자녀를 억압할 권리가 주어진 것은아니다”라고 요약한다. 그는 이 관계를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관계”에 빗대어, ‘노엽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녀의 감정과 개성을 존중하고, 상처 주지 않으려 애쓰는 태도라고 설명한다. 또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한다’는것은 무조건적 방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끌되 늘 복음이 흘러나오도록 돕는 자세라는 것이다.

결국 에베소서 6장 속 자녀와 부모의 관계는 가정이 “천국의 기초 단위”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교회와 학교, 가정이라는 교육 삼각구도에서, 그 중심에 가정이 놓인다는 것이다. 가정이 무너지면 교회와 사회도 흔들릴 수밖에없다. 이때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부모”라는 두 축이 올바로 설 때라야건강한 기틀이 마련된다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주장이다. 그는 깨어진 가정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기에, 복음의 능력을 통해 이 틈이 메워질 수 있다고 호소한다. 교회는 “상처받은 자녀나 혼란을 겪는 부모에게 피난처가 되고, 그들을 복음으로 치유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종과 주인의 관계가 시대를 초월해 시사하는 섬김과 권위의 역설

에베소서 6장 5절 이하의 종과 주인의 관계는 오늘날 대부분 국가에서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기에 직접 적용이 어렵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바울 시대를 이해하되, 이 말씀이 21세기에도 직장이나 사회적 약자와강자의 관계를 관통하는 원리를 보여 준다고 말한다. 여기서도 바울은 “상전”이 아니라 “종”에게 먼저 말한다. 전통적으로라면 힘 있는 “주인”에게 권면이 향해야 할 텐데, 복음은 정반대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복음의 비밀이자 천국 윤리”라고 주장한다. 세상이라면 권력자에게 아부하거나 조심스레말해야 하지만, 복음의 방향은 “종들아”라고 먼저 부르며,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권면한다. 이는 종이 세상에서는 낮은 지위에 있더라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결코 가치가 뒤처지지 않음을 드러내며, 하나님께서는 “눈가림이나 사람 기쁘게 하려는 동기가 아닌, 진실한섬김”을 귀히 여기신다는 뜻이다.

그는 이를 “하나님 앞에서의 동기”라는 표현으로 자주 풀어낸다. 직장이나 조직 안에서 성도가 일하면서, 겉치레만 하고 속으로는 불성실하면 그 마음이 이미 하나님 앞에서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반면 하찮아 보이는 일도“주께 하듯”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된다. “종이나 자유자나 선을 행하면 주께로부터 보상을 받는다”(6:8)는 말씀도 이 원리를 뒷받침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성경은 ‘선을 행하면 하나님이 갚으신다’고 말하는 보상 신앙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이 보상이 세속적 성공이나 물질적 풍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하늘에서의 존귀’나 ‘영적 축복’은 반드시 뒤따른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6장 9절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는 명령이 얼마나 파격적인지 말한다. 당시 로마 법 아래서 노예는 주인의 재산이었고, 주인은 종의 목숨까지도 좌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 하나님”을 언급하며, 종과 주인이 모두 “하늘에 계신 상전” 아래 있다고 가르친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이 노예 제도를 곧바로 해방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회가 노예 제도를 묵인했다”는 오해가있지만, 복음이 노예와 주인을 형제로 삼고, 결국 제도 자체를 무너뜨리는 내적 동력을 제공했다는 점을 빌레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해설한다.

장재형목사는 현대사회에서도 누구나 ‘종’ 혹은 ‘주인’의 위치를 경험한다고 말한다. 어떤 조직에서는 상급자의지위에 있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누군가에게 지시받아야 하는 처지일 수 있다. 중요한 건 성령 안에서 늘 “주께 하듯” 일하고, “공갈”을 그쳐야 한다는 점이다. 세상 권위와 권력은 영원하지 않고, 모두가 결국 하나님 앞에 동등한존재다. 그러므로 ‘주인’이 된 이들은 ‘섬김의 리더십’을 실천해야 하며, ‘종’의 자리에 있는 이들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세’를 지켜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강조한다.

