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남편 – 장재형(장다윗)목사

1. 부부 관계의 본질

에베소서 5장 22절부터 시작되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많은 신학자들이 “해석하기 어려운 본문”이라 지적할 만큼 오늘날도 적잖은 논쟁의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말씀을 단순히 ‘순종’과 ‘복종’의 관점으로 축소하기보다, 그 근원에 담긴 ‘사랑’과 ‘서로 존경하는 마음’, 그리고 상호보완적 관계라는 관점에서 조망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실제로 교회 역사 속에서도 이 본문이 오용되어, 여성의 지위를 낮추고 남성의 절대적 권위를 옹호하는 지지의 근거로 쓰인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장재형목사가 주목하는 것은 이 본문이 말하려는 궁극적 목적—즉 가정이 서로를 살리고 세워주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진리입니다.

성경은 에베소서 5장에서 남편과 아내, 그리고 에베소서 6장으로 이어지는 부모와 자식, 주인과 종의 관계를 통해, 인간이 맺고 있는 모든 사회적·영적 관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줍니다. 장재형목사는 늘 강조해왔듯, “성경의 가르침은 일차적으로 윤리적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영적 차원에서 출발한다”고 말합니다. 특히 바울이 말하는 ‘복종’의 개념은 “피차 복종하라”(엡5:21)라는 전제 위에서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에베소서 5장 22절의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라는 구절은 결코 아내에게만 일방적 순종을 요구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21절이 내세우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명령 속에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존중과 경외를 표해야 한다는 상호성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해설하면서, 성령 충만과 상호복종을 연결해 해석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하고, 바로 이어 21절에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라고 권면하는데, 이는 성령 충만의 결과로 나타나는 구체적인 삶의 열매를 ‘서로에 대한 존중과 복종’이라는 관계적인 범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자기중심적 욕망을 내려놓고, 이웃을 섬기며 서로를 귀히 여길 수밖에 없다는 논리입니다.

에베소서 5장 22절부터 시작되는 아내와 남편의 관계가 사실상 모든 인간관계의 기초를 제시한다는 점은, 창조의 질서가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묶어 ‘한 몸’(창 2:24)을 이루게 하는 데서 잘 드러납니다. 창세기 2장 24절의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육체를 이룰지로다”라는 본문을 바울이 그대로 인용한 것은(엡 5:31), 부부 관계가 단순히 사회적 계약이나 감정적 유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창조 섭리의 반영’임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가정은 모든 인간관계의 출발점이며, 교회 공동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소우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해설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내에게 먼저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많은 이들이 이 구절을 읽으며, 바울이 여성에게만 순종을 강요하고 남성에게 군림의 권위를 부여한 것은 아닌가 하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바울이 ‘아내들이여…’라고 먼저 말한 것은, 가정 안에서 사랑의 시작이 아내에게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풀이합니다. 전통적 관념 속에서 남성이 가정의 가장으로 인식되지만, 실제 삶에서는 섬세한 돌봄과 일상적인 배려가 여성에게서 비롯되는 일이 더 많다는 점을 지적하며, 바울 역시 이 현실을 반영해 “먼저 아내들에게 부탁한다”는 식으로 설교했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런 해설이 더 이상 남편의 책임을 경감시킨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이어지는 25절—“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에서 바울은 더욱 직접적으로 남편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교회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남편이 아내에게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시대의 다른 종교나 문화권에서 아내를 향해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은 흔했지만(그것은 그저 가부장제의 반영일 뿐이었습니다), 남편에게 “생명까지도 주를 위해, 아내를 위해 희생하라”고 요구하는 종교·사상은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의 가르침은 혁명적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이야말로 “남성 중심의 시대에서 여성과의 관계를 가히‘수평적·상호적 관계’로 끌어올린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강조합니다.

