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섬김의 길, 장재형목사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씩 정성스럽게 씻겨 주신 뒤 다시 자리로 돌아와 던지신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라는 질문은 단순한 확인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자들의 마음 깊은 곳을 흔드는 영적 일깨움의 초대였다. 장재형(장다윗) 목사는 이 장면을 통해, 본래 섬김을 받으셔야 마땅한 주님이 종의 자리까지 스스로 내려가 제자들의 먼지 묻은 발을 씻기신 사건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의 구조와 얼마나 다른 차원에 놓여 있는지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말한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는 말씀은 도덕적 권면을 넘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다시 짜는 선언이다.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 앞에 무릎을 굽히신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위대함’의 기준을 송두리째 뒤엎는다. 높아지려 하면 낮아지고, 낮아질 때 참된 높임을 받는 하나님 나라의 역설이 그 장면 속에 응축되어 있다. 장재형(올리벳대학교 설립) 목사는 발 씻김을 통해, 세상이 말하는 ‘성공’이 아니라 자신을 비워 타인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는 것이 참된 영광의 길임을 강조한다. 주님의 손에는 왕홀도 금관도 없었다. 그분이 드신 것은 평범한 대야와 수건이었고, 그 손이 닿은 곳은 제자들의 가장 낮고 가장 지저분한 자리였다. 그 낮은 자리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숨어 있다.

요한복음 13장의 이 사건은 오래도록 미술 작품 속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어 왔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빵과 잔을 드시는 예수를 중심에 두고 제자들의 움직임과 긴장감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그 그림에는 발을 씻기는 장면이 보이지 않지만,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점에서 깊이 연결되어 있다. 성찬을 베푸시는 주님의 손과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주님의 손은 동일하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가 성만찬의 은혜는 사모하면서, 정작 발 씻김의 낮아짐은 외면하는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성찬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작은 이웃의 발 앞에 무릎 꿇지 못한다면 복음의 반쪽만 붙든 것에 불과하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의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라는 말씀을 요한복음의 사건과 연결하며, 그리스도의 법은 결국 ‘사랑의 법’이라고 강조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은 복잡한 지식을 습득하는 데 있지 않고, 서로의 짐을 함께 지는 삶을 선택하는 데 있다. 약함을 덮고 상처를 감싸며 실패한 이웃 곁에서 함께 울어 주는 행동 속에서 사랑의 법은 현실이 된다. 예수님의 발 씻김은 사랑이 추상적 감정이 아니라 실제로 몸을 낮추고 손을 더럽히는 행동임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시범이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감정적으로만 이해하지만, 장재형 목사는 예수님의 행위를 통해 사랑을 ‘짐을 함께 지는 방식’으로 재정의한다. 사랑은 “너의 짐이 나의 짐”이라고 말하는 선택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성숙은 화려한 은사나 많은 활동이 아니라, 타인의 무게 아래로 스스로 들어가 받쳐 줄 수 있는지로 드러난다. 주님의 손이 제자들의 발에 닿았던 것처럼 우리의 손도 남들이 숨기고 싶어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한다.

예수께서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하신 말씀도 장재형 목사는 도덕적 완벽주의로 오해되지 않도록 설명한다. 하나님의 온전함은 사랑의 온전함이다. 원수까지도 포용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함이 그 온전함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온전함도 차가운 완벽함이 아니라 따뜻한 사랑이다. 이 온전함으로 인도하는 길이 “서로 짐을 지라”는 초청이며, 예수께서 몸으로 보여주신 발 씻김의 자리다.

사순절은 이 길을 다시 배우는 시기다. 장재형 목사는 사순절을 단순히 고난을 떠올리는 감상적 시간이 아니라, 잃어버린 섬김의 자세를 회복하는 영적 훈련의 때로 본다. 고난의 절정은 십자가이고, 십자가의 중심은 비움과 낮아짐이다. 예수께서 죽기까지 자기를 비우셨듯 우리도 자기중심성을 내려놓지 않고는 십자가를 말할 수 없다. 십자가 없는 고난의 말은 감정의 연출일 뿐이며, 낮아짐 없는 섬김은 결국 자기 과시로 끝난다.

