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드러난 대속의 길 – 장재형목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구원의 핵심이며, 동시에 인류의 죄와 하나님의 사랑이 극적으로 교차되는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 19장 17절부터 27절까지 기록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과정은 그 어느 복음서보다 간결하면서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해 줍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골고다라 불리는 해골의 언덕으로 가셔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장면이 매우 짧게 묘사되지만, 그 안에는 헤아릴 수 없는 비극과 동시에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을 묵상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혹독하고 처절한 것이었는지를 기억하며, 그 길이 곧 나를 위한 대속의 길이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드러난 모든 사건과 모습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무한한 겸손과 헌신, 그리고 죄로 얼룩진 세상의 잔혹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증언”임을 강조합니다. 이 말씀을 바탕으로, 십자가로 향하시는 예수님의 걸음과 그 곁을 지켰던 사람들, 그리고 그 자리에 동원되었던 로마 군인들의 모습까지 하나하나 천착해 보고자 합니다. 오직 하나의 소주제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라는 대주제 아래에서 모든 내용을 통합하여 정리하되, 그 속에 담긴 보편적이고도 영원한 복음의 진리와 교훈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넘겨지는 과정을 보면, 먼저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유대인들의 엄청난 압박과 거짓된 참소로 인해 사형 언도를 받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음을 어느 정도 직감했지만, 결국 로마 총독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지키고 유대 지도자들과 민중의 폭동을 방지하기 위해, 예수님께 십자가 형을 언도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도가 내렸던 결정 가운데 변화되지 않았던 한 가지가 있었는데, 바로 십자가 위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붙이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고 항의했지만, 빌라도는 “내가 쓸 것을 썼다”라고 단언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심을 오히려 선포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가리켜“아이러니 속에서 드러난 진리”라고 말합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정치적 계산에 의해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몰았지만, 동시에‘진실한 왕’이 예수님이심을 자기 손으로 선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판단과 죄악된 의도가 얽혀 있는 역사 한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섭리가 드러나는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신 골고다의 길은, 유대인의 전통적 죄의식과도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구약 레위기 16장에는‘속죄일’에 관한 규정이 나옵니다. 대제사장은 염소 두 마리를 준비해 하나는 여호와께 속죄제로 바치고, 다른 하나는 온 백성의 죄를 전가받아 광야로 내보내 버립니다. 죄 없는 짐승이 사람들의 죄를 대신 져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혹은 광야로 쫓겨나 죽임을 당하는 방식으로 이스라엘 공동체가 죄 사함의 은총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속죄양(scapegoat)’의 죽음을 통해 백성들의 죄가 사해진다는 유대 전통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궁극적이고 영원한 완성에 도달합니다. 이사야 53장 또한 이러한 ‘고난받는 종’의 이미지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사 53:5).” 주님은 마치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같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고난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완성하신 곳이 골고다 언덕이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사야 53장과 요한복음 19장을 함께 묵상하며 “예수님께서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실 때, 그것이야말로 이사야 선지자가 바라본 고난의 종 예언이 성취되는 현장이었다”고 강조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주님이 죄수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직접 지고 걸어가셨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형은 고대 로마의 사형 제도 중에서도 가장 잔인하고 치욕스러운 방법이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자는 이 형에 처해지지 않았고, 주로 피지배 민족이나 극악범들에게 선고되었으며, 사형수는 자신이 죽을 형틀인 십자가를 직접 지고 도시 곳곳을 돌아 처형장으로 갔습니다. 이는 죄인에게 최고의 치욕을 안기고, 동시에 시민들에게 ‘반역하면 이렇게 죽는다’라는 경고 효과를 주기 위한 잔혹한 의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이미 유대인들에게 매와 채찍, 조롱과 모욕을 당해 몸이 심각하게 지친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마태복음 27장과 마가복음 15장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너무 쇠약해져 쓰러지시자, 로마 병사들이 구레네 사람 시몬을 억지로 끌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합니다. 시몬은 북아프리카의 구레네, 곧 현재의 리비아 지역에서 왔는데,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순례차 왔다가 예수님의 극형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방인으로서 특별한 의도가 있던 것도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영광(?)스럽고도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마가는 시몬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소개하는데, 나중에 로마서 16장 13절에서 바울이 문안하는“루포”라는 인물이 시몬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를 통해 교회 전승은 시몬과 그의 가정이 십자가 사건 이후 기독교 공동체의 중요한 멤버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어떤 이는 십자가를 억지로 지지만, 그 억지의 상황에서도 주님의 고난을 함께 경험하게 되면 오히려 그것이 축복의 통로가 된다”라고 설명합니다. 시몬은 본디 여행자로서 잠시 예루살렘에 머무르다 돌아갈 예정이었을지 모르지만, 십자가를 짊어진 그 경험이 그의 인생과 가정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행렬은 인간의 악한 제도와 권력의 폭력성, 그리고 무관심한 군중들의 시선 속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옷이 벗겨지고, 가시면류관을 쓰신 채 조롱받고, 몽둥이와 채찍에 맞으시며, 갈보리 언덕까지 그 고통을 감내하셨습니다. 갈보리(골고다)는 히브리말로 해골이라는 뜻인데, 참혹한 형벌의 장소라는 이름에 걸맞게 사방은 처형된 자들의 뼈나 해골이 굴러다니는 흉측한 곳이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극악한 범죄자들과 동일 선상에 놓고 싶었기에, 두 강도를 예수님의 좌우편에 배치함으로써 예수님을 더욱 치욕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이 양쪽 강도 사이에 매달린 모습은 역으로 예수님의 무죄함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극적으로 부각하는 장면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수치와 조롱의 상징이었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도리어 구원의 능력과 은혜의 보좌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강도들과 똑같은 형벌을 받으셨지만, 실제로는 죄가 없으심에도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참된 희생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9절 이하에서는 빌라도가 작성한 명패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에 대해 대제사장들이 분개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고 빌라도에게 항의했으나, 빌라도는 “내가 쓸 것을 썼다”라고 못 박습니다. 