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 엘리야와 남은 자

Ⅰ. 엘리야 이야기와 남은 자 

열왕기상 19장은 엘리야의 삶 가운데 가장 극적인 순간 중 하나를 보여준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기적적인 승리를 경험한 직후, 이세벨의 위협 때문에 극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광야로 도피하는 엘리야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방식으로 찾아오셔서 그를 어루만지시고 다시금 사명으로 인도하신다. 특히 이 장면은 현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도 깊은 공감과 위로, 그리고 결단을 요구하는 말씀으로 적용된다. 장재형목사는 여러 설교와 강의를 통해 엘리야 이야기가 가진 영적 원리와 ‘남은 자 사상(Remnant Theology)’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시대가 혼탁해질수록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들에 대한 약속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의 아합왕 시대에 활동한 대선지자다. 성경은 아합왕을 “악하고도 악한 왕”으로 묘사하는데, 그중에서도 아합왕과 결혼하여 바알 숭배를 전국적으로 퍼뜨린 이세벨이 등장함으로써 엘리야의 사역 환경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열왕기상18장에서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 대결을 하여, 하나님이 참된 신이심을 드러내는 위대한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그 직후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는 살벌한 소식을 전해오자, 엘리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브엘세바로 도망치고 이어 광야로 들어가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하게 된다.

이 대목은 놀랍도록 인간적이다. 한순간 전까지는 불의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영적 거장이었으나, 이세벨의 위협 앞에서 극심한 두려움과 좌절을 맛본다. 인간적 나약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토록 절망한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하늘의 양식과 음료를 제공하심으로써 그의 육체적 필요를 채우시고, 동시에 영적 회복을 주도하신다.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라는 대목은 하나님의 따뜻한 돌보심을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는 장재형목사가 자주 인용하는 히브리서 1장 14절, 곧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이라는 구절을 실제 삶 속에서 체험하는 예시가 된다.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서도, 혹은 까마귀처럼 예상치 못한 수단을 통해서도 자신의 사람을 돌보시는 분이시다. 이 사실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내가 혼자 있다’고 느낄지라도 결코 혼자가 아님을 일깨워준다.

엘리야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초자연적 양식을 먹고 40일 밤낮을 호렙산까지 이동한다. 그곳 동굴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시금 듣게 된다.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그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고, 또 지진이 일어났으나 그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불이 났으나 그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고,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다.”(왕상 19:11-12) 이것은 대단히 상징적인 장면이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에게 위대한 표적과 기적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기도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세미한 음성”으로 전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 침체와 극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엘리야가 다시금 회복되고, 자신의 소명을 재확인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여기서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반복적으로 물으시는 질문이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이다. 이 질문에는 어느 정도 책망의 뉘앙스가 담겨 있다. 곧 “네가 여기서 이렇게 주저앉아 있을 사람이 아니지 않느냐?”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에 엘리야는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합니다.”라며 극도로 고독한 심경을 토로한다. “나만 남았습니다”라는 이 표현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극한의 고독과 절망을 대변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칠천 명을 내가 남겨 두었다”고 하심으로써 엘리야의 고정관념을 깨뜨리신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남은 자 사상(Remnant Theology)”의 핵심이다. 사람의 눈에는 자기 혼자만 남은 것처럼 보이고, 이스라엘 전체가 우상숭배에 빠져버린 것만 같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우상에게 굴복하지 않은 칠천 명을 예비해 놓으셨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남은 자 사상’을 두 가지 핵심 포인트로 설명한다. 첫째, 인간의 한계 안에서는 절대 찾거나 파악할 수 없는 ‘숨겨진 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영적으로 어둡고, 사회가 맘몬(물질)에 물들고, 바알(우상숭배)과 음란이 만연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분의 통치를 벗어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섭리는 어느 시점에도 무너지지 않고, 반드시 “남겨진 씨앗”이 존재한다. 이는 구약 시대뿐만 아니라 신약과 현대 교회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리다.

둘째, 이러한 남은 자들은 시대를 바꾸는 마중물이 된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을 예비하신 이유는 단순히 ‘숫자’를 보존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그들은 엘리야처럼, 혹은 엘리사처럼, 하나님의 진리를 파수하고 전수하며 역사를 변화시키는 데 쓰임받는 핵심 인물들이다. 로마서 9장 27-29절에 언급된 것처럼, 이스라엘 자손이 비록 바다의 모래같이 많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라는 구절은 하나님께서 믿음의 계보를 이끌어 가시기 위해 특정한 ‘씨앗’을 보존하신다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또한 이사야서 1장 9절도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라”라고 말씀한다. 그만큼 남은 자들의 존재는 하나님의 심판의 와중에서도 은혜의 방주 같은 역할을 한다.

