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장재형(장다윗)목사의 요한복음 13장 1절의 말씀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를 중심으로, 고난과 사랑에 대한 성경적 통찰을 정리한 것이다. 특히 사순절 기간에 우리가 깊이 묵상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그리고 그 고난의 참된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의 ‘끝까지 사랑하심’에 있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본문에서 제시된 시편 119편, 로마서 5장, 빌립보서 1장과 3장, 골로새서 1장, 디모데후서 1장과 2장, 베드로전서 2장과 4장의 구절들을 함께 살피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단지 ‘저주나 불행’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도하는 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제자들이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여전히 세상적 가치관에 사로잡혀 누가 더 크냐를 다투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음을 보여 주심으로써, 우리 역시 섬김과 낮아짐의 삶을 통해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영광을 맛보게 될 것임을 가르치신다. 이러한 맥락에서 장재형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단순히 슬픔이나 인간적 연민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놀라운 섬김과 사랑의 본질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제자도의 핵심이라고 역설한다. 첫째로 ‘고난의 의미와 그리스도의 사랑’, 둘째로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의 실천적 적용’이라는 흐름으로 정리해 본다.
Ⅰ. 고난의 의미와 그리스도의 사랑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에 대해 우리는 사순절 기간마다 더욱 각별히 묵상하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사순절은 단지 슬프고 고통스러운 예수님의 수난을 바라보는 시간이 아니라, 그 고난 속에 담긴 초월적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기회라고 강조한다. 요한복음 13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한 발걸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장면이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증언한다(요 13:1). 여기서 “끝까지 사랑하신다”라는 말은 시간적 한계나 조건적 제약이 붙지 않은 ‘완전한 사랑’을 의미하며, 그 사랑이 바로 십자가로 이어지는 길 자체임을 보여 준다.
장재형 목사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흔히 ‘고난’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적 시선에서 보면 ‘저주’이거나 ‘괴로운 시련’인 듯 보이지만, 예수님의 시선에서 보면 이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결단’이다. 예수님은 고난을 피해 가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심으로써 인간의 죄와 한계를 짊어지셨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 곧 세상을 향한 구원의 의지를 드러내셨다. 성경은 이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이라고 말한다. 시편 119편 67절은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고백하고, 71절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말한다. 즉, 고난이라는 과정은 하나님 말씀이 진정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통로로서의 역할을 한다.
장재형 목사는 로마서 5장 3~4절에서 바울이 말한 “환난 중에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라는 구절 역시 같은 맥락에서 설명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알게 되는 과정은 인간적 고난을 통과할 때 더 온전히 일어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말은 단순히 고통을 맞닥뜨리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 속에 담긴 예수님의 섬김과 은혜, 그리고 죄인을 향한 용서의 깊이를 깨닫는다는 뜻이다. 빌립보서 1장 29절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한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오히려 은혜의 통로가 된다는 역설이 담겨 있다.
또한 빌립보서 3장 10~11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고백한 바울의 말은, 고난이 단지 목적 없이 주어지는 현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기 위한 거룩한 길임을 보여 준다.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낮아짐과 섬김, 그리고 자신을 철저히 내어 주신 사랑을 본받을 기회이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바울은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고 말함으로써, 고난이 교회를 세우고 공동체를 섬기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이는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고난은 홀로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확장이요 섬김의 기회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디모데후서에서도 바울은 반복해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한다(딤후 1:8, 2:3). 이 권면의 배경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긍정적 의미를 지닌다는 신학적 이해가 깔려 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두려움 속에서 고난을 피하려고만 해서는 안 되고, 그 안에 담긴 주님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2장 20~21절과 4장 13절에서도,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일이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장차 주님께서 영광 가운데 나타나실 때 큰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고난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필연적이며, 결국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해 주는 길”이라고 해설한다.
사실 이런 가르침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이를 실제 삶에 적용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성경에서 고난에 대한 말씀이 반복해서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교회와 성도들은 고난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장재형 목사는 “고난 없이 영광은 없다”라는 진리를 자주 언급한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룬 구원의 사역은, 바로 그 고난 자체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강력하게 증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고난을 너무 쉽게 저주나 벌로만 해석해 버리면,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끝까지 사랑하심”을 놓쳐 버리게 된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 즉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모습 속에는 ‘고난을 기꺼이 수용하시는 의지’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요한복음 13장 1절의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표현을 두고, 여기서 말하는 ‘끝까지’의 범주에는 시간적 한계가 없으며(“끝까지”=마지막 순간까지), 또한 희생이나 헌신의 제약이 없다고 설명한다. 즉, 제자들이 실수하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거나 심지어 부인하더라도, 예수님의 사랑은 멈추지 않고 그들을 향해 있었다. 그 사랑의 정점이 십자가의 희생이며, 바로 그 희생이야말로 예수님의 고난이 저주가 아니라 사랑임을 증명한다. 고난은 결국“사랑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임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우리가 요한복음 13장을 살펴볼 때, 그 첫 구절에서 이미 예수님의 이러한 결단이 선포된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곧 다가올 고통스러운 죽음을 뚜렷이 인식하셨음을 알려 준다. 그리고 그 죽음은 십자가라는 참혹한 형벌을 동반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향해 끝까지 사랑하시는 길을 선택하셨다. 이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초월적인 사랑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사람이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고난을 자초하는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은 본래 상대를 위한 희생과 헌신을 필연적으로 내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예수님의 고난은 자신을 낮추고 종의 모습으로 살아가신 주님의 사랑을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다.
