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남편 – 장재형(장다윗)목사

1. 부부 관계의 본질

에베소서 5장 22절부터 시작되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많은 신학자들이 “해석하기 어려운 본문”이라 지적할 만큼 오늘날도 적잖은 논쟁의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말씀을 단순히 ‘순종’과 ‘복종’의 관점으로 축소하기보다, 그 근원에 담긴 ‘사랑’과 ‘서로 존경하는 마음’, 그리고 상호보완적 관계라는 관점에서 조망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실제로 교회 역사 속에서도 이 본문이 오용되어, 여성의 지위를 낮추고 남성의 절대적 권위를 옹호하는 지지의 근거로 쓰인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장재형목사가 주목하는 것은 이 본문이 말하려는 궁극적 목적—즉 가정이 서로를 살리고 세워주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진리입니다.

성경은 에베소서 5장에서 남편과 아내, 그리고 에베소서 6장으로 이어지는 부모와 자식, 주인과 종의 관계를 통해, 인간이 맺고 있는 모든 사회적·영적 관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줍니다. 장재형목사는 늘 강조해왔듯, “성경의 가르침은 일차적으로 윤리적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영적 차원에서 출발한다”고 말합니다. 특히 바울이 말하는 ‘복종’의 개념은 “피차 복종하라”(엡5:21)라는 전제 위에서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에베소서 5장 22절의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라는 구절은 결코 아내에게만 일방적 순종을 요구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21절이 내세우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명령 속에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존중과 경외를 표해야 한다는 상호성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해설하면서, 성령 충만과 상호복종을 연결해 해석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하고, 바로 이어 21절에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라고 권면하는데, 이는 성령 충만의 결과로 나타나는 구체적인 삶의 열매를 ‘서로에 대한 존중과 복종’이라는 관계적인 범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자기중심적 욕망을 내려놓고, 이웃을 섬기며 서로를 귀히 여길 수밖에 없다는 논리입니다.

에베소서 5장 22절부터 시작되는 아내와 남편의 관계가 사실상 모든 인간관계의 기초를 제시한다는 점은, 창조의 질서가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묶어 ‘한 몸’(창 2:24)을 이루게 하는 데서 잘 드러납니다. 창세기 2장 24절의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육체를 이룰지로다”라는 본문을 바울이 그대로 인용한 것은(엡 5:31), 부부 관계가 단순히 사회적 계약이나 감정적 유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창조 섭리의 반영’임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가정은 모든 인간관계의 출발점이며, 교회 공동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소우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해설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내에게 먼저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많은 이들이 이 구절을 읽으며, 바울이 여성에게만 순종을 강요하고 남성에게 군림의 권위를 부여한 것은 아닌가 하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바울이 ‘아내들이여…’라고 먼저 말한 것은, 가정 안에서 사랑의 시작이 아내에게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풀이합니다. 전통적 관념 속에서 남성이 가정의 가장으로 인식되지만, 실제 삶에서는 섬세한 돌봄과 일상적인 배려가 여성에게서 비롯되는 일이 더 많다는 점을 지적하며, 바울 역시 이 현실을 반영해 “먼저 아내들에게 부탁한다”는 식으로 설교했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런 해설이 더 이상 남편의 책임을 경감시킨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이어지는 25절—“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에서 바울은 더욱 직접적으로 남편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교회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남편이 아내에게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시대의 다른 종교나 문화권에서 아내를 향해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은 흔했지만(그것은 그저 가부장제의 반영일 뿐이었습니다), 남편에게 “생명까지도 주를 위해, 아내를 위해 희생하라”고 요구하는 종교·사상은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의 가르침은 혁명적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이야말로 “남성 중심의 시대에서 여성과의 관계를 가히‘수평적·상호적 관계’로 끌어올린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강조합니다.

장재형목사는 또 유대교나 이슬람, 그리고 당대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여성의 위치가 어땠는지를 설명합니다. 일반적으로 여성은 재산처럼 간주되거나, 종교적으로도 ‘듣는 자리’에만 머물렀으며, 남편에게 배우는 수동적 존재로 규정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여성들은 오히려 교회에서 영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어떤 경우에는 지나치게 앞서 나가는 일도 있었을 정도였습니다(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이 “여자는 잠잠하라”고 자제시킨 배경이 이것입니다). 이는 기독교가 그 시대 여성들에게 해방구의 역할을 어느 정도 했음을 보여주는데, 장재형목사는 “기독교야말로 당시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하던 시대에 진정한 평등과 자유의 의미를 제시한 혁신적 믿음이었다”고 지적합니다.

나아가 관계의 문제—즉 결혼 생활에서의 갈등, 부모와 자식의 불화, 사회적 지위가 다른 이들 간의 충돌—는 언제나 인간 실존의 핵심적 고통으로 등장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모든 갈등의 해결책이 에베소서 전체, 특히 5장 후반부에서 드러난다고 해설합니다. 곧 모든 인간관계는 “피차 복종하라”는 상호성의 원리에 기초해야 하며,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전적으로 성령 충만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결심만으로는 자기 중심성을 버리기 힘들지만,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충만할 때 비로소 자기를 부인하고, 서로를 귀히 여기며, 궁극적으로 충만한 사랑에 이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장재형목사는 더 나아가 창세기 1장에서 반복되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말씀이 ‘충만함’과 ‘창조의 완성’을 암시한다며, 한자 “多(다)”가 “夕(석)” 두 개를 합친 글자라는 점을 짚어보면, 동양고전에서도 이 성경적 진리가 반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소개합니다. “저녁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창조가 계속되고, 결국 충만해지는 창조의 완성을 맞이한다”는 사실이, 한자에서 ‘많다(多)’라는 의미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부부 관계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가정을 이룰 때, 초반에는 기쁨과 설렘이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창조적 순환 과정처럼, 부부도 시간이 흐르면서 더 성숙해지고 충만해져야 진정한 ‘한 몸’으로서의 창조적 연합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부부는 누구나 충돌하게 마련이지만, 그것이 곧 파괴의 징조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진정한 사랑에 이르기 위한 필연적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결국 이 충돌 과정 속에서 내가 먼저 낮아지고 상대방에게 존중과 경외심을 표시할 수 있다면, 갈등은 폭발이 아니라 성숙과 변화의 계기가 됩니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개념이 “천생연분(天生緣分)”과 “운명”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잠언서 16장 1절과 9절을 자주 인용합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잠 16:1),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이는 인간이 자기 의지로 사랑하고 결혼을 선택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존재한다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곧 ‘예정’(Predestination)과 ‘섭리’(Providence)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혼인을 통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맺어지는 것을 중국어로 “천생연분”이라 하는데, 이는 ‘하늘에서 이미 내린 인연’이라는 뜻입니다. 잠언서의 가르침과 상통하는 이 개념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자유의지로 결혼을 결정하지만, 그 모든 과정 위에 이미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다고 믿을 때 부부는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결여되었을 때, 결혼을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나?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라고 상대화하기 쉬워지고, 그 순간부터 파괴적 갈등에 휩싸이기 쉽다고 경고합니다.

다시 말해, 장재형목사가 보는 부부 관계의 본질은 ‘운명적 만남’과 ‘자유의지적 결단’이 묘하게 교차하는 신비로운 영역에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결단해도 결국 그 선택을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일찍이 정해놓으신 섭리 안에서 우리가 기쁨으로 동행하기를 바라신다는 믿음이 결혼 생활을 든든히 지탱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갈등을 맞이하더라도, ‘우리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며, 천생연분이기에 귀하다’고 굳게 믿는다면 그 갈등을 해결할 힘을 얻게 됩니다.

결국 에베소서 5장 22절 이하가 강조하는,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와 “남편들은 아내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같이 사랑하라”는 두 개의 명령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쌍’임을 장재형목사는 거듭 강조합니다. 만약 어느 한쪽만 강조된다면, 그것은 가정의 균형을 깨트리고 폭력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복종과 희생은 늘 상호적이어야 하며, 그 원동력은 성령의 충만함에서 비롯됩니다. 이 사랑의 본질이 “피차 복종”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결혼이 단지 일상적 생활공동체가 아니라 거룩한 예배의 자리이자,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예표하는 ‘성스러운 언약’임을 알게 됩니다.