이 “남은 자 사상(Remnant Theology)”은 장재형목사의 설교나 강의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며, 현대 교회와 세계 선교 현장에서 매우 중요하게 적용된다. 그는 특히 열방에 복음을 전하러 나가는 전도자들에게 이 개념을 명심하도록 독려한다. 사람의 눈에 볼 때는 ‘그 땅은 너무 굳어 보이고, 사람들이 복음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엘리야가 광야에서 ‘나만 홀로 남았다’고 절망했지만 사실은 칠천 명이 숨겨져 있던 것처럼, 하나님은 세계 도처에 이미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남은 자들”을 두고 계신다는 것이다. 전도자는 “내가 그들을 변화시킨다”는 마음이 아니라, “이미 그들을 준비하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나는 그저 그들을 발견하고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는 담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역설한다.

사도행전 18장에서 바울이 고린도에 체류할 때, 현지 유대인들의 극심한 반발과 핍박으로 인해 두려워하던 모습을 떠올리면, 이 원리는 훨씬 더 실감이 난다. 밤에 주님이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나타나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다”라고 말씀하셨던 사건이 그것이다(행 18:9-10). 처음에는 사람들이 워낙 완악해 보이므로 전도가 전혀 되지 않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이미 고린도에 바울의 메시지를 들을 준비가 된 백성들을 예비해 두신 상태였다. 결국 그 말씀대로 고린도교회가 세워지고, 나아가 이방인의 복음 전파에 중요한 거점이 된다. 이처럼 ‘남은 자 사상’은 하나님이 이미 예비하신 은혜의 사람들을 믿고 담대히 나아가라는 촉구이며, 엘리야 이야기는 그 대표적인 구약적 모형이다.

또 한편, 이는 ‘내가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엘리야는 결국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했으며, 엘리사를 후계 선지자로 세워야 했다. ‘남은 자 사상’이란, 결국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신뢰하면서도, 우리 각자가 맡은 책임과 순종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 역동적 균형을 요구한다. 장재형목사 역시 이를 거듭 강조하며,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이 있으니, 두려움 없이 나아가라. 그러나 그 사람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우리도 우리의 소명에 충실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러한 균형감은 엘리야나 사도 바울의 삶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하나님이 친히 주신 약속이 있을지라도, 그들은 늘 인내와 기도로 최선을 다해 사역 현장에 몸을 던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렇듯 열왕기상 19장에 담긴 엘리야 이야기와 ‘남은 자 사상’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우리는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암담해 보여도, 홀로 싸우고 있다고 느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남은 자를 예비하셨다는 사실을 신뢰해야 한다. 이것이 개인의 신앙을 붙드는 토대가 될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와 세계 선교의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비전의 원천이 된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 생각을 초월하여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며, 심지어 까마귀와 같은 도구로도 우리를 먹이시고, 천사를 통해 체력을 보강하시며, 눈에 보이지 않는 칠천의 사람들을 숨겨놓으신다. 그렇기에 신자는 결코 절망할 이유가 없다.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한다’라는 두려움에 고착된 엘리야에게 조차도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찾아와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시며 다시금 그를 세상 한가운데로 돌려보내신다. 이 같은 메시지는 우리 각자의 삶이 아무리 기근과 같은 고통으로 가득해도 결코 포기하거나 주저앉지 말라는 초청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에는 반드시 ‘남은 자’를 향한 소명의식이 동반된다. 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어떻게 전파하는 이가 없는데 들을 수 있겠느냐?’고 말하며, 보냄받은 전도자들이 말씀을 선포해야 “이미 준비된” 영혼들이 그 소리를 듣고 반응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는 곧 우리가 단지 농부처럼 씨를 뿌리면, 곧바로 수확이 일어나는 원리는 아니지만, 적절한 때에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는 약속과 같다. 사람의 눈에는 황무지 같아 보이는 땅이라도, 하나님께서 이미 남은 자를 심어 놓으셨다면, 그 땅에서 열매를 기대할 수 있다는 메시지다. 이 믿음이 있기에, 전도자는 ‘열매 없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반드시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두려움에 휩싸여 전하지 않거나, “이젠 소망이 없다”며 포기해버리는 실수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정리하자면, 엘리야 이야기와 남은 자 사상은 “하나님이 일하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할 만큼 절망했을 때조차도 하나님의 역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나만 남았다’고 절규할지라도, 사실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세상 어딘가에, 혹은 바로 우리 곁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이들이 존재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거듭 설파하며, “현장에서 사역할 때 외롭고 지쳐도, 불가능해 보이는 현장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이미 남은 자들을 준비하셨기에 담대히 나아가라”고 강조한다. 이 메시지는 구약의 역사적 기록을 넘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도 절실히 필요한 격려와 도전으로 다가온다. 남은 자 사상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의 주인으로 행하시는지 깊이 깨닫고, 복음 증거의 사명감과 담대함을 되찾을 수 있다.

