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대리석에서 천사를 해방하듯: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의 성화와 성령론

이탈리아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 복도에는 미켈란젤로가 남긴 ‘노예상(The Slaves)’ 연작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조각들은 이른바 ‘논 피니토(Non-finito)’, 즉 미완성 기법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형체는 대석석이라는 거친 물질 속에 반쯤 갇혀 있으며, 마치 그 무거운 돌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온몸을 비틀며 몸부림치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깎여 나가지 않은 육중한 돌덩이가 인물의 사지를 짓누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부에는 이미 완전한 생명력이 꿈틀거리고 있는 듯한 묘한 긴장감이 흐릅니다.

저는 이 조각상들 앞에 멈춰 서서 한참 동안 그 고통스러운 몸짓을 응시하다가, 문득 우리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마주한 것 같은 강렬한 전율을 경험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얻었으나(Already), 여전히 타락한 본성이라는 육체의 무거운 껍질을 다 벗어버리지 못한 채(Not Yet), 하늘의 거룩함을 향해 신음하며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저 돌 속에 갇힌 노예와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는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고뇌와 성화(Sanctification)의 긴 여정을 깊이 있는 신학적 통찰로 풀어냅니다. 그는 성령의 사역을 단순히 일시적인 초자연적 기적이나 감정적 신비 체험의 영역에 가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령의 역사를 거친 돌더미를 하나하나 깎아내어 그 안에 잠들어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마침내 밖으로 드러내는, 치열하면서도 본질적인 ‘조각의 과정’으로 정의합니다. 우리 삶에 불어오는 성령의 바람은 때로 지친 영혼을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미풍으로, 때로는 우리의 견고하고 모난 자아를 사정없이 깨뜨리는 강력한 망치질로 다가오며 우리를 빚어갑니다.


돌덩이 속의 천사를 발견하다: 육의 본성을 깨뜨리는 영적 투쟁

생전에 미켈란젤로는 **”나는 대리석 안에 갇혀 있는 천사를 보았고, 그 천사가 자유롭게 풀려날 때까지 돌을 깎아냈을 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장재형 목사가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 또한 이 위대한 예술적 영감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그는 죄로 말미암아 부패한 인간의 본성을 성경적 용어인 ‘육체의 일’이라 명명하며,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로막는 근본적이고도 거대한 장애물임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갈라디아서가 경고하는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그리고 분쟁과 시기 등은 단순한 윤리적 일탈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없이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려 했던 아담의 오래된 반역의 습관이며, 우리 영혼의 광채를 가로막고 있는 차갑고 두꺼운 돌덩어리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임재하신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견고한 자아의 돌덩어리에 마침내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 사이의 영적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수반하지만, 이는 생명이 살아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치열한 싸움을 결코 회피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사도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처절하게 탄식했던 바로 그 자리, 자신의 무능함을 뼈저리게 통감하는 그 지점에서 비로소 성령의 초자연적인 도우심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박약한 의지로는 절대로 끊어낼 수 없는 죄의 사슬을 푸는 유일한 열쇠이며, 타락한 본성을 하늘의 거룩한 성품으로 재창조하는 유일한 권능입니다.