특히 31~32절—“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를 해설하면서,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말하는 부부의 합일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 차원을 넘어선다”고 설명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신비로운 연합’을 이루는 것처럼, 부부도 영혼 깊이 서로 하나로 이어지는 통합적 관계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 ‘하나 됨’은 결코 남편이 아내를 소유하거나 혹은 그 반대도 아니고, 서로를 억압하는 방식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섬김과 희생을 반영하는 부부의 상호성에서만, 진정으로 이 비밀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요약하면, 에베소서 5장 22절 이하를 향한 장재형목사의 시각은 매우 균형 잡혀 있습니다. 남편이 ‘머리’가 되어 아내를 통솔한다는 전근대적 오해를 지적하되, 동시에 아내에게서 시작되는 사랑의 섬김이라는 측면도 분명히 조명합니다. 무엇보다 바울의 본의는 ‘상호희생과 상호섬김’의 원리를 선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지닌 신비와 사랑이 부부에게서도 재현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실천은 오직 성령 충만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라 말합니다.

2 가정의 위기

결혼 생활에서 갈등을 겪는 부부들은 늘 서로를 탓하기 마련입니다. “내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느냐”, “내 성격이 원래 이렇지 않았다”라는 식의 반발이나 실망이 오가다 보면, 점차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게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럴 때야말로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에 대한 믿음”을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때라고 강조합니다. 우리가 자유의지로 결혼을 선택했지만, 그 뒤에는 이미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이 있었다는 믿음이야말로, 결혼 생활의 근간을 지키는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부부 관계를 ‘우연’으로 보느냐, ‘운명’으로 보느냐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잠언서 16장이 말하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해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는 말씀은, 아무리 인간이 앞을 내다보고 계산해도 결국 우리 삶의 결과와 결론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우리가 처음에는 사랑에 취해 마치 내가 주도적으로 이 결혼을 이끌었다고 생각하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그 모든 과정이 이미 ‘천생연분’으로 예정된 길이었음을 깨닫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우리 만남이 하나님의 깊은 뜻 안에 있었다고 믿는 순간, 결혼생활에 닥치는 갖가지 풍파를 대하는 태도 또한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곧 “하나님이 허락하신 인연인데, 결코 헛되이 끝나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나고, 그 믿음 속에서 우리는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게 됩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점들을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이런 차이를 주셨을까?’라는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면, 갈등은 곧 학습의 계기이자 성장의 기회가 됩니다.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그 차이 속에서 나를 돌아보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장재형목사는 “부자(父子)는 유친(有親)해야 하고, 부부(夫婦)는 유별(有別)해야 한다”는 동양고전의 개념도 인용합니다. 이는 유교 경전에서 흔히 말하는 ‘오륜’ 가운데 두 가지 관계의 핵심 요약인데, “부자는 멀었던 관계이기에 친밀해져야 하고, 부부는 지나치게 가깝기에 일정한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그만큼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애초에 세대 차이와 위치 차이가 있기에, 더욱 의도적인 친밀함이 필요하다는 뜻이고, 부부는 때로는 서로가 너무 일상적으로 붙어 있다 보니 각자의 개성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거리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이 대목에서 장재형목사는 “물론 부모 자식 간에도 거리가 필요하고, 부부 간에도 친밀함이 필요하다”며, 본문을 문자 그대로만 단순 해석하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사랑과 존중의 긴장감’을 포착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관계는 상호균형 속에 있을 때 건강해진다’는 원리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말한 부부 관계 또한, 일방적으로 여성이나 남성 한쪽만 희생하거나 복종하거나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피차 복종하라”는 원리 아래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는 관계여야 합니다.

가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다툼과 갈등은 결국 ‘사랑의 결핍’에서 오는데, 그 사랑이 결핍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먼저 변하려 하기보다 상대가 먼저 변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장재형목사는 진단합니다. 상대에게 변화와 희생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이 낮아지고 섬길 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 관계를 붙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내가 먼저 사랑을 시작하고, 내가 먼저 존경을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의 때에 합당한 열매를 거두리라”는 신앙적 확신에 근거합니다.

부부가 한 명은 ‘내가 옳다’는 입장을 끝까지 고수하고, 다른 한 명은 ‘절대 내가 양보할 수 없다’는 태도로 버틴다면, 아무리 작은 갈등도 쉽게 해결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내가 먼저 상대방의 필요와 상황을 이해해보겠다”고 마음먹는 순간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씩 부드러워집니다. 물론 자존심을 내려놓고 먼저 다가가는 일이 결코 쉽지 않기에, 성경은 이를 ‘성령의 충만’과 연결하여 이야기합니다. 인간적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자기를 부인하는 마음’이 생길 때, 우리는 진정으로 상호 존중의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가정이 곧 작은 교회라는 말을 즐겨 인용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가정 또한 부부와 자녀가 서로 사랑하고 섬기며, 한 몸의 지체로서 움직이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근본은 그리스도로부터 오는데,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셨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희생적 사랑을 남편이 아내에게도 실천하라고 강조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하며, 아내는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이 둘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가정은 불균형에 빠지게 됩니다.

에베소서 5장 26절과 27절에서 말하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는 표현은, 단지 결혼 예식 때의 상징적 의미가 아니라 부부가 결혼 생활 전반에서 서로를 영적으로 세워주어야 함을 상징합니다. 교회가 말씀으로 정결해지듯, 부부도 말씀 안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회개하고 성장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남편은 ‘머리’로서 이끄는 존재인 동시에,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듯이 아내의 ‘발’을 씻기고, 필요하면 자기 생명까지도 내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내는 그러한 남편을 ‘주께 하듯’ 존경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맞이해야 합니다.

결국 이 모든 ‘비밀’(엡 5:32)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반영한다는 사실이, 에베소서 5장이 전하고자 하는 가장 궁극적인 메시지입니다. 즉, 부부는 서로에게 맞춰가기 위해 노력하는 수준을 넘어, 서로의 영적 성장을 돕는 조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때로는 서로의 단점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며, 상처받은 마음을 보듬어주고, 또 다른 차원에서는 각자의 재능을 더욱 펼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그렇게 서로를 세워주고 ‘거룩하고 흠 없는 모습’으로 만드는 책임이 부부 양쪽에게 공히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본문을 통해 “결혼이란 단지 인간적 제도나 전통적 행사 이상의 영적 사건”이라 말합니다. 그 영적 사건은 선택의 자유를 가진 두 인격체가 만나지만, 그 만남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다는 신비가 깃들어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신비가 깨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한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만약 이 성령의 역사를 소홀히 여기고, 결혼 생활을 단지 세속적인 감정 교류나 이해관계의 문제로만 치부한다면, 하늘이 허락하신 귀한 인연을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성령 안에서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은, 가장 먼저 부부에게 적용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부모와 자식, 종과 주인의 관계 등 모든 수직적·수평적 관계가 이 원리로 이어집니다. 장재형목사는 흔히 현대인들이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는 거리 두면 된다”는 사고방식으로 관계를 단절하기 쉽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은 결코 성서가 말하는 ‘피차 복종하라’는 가르침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갈등이 생길 때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그 관계가 더 성숙해질 수 있도록 책임감을 가지고 노력해야 합니다. 부부 관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결론적으로, 장재형목사는 부부에게 “여러분이 하나님의 계획 아래 맺어진 존재라는 절대성을 잊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그 절대성이 무너지고 관계를 임의로 상대화할 때, 우리에게 무너짐과 파괴가 찾아온다”고 경고합니다. 한편으로 “그 절대성을 굳게 붙들고, 갈등 속에서도 성령의 능력을 구하며,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섬길 때, 결혼은 놀라운 기쁨과 축복의 통로가 된다”고 강조합니다.

3. 믿음과 가정(Faith & Family)의 조화

에베소서 5장 22절 이하를 중심으로 한 이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가족 해체 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가속화되고, 개인주의가 만연해지는 현대사회에서, 결혼 제도 자체가 ‘구시대적인 속박’으로 치부되는 시각도 있기 때문입니다. 장재형목사는 그러나 “신앙과 가정(Faith & Family)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영역”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이 가정 속에서 가장 기초적인 형태로 구현되기 때문입니다. 교회 공동체도 궁극적으로는 여러 가정이 모인 형태이기 때문에, 가정이 무너지면 교회 역시 제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고 그는 강조합니다.

이 연장선에서, 장재형목사는 결혼 주례를 서게 될 때마다 반드시 잠언 16장 1절과 9절을 본문으로 읽어준다고 말합니다. 바로“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16:1),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16:9)입니다. 이 본문은 결혼이란 당사자들이 ‘자의적으로 선택하고 맺는 언약’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일찍이 예비하시고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상징적 메시지입니다.