장재형목사는 또 유대교나 이슬람, 그리고 당대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여성의 위치가 어땠는지를 설명합니다. 일반적으로 여성은 재산처럼 간주되거나, 종교적으로도 ‘듣는 자리’에만 머물렀으며, 남편에게 배우는 수동적 존재로 규정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여성들은 오히려 교회에서 영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어떤 경우에는 지나치게 앞서 나가는 일도 있었을 정도였습니다(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이 “여자는 잠잠하라”고 자제시킨 배경이 이것입니다). 이는 기독교가 그 시대 여성들에게 해방구의 역할을 어느 정도 했음을 보여주는데, 장재형목사는 “기독교야말로 당시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하던 시대에 진정한 평등과 자유의 의미를 제시한 혁신적 믿음이었다”고 지적합니다.

나아가 관계의 문제—즉 결혼 생활에서의 갈등, 부모와 자식의 불화, 사회적 지위가 다른 이들 간의 충돌—는 언제나 인간 실존의 핵심적 고통으로 등장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모든 갈등의 해결책이 에베소서 전체, 특히 5장 후반부에서 드러난다고 해설합니다. 곧 모든 인간관계는 “피차 복종하라”는 상호성의 원리에 기초해야 하며,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전적으로 성령 충만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결심만으로는 자기 중심성을 버리기 힘들지만,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충만할 때 비로소 자기를 부인하고, 서로를 귀히 여기며, 궁극적으로 충만한 사랑에 이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장재형목사는 더 나아가 창세기 1장에서 반복되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말씀이 ‘충만함’과 ‘창조의 완성’을 암시한다며, 한자 “多(다)”가 “夕(석)” 두 개를 합친 글자라는 점을 짚어보면, 동양고전에서도 이 성경적 진리가 반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소개합니다. “저녁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창조가 계속되고, 결국 충만해지는 창조의 완성을 맞이한다”는 사실이, 한자에서 ‘많다(多)’라는 의미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부부 관계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가정을 이룰 때, 초반에는 기쁨과 설렘이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창조적 순환 과정처럼, 부부도 시간이 흐르면서 더 성숙해지고 충만해져야 진정한 ‘한 몸’으로서의 창조적 연합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부부는 누구나 충돌하게 마련이지만, 그것이 곧 파괴의 징조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진정한 사랑에 이르기 위한 필연적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결국 이 충돌 과정 속에서 내가 먼저 낮아지고 상대방에게 존중과 경외심을 표시할 수 있다면, 갈등은 폭발이 아니라 성숙과 변화의 계기가 됩니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개념이 “천생연분(天生緣分)”과 “운명”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잠언서 16장 1절과 9절을 자주 인용합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잠 16:1),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이는 인간이 자기 의지로 사랑하고 결혼을 선택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존재한다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곧 ‘예정’(Predestination)과 ‘섭리’(Providence)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혼인을 통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맺어지는 것을 중국어로 “천생연분”이라 하는데, 이는 ‘하늘에서 이미 내린 인연’이라는 뜻입니다. 잠언서의 가르침과 상통하는 이 개념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자유의지로 결혼을 결정하지만, 그 모든 과정 위에 이미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다고 믿을 때 부부는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결여되었을 때, 결혼을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나?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라고 상대화하기 쉬워지고, 그 순간부터 파괴적 갈등에 휩싸이기 쉽다고 경고합니다.

다시 말해, 장재형목사가 보는 부부 관계의 본질은 ‘운명적 만남’과 ‘자유의지적 결단’이 묘하게 교차하는 신비로운 영역에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결단해도 결국 그 선택을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일찍이 정해놓으신 섭리 안에서 우리가 기쁨으로 동행하기를 바라신다는 믿음이 결혼 생활을 든든히 지탱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갈등을 맞이하더라도, ‘우리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며, 천생연분이기에 귀하다’고 굳게 믿는다면 그 갈등을 해결할 힘을 얻게 됩니다.

결국 에베소서 5장 22절 이하가 강조하는,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와 “남편들은 아내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같이 사랑하라”는 두 개의 명령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쌍’임을 장재형목사는 거듭 강조합니다. 만약 어느 한쪽만 강조된다면, 그것은 가정의 균형을 깨트리고 폭력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복종과 희생은 늘 상호적이어야 하며, 그 원동력은 성령의 충만함에서 비롯됩니다. 이 사랑의 본질이 “피차 복종”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결혼이 단지 일상적 생활공동체가 아니라 거룩한 예배의 자리이자,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예표하는 ‘성스러운 언약’임을 알게 됩니다.