이에 더해 마태복음 20장과 누가복음 22장에 기록된 제자들의 다툼 장면을 보면, 예수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세속적인 가치관, 즉 누가 더 크냐,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느냐에 집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마태복음 20장 20-27)고 선언하신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을 주목하며, “세상의 지배자들은 권세를 부리고 높아지는 것을 목표로 삼지만, 주님의 나라는 그 반대”라고 강조한다. 참된 제자라면, 낮은 자리에서 형제를 섬기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자신을 낮추는 마음으로 서로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보여 주신 발 씻김의 사건(요 13:4~5)은 바로 이러한 가르침을 삶으로 구현한 현장이다. 당시 제자들은 누구 하나 먼저 종의 역할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친히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물을 대야에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다. 이것은 중동의 풍습상 종이 해야 할 가장 낮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 아무도 먼저 나서서 형제의 발을 씻기거나, 사랑의 섬김을 실천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님께서 직접 본을 보이심으로써, 사랑은 결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섬김으로 입증’해야 함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장재형 목사는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은 인류에 대한 구원이 얼마 남지 않은 긴박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에게 오히려 ‘누가 더 크냐’가 아니라 ‘누가 진정 종처럼 섬기느냐’가 중요하다고 몸소 보여 주셨다”라고 설명한다.
요한복음 13장에 펼쳐진 예수님의 고난의 시작은, 그저 고통스러운 장면이 아니라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극적인 무대다. 예수님은 그 사랑을 말로만 선포하지 않으시고, 몸소 낮은 자리를 택하셨다. 그것이 십자가로 가는 길의 본질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기꺼이 지심으로써, 죄인인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신실하고 변함없다는 사실이 역사 속에 분명히 각인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장재형 목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고난 속에서도 사랑을 놓지 않는 것”이며, “섬김으로써 그 사랑을 증언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십자가는 고난이지만 동시에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다.
Ⅱ.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의 실천적 적용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고난은 사랑의 절정이며, 십자가는 바로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여 주는 현장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성경의 메시지를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에 대한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누가 크냐”라는 제자들의 세속적인 다툼을 마주했을 때, 발을 씻기는 섬김으로 답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끝까지 사랑하시는 삶’을 살려면 구체적인 적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라고 말씀하신다. 즉, 주님이 보여 주신 본을 따라 실천하는 것이 제자됨의 표지라는 의미다. 그런데 실상 우리의 내면에는 여전히‘누가 더 크냐’는 비교 의식,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 섬김을 받으려는 태도가 자리 잡고 있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날 교회 안에도 명예욕, 권력욕, 과시욕이 은연중에 만연해 있다. 하지만 주님의 나라에서는 오히려 낮아지고 더 섬기는 자가 참으로 큰 자다. 우리는 이 가치관의 급진적 전환을 경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예수님의 ‘끝까지 사랑하시는’ 모습을 본받을 수 있을까? 먼저, 우리는 사랑이란 감정이나 말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의지’임을 인식해야 한다. 요한복음 13장의 예수님은 제자들이 누가 더 크냐고 다투고 심지어 뒤이어 자신을 배반할 제자가 있음을 아셨음에도(요 13:2, 21~27),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 이는 사랑이 상대의 반응 여부나 착함에 좌우되지 않음을 보여 준다. 사랑은 곧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내 몫’이며, 고난을 동반하더라도 감당해야 할 부름이라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사랑은 상대가 그에 걸맞은 태도를 보이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또 인류에게 보여 주신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이라고 설명한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은 ‘실천적 섬김’으로 구체화된다. 발을 씻겨 주시는 행위는 단순히 겸손을 과시하는 제스처가 아니다.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먼지투성이가 된 발을 씻는 일은 매우 실질적인 섬김이었다. 예수님은 ‘말로만, 마음으로만’ 사랑하지 않으시고, 실제적인 행동으로 제자들의 필요를 채워 주셨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보살피고, 가족이나 이웃들에게 헌신적으로 다가가며, 혹은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타인의 필요를 살피고 기꺼이 돕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장재형 목사는“참된 사랑은 언제나 행동을 동반한다. 아무리 그럴듯한 말을 해도, 정작 주변의 사람들을 돕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사랑이라 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특히 누가복음 22장 14~2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기 전에 유월절을 제자들과 함께 지키기 원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떡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는 ‘주심’, ‘내어 주심’이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사랑이란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고, 그 내어 줌이 바로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성만찬을 기념할 때마다, 그분의 희생적 사랑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몸을 찢어 주시고 피를 흘려 주신 그 실제적 사랑을 묵상해야 한다. 