성령으로 충만해진 삶이 가정과 사회를 뒤바꾸는 실제적 적용

장재형목사의 설교는 끝내 “술 취하지 말라 오직 성령 충만을 받으라”(엡 5:18)는 말씀과 연결된다.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주인의 관계에 결정적 전환을 일으키는 열쇠는 “성령의 내주하심”이다. 그는 “두려움, 걱정, 분노, 상처 속에서도 먼저 사랑할 힘은 오직 성령께서 임하실 때 생긴다”고 거듭 말한다. 그렇게 성령에 충만해진 개인이 가정과 교회와 일터에 선한 영향력을 흘려보낸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 안에도 갈등과 상처가 존재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특히 깨어진 가정의 자녀들이 교회로 몰려온다. 교회가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참된 ‘아버지 되심’을 경험하게 해야 할 책임이 크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교회가 먼저 “천국 윤리”를 실천해야 한다. 교회 지도자들도 ‘공갈’을 그치고, 외형적 치장보다는 섬김을 앞세우며, 부모와 자녀들 역시 서로를 보듬으려는 태도를 배워야 한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부모가 성령 안에서 먼저 회개하고, 남편이 아내에게 헌신하면, 아내가 그를 공경하기 시작한다. 그런 식으로 ‘순서의 역전’과 ‘사랑의헌신’이 진행될 때, 비로소 가정이 세워진다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은 어떻게 유지될까. 장재형목사는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는 습관이중요하다고 말한다.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이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하듯, 우리의 영혼은 매일 죄를 회개하고 성령의 능력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찬양과 감사가 충만한 예배 공동체에 속하는 것도 필수적이라고본다. 함께 모여 성령을 구하며 찬양할 때,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 되어 일하시는 성령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개인의 약함을 넘어서, 서로에게 “주께 하듯” 대하는 소위 ‘하나님 나라의 미리 맛보기’가 교회 안에서 구현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교회 생활에 치중하느라 가족을 돌보지 않는 “어긋난 열심”을 경계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고르반” 개념과도 맞닿는 문제다. 즉 “나는 하나님께 헌신했다”며 부모나 가족을 외면하는 태도는 복음의 정신이 아니며, 진정한 헌신이라면 오히려 가정부터 돌보도록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는 수많은 실제 사례를 예로 들어, “가정이 깨어져 버렸는데 교회 봉사만 열심히 한다면 세상이 교회를 어떻게 보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가정이 어렵더라도 부모나 배우자를 함부로 대하지 말고, 가능한 한 사랑과 공경을 실천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길을 여신다”고 격려한다.

결국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세 쌍의 관계, 곧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녀, 종과 주인은 “성령 충만이 실제 현장에서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보여 주는 사례다. 장재형목사가 거듭 언급하듯, 복음의 역설을 붙들면 우리의 삶터가 달라진다. 세상은 강자를 우선시하지만, 에베소서 6장과 복음은 “약자에게 먼저 말씀하심으로 강자를 바꾸어 가신다”는 길을 제시한다. 아내가 먼저, 자녀가 먼저, 종이 먼저 등장하고, 그들에게 먼저 권면하시는 순서가 바로 “천국의 순서”라는 말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약자의 억울함을 그냥 외면하라”는 뜻이 아니라고 덧붙인다. 오히려 “불의는 바로잡아야하지만, 복음적 해결책은 언제나 ‘먼저 나에게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아내든 자녀든 종이든, 하위 계층에 놓여 있다고 여겨지는 이들이 ‘주 안에서’ 순종과 공경을 실천하면, 그 선행을통해 “하늘에 계신 상전”이 직접 보응해 주신다는 믿음이 바울 서신의 골자다. 동시에 남편·부모·주인 같은 ‘위’에놓인 이들은 “공갈을 그치라”는 경고에 동일하게 직면한다.

