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 변질되지 않는 복음

1. 성탄절의 의미와 복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이는 단순히 연말의 축제 분위기나 장식,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울려 퍼지는 캐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본래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성탄절은 가장 중요한 절기 중 하나다. 왜냐하면 “왜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는가? 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가운데 오셔야 했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바로 이 시기에 더욱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장재형목사의 가르침에 비추어, 성경 본문 중 크리스마스에 가장 적합한 구절로 흔히 알려진 요한복음 3장 16절을 다시금 깊이 묵상할 수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은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알려 준다. 곧,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를 보내신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의 은혜를 통해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장재형(장다윗)목사의 강조에 따르면, 요즘 시대를 보면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점점 사라져 가는 듯하다. ‘연말 분위기’나 ‘휴일’ 정도로만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크리스마스는 단순히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가 아니라, “주님이 낮아지시고,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복음의 핵심이 선포되는 엄중한 날이다. 이 거룩한 날에 우리는 “왜 예수가 이 땅에 필요한가?”라는 물음에 성경적으로 답변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는 단지 교리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실제 신앙생활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기본적으로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 탄생 기사를 살피면서 아기 예수의 탄생 이야기, 천사들의 찬양과 목자들의 경배, 동방박사들의 예물 드림 등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넘어, “왜 예수님이 오셔야 했는가?”에 대한 풍성한 설명을 담아내는 곳으로서 로마서를 꼽을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과거 샌프란시스코에서 로마서 강해를 연속으로 진행하던 중 성탄절을 맞이했을 때, 로마서 8장의 메시지를 전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해 오신 주님”이라는 본래적 의미가 로마서를 통해 교리적으로, 이론적으로, 체계적으로 가장 잘 정리된다는 것이다. 사실 로마서 전체가 그러한 논리를 따라가지만, 특히 로마서1장, 5장, 8장 등에서는 ‘왜 주님이 이 땅에 오시게 되었는지’가 매우 선명하게 드러난다. 로마서 5장은 ‘새 아담론’이라고 불릴 정도로, 인류가 모두 죄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은 첫 사람 아담 때문이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 안에서 새 인류가 열렸다고 선언한다. 즉 “왜 오직 예수인가?”라는 질문에 답변을 제공하는 핵심 구절들이 이 로마서에 가득하다.

장재형목사는 교회 지도자와 성도들이라면 성경에 등장하는 메시지를 교리적, 조직신학적으로 잘 이해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복음의 의미가 흐려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정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 “너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하여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고 권면한 대로, 복음이 무엇이며 예수의 오심이 왜 필요한지를 묻는 이들에게 우리가 제대로 답변해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장재형목사는 “만인이 성탄절의 문화적, 세속적 분위기에만 빠져 있을지라도,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자들은 이 날의 깊은 의미를 더 성찰하고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때 오히려 로마서를 본문으로 삼아 복음을 선포할 때, 수많은 사람에게 “주님의 오심이 곧 우리의 구원”임을 새삼 일깨울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바로 이 복음의 정수를 각 성도에게 제대로 가르쳐야만, 교회의 존재 이유가 분명해진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만 백성을 제자 삼는 것이며,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이다. 이런 소명은 그저 교회의 외형적 성장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가 ‘왜 예수가 필요한가?’라는 물음에 늘 답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태도에 달려 있다. 실제로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또, 크리스마스가 상업적인 시즌으로 치우치거나, 단지 연말연시의 축제 기간으로만 여겨지고 있는 현실에서, 진정한 메시지를 잃어버린 캐럴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허함만을 안기기 쉽다. 그런 까닭에, “교회가 살아 있고 생명력 있는 말씀을 제대로 전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더욱 강조된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면서 교회 전통에서 지켜져 온 강림절(대림절) 기간은 원래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그 의미를 새기고 기다리는 절기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그 해(본문에서 언급된 2021년 즈음), 갈라디아서 본문을 통해 말씀을 전하고자 마음먹었다고 한다. 갈라디아서가 주는 중요한 가르침은, 주님의 오심과 복음이 왜 다른 것과 절대로 섞일 수 없는 순수한 진리인지, 또 왜 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지켜야 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교회가 겪었던 상황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교회와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쁨 가운데에서도, 장재형목사는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진다. “왜 우리는 주님이 필요한가?” 이 질문은 개인 차원을 넘어, “우리가 교회를 왜 세웠는가? 세상에 이미 교회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가 따로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교회와 다른 교회들의 차이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전 세계 어딜 가든 교회는 참으로 많지만, 어째서 사회가 실질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증거가 희미한가?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바다와 소금의 비유처럼, 소수의 ‘진정한 소금’ 역할을 하는 교회가 있다면 세상은 썩지 않는데, 지금은 수많은 교회가 있음에도 세상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원의 복음을 깨닫고, 복음의 감격이 살아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세상을 바꿀 만한 능력도 점차 약해지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우리 교회를 “젊고 새로운 교회”라고 부르며, 개혁교회(Reformed Church)임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여기서 ‘개혁’(Re-formed)은 ‘다시 만들었다’는 말이고, 역사적인 종교개혁을 언급할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교회사는 크게 두 가지 신학적 논쟁의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기독론(Christology)의 논쟁, 다른 하나는 구원론(Soteriology)의 논쟁이다. 초대교회 시기에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비롯한 기독론 문제가 칼케돈 신조를 통해 “Vere Deus Vere Homo(참 하나님이면서 참 인간)”라는 결론에 이르렀다면, 그다음으로 역사적인 큰 논쟁이었던 구원론적 분쟁이 바로 종교개혁으로 이어진 것이다.