그것은 단지 예식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렇게 서로 섬기라는 말씀 앞에 서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교회는 예수님의 희생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끝까지 사랑하는 삶’을 각 성도에게 권면해야 하며, 그 사랑이 세상으로 흘러 나가도록 격려해야 한다. 만약 교회가 이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은 공허한 구호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실제로 제자들은 초대교회 시절 서로의 필요를 채우고 재산을 기꺼이 나누며(행 2:44~45), 박해와 고난 가운데서도 서로를 돌보는 모습을 보였다. 그것이 로마 제국을 변화시키고, 복음의 능력을 드러낸 강력한 증거였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교회가 참된 사랑의 실천으로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할 책임이 있다. 그것이 곧 세상 사람들이 ‘아, 저들이 정말 예수의 제자이구나’라고 깨닫게 되는 결정적 표지”라고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변을 돌아보면 ‘발을 씻어 줘야 할’ 사람이 너무 많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소외된 이들, 이주민, 장애인 등 우리가 일상 속에서 외면하기 쉬운 존재들이 있다. 예수님이라면 그들의 발을 기꺼이 씻겨 주셨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을 돌아보면서도, 종종 ‘내가 더 중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끝내 외면하거나, 누가 섬겨 주겠거니 하고 미룰 때가 많다. 하지만 장재형 목사는 “예수님께서 소외된 사람들, 병자와 세리, 창기, 문둥병자와 함께하시고 그들을 치유하시며, 그들에게 다가가셨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시는 모습이 바로 십자가에 담긴 사랑의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는 ‘누가 나를 섬겨 줄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누구를 섬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더욱 깊이 체험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에 ‘종말론적 가치관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장재형 목사는 “새 하늘과 새 땅, 즉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이전의 가치관과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라는 역설이 바로 그 나라의 법칙임을 설명한다. 세상에서는 더욱 높아지고, 더욱 인정받으며,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성공으로 간주되지만, 하나님 나라는 낮아짐을 통해 오히려 높은 자리에 오르고, 자신을 버리고 남을 세워 줌으로써 참된 존귀를 얻는 세계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예수님은 바로 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장 실제적으로 보여 주신다.
고난을 두려움으로만 대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사랑의 신비’를 깨닫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환경 속에서 끝까지 사랑하기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사람들이 우리를 몰라주고, 심지어 핍박하는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우리는 끝까지 사랑하는 삶을 포기하면 안 된다”고 거듭 역설한다. 왜냐하면 부활의 영광은 단지 고난을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채우는 것’을 통해 주어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마주했을 때, 제자들의 배반과 세상의 조롱을 마주했을 때, 자신을 철저히 내어 주는 사랑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그것이 부활을 이루는 능력으로 연결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사랑이 없이는 고난이 오히려 저주가 되겠지만, 사랑 안에서의 고난은 영원한 생명을 품고 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수동적 희생’이나 ‘억울함’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이고 능동적인 사랑의 표현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라는 가장 치욕스러운 형벌을 선택하신 것은, 인간의 죄와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 사랑의 깊이를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장재형 목사는 “십자가는 전적으로 사랑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을 전파하고 증언하는 증인으로 부름받았다. 그러나 그 사랑을 말로만 알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닮아 가야 한다”고 권면한다. 사랑은 고난을 동반한다. 하지만 바로 그 고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부활의 소망을 간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을 멀리서 관조하거나 예수님의 아픔에 대해 단순한 동정을 갖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동일한 사랑을 실천할 것인가’를 묵상하며 결단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때로는 교회 안에서조차 갈등과 상처를 경험하기도 한다. 지도자와 성도 간, 성도들 상호 간에 ‘누가 옳으냐’, ‘누가 더 인정받아야 하느냐’, ‘누가 먼저 대접받아야 하느냐’ 같은 문제로 다투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러한 다툼을 하는 우리를 향해 “너희는 종이 되라, 서로의 발을 씻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신다. 오늘날에도 이 말씀은 그대로 유효하다. 우리가 서로 발을 씻어 주고, 서로의 부족함을 감싸 주며, 형제자매를 섬기는 삶을 통해, 교회는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성도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종의 모습으로 헌신할 때에야 비로소, 세상이 교회를 보고 ‘아, 저들이 진정 예수의 제자들이구나!’ 하고 알게 된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모습이 오늘날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재현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랑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른다. 남을 살리고 세우는 일에는 언제나 고난이 동반된다. 