결혼서약을 할 때, 서로에게 ‘내가 자발적으로 당신을 배우자로 선택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결코 누가 강제로 강요해서 이뤄진 결합이 아닙니다. 그런데 동시에 “왜 이 사람이 내 배우자가 되었나?”라는 질문을 곱씹어보면, 결코 내 자유의지로만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가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점에서, 결혼은 곧 우리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섭리가 교차하는 지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기에 부부가 살아가면서 갈등이 생길 때, 또는 실망스러운 순간이 닥쳐올 때마다, “그래도 우리를 맺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라는 절대적 믿음이 있으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작할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예정’(Predestination), ‘섭리’(Providence)라는 교리의 가정 생활에서의 구체적 적용입니다. “Pro-vidence”에서 “Pro”가 ‘미리’라는 뜻이고, “vidence”가 ‘본다(video)’는 의미를 가진다 해서, ‘미리 보고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교리적 설명이 단지 머릿속 지식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큰 위로와 지지대가 된다고 강조합니다. 흔히 결혼 생활을 하다 보면, “다른 사람을 만났으면 더 행복했을까?”라는 의문을 품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 자체가 ‘하나님의 예정’을 가벼이 여기고, ‘천생연분’의 가치를 스스로 흩뜨려 버리는 위험한 발상일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결혼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가회(信家會)’—곧 믿음의 가정—라는 의식을 굳게 지키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신앙의 기초 위에 가정을 세우고, 그 가정이 다시금 교회 공동체로 연결되어, 서로를 격려하며 세워주는 순환 구조가 형성될 때, 개인과 사회 모두가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차원에서 살펴보면,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는 표현을 오해하여, 남편이 가정에서 일방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과거에도, 또 지금도 적지 않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에 대해 “바울이 말한 ‘머리’ 개념은 ‘주권자’라기보다 ‘섬기는 리더’로서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즉 머리는 몸 전체를 코디네이트(coordinate)하고 보호하며, 필요하면 최전선에서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문화권에서든 ‘남편의 권위’를 오용하여 가정폭력이나 심리적 학대를 저지르는 일들이 벌어지는데, 이는 에베소서 5장 25절 이하의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는 명령을 전면으로 거부하는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세미나나 설교를 통해 “만약 교회가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부정하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밟고, 멸시하고, 착취한다면 이미 그것은 ‘교회’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라며, “마찬가지로 남편이 아내를 희생시키며 군림한다면, 그는 이미 ‘머리’가 아니라 폭군”이라고 일갈합니다. ‘머리’는 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몸을 착취하기 위한 기관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진정한 신앙 안에서의 부부 관계는, 남편이 아내에게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기꺼이 돌보고 보호하며 스스로 낮아져 섬기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남편을 존경하며 세워주는 것이 아내가 보여주어야 할 ‘복종’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결국 에베소서 5장 22절 이하의 말씀은, 서로를 얽어매고 구속하기 위한 속박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를 허락하는 사랑의 원칙을 제시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사랑은 상대를 종속시키고 지배하는 데서 오는 쾌감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창조적 연합’에서 오는 충만함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홀로 있지 않게 하겠다’며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고, 이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결혼이 결코 인간이 임의로 만든 제도가 아니며, 거룩한 창조 질서 안에 포함된 것임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 결혼의 의미가 무너지고, 개인주의가 만연하며, ‘결혼은 선택일 뿐’ 혹은 ‘결혼은 구속’이라는 인식이 강해지는 현실에서, 교회는 더욱 적극적으로 성경적 결혼관을 재조명해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결혼은 단지 둘이 사랑해서 만든 가족이 아니라, 그 사랑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고백하는 삶의 자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고백은 결혼 생활의 위기 순간에 더욱 빛을 발합니다. 사람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수습되지 않는 감정적 혼란이나 경제적 어려움, 자녀 양육 문제 등이 닥쳐올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고, 이 가정을 인도하신다”는 믿음이 참된 희망을 줍니다.

나아가 장재형목사는 “가정이 흔들릴수록 교회가 서로 부부생활의 어려움을 나누고, 성경적 지혜를 함께 모색할 수 있는 장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과거에는 가족 내 문제를 외부에 알리지 않는 문화가 강했지만, 현대 교회는 ‘서로 짐을 지라’(갈6:2)는 말씀에 따라, 가정의 문제를 신앙 안에서 함께 나누고 돕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오늘날에는 성도들이 결혼생활에 대한 교육, 상담, 기도를 함께 나눌 기회가 많아져야 합니다. 결혼이 힘겹고 외로운 싸움이 아니라, 교회가 함께 짐을 나누어지는 과정이 될 때, 가정은 지치지 않고 회복할 에너지를 얻게 됩니다.

이렇듯 믿음과 가정(Faith & Family)은 언제나 맞물려 돌아가는 두 축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가정을 꾸리면, 결국 인간적 한계와 이기심이 가정에 침투해 심각한 갈등을 일으킬 때가 많습니다. 반대로 가정이 건강하게 세워지지 못하면, 교회 공동체 역시 분열과 갈등으로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피차 복종하라”는 언급 뒤에, 곧바로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식, 종과 주인의 관계를 차례차례 설명합니다. 이는 교리적이고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이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매우 구체적인 지침입니다.

정리하면, 장재형목사가 에베소서 5장 22절 이하를 강해할 때, 가장 강조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인간의 모든 관계는 서로를 살리고 세워주는 상호성 속에서만 온전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 그 상호성은 성령의 충만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바탕으로 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셋째, 부부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상징하는 ‘신비로운 연합’이기에, 결코 단순한 사람끼리의 계약이 아니며,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아래 있음을 믿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넷째, 부부가 서로 갈등을 겪을 때마다 이 믿음을 붙들고, “천생연분”이라는 절대성을 놓치지 않을 때, 그 가정은 오히려 더욱 성숙하고 충만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고대의 가부장제와는 분명 구별됩니다. 기독교가 전하는 결혼관은, 남편과 아내가 ‘같은 인간적 존엄을 가진 존재’로서 서로를 위하고 지켜주도록, 최초로 혁명적인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지금도 사회·문화적 상황은 계속 변하지만, 인간의 근원적 문제—즉 이기심, 고립, 불화, 욕망 등—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22절 이하의 메시지는 여전히 살아 있으며, 장재형목사의 설교나 강연을 통해 현대인들에게도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합니다.

마지막으로, 장재형목사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부부로 만나서 살다 보면,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반드시 온다. 그때 ‘우리 만남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붙들라. 그리고 ‘내가 먼저 상대를 존경하고, 내가 먼저 상대를 사랑하겠다’고 결단하라. 그 결단 위에 성령이 임하실 때, 우리의 가정은 하늘의 모형을 지니게 된다. 평생 서로의 발을 씻어주고, 서로에게 천국의 기쁨을 맛보게 하는 복된 부부로 살아가길 바란다.”

바울이 그토록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단지 신학적·추상적인 범주가 아니라, 우리의 실제 가정에서 살아 움직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장재형목사의 해설도 그 핵심을 놓치지 않습니다. 사랑은 서로를 마주보는 관계, 서로에게 먼저 낮아지고 먼저 섬기는 관계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메시지, 그것이 에베소서 5장 22절 이하에 대한 장재형목사의 가르침이자, 현대 교회를 향한 중요한 권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장재형목사

1.유대인의 특권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로마서 3장 1-2절은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라는 물음에서 시작한다. 바울은 여기서 곧바로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라”고 대답한다. 즉,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부르심이 있었는데, 그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점이다. 이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도 유사하게 적용되는 중요한 영적 교훈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이 그 말씀을 보존했기에, 우리 역시 그 전통을 이어받아 성경을 소중히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장재형 목사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구원의 큰 그림을 이루시는 과정에서 특정 민족을 선택하셨고, 그들에게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그것이 곧 유대인의 특권이자 사명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성경을 소중히 여기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사랑을 발견하며, 그것을 세상에 전파해야 하는 의무를 부여받은 것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9장에서 유대인의 특권을 여럿 열거하는데, 거기에 따르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양자 됨, 영광, 언약, 율법 제정, 예배, 약속,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탄생했다는 영광스러운 자랑이 있다(롬 9:4-5).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인이 무조건 폐기되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점을 시사하며, 단지 그들이 의무에 합당치 못한 삶을 살았고 결국은 메시아를 영접하지 않는 선택을 했기에 문제가 생겼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논리는 바울의 전통적 배경인 유대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동시에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는 복음의 문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불순종이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했음을 드러내느냐”라는 물음이 뒤따른다. 바울은 로마서 3장 3-4절에서 단호히 말한다.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유대인이 믿음에서 실패하고 불순종한다고 해서, 그들의 “불신”이 곧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효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장재형 목사는 이런 본문을 설교하며 “인간은 언제나 흔들릴 수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흔들리거나 거짓을 행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의 신실하심은 어떠한 인간적 실패로도 취소되거나 무효화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바울은 시편 51편 4절, 그리고 시편 100편 5절 등의 구절들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시고 인자하시며, 그 성실이 대대에 미친다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라는 표현은, 인간이 자기 죄를 숨기고 하나님께 반론하거나 항변하려 해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즉, 아무리 인간이 “왜 하나님은 이러이러하시냐,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드시고 방치하시냐”고 하나님을 비난하더라도,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의로우심은 변하지 않고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신다는 것이다.