특히 31~32절—“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를 해설하면서,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말하는 부부의 합일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 차원을 넘어선다”고 설명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신비로운 연합’을 이루는 것처럼, 부부도 영혼 깊이 서로 하나로 이어지는 통합적 관계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 ‘하나 됨’은 결코 남편이 아내를 소유하거나 혹은 그 반대도 아니고, 서로를 억압하는 방식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섬김과 희생을 반영하는 부부의 상호성에서만, 진정으로 이 비밀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요약하면, 에베소서 5장 22절 이하를 향한 장재형목사의 시각은 매우 균형 잡혀 있습니다. 남편이 ‘머리’가 되어 아내를 통솔한다는 전근대적 오해를 지적하되, 동시에 아내에게서 시작되는 사랑의 섬김이라는 측면도 분명히 조명합니다. 무엇보다 바울의 본의는 ‘상호희생과 상호섬김’의 원리를 선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지닌 신비와 사랑이 부부에게서도 재현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실천은 오직 성령 충만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라 말합니다.

2 가정의 위기

결혼 생활에서 갈등을 겪는 부부들은 늘 서로를 탓하기 마련입니다. “내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느냐”, “내 성격이 원래 이렇지 않았다”라는 식의 반발이나 실망이 오가다 보면, 점차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게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럴 때야말로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에 대한 믿음”을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때라고 강조합니다. 우리가 자유의지로 결혼을 선택했지만, 그 뒤에는 이미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이 있었다는 믿음이야말로, 결혼 생활의 근간을 지키는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부부 관계를 ‘우연’으로 보느냐, ‘운명’으로 보느냐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잠언서 16장이 말하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해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는 말씀은, 아무리 인간이 앞을 내다보고 계산해도 결국 우리 삶의 결과와 결론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우리가 처음에는 사랑에 취해 마치 내가 주도적으로 이 결혼을 이끌었다고 생각하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그 모든 과정이 이미 ‘천생연분’으로 예정된 길이었음을 깨닫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우리 만남이 하나님의 깊은 뜻 안에 있었다고 믿는 순간, 결혼생활에 닥치는 갖가지 풍파를 대하는 태도 또한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곧 “하나님이 허락하신 인연인데, 결코 헛되이 끝나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나고, 그 믿음 속에서 우리는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게 됩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점들을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이런 차이를 주셨을까?’라는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면, 갈등은 곧 학습의 계기이자 성장의 기회가 됩니다.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그 차이 속에서 나를 돌아보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장재형목사는 “부자(父子)는 유친(有親)해야 하고, 부부(夫婦)는 유별(有別)해야 한다”는 동양고전의 개념도 인용합니다. 이는 유교 경전에서 흔히 말하는 ‘오륜’ 가운데 두 가지 관계의 핵심 요약인데, “부자는 멀었던 관계이기에 친밀해져야 하고, 부부는 지나치게 가깝기에 일정한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그만큼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애초에 세대 차이와 위치 차이가 있기에, 더욱 의도적인 친밀함이 필요하다는 뜻이고, 부부는 때로는 서로가 너무 일상적으로 붙어 있다 보니 각자의 개성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거리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이 대목에서 장재형목사는 “물론 부모 자식 간에도 거리가 필요하고, 부부 간에도 친밀함이 필요하다”며, 본문을 문자 그대로만 단순 해석하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사랑과 존중의 긴장감’을 포착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관계는 상호균형 속에 있을 때 건강해진다’는 원리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말한 부부 관계 또한, 일방적으로 여성이나 남성 한쪽만 희생하거나 복종하거나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피차 복종하라”는 원리 아래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는 관계여야 합니다.

가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다툼과 갈등은 결국 ‘사랑의 결핍’에서 오는데, 그 사랑이 결핍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먼저 변하려 하기보다 상대가 먼저 변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장재형목사는 진단합니다. 상대에게 변화와 희생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이 낮아지고 섬길 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 관계를 붙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내가 먼저 사랑을 시작하고, 내가 먼저 존경을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의 때에 합당한 열매를 거두리라”는 신앙적 확신에 근거합니다.