복음은 이처럼 인간 세상의 상하 질서를 뒤흔들지만, 그 뒤흔듦 안에서 ‘더 높고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드러난다. 장재형목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여 준 것이 바로 이 역설적 승리”라고 한다. 예수께서는 로마 제국을 무력으로 전복하는 대신, 십자가를 지심으로 죗값을 거두고 영원한 생명을 여셨다. 이는 세상의 통념과 거꾸로 된 방식이며, 에베소서 6장의 윤리가 뿌리내린 기초이기도 하다.

그는 교회가 에베소서 6장의 메시지를 잘못 이해하여, “옛 노예 제도와 가부장적 권위를 옹호했다”는 과오를 경계한다. 복음의 참된 힘은 이런 왜곡을 뛰어넘어, 사랑과 존중과 섬김을 실천하는 공동체로 우리를 초대한다. 현대사회에서도 법과 제도는 평등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직장 내 갑질과 가정 폭력이 비일비재하다. 교회 안에서도‘성직자’ 대 ‘평신도’ 권위를 악용하는 문제가 생길 때가 있다. 그럴 때 교회는 어느 편을 들기보다, “서로 형제가되라”는 복음적 근본 메시지를 선포하고, 실제로 이행하도록 제도적·영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또, 궁극적 목표는 ‘적대’가 아니라 ‘화해와 화평’에 있음을 기억하라고 장재형목사는 덧붙인다.

결론적으로, 장재형목사가 에베소서 6장을 해설할 때 제시하는 사중(四重)의 메시지는 동일한 맥을 이룬다. 첫째, 아내와 남편 관계에서 “먼저 기초를 놓는 자”가 아내라는 역전적 사고는 복음의 역설적 순서를 드러낸다. 둘째, 자녀와 부모 관계에서 “주 안에서 공경”하라는 말은 약속 있는 첫 계명으로 천대까지 흐르는 축복의 물꼬를 튼다. 셋째, 종과 주인의 관계에서 “종에게 먼저 말하고, 주인에게는 공갈을 그치라”는 명령은 외형적 지위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마음 상태가 더 중요함을 일깨운다. 넷째, 이 모든 것을 실천하게 하는 동력은 “술 취하지 말고 성령충만하라”는 권면이며, 성령 충만이야말로 가정과 사회를 치유하는 열쇠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에서 “이 비밀이 크다”는 표현을 자주 인용한다. 이 ‘비밀’은 결코 감추어진 신비가 아니라, 십자가가 보여 준 ‘인간 이성 너머 하나님의 역설’이라는 의미다. 십자가처럼, 복음 역시 겉보기에 세상의 관념과 맞지 않지만, 그 길을 통해 가장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아내가 먼저, 자녀가 먼저, 종이 먼저라는 흐름은“강자가 먼저가 아니다”라는 하나님 음성을 상징하며, 사랑의 섭리가 실행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현대 교회가 이본문을 접할 때, 과거 잘못을 반복하지 않고 “복음이 지닌 전복적·치유적 능력”을 재발견해야 한다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강력한 주문이다.

그는 설교 말미마다 “이 말씀을 붙들고 삶으로 나아가라. 우리는 천국 백성이자 이 땅의 문화 속에서 성령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아내가 남편을 세워 주고,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며, 종이 주인을 섬기는 중에 주인까지도 복음앞으로 나오게 하자. 이것이 십자가의 역설이요, 새로운 피조물의 삶이다”라고 권면한다. 이런 관계 역전을 통해가정이 서고, 교회가 회복되며, 사회가 밝아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된다는 것이다. 성령에 충만해진 사람은그 사랑을 머금고만 있지 않고 반드시 흘려보내기 마련이기에, 부딪히는 현실마다 복음의 향기가 드러나게 된다는 결론이다.