바울은 3장 5-8절에서 이러한 논리를 더욱 확장한다. 사람들은 “우리의 불의가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니, 이왕이면 더 죄를 짓는 게 낫지 않느냐?”라든지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자”라는 극단적이고 왜곡된 결론으로 치달을 수 있다. 바울은 이에 대해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확실하게 선을 그으며, 그런 식으로 복음을 왜곡하여 비방하는 자들은 오히려 정죄를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장재형 목사 또한 “하나님께서 악을 계획하셨다거나, 악을 일부러 허용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식의 해석은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악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사랑의 관계를 중시하시는 분이다. 악이 발생했을 때에도 그분이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절대 주권이 있지만, 그것이 곧 ‘악 자체가 하나님의 계획’이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따라서 악을 저지르면서 ‘결국은 하나님이 잘 되게 하실 것’이라고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 된다”라고 설교한다.

정리하자면, 로마서 3장 1-8절까지의 요지는 “유대인에게는 분명 특권이 있고, 그 특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으로 대표된다. 그러나 그들이 믿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인간이 악을 행함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선을 더 극적으로 드러낸다고 주장하거나, 그래서 악을 더 행해도 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궁극적 심판 주이시며 의로우시다”라는 바울의 선포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주제가 오늘날 교회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장재형 목사는 가르친다. 교회가 세상에 대해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실패한 모습이 드러나도, 그것이 곧 하나님의 권위나 신실하심이 손상되는 일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그러한 실패를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선택받은 이스라엘이 거룩한 사명을 지키지 못했을 때 멸망으로 치달았던 것처럼, 교회 역시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동일한 불순종을 반복한다면, 구약의 역사에서 보았던 심판이 우리에게도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 점이야말로 로마서 3장 초반부에서 강조하는 ‘특권과 책임’의 긴장감이며, 바울은 그 긴장 위에 하나님의 절대적 의와 신실하심을 놓는다.

따라서 첫 번째 소주제에서 우리는 다음을 요약해볼 수 있다. 유대인(이스라엘)이 받은 특권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 특권을 올바로 사용하지 못했음에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무너짐이 없다. 인간의 불신과 불순종은 하나님을 무효화할 수 없지만, 그러한 불순종을 “구원의 과정에서 필요한 단계” 혹은 “악조차도 하나님이 쓰시기에 우리는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된다”는 식으로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곧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2.인간의 죄에 대한 오해

로마서 3장 9-18절에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결국 모든 인간이 다 죄 아래 있다”는 사실을 천명한다. 그는 앞서 1장과 2장에서 이방인들의 죄와, 또 자랑하던 유대인들의 죄를 차례로 지적해왔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라고 말한다(롬 3:9). 이는 유대인뿐 아니라, 바울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죄의 지배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이 점은 장재형 목사도 여러 차례 설교에서 강조하는 바이다. “우리는 남의 죄를 보고 쉽게 정죄하지만, 사실은 내면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죄의 뿌리를 외면하고 싶어 한다. 바울은 죄가 이방인에게만 있는 것도, 유대인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라고 가르친다. 죄는 모든 인류가 공유하는 공통된 숙명 같은 것이며,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바울은 10-18절에서 유명한 ‘카라즈(charaz)’ 기법을 사용한다. 여러 시편과 예언서의 구절을 하나씩 인용해, 인간의 죄를 종합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10절)는 전도서 7장 20절, 시편 14편 및 53편에서 인용된 내용이다. 한마디로, 인간이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길 만한 조건은 전혀 없다는 절대 선언이다. 바울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구약의 다양한 본문을 꿰어(카라즈) 인용한다.

인간의 죄는 주로 세 가지 영역에서 드러난다. 첫째, ‘생각과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죄다. 바울은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으며”(롬 3:11)라고 지적한다. 이는 곧 인간이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며, 하나님을 무시하는 교만에 사로잡혀 있다는 뜻이다. 사실 하나님을 떠나 죄의 본성대로 살면, 마음과 생각이 부패하여 하나님을 싫어하거나 무시하는 지경에 이른다.

둘째, ‘말’의 죄다. 바울은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롬 3:13-14)라고 말한다. 시편에서 이런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사람의 언어가 얼마나 쉽게 악독, 거짓, 저주로 채워질 수 있는지를 강변한다. 야고보서 3장도 혀를 지옥 불과 연결지어 설명할 만큼, 말의 문제는 심각하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본문을 다루며 “우리가 동일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을 저주하거나 거짓말을 일삼는 죄를 범한다면, 그 혀는 열린 무덤의 냄새와 다르지 않다”고 표현한다. 그만큼 죄가 마음에 뿌리내리면, 혀를 통해 죽이는 말, 상처 주는 말, 독설이나 거짓말이 솟아나는 것이다.

셋째, ‘행동’의 죄다. 바울은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르다.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다. 평강의 길을 알지 못했다”(롬 3:15-17)고 한탄한다. 인간의 마음이 부패하고 말이 독해지면, 결국 행동으로도 나타나게 된다. 살인, 폭력, 분쟁, 전쟁, 수많은 사회적·개인적 부패가 여기서 시작된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극단적 살인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해도, 근본적으로 인간이 ‘이기심’ ‘증오’ ‘탐욕’ 등의 마음에 사로잡히면 결국 행동으로 악이 분출된다.

바울이 마지막으로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롬 3:18)고 선언하는 것은, 이런 모든 죄가 결국 ‘불경건’, 즉 하나님을 무시하는 교만에서 연유함을 보여준다. 인간이 스스로를 주인 삼아 살고, 하나님의 통치를 부정한 결과가 바로 죄의 현주소라는 것이다. 이처럼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이 오직 자기 힘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이 대목에서 장재형 목사는 “교회 안에서도 신앙 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혹은 말씀을 조금 안다는 이유로, 자신이 의롭게 된 듯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직면해야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해진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기서 다시 오해에 빠질 수 있다. “인간이 다 죄인이고,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우리가 굳이 어떻게 사느냐는 중요하지 않은 것 아니냐?”라는 생각이다. 어떤 이들은 아예 “죄가 죄를 더해서 결국은 더 큰 은혜가 드러나지 않느냐”며 방종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바울은 앞서 3장 8절에서 이미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라며, 그런 주장은 말도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장재형 목사 역시 “악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선이 나타날 수는 있어도, 그것이 결코 악을 합리화하거나 미화해주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거듭 강조한다. 요셉의 경우처럼, 형들의 악한 행동을 하나님이 선으로 바꾸셔서 구원의 큰 그림을 이루게 하셨지만, 그것이 곧 ‘형들의 악행이 선한 의도로 미리 계획된 것’이라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바울이 3장 9-18절에서 말하는 핵심은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으며, 인간이 스스로 의롭다 여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론의 핵심 출발점이다. 죄인을 죄인이라 깨닫게 하는 일, 그래서 결국은 은혜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알게 하는 일이 바로 복음의 첫 단계다. 장재형 목사가 이에 대해 말하길, “교회가 가장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은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구원이 절실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죄가 죄인 줄도 모르고 사는 사람에게 그 죄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말씀의 역할이다. 여기서부터 참된 회개와 구원의 문이 열린다”고 한다.