부부가 한 명은 ‘내가 옳다’는 입장을 끝까지 고수하고, 다른 한 명은 ‘절대 내가 양보할 수 없다’는 태도로 버틴다면, 아무리 작은 갈등도 쉽게 해결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내가 먼저 상대방의 필요와 상황을 이해해보겠다”고 마음먹는 순간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씩 부드러워집니다. 물론 자존심을 내려놓고 먼저 다가가는 일이 결코 쉽지 않기에, 성경은 이를 ‘성령의 충만’과 연결하여 이야기합니다. 인간적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자기를 부인하는 마음’이 생길 때, 우리는 진정으로 상호 존중의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가정이 곧 작은 교회라는 말을 즐겨 인용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가정 또한 부부와 자녀가 서로 사랑하고 섬기며, 한 몸의 지체로서 움직이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근본은 그리스도로부터 오는데,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셨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희생적 사랑을 남편이 아내에게도 실천하라고 강조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하며, 아내는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이 둘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가정은 불균형에 빠지게 됩니다.

에베소서 5장 26절과 27절에서 말하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는 표현은, 단지 결혼 예식 때의 상징적 의미가 아니라 부부가 결혼 생활 전반에서 서로를 영적으로 세워주어야 함을 상징합니다. 교회가 말씀으로 정결해지듯, 부부도 말씀 안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회개하고 성장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남편은 ‘머리’로서 이끄는 존재인 동시에,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듯이 아내의 ‘발’을 씻기고, 필요하면 자기 생명까지도 내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내는 그러한 남편을 ‘주께 하듯’ 존경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맞이해야 합니다.

결국 이 모든 ‘비밀’(엡 5:32)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반영한다는 사실이, 에베소서 5장이 전하고자 하는 가장 궁극적인 메시지입니다. 즉, 부부는 서로에게 맞춰가기 위해 노력하는 수준을 넘어, 서로의 영적 성장을 돕는 조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때로는 서로의 단점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며, 상처받은 마음을 보듬어주고, 또 다른 차원에서는 각자의 재능을 더욱 펼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그렇게 서로를 세워주고 ‘거룩하고 흠 없는 모습’으로 만드는 책임이 부부 양쪽에게 공히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본문을 통해 “결혼이란 단지 인간적 제도나 전통적 행사 이상의 영적 사건”이라 말합니다. 그 영적 사건은 선택의 자유를 가진 두 인격체가 만나지만, 그 만남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다는 신비가 깃들어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신비가 깨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한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만약 이 성령의 역사를 소홀히 여기고, 결혼 생활을 단지 세속적인 감정 교류나 이해관계의 문제로만 치부한다면, 하늘이 허락하신 귀한 인연을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성령 안에서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은, 가장 먼저 부부에게 적용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부모와 자식, 종과 주인의 관계 등 모든 수직적·수평적 관계가 이 원리로 이어집니다. 장재형목사는 흔히 현대인들이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는 거리 두면 된다”는 사고방식으로 관계를 단절하기 쉽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은 결코 성서가 말하는 ‘피차 복종하라’는 가르침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갈등이 생길 때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그 관계가 더 성숙해질 수 있도록 책임감을 가지고 노력해야 합니다. 부부 관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결론적으로, 장재형목사는 부부에게 “여러분이 하나님의 계획 아래 맺어진 존재라는 절대성을 잊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그 절대성이 무너지고 관계를 임의로 상대화할 때, 우리에게 무너짐과 파괴가 찾아온다”고 경고합니다. 한편으로 “그 절대성을 굳게 붙들고, 갈등 속에서도 성령의 능력을 구하며,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섬길 때, 결혼은 놀라운 기쁨과 축복의 통로가 된다”고 강조합니다.