종교개혁은 교회가 본래 지켜야 할 복음의 진리가 변질되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이사야서 1장 22절의 표현으로 “포도주에 물이 타지고, 은에 찌끼가 끼었다”는 상징이 있는데, 이는 ‘복음에 다른 것이 섞여 오염되었다’는 뜻이다. 본래 순수해야 할 복음에 자꾸 사람이 추가한 전통이나 행위, 규례가 덧붙여지면서, 그 순수가 훼손되고 말았던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대로, 오직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다. 장재형목사는 오늘날에도 동일한 의미에서, 교회가 변질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갈라디아서나 로마서를 통해 바울의 구원론을 바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미 한 차례 갈라디아서를 강해했던 시점이 있었지만, 당시에는 아직 교회가 그 진리를 충분히 실감하고 받아들일 만큼 성숙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이제는 해외 선교 현장에서, 혹은 라틴 문화를 접하는 자리에서, 복음이 희미해지는 “영적 위기 상황”을 체감하고 있으므로, 갈라디아서 말씀이 더욱 절실하다는 것이다.

정통(Orthodox) 교회에서 구원론은 바울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가 중추를 이룬다. 여기에 핵심 요절을 뽑자면 바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며, 더 압축하면 “오직 믿음(Sola Fide)으로만”이 된다. 로마서 10장 10절에 따르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한다. 믿음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마음에는 사랑이 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음에서 깨닫고 믿고 고백할 때,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이 흐려졌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흐려졌다는 말과 동일하다. 사랑이 흐려진 교회는 힘이 빠지고,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을 잃는다.

그렇다면 개인의 전도가 잘되지 않고 결실이 없을 때는 왜 그럴까? 장재형목사는 그것은 “말씀의 칼이 무디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성경을 통해 끊임없이 성령의 검으로 단련되지 않으면, 사람 앞에서 복음을 예리하게 전할 수 없다. 세상 안에서 활동하는 직업인, 즉 세상과 접촉이 많은 성도라면 더욱 말씀의 근거가 필요하다. 사도행전 6~7장에 등장하는 스데반 집사를 예로 들면서, 그는 단지 교회에서 봉사만 했던 사람이 아니라, 구약 성경과 이스라엘 역사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치지 않고, 끝까지 선교하며, 최초의 순교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갈라디아서가 기록된 이유도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복음이 변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초대교회 때부터 바울이 강하게 경계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직면한 현실도 갈라디아서 시대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통찰이다.