따라서 두 번째 소주제의 요점은 ‘인간의 전적 타락’이라는 주제를 정확히 짚고, 우리가 모두 죄인임을 알 때라야 비로소 복음의 필요성이 분명해진다는 데 있다. 나아가 그것을 오해하여 “결국 죄가 큰 만큼 은혜도 커지니 마음껏 죄를 지어도 된다”거나, “악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왜곡해서도 안 된다. 그저 하나님의 절대적 거룩 앞에 서볼 때, 모든 사람은 무릎을 꿇어야 마땅하다. 이 강력한 메시지는 바울의 로마서 죄론을 지탱하는 핵심 기둥이며, 장재형 목사가 여러 설교와 강해에서 반복적으로 설명해온 주제이기도 하다.

3.율법과 죄 인식, 그리고 구원의 길

로마서 3장 19-20절은 바울의 죄론(3장 1-18절까지)을 마무리하며, 율법의 역할과 한계를 다시 한번 짚어준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유대인들이 자랑하던 율법은 사실상 그들을 ‘의’로 이끄는 완전한 통로가 되지 못했다. 물론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말씀이고, 그 속에는 인류가 걸어야 할 ‘의로운 길’이 담겨 있다. 하지만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은 그 율법을 완벽히 지켜낼 수 없다. 결국 율법은 죄를 ‘드러내고 고발’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 율법을 통해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죄인인가를 깨닫게 된다. 문제는 율법을 단순히 “나는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는 더 깊은 필요를 자극한다는 데 있다.

바울은 율법이 가진 역할을 ‘성화(聖化)를 위한 하나의 거울’로도 본다. 율법이 없었다면, 인간은 스스로가 죄인이라는 사실조차 자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유대인들은 “우리는 율법을 받았으니, 이방인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해왔으나, 바울의 결론은 “율법을 줬어도 그것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에, 결국 너희도 죄인이며 심판 아래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의롭다 인정받을 수 없음을 선언하는, 복음 신학의 근본 진리로 자리 잡는다.

장재형 목사도 여러 강해와 저서에서 “율법의 행위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로마서의 메시지를 자주 강조한다. “율법이 좋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와 뜻을 나타내는 소중한 계시지만, 우리의 죄를 씻고 새 생명을 주는 능력까지 제공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율법은 죄를 폭로하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 역할을 할 따름이다”라고 한다.

3장 19-20절은 곧이어 바울이 말할 ‘이신칭의’(3장 21절 이하)로 넘어가기 직전의 결론부이다. 즉, 율법과 죄에 대해 충분히 논하고 나서,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 외에는 답이 없다”는 논리적 결론을 예고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바울은 인간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죄의 현실’을 조명한 뒤, 바로 이어서 21절 이하에서 그 죄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의를 선포한다.

물론 이 본문만 보면, 인간은 단지 율법 앞에 입이 막히고 심판이 두려운 존재로 비춰진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절망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함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새로운 소망의 길”에 대한 전제다. 즉, 인간이 정말 처절한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왜 필요한지를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 죄와 심판이라는 진단을 명확히 하지 않는다면, 복음 자체가 설득력을 잃는다. 인간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나는 죄인이며, 스스로 의롭게 될 길이 없다. 율법을 안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자각이 일어나야만, 복음이 복음답게 빛나게 되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에서도 “이 시대는 전반적으로 ‘죄책감’이나 ‘심판의 두려움’을 경시하며, 본질적 회개와 변화 없이도 신앙생활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풍조가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 심령에 뼈아픈 각성이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율법은 그 각성을 돕는 도구다. 어느 누구도 율법을 통해 의를 얻을 수 없으나, 율법을 통해 죄인임을 발견하고 결국은 그리스도께 나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율법의 선한 역할을 제대로 경험하는 길이다”라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율법은 불필요한 것인가?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로마서 7장에 가면, 바울은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고 단언한다(롬 7:12). 문제는 우리의 죄된 본성이 율법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율법이 인간을 정죄하기 때문에, 인간은 “어찌할꼬” 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가 말하는 복음의 질서다.

결국 바울의 논지에 따르면, 인간이 스스로 내세울 수 있는 의로운 행위는 아무것도 없고, 선천적/후천적 죄성 때문에 모든 부문에서 부패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달으면 오히려 길이 열린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죄 사함이 완성되었고,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를 새 피조물로 삼으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미 선포되었다. 율법을 통해 “나는 죄인”임을 절감한 자가,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이 베푸신 의”를 옷 입고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지점을 강조하며, “복음은 분명히 절망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그 절망은 우리를 진정한 소망으로 안내하기 위한 통로다. 율법에 의해 드러난 죄가 절망감을 가져오고, 스스로 의롭지 못함을 자인하게 만들며, 결국은 우리를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게 한다. 그 순간이야말로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턱이 된다”고 풀이한다. 동시에 그는 “이 메시지가 진정 교회 안에 깊이 울려 퍼져야 하며, 모든 성도가 매일 회개하고 다시 복음 앞에 선다면, 교회야말로 세상에 참된 빛이 될 수 있다”고 설파한다.

이렇듯 로마서 3장 1-20절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율법과 언약이었고, 오늘날 교회에는 복음과 성령의 임재일 수 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죄 아래 있음’,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지만, 율법 행위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긴밀히 이어 놓은 단락이다. 바울은 이어지는 3장 21절부터 드디어 인간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칭의)를 명확하게 설명할 예정이다. 하지만 그것에 앞서 반드시 필요한 전제는 ‘죄’를 깨닫는 일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찾지 않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교만’ ‘입술에 가득한 악독’ ‘발로 달려가는 불의’ 등, 총체적이고 보편적인 타락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직시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세 번째 소주제의 핵심은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지만, 스스로 의를 이룰 수는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함’을 선언하는 데 있다. 율법의 참뜻은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고, 동시에 우리 마음에 죄책을 일깨워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그 누구도 진정으로 의로워질 수 없다. 이 죄 문제를 바라보는 성도들이라면, 늘 “내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 교회에 전하고자 했던 복음의 전개이며, 교회사 속 여러 설교자들, 그리고 오늘날 장재형 목사가 독자와 성도들에게 반복해서 전달하는 메시지다.

결국 우리는 이 모든 결론을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로마서 3장 1-20절은 바로 그 전초(前哨)로서, 믿음으로 의를 얻게 되는 기쁨이 얼마나 크고 절대적인지 실감하도록 먼저 죄를 면밀히 들여다보게 만드는 장(場)이다. 이러한 바울의 논리 구조를 이해하면, 복음을 향한 우리의 감사와 감격은 훨씬 깊어질 것이다.

(단, 바울이 율법을 공격하거나 폐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살아야 함을 전제한다는 점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려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마 5:17)고 하셨던 진술이 그 토대를 단단히 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과 의를 보여주는 거울이자 기준이지만, 결국 우리의 죄를 고발하며, 예수님의 보혈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그 기준을 충족시킬 수 없음을 반증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볼 수 있다.)

이로써 바울의 핵심적 메시지는 “모두가 죄 중에 있고, 아무도 율법 행위로는 의를 이룰 수 없으나, 그리스도 안에 희망이 있다”가 된다. 장재형 목사도 이러한 복음의 진리를 역설하며, 교회가 먼저 회개와 겸손으로 돌아서고,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함께 살아갈 때, 비로소 세상에 진정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결국 로마서 3장 1-20절은 죄와 은혜의 극명한 대비 속에서, 구원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를 직면하고 회개해야 한다는 불변의 사실을 일깨우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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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장 1-20절 강해를 소주제로만 구분하여 정리했다. 첫째로, 유대인의 특권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논하였고, 둘째로,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죄성과 그에 대한 오해들을 살폈으며, 셋째로, 율법과 죄 인식의 관계,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길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나, 하나님은 참되시고 신실하시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의를 베푸셨다”라는 복음의 절대적 선포에 있다. 인간은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지만, 죄를 자각하고 돌이켜 예수께 나아가는 길만이 구원의 답임을 로마서 3장은 힘있게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 메시지를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얼마나 절실하게 붙들어야 하는지를, 여러 시대의 설교자들과 마찬가지로, 장재형 목사 또한 거듭해서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천 가족을 위한 권면 – 장재형목사

에베소서 6장 속 관계의 재발견

에베소서 6장에 담긴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주인에 관한 가르침은 장재형(장다윗)목사가 꾸준히 강조해온 ‘천국 윤리’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는 오래도록 가정의 기초를 다지는 관계 회복의 중요성을 설파해 왔는데, 그 핵심은 단순한 도덕적 권면이 아니라 복음적 통찰에 있다. 즉 “취약해 보이는 이들에게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이라는 관점에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아내와 자녀, 종에게 먼저 권면하는 방식은 단순히 ‘순서가 역전된’ 표현을 넘어, 약자를 배려하시는 천국 가치관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해석할 때, 가정과사회와 교회 모든 영역에서 ‘힘의 역학관계’가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 서로를 세워 가는 것이야말로 “천대까지 이르는 복”을 여는 열쇠라고 역설한다.