이 짧은 대화 안에는, 이미 한 번 결정된 ‘유대인의 왕’이라는 호칭이 취소될 수 없음을 시사합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음에도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를 거부했고, 오히려 로마 총독인 빌라도를 통하여 그 표현을 철회하게 만들려 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자기 권위로 쓴 문구를 번복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온 세상에 “예수께서 진정한 왕이시다”라는 말을 로마어(라틴어), 헬라어(그리스어), 히브리어로 동시에 알려 버린 셈이 되었습니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이 사건에 담긴 상징적 의미를 분명히 인지했고, 독자들이 “십자가 위에서 완성된 하나님의 왕 되심”을 깨닫도록 기술하고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악의와 잔꾀조차도 당신의 구원 계획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나 어떤 다른 길로 갈 수 없는 존재이며,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는 불의한 행동마저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목적을 실현하는 경로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요한복음 19장 23절 이하에서는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지는 모습이 기록됩니다. 당시 십자가형을 집행하는 병사들은 사형수의 마지막 소지품을 자신들끼리 나누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옷도 그렇게 네 명의 군병이 각각 한 부분씩 차지했고, 통으로 짠 속옷에 대해서는 찢지 않고 제비를 뽑아 소유를 결정했습니다. 요한은 이 장면을 시편 22편18절(“그들이 내 옷을 나누며 내 겉옷을 제비 뽑나이다”)과 연결 지어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모습 속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한 가지 진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진 모든 것을 다 빼앗기셨고, 심지어 마지막 몸을 가릴 옷마저도 군병들이 나누어 가지려는 장면이 펼쳐졌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완전한 비움”의 극치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에도 머리 둘 곳이 없으셨다고 기록되지만(마 8:20), 마지막 운명하시기 직전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신 상태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기꺼이 전부를 버리셔서, 궁극적으로 우리를 위한 대속물이 되셨다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그 어떤 소유도 주장하지 않으시고, 오직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시는 희생으로 남으셨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두 가지 대조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옷까지도 제비뽑기로 차지하려는 군병들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내주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세상은 탐욕스러운 군병처럼 남의 것까지 빼앗으려 하지만, 예수님은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이 대비는 곧 인간 죄성의 극명한 단면과,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완전한 희생인가를 동시에 상기시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군병들의 모습이 아닌,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쏟아부으신 예수님의 삶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오늘날‘소유’에 집착하는 현대인에게 주는 강력한 도전입니다. 탐욕에서 벗어나,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겸손과 나눔, 그리고 자기 희생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종종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조차 각자 나눠 가질 몫을 찾아 다투는 모습과 비슷해지기도 한다”라고 지적하며, “우리는 언제나 십자가 아래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셨던’ 주님을 바라보며, 소유와 탐욕을 회개하고 버리는 결단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다음으로 요한복음 19장 25절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었던 몇몇 여인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이모 살로메(마가복음에 의하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가 그 현장에 서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당시 여성들은 사회적 지위가 낮았고, 남성 제자들처럼 공식적 제자로 부름받지 못했으나, 역설적이게도 십자가 최후의 현장에는 바로 이 여인들이 끝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그곳은 극악한 처형이 이뤄지고 있는 공포스러운 자리였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되는 죄인의 측근으로 보이면, 자칫 로마 당국자들로부터 연대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을 지키기 위해 그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이는“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요일 4:18)는 말씀을 생생히 보여 줍니다. 장재형목사는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떠한 위협과 공포도 그 발길을 붙잡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여인들을 바라보시며,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서로를 맡기십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2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육신의 어머니를 끝까지 돌보시는 깊은 효심을 드러내기도 하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믿음으로 맺어진 새로운 가족”의 개념을 제시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나님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마 12:48-5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마리아는 육적 어머니이면서도 주님의 길을 따라야 할 믿음의 제자 중 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상에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부르실 때, 이는 ‘단순히 육신적인 모자(母子) 관계’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서로를 돌봐야 하고, 주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가족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의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원리를 확립하시며, 남겨진 자들을 향한 사랑을 마지막까지 베푸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삶 전체가 마치 하나의 대서사시처럼 완성되는 순간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심으로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지니셨으나, 죄는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공생애 동안 하늘나라 복음을 전파하시며,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고치시고, 죄인들과 세리, 창녀들에게 다가가 구원의 소망을 선포하셨습니다. 결국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와 민중의 오해 속에서 극형을 선고받으셨으나,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고 십자가에서 운명하십니다. 인간이 보기에는 비극이었으나, 하나님의 시선에서는 죄악된 세상을 향해 독생자를 내어주신 최고의 사랑이었고, 거룩한 대속의 사건이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서로 입맞추는 자리”라고 표현하며, 그 이유를 “십자가는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이 드러나는 동시에, 죄값을 치루는 정의가 완성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라 설명합니다.