특히 최근 우리 교회가 중남미, 즉 라틴 지역으로 선교를 확장해 가는 상황은, 갈라디아서의 가르침을 실제로 적용할 기회를 제공한다. 라틴의 교회들은 전통적으로 로마 가톨릭이 강세였다. 종교개혁의 배경을 살펴보면, 가톨릭 교회가 성경 외에도 수많은 전통과 의식을 덧붙이는 과정에서 복음의 핵심이 희미해졌고, ‘전통+복음’의 형태로 가르치면서 면죄부, 연옥설 등 사람이 만든 추가적인 교리를 교인들에게 지우게 되었다. 이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는 바울의 구원론에 어긋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종교개혁자들은 “Sola Scriptura(오직 성경으로), Sola Fide(오직 믿음으로), Sola Gratia(오직 은혜로)”를 외치며 교회가 성경 본연의 메시지로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복음주의(Evangelical)는 바로 이런 신앙 고백을 지키려는 이들을 가리키며, 오늘날 라틴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이 중요한 이슈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에, 갈라디아서의 메시지를 더욱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명을 우리가 감당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라틴 지역으로 들어가는 길은 이미 여러 경로(미국 캘리포니아, 텍사스, 플로리다 등)로 열려 있고, 복음 전파의 기회 또한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그때 교회가 ‘복음+다른 무엇’을 가르치면, 결국 교회는 힘을 잃는다.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구원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고, 어떤 전통과 의식으로 구원에 덧붙이지 말아야 한다. 복음이 흐려지면, 사랑이 식어버린다. 주님의 사랑이 영원함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맥없이 식어지고 열매를 맺지 못할 때, 반드시 그 원인은 복음에 다른 요소가 침투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너희가 다른 복음으로 속히 떠나가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라고 했던 경고가, 지금도 유효한 것이다.

실제로 갈라디아서가 쓰인 당시, 교회 안에는 유대주의자들이 들어와서 복음을 왜곡했다. 그들은 “이방인도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를 먼저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고, 할례를 구원의 필수 조건처럼 만들었다. 바울은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은혜, 그리고 그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고 선언하며, 다른 조건을 붙여서는 안 된다고 단호히 가르쳤다. 이것은 중세 가톨릭 교회가 “교회의 전통이나 의식을 통해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식으로 복음을 훼손했을 때도 똑같이 적용되는 진리였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들이나 라틴 지역에서, 복음에 이것저것을 더하며 사람들을 혼란케 한다면, 갈라디아서의 경고가 다시금 살아나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말한다.

이어 그는 로마서 9~11장을 통해 “바울이 자기 동족인 유대인에 대해 가졌던 끊을 수 없는 사랑”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면서, 우리의 태도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를 구원으로 이끌고자 하는” 마음이어야 한다고 권면한다. 단순히 가톨릭이나 다른 교파를 정죄하거나 비판하는 데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흐려진 형제들에게 우리가 진정한 복음을 다시 전해서 그들도 회복하도록 돕는 것”이 바울의 열망이었고, 그것이 지금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교회 안을 측량하라는 계시록 11장의 권고도 언급한다. 이미 일어났던 왜곡과 오류를 냉철히 살피되, 결국에는 교회가 복음의 핵심으로 돌아와 회복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곧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의 정신과도 맞닿는다.

그런 면에서 그는 교회가 21주년을 맞이했을 때, “Sola Fide, Sola Gratia, Sola Scriptura”를 설교한 일을 상기시킨다. 바로 그해 하나님께서 “눈물의 땅을 기쁨의 땅으로 바꾸는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 땅에 복음주의 센터(Evangelical Center)를 세우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복음주의(Evangelical)란, 순수한 복음을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며, 오직 성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진리를 결코 타협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이처럼 갈라디아서가 주는 메시지는 초대교회부터 늘 있어 왔고, 종교개혁 시기에도 문제의 본질은 동일했다. “복음에 무엇을 더하거나, 복음 외에 다른 조건을 붙이는 순간, 교회는 순수성을 잃는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 8절에서는 하늘의 천사가 전하더라도,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까지 엄하게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왜 갈라디아서가 로마서와 함께 묶여서 교리서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지” 다시금 환기시키며, 라틴 선교 현장에서도 이것이 반드시 필요한 태도임을 설파한다.

최근에는 교회마다 새로운 부흥의 움직임이 감지된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복음의 본질을 절대 흐리지 말라”는 권면이 더욱 절실해진다. 새로운 교회가 시작되거나, 교회당을 입당하는 순간조차도, “우리는 율법적이고 형식적인 교회가 아니라 순수한 복음이 지배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뚜렷한 원칙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식지 않을 것이며, 교회는 불타는 열정으로 가득 차 세상을 향해 능력 있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지치지 않는 사역자들, 견인(堅忍)의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바로 “복음이 오염되지 않은 공동체” 안에서 자라나는 법이다.