3. 믿음과 가정(Faith & Family)의 조화

에베소서 5장 22절 이하를 중심으로 한 이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가족 해체 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가속화되고, 개인주의가 만연해지는 현대사회에서, 결혼 제도 자체가 ‘구시대적인 속박’으로 치부되는 시각도 있기 때문입니다. 장재형목사는 그러나 “신앙과 가정(Faith & Family)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영역”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이 가정 속에서 가장 기초적인 형태로 구현되기 때문입니다. 교회 공동체도 궁극적으로는 여러 가정이 모인 형태이기 때문에, 가정이 무너지면 교회 역시 제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고 그는 강조합니다.

이 연장선에서, 장재형목사는 결혼 주례를 서게 될 때마다 반드시 잠언 16장 1절과 9절을 본문으로 읽어준다고 말합니다. 바로“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16:1),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16:9)입니다. 이 본문은 결혼이란 당사자들이 ‘자의적으로 선택하고 맺는 언약’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일찍이 예비하시고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상징적 메시지입니다.

결혼서약을 할 때, 서로에게 ‘내가 자발적으로 당신을 배우자로 선택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결코 누가 강제로 강요해서 이뤄진 결합이 아닙니다. 그런데 동시에 “왜 이 사람이 내 배우자가 되었나?”라는 질문을 곱씹어보면, 결코 내 자유의지로만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가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점에서, 결혼은 곧 우리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섭리가 교차하는 지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기에 부부가 살아가면서 갈등이 생길 때, 또는 실망스러운 순간이 닥쳐올 때마다, “그래도 우리를 맺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라는 절대적 믿음이 있으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작할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예정’(Predestination), ‘섭리’(Providence)라는 교리의 가정 생활에서의 구체적 적용입니다. “Pro-vidence”에서 “Pro”가 ‘미리’라는 뜻이고, “vidence”가 ‘본다(video)’는 의미를 가진다 해서, ‘미리 보고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교리적 설명이 단지 머릿속 지식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큰 위로와 지지대가 된다고 강조합니다. 흔히 결혼 생활을 하다 보면, “다른 사람을 만났으면 더 행복했을까?”라는 의문을 품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 자체가 ‘하나님의 예정’을 가벼이 여기고, ‘천생연분’의 가치를 스스로 흩뜨려 버리는 위험한 발상일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결혼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가회(信家會)’—곧 믿음의 가정—라는 의식을 굳게 지키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신앙의 기초 위에 가정을 세우고, 그 가정이 다시금 교회 공동체로 연결되어, 서로를 격려하며 세워주는 순환 구조가 형성될 때, 개인과 사회 모두가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차원에서 살펴보면,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는 표현을 오해하여, 남편이 가정에서 일방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과거에도, 또 지금도 적지 않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에 대해 “바울이 말한 ‘머리’ 개념은 ‘주권자’라기보다 ‘섬기는 리더’로서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즉 머리는 몸 전체를 코디네이트(coordinate)하고 보호하며, 필요하면 최전선에서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문화권에서든 ‘남편의 권위’를 오용하여 가정폭력이나 심리적 학대를 저지르는 일들이 벌어지는데, 이는 에베소서 5장 25절 이하의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는 명령을 전면으로 거부하는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세미나나 설교를 통해 “만약 교회가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부정하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밟고, 멸시하고, 착취한다면 이미 그것은 ‘교회’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라며, “마찬가지로 남편이 아내를 희생시키며 군림한다면, 그는 이미 ‘머리’가 아니라 폭군”이라고 일갈합니다. ‘머리’는 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몸을 착취하기 위한 기관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진정한 신앙 안에서의 부부 관계는, 남편이 아내에게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기꺼이 돌보고 보호하며 스스로 낮아져 섬기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남편을 존경하며 세워주는 것이 아내가 보여주어야 할 ‘복종’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결국 에베소서 5장 22절 이하의 말씀은, 서로를 얽어매고 구속하기 위한 속박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를 허락하는 사랑의 원칙을 제시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사랑은 상대를 종속시키고 지배하는 데서 오는 쾌감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창조적 연합’에서 오는 충만함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홀로 있지 않게 하겠다’며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고, 이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결혼이 결코 인간이 임의로 만든 제도가 아니며, 거룩한 창조 질서 안에 포함된 것임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 결혼의 의미가 무너지고, 개인주의가 만연하며, ‘결혼은 선택일 뿐’ 혹은 ‘결혼은 구속’이라는 인식이 강해지는 현실에서, 교회는 더욱 적극적으로 성경적 결혼관을 재조명해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결혼은 단지 둘이 사랑해서 만든 가족이 아니라, 그 사랑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고백하는 삶의 자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고백은 결혼 생활의 위기 순간에 더욱 빛을 발합니다. 사람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수습되지 않는 감정적 혼란이나 경제적 어려움, 자녀 양육 문제 등이 닥쳐올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고, 이 가정을 인도하신다”는 믿음이 참된 희망을 줍니다.