장재형목사의 설교는 주로 성경 본문의 흐름을 따라가면서도 시대적 적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후반부부터 6장에 이어지는 말씀을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는 교훈과 맞물려 해설하며, 가족 공동체와 사회생활을 다시금 조명해 낸다. 그는 “가정의 기초가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원래라면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주인과 종”이라고 말해야 할 위계 질서가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주인” 순으로 제시된 점이야말로 “천국 윤리”이자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요구되는 역설적 세계관”이라 말한다. 그리고여기에 “관계의 비밀”이 숨어 있으며, 복음을 아는 이라면 심각하게 깨어진 가정사나 불화 속에서도 “주 안에서”라는 전제 아래 새로운 돌파가 가능함을 강조한다. 요컨대 “주 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전제하는 문구이기에, 이 말씀은 단순한 윤리 강의를 넘어 실제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적 약속이 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에베소서 6장을 통해 현대사회에 제시하는 핵심 주제는 크게 네 가지다. 첫째, 아내와 남편 관계 안에 깃든 창조의 비밀과 사랑의 책임. 둘째, 자녀와 부모의 관계가 보여 주는 공경과 축복의 접점. 셋째, 종과 주인의 관계가 시사하는 ‘섬김과 권위’의 역설. 넷째, 성령으로 충만해진 삶이 어떻게 일상을 뒤바꿔 가는가에 대한 실제적 적용이다. 그는 이러한 네 가지 주제를 통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정과직장, 사회 전체를 ‘천국 가치관’으로 변화시키는 도구임을 거듭 강조한다. “약한 자들을 먼저 일으키시는 주님”이라는 관점이야말로 네 주제를 관통하는 메시지이며, 이를 놓치면 기독교 윤리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자’는세상 수준에 머물게 된다고 지적한다. 이제 이 네 가지 주제를 중심축 삼아, 장재형목사의 관점과 설교 내용을6500단어 분량으로 풀어 보겠다. 소제목만 달았을 뿐, 다른 형식 구분은 두지 않고 연속된 흐름으로 정리한다.

아내와 남편의 관계 속 창조의 비밀과 사랑의 책임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5장 후반부터 6장에 걸쳐, 사도 바울이 “아내들과 남편”의 관계를 다룰 때 예상 밖으로“아내”를 먼저 언급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남편을 가정의 대표자라 여기는 전통적 문화에서라면, ‘남편이 먼저, 그다음 아내가 나중’이라는 흐름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바울은 아내에게 먼저 권면을 전한 후, 남편에게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성경은 익숙한 위계를 성령 안에서 새롭게 해석하도록 부르신다”고 해설한다. 통념에따르면 남편이 주도권을 쥐고 이끌어야 하지만, 복음적 관점은 “강자가 아니라 약자에게 먼저 말씀하시는” 신비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는 가정의 갈등이란 결국 남편과 아내가 서로 섬기고 존중하는 원리를 놓칠 때 생긴다고 본다. 이는 창세기 2장에 나타난 창조 원리, 곧 ‘둘이 합하여 한 몸을 이루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라’는 명령이 깨질 때 발생하는 비극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이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에 비유하며, 남편과 아내가 각각 상호 보완적으로 역할을 감당한다고 가르친다. 장재형목사는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듯 남편은 아내를 위해 헌신하라는 말씀과, 교회가 그리스도를 공경하듯 아내도 남편을 공경하라는 말씀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말한다.

종종 교회 전통에서 “남편은 머리요, 아내는 순종하라”는 본문이 가부장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인용되곤 했지만, 장재형목사는 “바울이 아내 억압을 지지한 적은 결코 없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남편은 아내를 위해 목숨까지내줄 만큼 사랑하라”는 메시지 쪽에 더 큰 무게가 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아내의 ‘주께 하듯 순종하라’는 말과남편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은 떼어 낼 수 없으며, 상호성을 놓치면 큰문제가 생긴다는 이야기다. 장재형목사는 “성령 안에서 깨어나면 서로 높여 주려 한다. 하지만 성령의 능력이 없으면 한쪽이 권위를 과도하게 주장하거나 다른 쪽이 온전히 순종을 감당해 내기 어렵다”고 말한다.

에베소서 5장 33절 “아내도 남편을 존경하라”는 구절이 있지만, 그보다 앞서 남편에게 먼저 요구되는 것은 ‘자기희생적 헌신’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원리를 ‘헌신적 리더십’이라 부르며, 만약 이 희생적 사랑이 배제된 채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만 일방적으로 내세우면 가정이 무너진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동시에 아내가 진정으로 공경하는 태도를 보이면 남편이 더욱 기꺼이 헌신하려는 마음을 얻게 된다는 역설도 강조한다. 예컨대 가정의경제적 어려움이나 육아 부담 등 일상적 갈등에서, 아내가 남편을 무시하면 남편도 스스로 책임을 지려는 의지를잃어 간다는 것이다.

“성령에 취하라”는 말씀이 왜 중요한가에 대해서, 장재형목사는 “인간적 자원만으로는 기꺼이 헌신하는 사랑을지속하기가 어렵다”고 설명한다. 사람들이 피곤하고 감정적으로 지치면, 누구나 서로를 배려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 충만에 들어가면, 서로에게 먼저 희생을 베풀 수 있는 영적 힘이 생긴다. 술은 잠시 들뜨게 할수는 있어도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반면 성령이 부어지면, ‘주의 기쁨과 인내와 배려’가 공급되어 가정을 치유해 간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특별히 언급하는 또 다른 관점은 “창조 때 저녁이 시작”이라는 창세기의 표현이다. 우리는 “아침이하루의 시작”이라 여기지만, 성경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고 말한다. 그는 이것이 전통적인 인식과 반대되는 개념이라며, 가정에서도 ‘강자’가 아니라 ‘약자’를 먼저 세우시는 것이 성경적 창조 질서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아내에게 먼저 말씀하심”은 곧 “가정 안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남편, 그리고 남편을 주께 하듯 공경하는 아내” 사이의 상호 존중을 통해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창조 질서의 비밀이며, 가정의 사랑과 책임을 동시에 구현하는 길이다.

자녀와 부모의 관계가 보여주는 공경과 축복의 접점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6장 1~4절에 나오는 자녀와 부모의 관계가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는 십계명의 구조를통해 해석될 수 있다고 말한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라는 구절에서, 우선“주 안에서”라는 전제가 중요하다. 그는 이것이 단순히 조건부 문장이 아니라, 복음을 아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근본 선언이라고 주장한다. 세상에는 폭력적이거나 무책임한 부모도 많지만, “주 안에서”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전제한다. 믿지 않는 가정이라면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이 불가능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주 안에서”라는 토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6장 2절은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라고 말한다. 장재형목사는십계명 중에서 ‘부모 공경’이, 하나님께 드리는 계명(14계명다음에 오는 사람 사이 계명(510계명)을 잇는 핵심적다리라고 본다. 즉 “부모 공경”이야말로 하나님과 이웃을 연결하는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는 한국 사회가 급격한변화를 겪는 가운데 “부모 공경”이 점차 약화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교회 공동체가 이를 회복하기 위한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깨어진 가정 안에서 학대당한 자녀라도, 주 안에서 새로운 ‘아버지 되심’을 발견할 때, 용서와 화해가 가능해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장재형목사는 이어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6장 3절의 축복을 단순화하지 않는다. “부모에게잘하면 장수한다”는 피상적 해석이 아니라, “공경”이라는 개념이 ‘위로 올려드리는’ 행위임을 강조한다. 그는 자주 인용하는 예화를 들어, 손녀가 단 하나의 아이스크림을 사서 할머니께 드리자, 그 집의 아이가 “엄마는 왜 할머니만 좋아하냐”며 서럽게 우는 사례를 언급한다. 그러나 그 할머니는 미안함보다도 “지혜롭네”라 말하며 먹어 넘긴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에서 “공경은 위를 향해 올려드리는 실천”이자, 결국 그것을 본 다음 세대가 또다시공경함으로 선순환이 생긴다고 해설한다.