장재형목사는 창립 이래 우리 교회가 걸어온 길을 거듭 언급하면서, “우리 교회가 왜 전 세계적으로 하나님의 눈동자처럼 지킴을 받는가?” 하고 자문해 보라고 한다. 그건 다른 것 없이 순수한 복음을 붙든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중남미에서도, 미국에서도, 아시아에서도 동일한 복음이 그대로 전해져야 한다. 우리의 사명은 “세계의 여러 지역을 복음으로 깨우고, 교회가 변화되어 세상을 살리는 구원의 방주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1장 본문을 잠깐 살피면, 바울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이는 복음의 권위가 결코 인간에게서 온 것이 아님을 선언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마찬가지로, 바울 역시 사람에게서 임명을 받거나 권한을 위임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사도가 되었다는 고백이다. 교회의 근거, 복음의 근거 역시 여기에 있다. 사람이 만든 체계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 말씀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6절 이하에서 “너희가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는 어떤 자들이 있다”고 지적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무언가를 더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혼란에 빠진 것을 강하게 책망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1장 8절~9절에서는 더 나아가 “우리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만큼 복음은 타협이 없고, 절대 다른 것으로 대체되거나 보충될 수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이야말로 오늘의 교회가 다시금 되새겨야 할 경고”라고 말한다. 교회가 성장하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만약 복음이 흐려지는 교회라면,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초대교회가 경험했던 똑같은 문제를 되풀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율법주의나 형식주의가 교회를 지배하면, 교회가 더 많아져도 세상은 여전히 바뀌지 않는다. 복음주의 교회, 개혁교회, 다시 말해 순수한 복음을 지키는 교회가 세상에 진정한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다.

성탄절을 맞이하는 모든 성도들은 “복음이 무엇이며, 왜 예수가 오직 유일한 구원의 길인가?”라는 질문을 생각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내용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풍부히 기록되어 있다고 역설한다. 로마서 8장에서 말하듯이“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신 생명의 성령의 법”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로마서 5장에서 설명하듯 “아담 안에서 죄가 들어온 인류는 새로운 아담이신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다.” 이것이 복음이며, 복음은 그 자체로 충분하다. 교회가 이것을 붙들 때,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더욱 또렷해지고, 그 거룩한 사랑은 결코 식지 않는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요, 우리 삶의 지치지 않는 동력이 된다고 말한다. 교회는 늘 사랑 안에서, 복음 안에서, 주님이 보여 주신 낮아짐과 섬김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만 성탄절이 그저 상업적 캐럴과 화려한 장식으로 끝나지 않고,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는 증거가 될 수 있다.

2. 갈라디아서를 통한 개혁신앙과 교회의 방향

갈라디아서가 교회에 주는 경고와 도전은 중세 시대 종교개혁에 그대로 적용되었고,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달라지지 않는다. “복음에 무엇을 더하는가?”의 문제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건이 가진 무한한 가치를 온전히 인정하지 못하고, 인간의 전통이나 공로를 보태어야 한다고 믿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바울의 서신과 종교개혁 신앙고백이 일관되게 말하는 바는, “복음은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은 단지 교회 조직을 바꾼 혁신이 아니었다. 구원론의 문제, 즉 “어떻게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었다. 가톨릭 교회가 점차 교리에 사람의 전통을 가중시키고, 면죄부나 연옥설 같은 것들을 성도들에게 요구함으로써, 교회가 ‘구원의 통로’를 독점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는 바울의 가르침, 곧 “구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 얻어진다”는 진리를 왜곡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루터, 칼뱅, 쯔빙글리 등 종교개혁가들이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자(Sola Scriptura)”고 외치며, 복음주의(Evangelical) 운동을 일으켰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Re-formed(개혁)”이라는 단어로 다시금 되짚는다. 우리 교회가 단순한 새 교회가 아니라, “복음으로 돌아가자는” 개혁교회라는 정체성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듯 교회가 얼마든지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초기 교회부터 이미 영지주의자나 유대주의자 등, 복음에 다른 것을 덧붙이거나 복음을 왜곡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바울은 각 서신에서 이런 도전을 강력히 반박했고, 갈라디아서에서는 “다른 복음을 좇는 것”에 대해 가장 직접적이고 단호한 표현으로 책망하고 있다.

