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유대인의 특권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로마서 3장 1-2절은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라는 물음에서 시작한다. 바울은 여기서 곧바로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라”고 대답한다. 즉,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부르심이 있었는데, 그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점이다. 이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도 유사하게 적용되는 중요한 영적 교훈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이 그 말씀을 보존했기에, 우리 역시 그 전통을 이어받아 성경을 소중히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장재형 목사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구원의 큰 그림을 이루시는 과정에서 특정 민족을 선택하셨고, 그들에게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그것이 곧 유대인의 특권이자 사명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성경을 소중히 여기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사랑을 발견하며, 그것을 세상에 전파해야 하는 의무를 부여받은 것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9장에서 유대인의 특권을 여럿 열거하는데, 거기에 따르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양자 됨, 영광, 언약, 율법 제정, 예배, 약속,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탄생했다는 영광스러운 자랑이 있다(롬 9:4-5).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인이 무조건 폐기되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점을 시사하며, 단지 그들이 의무에 합당치 못한 삶을 살았고 결국은 메시아를 영접하지 않는 선택을 했기에 문제가 생겼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논리는 바울의 전통적 배경인 유대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동시에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는 복음의 문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불순종이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했음을 드러내느냐”라는 물음이 뒤따른다. 바울은 로마서 3장 3-4절에서 단호히 말한다.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유대인이 믿음에서 실패하고 불순종한다고 해서, 그들의 “불신”이 곧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효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장재형 목사는 이런 본문을 설교하며 “인간은 언제나 흔들릴 수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흔들리거나 거짓을 행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의 신실하심은 어떠한 인간적 실패로도 취소되거나 무효화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바울은 시편 51편 4절, 그리고 시편 100편 5절 등의 구절들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시고 인자하시며, 그 성실이 대대에 미친다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라는 표현은, 인간이 자기 죄를 숨기고 하나님께 반론하거나 항변하려 해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즉, 아무리 인간이 “왜 하나님은 이러이러하시냐,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드시고 방치하시냐”고 하나님을 비난하더라도,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의로우심은 변하지 않고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신다는 것이다.
바울은 3장 5-8절에서 이러한 논리를 더욱 확장한다. 사람들은 “우리의 불의가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니, 이왕이면 더 죄를 짓는 게 낫지 않느냐?”라든지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자”라는 극단적이고 왜곡된 결론으로 치달을 수 있다. 바울은 이에 대해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확실하게 선을 그으며, 그런 식으로 복음을 왜곡하여 비방하는 자들은 오히려 정죄를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장재형 목사 또한 “하나님께서 악을 계획하셨다거나, 악을 일부러 허용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식의 해석은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악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사랑의 관계를 중시하시는 분이다. 악이 발생했을 때에도 그분이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절대 주권이 있지만, 그것이 곧 ‘악 자체가 하나님의 계획’이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따라서 악을 저지르면서 ‘결국은 하나님이 잘 되게 하실 것’이라고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 된다”라고 설교한다.
정리하자면, 로마서 3장 1-8절까지의 요지는 “유대인에게는 분명 특권이 있고, 그 특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으로 대표된다. 그러나 그들이 믿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인간이 악을 행함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선을 더 극적으로 드러낸다고 주장하거나, 그래서 악을 더 행해도 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궁극적 심판 주이시며 의로우시다”라는 바울의 선포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주제가 오늘날 교회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장재형 목사는 가르친다. 교회가 세상에 대해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실패한 모습이 드러나도, 그것이 곧 하나님의 권위나 신실하심이 손상되는 일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그러한 실패를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선택받은 이스라엘이 거룩한 사명을 지키지 못했을 때 멸망으로 치달았던 것처럼, 교회 역시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동일한 불순종을 반복한다면, 구약의 역사에서 보았던 심판이 우리에게도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 점이야말로 로마서 3장 초반부에서 강조하는 ‘특권과 책임’의 긴장감이며, 바울은 그 긴장 위에 하나님의 절대적 의와 신실하심을 놓는다.