Ⅱ. 현대 교회의 실천

열왕기상 19장에 묘사된 엘리야의 영적 여정과 ‘남은 자 사상(Remnant Theology)’은 구체적으로 현대 교회에 어떤 적용점을 제공할까? 그리고 그러한 적용점을 장재형목사는 실제 사역에서 어떻게 풀어내고 있을까? 본 소주제에서는 현대 교회 공동체가 엘리야의 이야기를 통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 과정에서 장재형목사가 강조해온 핵심 가치와 실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가장 먼저, 현대 교회가 놓치지 말아야 할 원리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압도적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세벨의 위협 앞에 홀로라고 느끼는 순간 두려움에 빠져버렸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이 그의 곁을 떠나신 적이 없었고, 까마귀나 천사를 통해 끊임없이 돌보셨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통해 “현대 교회의 위기는 교세의 감소나 세속화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망각하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강조한다. 성도들이 교회 예배에 출석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더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지금도 구체적으로 일하신다’는 믿음이 희미해지면 쉽게 두려움과 절망, 혹은 피상적 신앙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어떤 프로그램이나 정책을 시행하기 이전에, 먼저‘함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실천적 지점은 “현장 중심의 전도와 제자화”다. 엘리야는 때로는 천사를 통해, 때로는 까마귀를 통해 양식을 공급받았고, 사르밧 과부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다. 결국 엘리야가 이스라엘 전역을 누비며 사역할 수 있었던 동력은 하나님의 실제적 공급이었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성도들에게 ‘현장을 체험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국내외 단기 선교, 봉사 활동, 지역사회 섬김 프로젝트 등을 통해 성도들이 직접 ‘하나님의 준비하심’을 목격하게 하라는 것이다. 그동안 그는 여러 선교지에서 활동하며, 하나님이 이미 그곳에 예비해 두신 사람들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여러 차례 간증해 왔다. 아무리 복음에 무심하고 적대적인 곳이라도, 그곳에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을 만나게 될 때 교회 공동체 전체가 영적 흥분과 사명감을 새롭게 하게 된다.

여기서 장재형목사는 특히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라”(에스겔 3:11)는 말씀을 즐겨 인용한다. 전도자는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또 성과를 강박적으로 추구하지도 않는다. 대신,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씨앗이 되어 심겨졌을 때,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된다는 확신 안에서 꾸준히 전파한다. 이 원리는 사도행전 28장에서 사도 바울이 언급한 “불신앙의 신비”와도 연결된다. 똑같은 메시지를 들어도 어떤 사람은 열리고 어떤 사람은 닫히는데, 그 현상 자체는 인간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영적 신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전해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미 예비하신 ‘내 백성’이 많다”는 믿음 안에서, 교회는 계속해서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그렇다면 “남은 자 사상(Remnant Theology)”은 교회 내 제자훈련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장재형목사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에서 그 실마리를 찾는다. 하나님은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명령하심으로, 엘리야의 뒤를 이을 영적 계보를 준비하셨다. 이는 신약에서 바울과 디모데 관계로도, 예수님과 열두 제자의 관계로도 확장해서 적용할 수 있다. 교회는 단순히 성도 수를 늘리는 데 주력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 영적 계승자들을 세워야 한다. ‘남은 자’가 되기 위해서는 단순 교리 지식이나 형식적 예배 참석만으로는 부족하다. 실제로 말씀과 기도의 삶, 순종과 희생의 실천을 통해 준비된 자들이 되어야 한다. 교회 지도자들은 제자훈련 프로그램과 목양을 통해 성도 개인을 ‘하나님이 예비하신 자’로 세우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일관된 가르침이다.