장재형목사는 갈라디아서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며, 특히 1장과 2장, 그리고 3장 전체를 통해 “어떻게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가?”를 주목해 보라고 권면한다. 율법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미 율법을 완성하시고, 새로운 길을 여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가 핵심 고백이 된다. 우리 행위의 ‘조금 더함’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개혁신앙이며, 종교개혁 이후로도 복음주의 교회가 수호해야 할 가장 본질적인 원리다.

오늘날 라틴교회 안에서, 때로는 “종교적 의무를 지켜야만 구원을 유지할 수 있다”거나, 전통 의식을 지키는 것과 성례에 참여하는 것이 곧 구원의 필수 요건인 양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전통과 성례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교회 전통은 풍부한 신앙의 유산을 담고 있으며, 예배 의식도 하나님께 경외심을 표하는 소중한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복음+α”의 형태로 구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처럼 teach(가르침)되고 있다면, 바로 갈라디아서적 비판을 면치 못한다. 바울이 말하듯, “할례+복음”이 아니라 “오직 복음”이어야 한다. “주님이 주신 은혜+인간의 전통”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충분하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현대교회 맥락에 구체적으로 적용한다. 우리 교회만의 규례나 조직, 혹은 문화적 요소가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는다면, 그것 역시 복음의 순수성을 흐리는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전통이나 제도를 통해 성도를 섬기고 질서를 세우는 것은 중요하지만, 절대로 구원의 조건처럼 남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개혁교회의 정신은 끊임없이“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을 되새기며, 시대가 바뀌어도 복음이 오염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맥락에서, 장재형목사는 갈라디아서가 초대교회부터 2000년 동안 교회가 부딪쳐온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으므로, 오늘날 세계 선교 현장에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이 서신을 깊이 연구하고 묵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글로벌 사역 네트워크(OC)의 확장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복음을 접하고 교회를 형성하는 라틴의 성도들이 갈라디아서의 메시지를 듣게 된다면, 처음부터 “다른 복음”이 섞이지 않은 순수하고 건강한 교회를 세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우리가 교회를 개척할 때,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핵심 구원론을 기초로 삼으면, 불필요한 율법주의나 형식주의가 교회 안에 들어올 틈이 줄어든다. 그러면 교회는 처음부터 복음에 기반한 자유와 기쁨, 열정이 충만한 공동체가 된다. 이런 교회는 세상을 향해 활짝 열린 모습을 보이고, 사랑과 선교의 동력이 끊임없이 솟아오른다. 장재형목사는 성령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교회가 자라나고, 라틴 지역은 물론 세계 곳곳으로 생명의 강이 흘러가기를 소망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장재형목사가 말한 “Evangelical Center(복음주의 센터)”의 역할이다. 우리는 복음주의자(Evangelicals)로서,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의 핵심을 지키는 것에 생명을 건 사람들이다. 교회사를 크게 나누면, 구교(가톨릭)와 신교(개신교)로 구분할 수 있고, 신교 안에서도 자유주의(liberals)와 복음주의(Evangelicals/Conservatives)로 분류할 수 있다. 복음주의는 말 그대로 “복음을 지키고 전파하는 데 집중하겠다”는 움직임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체성은 단지 ‘우리는 가톨릭이 아니다’, ‘우리는 자유주의가 아니다’라는 수준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우리는 오직 복음, 오직 성경의 권위 아래 살아가는 공동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래서 전 세계로 흩어진 복음주의 센터들은 각 지역에서 복음전도, 말씀 교육, 제자 양육을 통해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구체적인 사역을 감당해 나가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최근 여러 교회에서 견신례(Confirmation)나 세례식을 통해 수십 명이 새로운 신앙고백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거기에는 똑똑한 사람들, 이슬 같은 청년들,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이 가득하다”고 말했다. 참된 복음이 들어가면 젊은 영혼들이 기꺼이 마음을 열고 예수를 고백하기 때문이다. 구약 호세아 14장 5절에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라는 말이 있는데, 이슬 같은 은혜로 시들어가던 영혼이 살아나고, 마른 밭이 촉촉해지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선교지에 “성령받는 장소”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Evangelical Center이며, 교회에 대한 바울의 비전이기도 하다.