따라서 첫 번째 소주제에서 우리는 다음을 요약해볼 수 있다. 유대인(이스라엘)이 받은 특권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 특권을 올바로 사용하지 못했음에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무너짐이 없다. 인간의 불신과 불순종은 하나님을 무효화할 수 없지만, 그러한 불순종을 “구원의 과정에서 필요한 단계” 혹은 “악조차도 하나님이 쓰시기에 우리는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된다”는 식으로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곧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2.인간의 죄에 대한 오해
로마서 3장 9-18절에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결국 모든 인간이 다 죄 아래 있다”는 사실을 천명한다. 그는 앞서 1장과 2장에서 이방인들의 죄와, 또 자랑하던 유대인들의 죄를 차례로 지적해왔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라고 말한다(롬 3:9). 이는 유대인뿐 아니라, 바울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죄의 지배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이 점은 장재형 목사도 여러 차례 설교에서 강조하는 바이다. “우리는 남의 죄를 보고 쉽게 정죄하지만, 사실은 내면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죄의 뿌리를 외면하고 싶어 한다. 바울은 죄가 이방인에게만 있는 것도, 유대인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라고 가르친다. 죄는 모든 인류가 공유하는 공통된 숙명 같은 것이며,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바울은 10-18절에서 유명한 ‘카라즈(charaz)’ 기법을 사용한다. 여러 시편과 예언서의 구절을 하나씩 인용해, 인간의 죄를 종합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10절)는 전도서 7장 20절, 시편 14편 및 53편에서 인용된 내용이다. 한마디로, 인간이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길 만한 조건은 전혀 없다는 절대 선언이다. 바울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구약의 다양한 본문을 꿰어(카라즈) 인용한다.
인간의 죄는 주로 세 가지 영역에서 드러난다. 첫째, ‘생각과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죄다. 바울은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으며”(롬 3:11)라고 지적한다. 이는 곧 인간이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며, 하나님을 무시하는 교만에 사로잡혀 있다는 뜻이다. 사실 하나님을 떠나 죄의 본성대로 살면, 마음과 생각이 부패하여 하나님을 싫어하거나 무시하는 지경에 이른다.
둘째, ‘말’의 죄다. 바울은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롬 3:13-14)라고 말한다. 시편에서 이런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사람의 언어가 얼마나 쉽게 악독, 거짓, 저주로 채워질 수 있는지를 강변한다. 야고보서 3장도 혀를 지옥 불과 연결지어 설명할 만큼, 말의 문제는 심각하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본문을 다루며 “우리가 동일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을 저주하거나 거짓말을 일삼는 죄를 범한다면, 그 혀는 열린 무덤의 냄새와 다르지 않다”고 표현한다. 그만큼 죄가 마음에 뿌리내리면, 혀를 통해 죽이는 말, 상처 주는 말, 독설이나 거짓말이 솟아나는 것이다.
셋째, ‘행동’의 죄다. 바울은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르다.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다. 평강의 길을 알지 못했다”(롬 3:15-17)고 한탄한다. 인간의 마음이 부패하고 말이 독해지면, 결국 행동으로도 나타나게 된다. 살인, 폭력, 분쟁, 전쟁, 수많은 사회적·개인적 부패가 여기서 시작된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극단적 살인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해도, 근본적으로 인간이 ‘이기심’ ‘증오’ ‘탐욕’ 등의 마음에 사로잡히면 결국 행동으로 악이 분출된다.
바울이 마지막으로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롬 3:18)고 선언하는 것은, 이런 모든 죄가 결국 ‘불경건’, 즉 하나님을 무시하는 교만에서 연유함을 보여준다. 인간이 스스로를 주인 삼아 살고, 하나님의 통치를 부정한 결과가 바로 죄의 현주소라는 것이다. 이처럼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이 오직 자기 힘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이 대목에서 장재형 목사는 “교회 안에서도 신앙 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혹은 말씀을 조금 안다는 이유로, 자신이 의롭게 된 듯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직면해야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해진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기서 다시 오해에 빠질 수 있다. “인간이 다 죄인이고,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우리가 굳이 어떻게 사느냐는 중요하지 않은 것 아니냐?”라는 생각이다. 어떤 이들은 아예 “죄가 죄를 더해서 결국은 더 큰 은혜가 드러나지 않느냐”며 방종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바울은 앞서 3장 8절에서 이미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라며, 그런 주장은 말도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장재형 목사 역시 “악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선이 나타날 수는 있어도, 그것이 결코 악을 합리화하거나 미화해주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거듭 강조한다. 요셉의 경우처럼, 형들의 악한 행동을 하나님이 선으로 바꾸셔서 구원의 큰 그림을 이루게 하셨지만, 그것이 곧 ‘형들의 악행이 선한 의도로 미리 계획된 것’이라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바울이 3장 9-18절에서 말하는 핵심은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으며, 인간이 스스로 의롭다 여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론의 핵심 출발점이다. 죄인을 죄인이라 깨닫게 하는 일, 그래서 결국은 은혜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알게 하는 일이 바로 복음의 첫 단계다. 장재형 목사가 이에 대해 말하길, “교회가 가장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은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구원이 절실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죄가 죄인 줄도 모르고 사는 사람에게 그 죄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말씀의 역할이다. 여기서부터 참된 회개와 구원의 문이 열린다”고 한다.