진리의 닻을 내리고 은혜의 심연으로: 말씀과 성령의 동행

성령의 역사는 근거 없는 열광이나 일시적인 감정의 고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성령의 임재는 ‘기록된 말씀’이라는 견고한 암반 위에서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꽃을 피웁니다. 장재형 목사는 성령을 ‘진리의 영’으로 강조하며, 성령과 말씀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호보완적 관계를 역설합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밤바다를 항해하는 배에게 길을 안내하는 등대가 필수적이듯, 성령은 자칫 난해한 고대 문자로 남을 수 있는 성경의 텍스트에 신성한 조명의 빛을 비추십니다. 그리하여 그 말씀이 오늘 나에게 들려주시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음성(Rhema)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깊은 성경 묵상 가운데 글자 너머에 숨겨진 하나님의 타는 듯한 심정을 발견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은, 활자 사이사이에 역사하시며 우리의 지각을 깨우시는 성령의 조명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를 이 거친 세상에 고아처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십자가 사랑이 단지 2천 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일어난 박제된 역사적 사건에 머물지 않게 하십니다. 오히려 그 사랑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오늘 나의 삶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현재적 복음의 능력으로 다가오게 하십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이 성령을 가리켜 “우리 마음속에 신앙의 비밀을 여는 열쇠”라고 묘사했듯이, 장재형 목사 또한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그 어떤 인간도 구속의 은혜를 삶으로 번역해낼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자신의 추악한 죄를 자각하고, 그 서슬 퍼런 진리 앞에 순종하여 삶의 항로를 수정하게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방언이나 신유보다 더 확실하고 위대한 성령 충만의 증거일 것입니다.


개별적 조각을 넘어 사랑으로 완공되는 성전: 공동체적 성화

미켈란젤로의 조각이 한 예술가의 천재적인 영혼을 담은 단독적인 작품이라면, 성령께서 빚어내시는 궁극적인 걸작은 성도 개개인이 연결되어 이루는 ‘공동체’라는 거대한 유기적 성전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성령의 사역이 단순히 개인의 내면적 평안이나 수양의 차원에 머무르는 것을 경계합니다.

성령은 제각기 흩어진 이기적인 마음들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묶어 거룩한 연합을 이루게 하는 ‘천상의 접착제’와 같습니다. 오순절 다락방에 임했던 불의 혀는 각기 다른 언어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의 비전, 하나의 사랑으로 녹여내어 예루살렘 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과 같은 성령의 열매는 결코 혼자 골방에 앉아 도를 닦는다고 해서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완전한 사람들과 부대끼는 관계의 현장에서, 나를 아프게 하는 지체를 용서하고, 도저히 내어주기 힘든 것을 내어주는 처절한 사랑의 연습을 통해 서서히 영글어갑니다. 장재형 목사가 주창하는 ‘성령의 전으로서의 교회’는 건물의 웅장함이 아니라, 지체들이 서로를 향해 흘려보내는 희생적인 섬김의 깊이로 그 진가를 증명합니다. 세상의 차가운 냉소 속에서도 교회가 여전히 인류의 소망이 되는 이유는, 그 공동체 안에 성령이 주시는 따스한 위로와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은혜의 강물이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공사 중(Under Construction)인 존재들입니다. 구원은 이미 받았으나, 아직 완전한 영화(Glorification)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 거룩한 긴장 상태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미켈란젤로는 죽음 앞에 자신의 조각들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떠났을지 모르나, 우리 안에 이 착한 일을 시작하신 성령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성령께서는 우리의 모난 성품을 정으로 다듬으시고, 마음의 굳은 살을 제하시며, 마침내 흠도 점도 없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온전한 걸작으로 우리를 빚어가고 계십니다. 그 신실하신 창조주의 손길에 나의 전 존재를 온전히 내어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한 걸음씩 내디뎌야 할 영광스러운 성화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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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 로마서 13장 13–14절 강해: 그리스도로 옷 입는 삶과 성 어거스틴의 회심

로마서 13장 13–14절은 한 인간의 내면과 교회의 역사를 동시에 뒤흔든 말씀으로 기억된다. 성 어거스틴이 《고백록》에서 들려준 장면은 유명하다. 정원에 앉아 괴로움 속에 있던 그는 “톨레 레게(tolle lege), 집어서 읽어라”라는 아이의 노랫소리를 듣고 성경을 펼쳤고, 눈앞에 마주한 구절이 바로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였다. 그 순간 그는 과거의 방황을 내려놓고 삶의 방향을 돌렸다. 장재형목사는 이 이야기를 단지 옛 성인의 일화로 끝내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명령을 신자의 정체성을 바꾸는 실제적 힘으로 해석하며, 은혜가 사람을 어떻게 새롭게 이끄는지를 오늘의 언어로 차분히 설명한다.