교회가 이렇게 “오직 예수, 오직 복음”을 전할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라틴의 한 교회가 새 건물로 입당하고, 거기에 모인24명이 견신례를 받는 등, 새 출발을 하는 광경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단지 ‘눈에 보이는 건물’의 문제나 ‘수적 증가’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 교회가 어떤 신앙고백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선포하는가?”가 훨씬 더 중요한 이슈다. 갈라디아서 1장 8절 이하의 “하늘의 천사라도 복음에 다른 것을 더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강력한 선언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복음이 조금이라도 변질되면, 교회는 결국 힘을 잃는다. 반면, 순수한 복음을 지키면, 그 교회는 “전 세계를 변화시킬 만한 능력”을 가지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예전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는 시편 133편 말씀을 자주 인용하며, 성도들이 은혜 안에서 교제하고 하나를 이루는 공동체를 구축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강조했다. 그러한 공동체는 “주님이 사랑하시는 교회”가 되며, 성령의 열매가 충만한 교회가 된다. 거기엔 사랑이 식거나 사역자가 지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복음의 불길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르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가 보여주듯, 교회가 “복음에 무언가를 더하려는” 사람들을 단호히 경계하고, “오직 예수와 그분의 십자가”를 붙들 때, 그 사랑의 능력이 계속 확산되어 간다.

복음의 본질이 분명하면, 교회는 사회를 향해 강력한 빛이 된다. 지금 사회가 어두워져 가는 것은, 교회가 많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미 교회 수는 매우 많다. 하지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잃어버리거나, 복음 외에 다른 것들에 에너지를 빼앗긴다면, 교회가 본연의 능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이 교회가 정말 ‘Re-formed’, 곧 바울이 말한 순수 복음을 붙들고 있느냐?”를 계속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개혁은 한 번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교회가 늘 복음으로 돌아가는 “지속적 개혁(Semper Reformanda)”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함께 보면, 바울이 말하는 구원이 얼마나 놀랍고 광대하며, 또한 인간의 모든 공로를 무의미하게 만드는지를 깨닫게 된다. 로마서 5장의 “새 아담” 사상은 인류 죄의 근원을 아담에게서 찾고, 그 해결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는 논리로 이어진다. 거기엔 “오직 예수”를 독선적으로 보지 않는 신학적 뒷받침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첫 사람 아담 안에서 타락했고, 그 죄와 사망이 전 인류에 이르렀으나, 둘째 아담이신 예수 안에서 비로소 새롭게 창조된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인간도 자력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고, 따라서 율법이나 전통 같은 것들이 구원을 보장할 수 없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에서만 온다.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구원의 길은, 할례나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는 삶의 고백이다.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으로 죄값을 치르셨고, 우리는 그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이다. 종교개혁 때나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문제나, 모두 이 핵심에서 빗나갔기 때문에 생긴다. 교회가 점점 세상적 힘과 권세를 소유하면, 종교적 제도로써 사람을 통제하거나, 재정적 이익을 위해 면죄부 같은 것을 만들고, 복음에 다른 것들을 추가해 영혼들을 짓누르는 일이 벌어진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5장 1절은 “자유를 주려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으니”라고 선언하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강조한다. 여기에 바로 복음의 해방적 힘이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복음의 교리를 지키는 공동체가 되려면, 성도 개개인이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각성하고, 또 서로에게 복음을 일깨워 주는 ‘형제애’를 유지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교회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자칫 형식과 제도에 익숙해져서 “복음의 사랑”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탄절과 같은 절기에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재확인한다면, 우리의 신앙이 식을 틈이 없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다시 읽을 때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엄청난 사랑인지 깨닫게 되고, 거기에 우리가 감히 더하거나 뺄 것이 없음을 고백하게 된다. 그때 교회는 한없이 겸손해지면서, 동시에 세상을 향한 담대한 비전도 품게 된다.