요한복음은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는 말로 마지막 만찬을 시작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도 ‘누가 더 큰가’를 놓고 다투고 있었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과 끝까지 높아지려 하는 제자들의 대비는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도 반복된다. 교회와 가정, 공동체의 갈등 이면에는 섬기기보다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깔려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뿌리 깊은 죄성이 오직 십자가에서만 해결된다고 말한다.

십자가의 길은 추상적 상징이 아니라 ‘끝까지 사랑하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고, 용서하고, 다시 무릎 꿇는 삶이다. 우회로는 없다. 서로의 발을 씻으며 서로의 짐을 지는 것뿐이다. 우리는 이미 주님의 큰 사랑을 경험했기에 더 이상 핑계할 수 없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손을 내미셨던 경험이 있다면 이제 우리도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는 섬김이 ‘행동’ 이전에 ‘존재의 방향성’임을 강조한다. 예수님의 섬김은 일회적 행동이 아니라 그분의 인격에서 흘러나온 삶의 방식이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는 말씀은 아는 신앙과 행하는 신앙의 차이를 보여준다. 오늘날 교회가 이 말씀 앞에서 스스로를 돌아볼 용기가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발 씻김 사건은 수치와 상처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발’—가장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을 숨기고 싶어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자리까지 오셔서 씻기신다. 주님께 자신의 발을 내어 맡겨 본 사람이 타인의 발도 씻길 수 있다. 그러므로 섬김의 영성은 반드시 회개와 치유의 경험과 함께 간다.

현대 사회는 경쟁과 서열에 익숙하며, 이러한 기준은 교회 안에도 스며들어 섬김이라는 말을 빌려 자기 확장을 추구하게 만들기도 한다. 장재형 목사는 다시 ‘발 앞에 무릎 꿇는 공동체’로 돌아가야 한다고 촉구한다. 직분은 특권이 아니라 대야와 수건을 드는 책임이고, 리더십은 먼저 무릎 꿇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다. 사순절은 이 질문 앞에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다.

“내가 너희에게 본을 보였노라”는 말씀에서 본은 단순한 모범이 아니라 삶의 패턴이다. 그리스도인은 작은 그리스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그 구체적 형태가 서로의 발을 씻기는 삶이다. 용서하기 어려운 이를 용서하고, 이해되지 않는 이를 위해 기도하며, 소외된 이웃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일상 속 발 씻김이다.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얼굴이 흔들리는 순간처럼,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는 말씀 앞에서 우리도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지금 누구의 발을 씻고 있는가? 혹은 누구의 발 앞에서는 끝까지 무릎 꿇지 못하고 있는가? 이 질문이 우리를 복음 앞에 세운다.

십자가의 길은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작은 순종의 반복이다. 시간 일부를 내어 연약한 이웃을 찾아가고, 자존심을 내려놓고 먼저 사과하며,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섬기는 행위다. 이 길을 따라갈 때 부활의 영광도 함께 주어진다. 낮아지고 섬기는 길을 온전히 걷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영광이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는 요한복음의 약속은 지금도 유효하다. 아는 데 머물러서는 복을 누리지 못한다. 행함으로 나아갈 때 복음의 생명력이 숨 쉬기 시작한다. 장재형 목사의 발 씻김 설교는 지식과 실천 사이의 거리를 좁히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오늘도 주님은 수건을 두르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우리의 초라한 발 앞에 무릎 꿇어 물을 붓고 손을 내미신다. 그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제 우리도 누군가의 발 앞에 무릎 꿇는 삶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는 길이며,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길이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오늘도 조용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우리에게 동일한 말씀을 들려준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글로리오브갓

davidja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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