하지만 그 고난은 ‘저주’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고난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 그리고 그분이 우리 각자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보다 깊이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를 위해서, 나의 욕심을 위해서” 감내하는 고생은 지치고 피곤하기만 할 때가 많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헌신하는 고난은 달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다. 요한복음 13장에 기록된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은, 그 사랑 안에 기쁨과 감사, 그리고 부활의 소망까지 담아 놓으셨다. 장재형 목사는 이 복음을 지속적으로 전하면서, 제자들이 예수님 곁에서 여러 해를 지냈음에도 결코 체화되지 못한 ‘섬김과 사랑’을, 현대 교회도 너무 쉽게 놓치고 있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이 점을 회복하지 않으면 교회가 본질을 잃어버리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한다고 역설한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보여 주신 제자들을 향한 태도—그들이 부족하고 심지어 자신을 버릴 것을 아셨음에도 “끝까지 사랑하시는” 모습—이 바로 교회와 성도들의 궁극적 모범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사랑의 결정체이며, 우리를 향한 그분의 희생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토대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을 단순히 관념적으로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발을 씻어 주는 모습, 즉 종의 태도와 섬김의 행동으로 드러내야 한다. 그런 교회, 그런 성도들이 모일 때 비로소 세상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는 예수님의 말씀이 참이라는 사실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예수님의 십자가, 그 고난은 끝까지 사랑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이며, 그것이 곧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여신 사건이다. 그러니 우리 역시 이 복음의 길을 걷기 위해 끝까지 사랑하는 삶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선택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세상은 계속해서 우리를 높아지려는 욕망과 자기중심적 가치관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미 예수님의 본이 있고, 성령의 도우심이 있다. 우리가 진실로 이 사랑을 붙들고, 서로에게 종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다시 십자가의 능력을 나타낼 것이며, 온전한 부활의 희망을 선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순절을 비롯해 우리의 일상 속에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이 고난과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삶에 적용하기를 결단한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을 닮아 서로의 발을 씻어 줄 수 있는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다.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는 요한복음 13장 1절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걸어가야 할 길이 ‘고난의 길’인 동시에‘사랑의 길’임을 선포하는 핵심 구절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사건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인간을 살리는 하나님의 가장 아름다운 계획이었고, 예수님의 자기 희생적 순종이었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점을 여러 설교와 저술에서 지속적으로 강조해 왔다. 그리고 고난을 단순히 피하거나 두려워하기보다,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사랑의 본질을 발견하고, 똑같이 따라가는 삶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한 부활의 능력, 곧 새로운 생명과 기쁨을 경험할 수 있다. 사랑이 없는 고난은 그저 쓰라린 절망이 될 수 있지만, 사랑으로 감싸인 고난은 신비한 생명의 문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것이 사순절에 우리가 되새겨야 할 가장 중요한 영적 메시지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난의 의미가 단순히 인간적 고통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 사랑을 ‘끝까지’ 베푸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고난이 저주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라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리고 그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이며 축복이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랑은 구체적 실천을 통해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의 일상 안에 재현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 주시며 보여 주신 섬김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가 서로의 발을 씻어 주고, 끝까지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세상은 교회를 통해 부활의 소망을 발견하게 된다. 장재형 목사가 끊임없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요한복음 13장에 기록된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말씀처럼, 우리 역시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겸손히 섬김의 종으로 살아가며, 이 땅에 참된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고 몸소 행하신 그 사건으로부터 출발한다. 제자들은 자신들끼리 높아지고자 분쟁을 일으켰고, 예수님은 이에 대해 ‘종의 모습’으로 답하셨다. 그리고 곧이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여셨다. 그 십자가는 고난이지만,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메시지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순절을 비롯해 신앙생활의 모든 시간 속에서,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말씀—“십자가는 고난이지만 결코 저주가 아니라 사랑이다”—를 깊이 묵상하며 끝까지 사랑하는 삶을 결단하기를 소망한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되어야 하며, 서로의 발을 씻기고 낮아지는 태도를 통해 드러난다. 그 길이 좁고 험할지라도, 예수님께서 이미 보여 주신 모범을 따를 때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부활의 소망을 누릴 수 있다.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선언이 우리의 삶과 공동체를 통해 오늘도 계속 울려 퍼지기를 바란다.
www.davidjang.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