크리스마스는 그래서 교회로 하여금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촉구이기도 하다. “[마 24:12]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는 예언처럼, 세상 끝날이 가까울수록 사람들의 사랑이 식는다고 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교회 안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이 식는다는 것은 곧 복음이 흐려진다는 의미다. 교회가 다시 복음으로 돌아오면, 성탄절이 매년 반복될 때마다 오히려 더 뜨거운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포도주가 더 귀해지듯, 진짜 복음은 변질되지 않는다. 물을 타거나, 잡다한 것들이 스며들 때만 교회가 싱거워지고 식어 버리는 법이다.

장재형목사가 갈라디아서 서론(1장)을 인용하면서 강조하는 메시지는,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바울이 사도가 된 것도, 교회가 존재하는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이기 때문에, 사람의 시선이나 전통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성경과 성령의 권위에 따라야 한다. 이것이 “개혁신앙”이며, “복음주의 교회”의 존재 이유다.

교회가 이 길을 갈 때, 하나님은 “우리 눈에 기이할 만큼” 놀라운 일을 이루신다. 장재형목사는 “Evangelical Center가 세워진 것은 실로 기이한 일”이라며, 이것이 하나님께서 큰 사명을 맡기신 증거라고 말한다. 실제로 교회가 순수한 복음을 지킨다면, 지리적, 문화적 경계를 넘어서는 선교가 훨씬 수월해진다. 사랑의 원동력이 복음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인간적인 율법이나 전통이 사람들을 얽매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아시아에서도, 아프리카에서도, 복음이 동일하게 전해지고 동일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확신을 품게 된다.

크리스마스 기간에 갈라디아서를 함께 공부하자는 것은, 지금까지 말해 온 복음의 본질을 다시금 확고히 하자는 의미다. 성탄절이 단지 “아기 예수”만 바라보는 동화적 서사가 아니라, “낮아지신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의 길, 그리고 우리를 향한 무한한 사랑의 약속”을 재차 묵상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또한, 그 사랑을 왜곡하거나, 은혜에 다른 무언가를 추가하여 성도들을 짓누르고 지치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경계다. 그러면 성탄은 1년에 한 번 반복되는 행사로 끝나지 않고, 교회를 개혁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동력이 된다.

장재형목사의 말처럼, “복음이 순수하게 전해지는 곳에는 늘 기쁨과 열정이 넘친다.” 교회가 사람의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져 갈 때, 그 교회는 해마다 성탄절이 올 때마다 더 깊어지고 성숙해진다. 교리적 지식과 결합된 실제 삶의 변화가 뒤따른다. 그러므로 올바른 교리 교육, 성경연구, 지속적인 제자훈련이 매우 중요하며, 교회가 ‘복음의 군사들’을 계속 양성해야 한다. 그렇게 준비된 자들은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증언하고, “왜 예수가 필요한가?”를 묻는 자들에게 언제든 소망의 이유를 알려 줄 수 있는 이들이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는 성탄절의 의미를 바탕으로, “왜 교회가 오직 예수를 붙들어야 하고, 왜 예수는 유일한 구원의 길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풍성한 답변을 제공한다.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누차 강조한 핵심 메시지다. 교회가 이 진리를 붙들면, 수많은 캐럴 중에도 생명력 있는 찬양이 있고, 형식적 예배 속에도 꺼지지 않는 열정이 깃들 수 있다. 특히 갈라디아서의 도전은 “오직 예수의 복음만이 교회에 능력과 활력을 준다”는 점이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복음이 살아 있다면 교회는 늙지 않는다. 오히려 더 진하고 귀한 향기를 풍기게 된다. 성탄절은 그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절기이고, 복음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세상에 선포하는 날이다.

바라건대, “갈라디아서 1장 8절의 심정”으로, 복음에 무언가를 보태려는 유혹을 강력히 거절하고, 온전히 예수의 사랑을 붙드는 교회라면, 어떤 문화권이든, 어떤 언어권이든, 그 교회를 통해 수많은 영혼이 구원의 길로 나아오게 될 것이다. 그날을 기대하며, 크리스마스에 선포되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마음 깊이 새기고, 한 해를 마감하며 새해를 준비하는 소중한 계기로 삼자. 성경이 약속한 ‘복음의 능력’이 세상을 어떻게 뒤바꾸는지 체험할 교회가 바로 우리 교회,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모든 믿음의 공동체가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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