따라서 두 번째 소주제의 요점은 ‘인간의 전적 타락’이라는 주제를 정확히 짚고, 우리가 모두 죄인임을 알 때라야 비로소 복음의 필요성이 분명해진다는 데 있다. 나아가 그것을 오해하여 “결국 죄가 큰 만큼 은혜도 커지니 마음껏 죄를 지어도 된다”거나, “악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왜곡해서도 안 된다. 그저 하나님의 절대적 거룩 앞에 서볼 때, 모든 사람은 무릎을 꿇어야 마땅하다. 이 강력한 메시지는 바울의 로마서 죄론을 지탱하는 핵심 기둥이며, 장재형 목사가 여러 설교와 강해에서 반복적으로 설명해온 주제이기도 하다.
3.율법과 죄 인식, 그리고 구원의 길
로마서 3장 19-20절은 바울의 죄론(3장 1-18절까지)을 마무리하며, 율법의 역할과 한계를 다시 한번 짚어준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유대인들이 자랑하던 율법은 사실상 그들을 ‘의’로 이끄는 완전한 통로가 되지 못했다. 물론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말씀이고, 그 속에는 인류가 걸어야 할 ‘의로운 길’이 담겨 있다. 하지만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은 그 율법을 완벽히 지켜낼 수 없다. 결국 율법은 죄를 ‘드러내고 고발’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 율법을 통해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죄인인가를 깨닫게 된다. 문제는 율법을 단순히 “나는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는 더 깊은 필요를 자극한다는 데 있다.
바울은 율법이 가진 역할을 ‘성화(聖化)를 위한 하나의 거울’로도 본다. 율법이 없었다면, 인간은 스스로가 죄인이라는 사실조차 자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유대인들은 “우리는 율법을 받았으니, 이방인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해왔으나, 바울의 결론은 “율법을 줬어도 그것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에, 결국 너희도 죄인이며 심판 아래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의롭다 인정받을 수 없음을 선언하는, 복음 신학의 근본 진리로 자리 잡는다.
장재형 목사도 여러 강해와 저서에서 “율법의 행위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로마서의 메시지를 자주 강조한다. “율법이 좋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와 뜻을 나타내는 소중한 계시지만, 우리의 죄를 씻고 새 생명을 주는 능력까지 제공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율법은 죄를 폭로하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 역할을 할 따름이다”라고 한다.
3장 19-20절은 곧이어 바울이 말할 ‘이신칭의’(3장 21절 이하)로 넘어가기 직전의 결론부이다. 즉, 율법과 죄에 대해 충분히 논하고 나서,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 외에는 답이 없다”는 논리적 결론을 예고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바울은 인간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죄의 현실’을 조명한 뒤, 바로 이어서 21절 이하에서 그 죄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의를 선포한다.
물론 이 본문만 보면, 인간은 단지 율법 앞에 입이 막히고 심판이 두려운 존재로 비춰진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절망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함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새로운 소망의 길”에 대한 전제다. 즉, 인간이 정말 처절한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왜 필요한지를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 죄와 심판이라는 진단을 명확히 하지 않는다면, 복음 자체가 설득력을 잃는다. 인간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나는 죄인이며, 스스로 의롭게 될 길이 없다. 율법을 안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자각이 일어나야만, 복음이 복음답게 빛나게 되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에서도 “이 시대는 전반적으로 ‘죄책감’이나 ‘심판의 두려움’을 경시하며, 본질적 회개와 변화 없이도 신앙생활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풍조가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 심령에 뼈아픈 각성이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율법은 그 각성을 돕는 도구다. 어느 누구도 율법을 통해 의를 얻을 수 없으나, 율법을 통해 죄인임을 발견하고 결국은 그리스도께 나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율법의 선한 역할을 제대로 경험하는 길이다”라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율법은 불필요한 것인가?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로마서 7장에 가면, 바울은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고 단언한다(롬 7:12). 문제는 우리의 죄된 본성이 율법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율법이 인간을 정죄하기 때문에, 인간은 “어찌할꼬” 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가 말하는 복음의 질서다.
