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 13장 13–14절은 한 인간의 내면과 교회의 역사를 동시에 뒤흔든 말씀으로 기억된다. 성 어거스틴이 《고백록》에서 들려준 장면은 유명하다. 정원에 앉아 괴로움 속에 있던 그는 “톨레 레게(tolle lege), 집어서 읽어라”라는 아이의 노랫소리를 듣고 성경을 펼쳤고, 눈앞에 마주한 구절이 바로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였다. 그 순간 그는 과거의 방황을 내려놓고 삶의 방향을 돌렸다. 장재형목사는 이 이야기를 단지 옛 성인의 일화로 끝내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명령을 신자의 정체성을 바꾸는 실제적 힘으로 해석하며, 은혜가 사람을 어떻게 새롭게 이끄는지를 오늘의 언어로 차분히 설명한다.
옷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신분을 드러내는 표지다. 의사가운을 입으면 몸가짐이 달라지듯,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은 자연히 그분의 마음과 걸음에 맞추어 살아가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진정한 은혜를 입은 사람은 세마포를 더럽히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자신을 단정히 지킨다”고 말한다. 억지로 끌고 가는 금욕이 아니라, 은혜의 끌림에 응답하는 방향성의 변화가 핵심이라는 뜻이다. 그 변화는 일회성 각성이 아니라 삶 전체를 부드럽게 재배치하는 힘으로 나타난다. 예배에서 받은 감동이 월요일의 선택으로 번역되고, 작은 선택이 쌓여 인격의 윤곽을 새긴다. 은혜는 번개처럼 임할 수 있으나, 성품의 변화는 보슬비처럼 스며든다.
바울이 이 권면을 보낸 시대의 풍경은 오늘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로마 제국은 강력했지만 도덕은 해이했고, 고린도는 번영했지만 방종이 일상이었다. 바울은 그 시대의 죄를 세 쌍으로 요약한다. 방탕과 술 취함은 밤낮을 가리지 않는 쾌락의 연쇄를, 음란과 호색은 양심이 마비돼 부끄러움을 잃은 성적 타락을, 다툼과 시기는 관계를 허무는 외적 폭력과 내적 부패를 가리킨다. 장재형목사는 이 목록을 오늘의 장면으로 옮겨 적는다. 무한 스크롤과 과도한 자극, 댓글 전쟁과 비교의 문화, 상업화된 욕망의 공급망은 로마의 광장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라”는 요청은 더 절실해졌다. 여기서 ‘낮’은 모든 것이 드러나는 하나님 앞의 공간을 뜻한다. 빛의 자녀는 숨김 없이 산다. 드러냄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삶은 간결해지고, 간결함이 지속되기에 공동체는 신뢰를 회복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씀이 “하지 말라”로만 채워진 금욕의 규칙집은 아니다. 바울의 결론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다. 비움보다 채움이 먼저라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갈라디아서 5장을 함께 펼쳐 보인다. 육체의 일은 의지력만으로는 끊기 어렵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같은 성령의 열매는 노력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머무를 때 ‘맺히는’ 결과다. 그는 회개를 “마음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라 부른다. 행동으로 드러나기 전에 생각과 욕망이 손을 맞잡기 마련인데, 말씀과 기도로 그 손을 먼저 붙잡아 끊어내는 일이 회개라는 것이다. 그래서 장재형목사의 강해에는 매일의 리듬이 따라붙는다. 짧고 잦은 기도로 욕망의 흐름에 브레이크를 걸고, 말씀 묵상으로 생각의 프레임을 바꾸며, 공동체의 상호 권면과 돌봄 속에서 드러난 죄를 즉시 고백하고 끊어내는 습관을 쌓으라고 권한다. 이렇게 준비된 마음에서는 죄의 계획이 자라기 어렵다.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이 바로 그 지점을 겨냥한다. 도모는 계획이고, 계획은 시스템이다. 거룩도 시스템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공동체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 장재형목사는 교회를 ‘대조적 공동체’로 묘사한다. 세상과 등을 지는 도피처가 아니라, 세상 가운데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함으로 복음을 비추는 등대라는 뜻이다. 소비와 효율이 전부인 질서 속에서 나눔과 안식을 회복하고, 경쟁과 비교가 일상인 공간에서 축복과 격려를 일상의 언어로 만들며, 실패를 숨기는 문화에서 회개와 용서를 숨기지 않는 질서를 세우는 공동체. 대조가 선명해질수록 복음의 향기는 진해진다. 그는 에베소서 6장의 전신갑주와 로마서의 ‘빛의 갑옷’을 나란히 읽으며, 기도와 말씀, 의의 실천과 평안의 복음이 공동체의 표준 복장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옷은 매일 바꿔 입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결단도 매일 새로워져야 한다. 어제의 결단은 오늘의 방심을 막아 주지 못한다. 오늘의 기도만이 오늘의 유혹을 이긴다.