이렇듯 장재형목사의 에베소서 6장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놀랍도록 유효하다. 그는 종종 “성경은 거꾸로 읽어야제맛”이라는 농담을 하는데,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주인과 종”이라는 위계를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주인”으로 읽어야 성경의 본의를 제대로 붙잡을 수 있다는 뜻이다. 겉보기엔 평등한 듯 보여도 실제로는 약자를 무시하기 쉬운 현대사회에서, 교회는 “약자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증언할 책임이 있다. 십자가가 증명한것처럼, 그 역설적 사랑이야말로 에베소서가 전하는 천국 윤리의 정수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유대인이나헬라인, 종이나 자유자, 남자나 여자의 구분이 없고, 우리는 모두 한 형제자매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종과주인이라는 구분은 이 땅에서 서로를 보듬고 “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을 학습하도록 주어진 자리일 뿐이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6장 설교를 마칠 때마다 “주여, 이 교훈을 실제로 살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며, 예배를 마친 뒤에도 “가정과 일터에서 이어지는 예배자가 되라”고 촉구한다. 이 예배의 현장이야말로 가정과 직장이며, 그곳에서부터 천국의 질서가 새롭게 흘러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가 수도 없이 강조해 온 메시지는, 오늘날 가정 붕괴와 세대 갈등, 직장 내 갑질이 흔한 현실에서 가장 근본적인 복음의 해답을 제시한다. “성령충만을 구하며, 약자를 먼저 배려하라”는 것이 요점이며, 아내와 남편이 서로 공경하며, 부모와 자녀가 사랑으로연결되고, 종과 주인이 섬김과 겸손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하늘에 계신 상전”께서 우리의작은 선행에도 반드시 신령한 보상을 내리신다는 믿음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의 기쁨이 된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에베소서 6장의 가르침은 1세기 지중해 세계의 노예 제도나 가부장적 문화에 타협한 것이아니며, 오히려 복음을 통해 그러한 구조들을 안에서부터 뒤집는 강력한 동력을 제공해 왔다고 장재형목사는 설파한다. 그 동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으며, 교회가 이 복음을 제대로 해석하고 실천한다면, 깨어진 가정과 왜곡된 사회를 치유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특히 다문화 가정이나 이민 공동체가 증가하는 현실에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먼저 약자에게 손을 내미시는 분’이기에, 교회는 낯선 문화나 난민 등 소외된 이들을 따뜻이 환대해야 한다. 그렇게 가정에서부터 시작된 복음의 실천이 교회와 사회 전체로 뻗어 나갈 때, 우리가 꿈꾸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실제로 확장된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장재형목사는 “이 비밀이 크다”는 고백 안에 담긴 경외심을 늘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이성을 훌쩍 뛰어넘는다. 순서가 거꾸로인 것 같고, 약자에게 먼저 말씀이 임하는 듯 보이지만, 이것이복음의 지혜이며 능력이다. 창조가 어둠 속 저녁부터 시작됐듯, 가정과 사회의 절망스러운 문제들 한가운데서도새로운 아침이 열릴 수 있다. 이는 “하늘에 계신 상전”께서 공의롭고 인격적인 사랑으로 모두를 보살피시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주인”이라는 세 쌍의 관계가 발산하는 복음의 빛은, 개인과 가정과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치유로 이어진다. 그것이 곧 “천대까지 흐르는 축복”이며, 술 취함 대신 성령 충만을옷 입은 사람들에게 약속된 새로운 삶의 패턴이라고 장재형목사는 강조해 왔다. 그렇게 수백 번, 수천 번 설교해도 달라지지 않는 그의 결론은, “성령 없이는 이 길을 갈 수 없지만, 성령과 함께라면 가정과 세상과 영혼이 바뀐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에베소서 6장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강력한 도전이자 위로라는 말로, 그는 늘설교의 문을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