결국 바울의 논지에 따르면, 인간이 스스로 내세울 수 있는 의로운 행위는 아무것도 없고, 선천적/후천적 죄성 때문에 모든 부문에서 부패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달으면 오히려 길이 열린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죄 사함이 완성되었고,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를 새 피조물로 삼으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미 선포되었다. 율법을 통해 “나는 죄인”임을 절감한 자가,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이 베푸신 의”를 옷 입고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지점을 강조하며, “복음은 분명히 절망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그 절망은 우리를 진정한 소망으로 안내하기 위한 통로다. 율법에 의해 드러난 죄가 절망감을 가져오고, 스스로 의롭지 못함을 자인하게 만들며, 결국은 우리를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게 한다. 그 순간이야말로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턱이 된다”고 풀이한다. 동시에 그는 “이 메시지가 진정 교회 안에 깊이 울려 퍼져야 하며, 모든 성도가 매일 회개하고 다시 복음 앞에 선다면, 교회야말로 세상에 참된 빛이 될 수 있다”고 설파한다.
이렇듯 로마서 3장 1-20절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율법과 언약이었고, 오늘날 교회에는 복음과 성령의 임재일 수 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죄 아래 있음’,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지만, 율법 행위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긴밀히 이어 놓은 단락이다. 바울은 이어지는 3장 21절부터 드디어 인간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칭의)를 명확하게 설명할 예정이다. 하지만 그것에 앞서 반드시 필요한 전제는 ‘죄’를 깨닫는 일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찾지 않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교만’ ‘입술에 가득한 악독’ ‘발로 달려가는 불의’ 등, 총체적이고 보편적인 타락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직시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세 번째 소주제의 핵심은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지만, 스스로 의를 이룰 수는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함’을 선언하는 데 있다. 율법의 참뜻은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고, 동시에 우리 마음에 죄책을 일깨워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그 누구도 진정으로 의로워질 수 없다. 이 죄 문제를 바라보는 성도들이라면, 늘 “내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 교회에 전하고자 했던 복음의 전개이며, 교회사 속 여러 설교자들, 그리고 오늘날 장재형 목사가 독자와 성도들에게 반복해서 전달하는 메시지다.
결국 우리는 이 모든 결론을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로마서 3장 1-20절은 바로 그 전초(前哨)로서, 믿음으로 의를 얻게 되는 기쁨이 얼마나 크고 절대적인지 실감하도록 먼저 죄를 면밀히 들여다보게 만드는 장(場)이다. 이러한 바울의 논리 구조를 이해하면, 복음을 향한 우리의 감사와 감격은 훨씬 깊어질 것이다.
(단, 바울이 율법을 공격하거나 폐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살아야 함을 전제한다는 점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려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마 5:17)고 하셨던 진술이 그 토대를 단단히 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과 의를 보여주는 거울이자 기준이지만, 결국 우리의 죄를 고발하며, 예수님의 보혈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그 기준을 충족시킬 수 없음을 반증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볼 수 있다.)
이로써 바울의 핵심적 메시지는 “모두가 죄 중에 있고, 아무도 율법 행위로는 의를 이룰 수 없으나, 그리스도 안에 희망이 있다”가 된다. 장재형 목사도 이러한 복음의 진리를 역설하며, 교회가 먼저 회개와 겸손으로 돌아서고,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함께 살아갈 때, 비로소 세상에 진정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결국 로마서 3장 1-20절은 죄와 은혜의 극명한 대비 속에서, 구원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를 직면하고 회개해야 한다는 불변의 사실을 일깨우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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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장 1-20절 강해를 소주제로만 구분하여 정리했다. 첫째로, 유대인의 특권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논하였고, 둘째로,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죄성과 그에 대한 오해들을 살폈으며, 셋째로, 율법과 죄 인식의 관계,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길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나, 하나님은 참되시고 신실하시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의를 베푸셨다”라는 복음의 절대적 선포에 있다. 인간은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지만, 죄를 자각하고 돌이켜 예수께 나아가는 길만이 구원의 답임을 로마서 3장은 힘있게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 메시지를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얼마나 절실하게 붙들어야 하는지를, 여러 시대의 설교자들과 마찬가지로, 장재형 목사 또한 거듭해서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