또한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들을 찾는 전도와 선교”는 매우 유연하고 역동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를 만났을 때, 그는 “먼저 네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나를 위해 떡을 구워 달라”고 요구한다. 이 요구는 엄밀히 말하면 과부의 입장에서는 부담이 될 수 있으나, 하나님의 인도를 의심치 않았던 엘리야는 담대히 말을 전했고, 놀랍게도 그 과부는 순종했다. 이처럼 전도나 선교는 ‘상대방이 받아들일지 말지’ 먼저 계산하기보다, 하나님이 이미 그를 준비하셨다는 확신으로 담대히 권면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장재형목사는 전 세계 여러 국가와 도시에 교회를 세우면서, ‘먼저 가서 선포하고, 함께 말씀을 공부하며, 반응하는 이들을 찾는’ 방식을 택했다. 이는 곧 “전도나 선교의 성패를 인간적인 열매로 판단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준다. 하나님의 타이밍과 섭리 안에서, 남은 자들은 반드시 말씀 앞에 반응하게 되어 있다.

특히 장재형목사가 역설하는 것은 “남은 자 사상을 가진 전도자에게 필요한 것은 복잡한 기획과 치밀한 전략 이전에, 늘 깨어 있는 영성”이라는 점이다.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잠들었을 때조차 천사의 터치와 음성을 놓치지 않았다. 오늘날 교회 지도자와 평신도 리더들은 영적으로 민감하게 깨어 있을 때,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들을 신기하게 만나게 되고, 그들과 함께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나가는 은혜를 체험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신자는 늘 성령 안에 거하며, “주여, 오늘 나를 통해 어떤 영혼을 만나길 원하십니까?”라고 질문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면 때때로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인물들이 교회에 들어오고, 가정이 회복되고, 공동체가 확장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고 한다.

한편, “남은 자 사상”은 종종 배타적 구별 개념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어떤 이는 ‘우리만 옳고, 세상은 다 틀렸다’라는 잘못된 우월감으로 흐르기도 하는데, 엘리야 이야기를 자세히 보면 하나님은 엘리야의 그릇된 독선, 즉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라는 극단적 생각을 깨뜨리신다. 남은 자 사상은 결코 자기중심적 자랑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결국 그들을 통해 역사를 새롭게 하시는가’를 드러내는 증표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이 부분에서 늘 겸손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남은 자는 스스로 “내가 택함을 받았다”고 자부하거나 교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까지도 긍휼히 여기시고, 당신의 사역에 동참하도록 부르셨다”는 감사와 감격으로 겸손히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현대 교회가 ‘남은 자 사상’을 오롯이 반영하려면, 공동체가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를 세속적 기준에서 벗어나야 한다. 겉으로 보기에 능력이 없어 보이거나, 학력이 낮거나,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성도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남겨 두신 씨앗”일 수 있다. 실제로 엘리야가 만났던 사르밧 과부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보잘것없는 신분이었지만, 복음(구약 시대에는 언약) 역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장재형목사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한 영혼의 가치를 절대 가벼이 보지 말라”고 경고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보고 ‘이 사람은 우리 교회에 큰 도움이 안 되겠다’라고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어쩌면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 중 한 명을 놓치는 것과 같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은 자 사상’은 전도와 선교 현장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내부의 목양과 제자훈련, 그리고 성도 간의 교제에서도 중요한 지침이 된다. 교회가 성도 개개인을 ‘하나님이 남겨 두신 귀한 사람’으로 보고, 그가 가진 은사와 잠재력을 발견하고 성장시키려 할 때, 그 공동체는 생동감 넘치는 사역을 펼칠 수 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지도자가 교인들을 ‘교회 성장의 도구’나 ‘재정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버리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거룩한 유산으로 존중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여러 해에 걸쳐 ‘양육’과 ‘말씀 교육’을 강조하는 근본 이유 중 하나다. 성도가 스스로 ‘내가 하나님의 남은 자로서, 이 시대를 위한 사명을 받았다’고 깨달으면, 그 삶의 궤도 자체가 달라진다. 교회 내에서나 가정, 직장, 사회 어느 영역에서든지, 하나님이 나를 통해 누구를 만나게 하실지, 어떤 일을 이루게 하실지 설레고 기대하게 된다.