디지털 시대의 특수성도 놓칠 수 없다. 알림은 우리의 취약 지점을 정확히 찌르고, 알고리즘은 욕망의 약한 연결고리를 학습한다. 장재형목사는 ‘영적 사분면’이라는 간단한 설계를 제안한다. 무엇을 끊을지(디지털 금식, 알림 비우기, 취침 전 스크린 오프), 무엇을 채울지(시편 낭독, 말씀 오디오, 짧은 감사 기도), 누구와 함께 갈지(멘토, 동행자, 소그룹)를 미리 정하라는 것이다. 회개는 결심이 아니라 설계라는 말이 여기서 힘을 얻는다. 설계가 바뀌면 생활 패턴이 바뀌고, 패턴이 바뀌면 욕망의 흐름이 달라진다. 흐름이 달라지면 죄의 씨앗은 자라지 못한다. 이렇게 시스템으로 구현된 거룩은 꾸준하고 현실적이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책임의 감각도 자라난다. 장재형목사는 그리스도로 옷 입은 교회가 공적 선을 증언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터에서 정직을 선택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타인의 성공을 축하하는 문화가 강단의 설교와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한다. 다툼과 시기가 지배하는 자리에서 화해와 격려를 실천하는 소수의 용기는 놀라운 전염력을 갖는다. 초대교회가 혹독한 핍박 속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았던 이유는, 개인의 영성이 공동체의 돌봄과 만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신약의 자주 쓰이는 단어 ‘서로’를 강조한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납하며, 서로 짐을 지는 삶이야말로 세상을 향한 가장 강력한 변증이라는 것이다. 거룩은 혼자서 완성되지 않는다. 함께 살 때 증명된다.
넘어짐은 누구에게나 있다. 중요한 것은 넘어짐의 빈도가 아니라 돌아섬의 속도다. 장재형목사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한다. 옷이 더러워졌다면 곧바로 갈아입으면 된다. 회개에는 유효기간이 없고, 성령은 우리를 다시 일으키시는 분이다. 죄책감에 매여 주저앉을 이유가 없다. 신자는 매일 새 옷을 입는다. 그 옷의 이름이 곧 예수 그리스도다. 이 단순한 진리가 일상의 리듬이 될 때, 빛의 자녀들은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다.
결국 이 본문은 ‘하지 말라’의 목록으로 시작해 ‘입으라’는 초대로 완성된다. 비움만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채움이 있을 때 비움은 의미를 얻는다. 장재형목사의 강해는 이 균형을 삶으로 이끈다. 말씀은 욕망의 근육을 재구성하고, 기도는 하루의 리듬을 조율하며, 사랑의 섬김은 삶의 나침반을 북쪽으로 고정한다. 이렇게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이 모이면 대조적 공동체가 되고, 그 공동체는 세상 한복판에서 복음의 실재를 비춘다. 어거스틴에게 들렸던 “톨레 레게”의 초청은 오늘도 유효하다. 성령께서 귀를 열어 주실 때, 말씀은 다시 들리고 우리는 다시 일어선다. 방탕과 음란, 다툼과 시기의 낡은 옷을 벗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길. 이것이야말로 오늘의 신자에게 주어진 가장 현실적이고도 영광스러운 부르심이며, 그 부르심을 맑은 목소리로 안내하는 설교 가운데 장재형목사의 로마서 강해는 유난히 선명하다. 은혜는 사람을 새롭게 하고, 회개는 길을 열며, 공동체는 그 길을 함께 걷게 한다. 이 세 겹의 끈이 하나로 묶일 때, 우리는 빛의 갑옷을 입은 자로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변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