나아가 장재형목사는 “가정이 흔들릴수록 교회가 서로 부부생활의 어려움을 나누고, 성경적 지혜를 함께 모색할 수 있는 장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과거에는 가족 내 문제를 외부에 알리지 않는 문화가 강했지만, 현대 교회는 ‘서로 짐을 지라’(갈6:2)는 말씀에 따라, 가정의 문제를 신앙 안에서 함께 나누고 돕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오늘날에는 성도들이 결혼생활에 대한 교육, 상담, 기도를 함께 나눌 기회가 많아져야 합니다. 결혼이 힘겹고 외로운 싸움이 아니라, 교회가 함께 짐을 나누어지는 과정이 될 때, 가정은 지치지 않고 회복할 에너지를 얻게 됩니다.

이렇듯 믿음과 가정(Faith & Family)은 언제나 맞물려 돌아가는 두 축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가정을 꾸리면, 결국 인간적 한계와 이기심이 가정에 침투해 심각한 갈등을 일으킬 때가 많습니다. 반대로 가정이 건강하게 세워지지 못하면, 교회 공동체 역시 분열과 갈등으로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피차 복종하라”는 언급 뒤에, 곧바로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식, 종과 주인의 관계를 차례차례 설명합니다. 이는 교리적이고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이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매우 구체적인 지침입니다.

정리하면, 장재형목사가 에베소서 5장 22절 이하를 강해할 때, 가장 강조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인간의 모든 관계는 서로를 살리고 세워주는 상호성 속에서만 온전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 그 상호성은 성령의 충만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바탕으로 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셋째, 부부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상징하는 ‘신비로운 연합’이기에, 결코 단순한 사람끼리의 계약이 아니며,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아래 있음을 믿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넷째, 부부가 서로 갈등을 겪을 때마다 이 믿음을 붙들고, “천생연분”이라는 절대성을 놓치지 않을 때, 그 가정은 오히려 더욱 성숙하고 충만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고대의 가부장제와는 분명 구별됩니다. 기독교가 전하는 결혼관은, 남편과 아내가 ‘같은 인간적 존엄을 가진 존재’로서 서로를 위하고 지켜주도록, 최초로 혁명적인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지금도 사회·문화적 상황은 계속 변하지만, 인간의 근원적 문제—즉 이기심, 고립, 불화, 욕망 등—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22절 이하의 메시지는 여전히 살아 있으며, 장재형목사의 설교나 강연을 통해 현대인들에게도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합니다.

마지막으로, 장재형목사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부부로 만나서 살다 보면,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반드시 온다. 그때 ‘우리 만남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붙들라. 그리고 ‘내가 먼저 상대를 존경하고, 내가 먼저 상대를 사랑하겠다’고 결단하라. 그 결단 위에 성령이 임하실 때, 우리의 가정은 하늘의 모형을 지니게 된다. 평생 서로의 발을 씻어주고, 서로에게 천국의 기쁨을 맛보게 하는 복된 부부로 살아가길 바란다.”

바울이 그토록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단지 신학적·추상적인 범주가 아니라, 우리의 실제 가정에서 살아 움직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장재형목사의 해설도 그 핵심을 놓치지 않습니다. 사랑은 서로를 마주보는 관계, 서로에게 먼저 낮아지고 먼저 섬기는 관계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메시지, 그것이 에베소서 5장 22절 이하에 대한 장재형목사의 가르침이자, 현대 교회를 향한 중요한 권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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