또한 마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이 “고르반” 전통을 책망하시는 장면을 인용하며, “부모에게 드릴 것을 다 하나님께 드렸으니 그만”이라고 주장하는 외식적 태도를 지적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지 말라”고 엄중히 말씀하셨고, 이는 곧 우리가 신앙에 열심을 낸다고 해서 부모 공경을 등한시하는 것이 합리화될 수 없음을 뜻한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이런 왜곡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며, “사랑이 모든 관계를 회복한다”는 복음의 본질을 강조한다. 그 사랑이 곧 주 안에서 흘러나오는 힘이므로, “부모 공경”은 단지 문화적 미덕이 아니라 ‘복음으로이어지는 명령’이라고 풀이한다.

에베소서 6장 4절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과 관련해, 장재형목사는 “아비들”에게 먼저 경고가 주어진 점이 흥미롭다고 말한다. 이는 부모가 자녀의 마음을 무시하고 가부장적 권위만 휘두르지 않도록 막아 주는 지침이라는 것이다. 현실에서 많은 자녀가 아버지를 불편하고 무서운 존재로 느끼기 쉬운데, 복음 안에서 “아버지”는 자녀를 존중하며, 주께서 주신 생명으로 대해야 한다. ‘주의교양과 훈계’란 세속적 지식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전제로 한 ‘엄격하지만 품어 주는 양육’을 가리킨다.

장재형목사는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부모에게 자녀를 억압할 권리가 주어진 것은아니다”라고 요약한다. 그는 이 관계를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관계”에 빗대어, ‘노엽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녀의 감정과 개성을 존중하고, 상처 주지 않으려 애쓰는 태도라고 설명한다. 또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한다’는것은 무조건적 방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끌되 늘 복음이 흘러나오도록 돕는 자세라는 것이다.

결국 에베소서 6장 속 자녀와 부모의 관계는 가정이 “천국의 기초 단위”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교회와 학교, 가정이라는 교육 삼각구도에서, 그 중심에 가정이 놓인다는 것이다. 가정이 무너지면 교회와 사회도 흔들릴 수밖에없다. 이때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부모”라는 두 축이 올바로 설 때라야건강한 기틀이 마련된다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주장이다. 그는 깨어진 가정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기에, 복음의 능력을 통해 이 틈이 메워질 수 있다고 호소한다. 교회는 “상처받은 자녀나 혼란을 겪는 부모에게 피난처가 되고, 그들을 복음으로 치유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종과 주인의 관계가 시대를 초월해 시사하는 섬김과 권위의 역설

에베소서 6장 5절 이하의 종과 주인의 관계는 오늘날 대부분 국가에서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기에 직접 적용이 어렵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바울 시대를 이해하되, 이 말씀이 21세기에도 직장이나 사회적 약자와강자의 관계를 관통하는 원리를 보여 준다고 말한다. 여기서도 바울은 “상전”이 아니라 “종”에게 먼저 말한다. 전통적으로라면 힘 있는 “주인”에게 권면이 향해야 할 텐데, 복음은 정반대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복음의 비밀이자 천국 윤리”라고 주장한다. 세상이라면 권력자에게 아부하거나 조심스레말해야 하지만, 복음의 방향은 “종들아”라고 먼저 부르며,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권면한다. 이는 종이 세상에서는 낮은 지위에 있더라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결코 가치가 뒤처지지 않음을 드러내며, 하나님께서는 “눈가림이나 사람 기쁘게 하려는 동기가 아닌, 진실한섬김”을 귀히 여기신다는 뜻이다.

그는 이를 “하나님 앞에서의 동기”라는 표현으로 자주 풀어낸다. 직장이나 조직 안에서 성도가 일하면서, 겉치레만 하고 속으로는 불성실하면 그 마음이 이미 하나님 앞에서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반면 하찮아 보이는 일도“주께 하듯”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된다. “종이나 자유자나 선을 행하면 주께로부터 보상을 받는다”(6:8)는 말씀도 이 원리를 뒷받침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성경은 ‘선을 행하면 하나님이 갚으신다’고 말하는 보상 신앙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이 보상이 세속적 성공이나 물질적 풍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하늘에서의 존귀’나 ‘영적 축복’은 반드시 뒤따른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6장 9절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는 명령이 얼마나 파격적인지 말한다. 당시 로마 법 아래서 노예는 주인의 재산이었고, 주인은 종의 목숨까지도 좌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 하나님”을 언급하며, 종과 주인이 모두 “하늘에 계신 상전” 아래 있다고 가르친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이 노예 제도를 곧바로 해방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회가 노예 제도를 묵인했다”는 오해가있지만, 복음이 노예와 주인을 형제로 삼고, 결국 제도 자체를 무너뜨리는 내적 동력을 제공했다는 점을 빌레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해설한다.

장재형목사는 현대사회에서도 누구나 ‘종’ 혹은 ‘주인’의 위치를 경험한다고 말한다. 어떤 조직에서는 상급자의지위에 있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누군가에게 지시받아야 하는 처지일 수 있다. 중요한 건 성령 안에서 늘 “주께 하듯” 일하고, “공갈”을 그쳐야 한다는 점이다. 세상 권위와 권력은 영원하지 않고, 모두가 결국 하나님 앞에 동등한존재다. 그러므로 ‘주인’이 된 이들은 ‘섬김의 리더십’을 실천해야 하며, ‘종’의 자리에 있는 이들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세’를 지켜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강조한다.

성령으로 충만해진 삶이 가정과 사회를 뒤바꾸는 실제적 적용

장재형목사의 설교는 끝내 “술 취하지 말라 오직 성령 충만을 받으라”(엡 5:18)는 말씀과 연결된다.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주인의 관계에 결정적 전환을 일으키는 열쇠는 “성령의 내주하심”이다. 그는 “두려움, 걱정, 분노, 상처 속에서도 먼저 사랑할 힘은 오직 성령께서 임하실 때 생긴다”고 거듭 말한다. 그렇게 성령에 충만해진 개인이 가정과 교회와 일터에 선한 영향력을 흘려보낸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 안에도 갈등과 상처가 존재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특히 깨어진 가정의 자녀들이 교회로 몰려온다. 교회가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참된 ‘아버지 되심’을 경험하게 해야 할 책임이 크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교회가 먼저 “천국 윤리”를 실천해야 한다. 교회 지도자들도 ‘공갈’을 그치고, 외형적 치장보다는 섬김을 앞세우며, 부모와 자녀들 역시 서로를 보듬으려는 태도를 배워야 한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부모가 성령 안에서 먼저 회개하고, 남편이 아내에게 헌신하면, 아내가 그를 공경하기 시작한다. 그런 식으로 ‘순서의 역전’과 ‘사랑의헌신’이 진행될 때, 비로소 가정이 세워진다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은 어떻게 유지될까. 장재형목사는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는 습관이중요하다고 말한다.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이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하듯, 우리의 영혼은 매일 죄를 회개하고 성령의 능력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찬양과 감사가 충만한 예배 공동체에 속하는 것도 필수적이라고본다. 함께 모여 성령을 구하며 찬양할 때,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 되어 일하시는 성령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개인의 약함을 넘어서, 서로에게 “주께 하듯” 대하는 소위 ‘하나님 나라의 미리 맛보기’가 교회 안에서 구현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교회 생활에 치중하느라 가족을 돌보지 않는 “어긋난 열심”을 경계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고르반” 개념과도 맞닿는 문제다. 즉 “나는 하나님께 헌신했다”며 부모나 가족을 외면하는 태도는 복음의 정신이 아니며, 진정한 헌신이라면 오히려 가정부터 돌보도록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는 수많은 실제 사례를 예로 들어, “가정이 깨어져 버렸는데 교회 봉사만 열심히 한다면 세상이 교회를 어떻게 보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가정이 어렵더라도 부모나 배우자를 함부로 대하지 말고, 가능한 한 사랑과 공경을 실천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길을 여신다”고 격려한다.