옷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신분을 드러내는 표지다. 의사가운을 입으면 몸가짐이 달라지듯,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은 자연히 그분의 마음과 걸음에 맞추어 살아가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진정한 은혜를 입은 사람은 세마포를 더럽히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자신을 단정히 지킨다”고 말한다. 억지로 끌고 가는 금욕이 아니라, 은혜의 끌림에 응답하는 방향성의 변화가 핵심이라는 뜻이다. 그 변화는 일회성 각성이 아니라 삶 전체를 부드럽게 재배치하는 힘으로 나타난다. 예배에서 받은 감동이 월요일의 선택으로 번역되고, 작은 선택이 쌓여 인격의 윤곽을 새긴다. 은혜는 번개처럼 임할 수 있으나, 성품의 변화는 보슬비처럼 스며든다.

바울이 이 권면을 보낸 시대의 풍경은 오늘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로마 제국은 강력했지만 도덕은 해이했고, 고린도는 번영했지만 방종이 일상이었다. 바울은 그 시대의 죄를 세 쌍으로 요약한다. 방탕과 술 취함은 밤낮을 가리지 않는 쾌락의 연쇄를, 음란과 호색은 양심이 마비돼 부끄러움을 잃은 성적 타락을, 다툼과 시기는 관계를 허무는 외적 폭력과 내적 부패를 가리킨다. 장재형목사는 이 목록을 오늘의 장면으로 옮겨 적는다. 무한 스크롤과 과도한 자극, 댓글 전쟁과 비교의 문화, 상업화된 욕망의 공급망은 로마의 광장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라”는 요청은 더 절실해졌다. 여기서 ‘낮’은 모든 것이 드러나는 하나님 앞의 공간을 뜻한다. 빛의 자녀는 숨김 없이 산다. 드러냄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삶은 간결해지고, 간결함이 지속되기에 공동체는 신뢰를 회복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씀이 “하지 말라”로만 채워진 금욕의 규칙집은 아니다. 바울의 결론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다. 비움보다 채움이 먼저라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갈라디아서 5장을 함께 펼쳐 보인다. 육체의 일은 의지력만으로는 끊기 어렵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같은 성령의 열매는 노력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머무를 때 ‘맺히는’ 결과다. 그는 회개를 “마음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라 부른다. 행동으로 드러나기 전에 생각과 욕망이 손을 맞잡기 마련인데, 말씀과 기도로 그 손을 먼저 붙잡아 끊어내는 일이 회개라는 것이다. 그래서 장재형목사의 강해에는 매일의 리듬이 따라붙는다. 짧고 잦은 기도로 욕망의 흐름에 브레이크를 걸고, 말씀 묵상으로 생각의 프레임을 바꾸며, 공동체의 상호 권면과 돌봄 속에서 드러난 죄를 즉시 고백하고 끊어내는 습관을 쌓으라고 권한다. 이렇게 준비된 마음에서는 죄의 계획이 자라기 어렵다.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이 바로 그 지점을 겨냥한다. 도모는 계획이고, 계획은 시스템이다. 거룩도 시스템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공동체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 장재형목사는 교회를 ‘대조적 공동체’로 묘사한다. 세상과 등을 지는 도피처가 아니라, 세상 가운데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함으로 복음을 비추는 등대라는 뜻이다. 소비와 효율이 전부인 질서 속에서 나눔과 안식을 회복하고, 경쟁과 비교가 일상인 공간에서 축복과 격려를 일상의 언어로 만들며, 실패를 숨기는 문화에서 회개와 용서를 숨기지 않는 질서를 세우는 공동체. 대조가 선명해질수록 복음의 향기는 진해진다. 그는 에베소서 6장의 전신갑주와 로마서의 ‘빛의 갑옷’을 나란히 읽으며, 기도와 말씀, 의의 실천과 평안의 복음이 공동체의 표준 복장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옷은 매일 바꿔 입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결단도 매일 새로워져야 한다. 어제의 결단은 오늘의 방심을 막아 주지 못한다. 오늘의 기도만이 오늘의 유혹을 이긴다.