이를 위해 장재형목사가 구체적으로 제안하는 방법 중 하나는 ‘함께 말씀 읽기’와 ‘말씀을 통한 실제 기도 훈련’이다. 예를 들어, 어떤 교회에서 이미 마련된 1년 혹은 2년 성경 통독 커리큘럼이나 소그룹 분반 공부 시스템을 활용할 수 있다. 상파울루나 뉴욕, 또는 아프리카의 작은 교회처럼 환경과 여건이 매우 다른 여러 지역에서도, 결국에는 “말씀을 함께 읽고, 그 말씀에 대해 자유롭게 나누며, 함께 기도하고, 실천사항을 점검하는” 기본적 구조가 갖춰졌을 때 사람들의 삶이 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새로운 프로그램을 기획하기 전에, 이미 우리 손에 주어진 말씀을 중심으로 철저히 돌아가고 있는지 먼저 확인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움직였고, 엘리사가 그 ‘말씀’ 아래에서 훈련을 받았으며, 남은 칠천 명 또한 결국 바알의 거짓 메시지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린 자들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엘리야 이야기와 남은 자 사상(Remnant Theology)은 현대 교회가 견지해야 할 중요한 본질과 실천 방향을 제시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원리를 바탕으로, 교회가 사회적 세력 확장이나 눈에 보이는 성공을 좇기보다는, 먼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 위에 서서, ‘남은 자’를 발견하고 세워 가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과정을 통해 교회는 엘리야가 극심한 두려움에서 회복되어 다시 이스라엘의 개혁을 이끌었던 것처럼, 이 시대에 새로운 영적 부흥을 일으키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부흥은 결코 거창한 외적 행사나 인간적인 영향력이 아니라, 숨어 있는 칠천 명 같은 이들을 찾아내고 그들과 함께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렇듯 장재형목사의 사역과 그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이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하셨으니, 우리가 그분의 섭리와 예비하심을 신뢰하고 담대히 나아가되, 동시에 늘 겸손함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양육하라”는 데 있다.

열왕기상 19장의 엘리야 이야기는 단지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엘리야처럼 사명에 지쳤을 때 우리에게 찾아와 부드럽게 쓰다듬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또한 ‘나만 남았다’고 절망하기에는, 하나님이 이미 너무나 많은 숨은 제자와 동역자들을 예비해 두셨음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혼자라고 느끼는 순간마다, 이 말씀을 다시 떠올리며 용기를 내야 한다. 교회가 이런 용기로 충만해질 때, 불가능해 보이던 성시화 운동, 국가 개혁, 열방 선교 등의 광대한 꿈도 현실이 될 것이다. “바람, 지진, 불”과 같은 극적인 표적만 기대하지 말고, 그 후에 들려오는 “세미한 음성”을 놓치지 않는 영적 민감함이야말로, 현대 교회가 새롭게 회복해야 할 가장 긴급한 덕목이다.

정리하자면, 엘리야의 이야기를 통해 배우는 ‘남은 자 사상(Remnant Theology)’은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선교지 현장을 모두 아우르며 우리 신앙의 좌표와 목적을 재정립해준다. 장재형목사는 이 원리를 실천하기 위해, 현장 선교를 통한 ‘준비된 영혼 찾기’, 교회 내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히 여기며 말씀으로 양육하기’, ‘하나님 동행에 대한 실감 있는 체험’을 강조해 왔다. 이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모든 역사의 주권자가 되신다”는 대전제를 붙들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엘리야처럼 우리도 때로는 두려움과 외로움 속에서 흔들릴 수 있지만, 결코 포기하거나 물러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숨겨 두신 칠천 명을 찾기 위해 계속 나아갈 수 있다. 이러한 교회와 성도들을 통해,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확장되고, 세상은 구원의 소식과 하나님 나라의 정의, 그리고 거룩함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여정 가운데 장재형목사를 비롯한 많은 영적 지도자들은,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처럼, 다음 세대에게 기름을 부으며 하나님의 사역을 계승하게 할 것이다. 그 길에 동참하는 모든 이가 바로 시대의 엘리야요, 칠천 명의 일부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www.davidjang.org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