결국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세 쌍의 관계, 곧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녀, 종과 주인은 “성령 충만이 실제 현장에서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보여 주는 사례다. 장재형목사가 거듭 언급하듯, 복음의 역설을 붙들면 우리의 삶터가 달라진다. 세상은 강자를 우선시하지만, 에베소서 6장과 복음은 “약자에게 먼저 말씀하심으로 강자를 바꾸어 가신다”는 길을 제시한다. 아내가 먼저, 자녀가 먼저, 종이 먼저 등장하고, 그들에게 먼저 권면하시는 순서가 바로 “천국의 순서”라는 말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약자의 억울함을 그냥 외면하라”는 뜻이 아니라고 덧붙인다. 오히려 “불의는 바로잡아야하지만, 복음적 해결책은 언제나 ‘먼저 나에게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아내든 자녀든 종이든, 하위 계층에 놓여 있다고 여겨지는 이들이 ‘주 안에서’ 순종과 공경을 실천하면, 그 선행을통해 “하늘에 계신 상전”이 직접 보응해 주신다는 믿음이 바울 서신의 골자다. 동시에 남편·부모·주인 같은 ‘위’에놓인 이들은 “공갈을 그치라”는 경고에 동일하게 직면한다.

복음은 이처럼 인간 세상의 상하 질서를 뒤흔들지만, 그 뒤흔듦 안에서 ‘더 높고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드러난다. 장재형목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여 준 것이 바로 이 역설적 승리”라고 한다. 예수께서는 로마 제국을 무력으로 전복하는 대신, 십자가를 지심으로 죗값을 거두고 영원한 생명을 여셨다. 이는 세상의 통념과 거꾸로 된 방식이며, 에베소서 6장의 윤리가 뿌리내린 기초이기도 하다.

그는 교회가 에베소서 6장의 메시지를 잘못 이해하여, “옛 노예 제도와 가부장적 권위를 옹호했다”는 과오를 경계한다. 복음의 참된 힘은 이런 왜곡을 뛰어넘어, 사랑과 존중과 섬김을 실천하는 공동체로 우리를 초대한다. 현대사회에서도 법과 제도는 평등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직장 내 갑질과 가정 폭력이 비일비재하다. 교회 안에서도‘성직자’ 대 ‘평신도’ 권위를 악용하는 문제가 생길 때가 있다. 그럴 때 교회는 어느 편을 들기보다, “서로 형제가되라”는 복음적 근본 메시지를 선포하고, 실제로 이행하도록 제도적·영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또, 궁극적 목표는 ‘적대’가 아니라 ‘화해와 화평’에 있음을 기억하라고 장재형목사는 덧붙인다.

결론적으로, 장재형목사가 에베소서 6장을 해설할 때 제시하는 사중(四重)의 메시지는 동일한 맥을 이룬다. 첫째, 아내와 남편 관계에서 “먼저 기초를 놓는 자”가 아내라는 역전적 사고는 복음의 역설적 순서를 드러낸다. 둘째, 자녀와 부모 관계에서 “주 안에서 공경”하라는 말은 약속 있는 첫 계명으로 천대까지 흐르는 축복의 물꼬를 튼다. 셋째, 종과 주인의 관계에서 “종에게 먼저 말하고, 주인에게는 공갈을 그치라”는 명령은 외형적 지위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마음 상태가 더 중요함을 일깨운다. 넷째, 이 모든 것을 실천하게 하는 동력은 “술 취하지 말고 성령충만하라”는 권면이며, 성령 충만이야말로 가정과 사회를 치유하는 열쇠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에서 “이 비밀이 크다”는 표현을 자주 인용한다. 이 ‘비밀’은 결코 감추어진 신비가 아니라, 십자가가 보여 준 ‘인간 이성 너머 하나님의 역설’이라는 의미다. 십자가처럼, 복음 역시 겉보기에 세상의 관념과 맞지 않지만, 그 길을 통해 가장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아내가 먼저, 자녀가 먼저, 종이 먼저라는 흐름은“강자가 먼저가 아니다”라는 하나님 음성을 상징하며, 사랑의 섭리가 실행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현대 교회가 이본문을 접할 때, 과거 잘못을 반복하지 않고 “복음이 지닌 전복적·치유적 능력”을 재발견해야 한다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강력한 주문이다.

그는 설교 말미마다 “이 말씀을 붙들고 삶으로 나아가라. 우리는 천국 백성이자 이 땅의 문화 속에서 성령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아내가 남편을 세워 주고,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며, 종이 주인을 섬기는 중에 주인까지도 복음앞으로 나오게 하자. 이것이 십자가의 역설이요, 새로운 피조물의 삶이다”라고 권면한다. 이런 관계 역전을 통해가정이 서고, 교회가 회복되며, 사회가 밝아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된다는 것이다. 성령에 충만해진 사람은그 사랑을 머금고만 있지 않고 반드시 흘려보내기 마련이기에, 부딪히는 현실마다 복음의 향기가 드러나게 된다는 결론이다.

이렇듯 장재형목사의 에베소서 6장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놀랍도록 유효하다. 그는 종종 “성경은 거꾸로 읽어야제맛”이라는 농담을 하는데,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주인과 종”이라는 위계를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주인”으로 읽어야 성경의 본의를 제대로 붙잡을 수 있다는 뜻이다. 겉보기엔 평등한 듯 보여도 실제로는 약자를 무시하기 쉬운 현대사회에서, 교회는 “약자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증언할 책임이 있다. 십자가가 증명한것처럼, 그 역설적 사랑이야말로 에베소서가 전하는 천국 윤리의 정수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유대인이나헬라인, 종이나 자유자, 남자나 여자의 구분이 없고, 우리는 모두 한 형제자매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종과주인이라는 구분은 이 땅에서 서로를 보듬고 “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을 학습하도록 주어진 자리일 뿐이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6장 설교를 마칠 때마다 “주여, 이 교훈을 실제로 살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며, 예배를 마친 뒤에도 “가정과 일터에서 이어지는 예배자가 되라”고 촉구한다. 이 예배의 현장이야말로 가정과 직장이며, 그곳에서부터 천국의 질서가 새롭게 흘러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가 수도 없이 강조해 온 메시지는, 오늘날 가정 붕괴와 세대 갈등, 직장 내 갑질이 흔한 현실에서 가장 근본적인 복음의 해답을 제시한다. “성령충만을 구하며, 약자를 먼저 배려하라”는 것이 요점이며, 아내와 남편이 서로 공경하며, 부모와 자녀가 사랑으로연결되고, 종과 주인이 섬김과 겸손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하늘에 계신 상전”께서 우리의작은 선행에도 반드시 신령한 보상을 내리신다는 믿음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의 기쁨이 된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에베소서 6장의 가르침은 1세기 지중해 세계의 노예 제도나 가부장적 문화에 타협한 것이아니며, 오히려 복음을 통해 그러한 구조들을 안에서부터 뒤집는 강력한 동력을 제공해 왔다고 장재형목사는 설파한다. 그 동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으며, 교회가 이 복음을 제대로 해석하고 실천한다면, 깨어진 가정과 왜곡된 사회를 치유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특히 다문화 가정이나 이민 공동체가 증가하는 현실에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먼저 약자에게 손을 내미시는 분’이기에, 교회는 낯선 문화나 난민 등 소외된 이들을 따뜻이 환대해야 한다. 그렇게 가정에서부터 시작된 복음의 실천이 교회와 사회 전체로 뻗어 나갈 때, 우리가 꿈꾸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실제로 확장된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장재형목사는 “이 비밀이 크다”는 고백 안에 담긴 경외심을 늘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이성을 훌쩍 뛰어넘는다. 순서가 거꾸로인 것 같고, 약자에게 먼저 말씀이 임하는 듯 보이지만, 이것이복음의 지혜이며 능력이다. 창조가 어둠 속 저녁부터 시작됐듯, 가정과 사회의 절망스러운 문제들 한가운데서도새로운 아침이 열릴 수 있다. 이는 “하늘에 계신 상전”께서 공의롭고 인격적인 사랑으로 모두를 보살피시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주인”이라는 세 쌍의 관계가 발산하는 복음의 빛은, 개인과 가정과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치유로 이어진다. 그것이 곧 “천대까지 흐르는 축복”이며, 술 취함 대신 성령 충만을옷 입은 사람들에게 약속된 새로운 삶의 패턴이라고 장재형목사는 강조해 왔다. 그렇게 수백 번, 수천 번 설교해도 달라지지 않는 그의 결론은, “성령 없이는 이 길을 갈 수 없지만, 성령과 함께라면 가정과 세상과 영혼이 바뀐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에베소서 6장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강력한 도전이자 위로라는 말로, 그는 늘설교의 문을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