디지털 시대의 특수성도 놓칠 수 없다. 알림은 우리의 취약 지점을 정확히 찌르고, 알고리즘은 욕망의 약한 연결고리를 학습한다. 장재형목사는 ‘영적 사분면’이라는 간단한 설계를 제안한다. 무엇을 끊을지(디지털 금식, 알림 비우기, 취침 전 스크린 오프), 무엇을 채울지(시편 낭독, 말씀 오디오, 짧은 감사 기도), 누구와 함께 갈지(멘토, 동행자, 소그룹)를 미리 정하라는 것이다. 회개는 결심이 아니라 설계라는 말이 여기서 힘을 얻는다. 설계가 바뀌면 생활 패턴이 바뀌고, 패턴이 바뀌면 욕망의 흐름이 달라진다. 흐름이 달라지면 죄의 씨앗은 자라지 못한다. 이렇게 시스템으로 구현된 거룩은 꾸준하고 현실적이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책임의 감각도 자라난다. 장재형목사는 그리스도로 옷 입은 교회가 공적 선을 증언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터에서 정직을 선택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타인의 성공을 축하하는 문화가 강단의 설교와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한다. 다툼과 시기가 지배하는 자리에서 화해와 격려를 실천하는 소수의 용기는 놀라운 전염력을 갖는다. 초대교회가 혹독한 핍박 속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았던 이유는, 개인의 영성이 공동체의 돌봄과 만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신약의 자주 쓰이는 단어 ‘서로’를 강조한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납하며, 서로 짐을 지는 삶이야말로 세상을 향한 가장 강력한 변증이라는 것이다. 거룩은 혼자서 완성되지 않는다. 함께 살 때 증명된다.

넘어짐은 누구에게나 있다. 중요한 것은 넘어짐의 빈도가 아니라 돌아섬의 속도다. 장재형목사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한다. 옷이 더러워졌다면 곧바로 갈아입으면 된다. 회개에는 유효기간이 없고, 성령은 우리를 다시 일으키시는 분이다. 죄책감에 매여 주저앉을 이유가 없다. 신자는 매일 새 옷을 입는다. 그 옷의 이름이 곧 예수 그리스도다. 이 단순한 진리가 일상의 리듬이 될 때, 빛의 자녀들은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다.

결국 이 본문은 ‘하지 말라’의 목록으로 시작해 ‘입으라’는 초대로 완성된다. 비움만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채움이 있을 때 비움은 의미를 얻는다. 장재형목사의 강해는 이 균형을 삶으로 이끈다. 말씀은 욕망의 근육을 재구성하고, 기도는 하루의 리듬을 조율하며, 사랑의 섬김은 삶의 나침반을 북쪽으로 고정한다. 이렇게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이 모이면 대조적 공동체가 되고, 그 공동체는 세상 한복판에서 복음의 실재를 비춘다. 어거스틴에게 들렸던 “톨레 레게”의 초청은 오늘도 유효하다. 성령께서 귀를 열어 주실 때, 말씀은 다시 들리고 우리는 다시 일어선다. 방탕과 음란, 다툼과 시기의 낡은 옷을 벗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길. 이것이야말로 오늘의 신자에게 주어진 가장 현실적이고도 영광스러운 부르심이며, 그 부르심을 맑은 목소리로 안내하는 설교 가운데 장재형목사의 로마서 강해는 유난히 선명하다. 은혜는 사람을 새롭게 하고, 회개는 길을 열며, 공동체는 그 길을 함께 걷게 한다. 이 세 겹의 끈이 하나로 묶일 때, 우리는 빛의 갑옷을 입은 자로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변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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