유월절 시기라는 배경 역시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합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중, 어린 양의 피로 죽음의 사자가 지나가도록 했고(출 12장), 이를 기념하여 해마다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바로 유월절 기간에 일어났습니다. 이는 단순한 역사적 우연이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신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값을 단번에 치루시는 것을 예표하고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말미암아, 죄인인 우리는 영원한 죽음의 형벌에서 해방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출애굽 사건에서 생명의 보호막이 되었듯이, 예수님의 피가 죄인을 구원하는 능력이 된다는 점이 극적으로 부각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길은 단순한 죽음의 행진이 아니라, 인류 구원의 사명을 완수하는 승리의 행진이기도 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롱과 모욕, 고통과 피가 가득한 처절한 패배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실제 영적 실재에서는 죄의 권세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승리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선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다 이루었다”(요19:30)였다는 사실에서도, 이 길이 패배가 아닌 완성임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단지 슬픔과 고통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너머에 있는 부활의 승리를 함께 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영원한 생명의 관문으로 전환되었고,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평강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기록된 십자가 사건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차원의 적용점을 깨닫게 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원수를 사랑하라”(마 5:44)고 하셨을 때, 이는 결코 추상적인 윤리적 명령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직접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 로마 군병들과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무리들의 조롱과 폭력을 몸소 겪으며, 그들을 향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말로만 사랑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악의 증오를 모두 받아내고도 끝내 저주와 복수를 외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분은 선으로 악을 이기셨고(롬 12:21), 원수에게조차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드러내셨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과 실제 삶이 완전히 일치했던 결정적 증거”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른다면, 가정과 직장, 사회와 인간관계 안에서 증오와 분노를 내려놓고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둘째, 십자가는 “서로의 짐을 지는 공동체”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2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저주, 그리고 연약함을 짊어지셨듯, 우리도 서로의 슬픔과 고통, 부족함과 상처를 함께 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철저히 타인을 위한 희생이고 나눔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십자가를 묵상하고 믿는다면, “나만 구원받았다”는 개인적 만족에 머무르지 않고, 교회와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 공동체 안에서 약한 지체가 있다면, 그것이 곧 내 문제임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야말로 십자가 정신의 구현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십자가 신앙은 결코 독립된 ‘나’의 신앙으로만 존재할 수 없다. 주님이 피 흘려 사신 공동체 속에서 서로 연대하며 서로의 짐을 나눌 때, 십자가가 교회 안에서 현재적 능력으로 살아 움직이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 있었던 여인들의 모습과 제자 요한의 모습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남성 제자들은 대부분 두려움에 도망쳤지만, 연약해 보이는 여성 제자들은 끝까지 남아 주님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와 당부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27)는 말씀은, 육신의 어머니를 위한 예수님의 마지막 가족적 사랑의 표현이자, 동시에 믿음 안에서 맺어진 영적 가족을 향한 선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시고, 그 믿음 안에서 서로를 돌보고 연합하는 교회를 탄생시키실 것입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어떤 마음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하는지를 더욱 선명히 알려 줍니다.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사건을 통해 요한복음 19장 17절부터 27절에 이르기까지 드러나는 핵심 메시지는, 첫째로는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죽음까지 감당하신 대속의 희생이며, 둘째로는 그러한 희생을 통해 인간의 구원이 가능하다는 사실이고, 셋째로는 그 희생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주님은 새로운 공동체의 가족애와 부활의 소망을 주신다는 점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시선은 애통함에 그쳐서는 안 되고, 그 깊은 고통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인식해야 합니다. 또한 십자가 사건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재현되도록, 원수를 사랑하고, 서로의 짐을 지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십자가 묵상의 결론으로 “우리도 자신이 지고 가야 할 십자가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자기 십자가’는 우리의 이기심, 죄성, 세상적 욕망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본받아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희생할 것을 의미합니다. 구레네 시몬처럼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게 되면, 그 속에서 뜻밖의 축복과 영적 각성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로서,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해야만 합니다.

이처럼 요한복음 19장 17-27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구약의 속죄 제사와 고난받는 종의 예언, 신약에서의 죄 사함과 구원의 성취,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출발을 집약적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골고다라는 해골의 언덕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처참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구원 경륜 속에서는 가장 영광스럽고도 승리의 자리입니다. 흑암과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빛과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셨고, 부활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믿는 모든 이에게 죄 사함과 영생, 새로운 삶의 기준과 희망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할 때마다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말씀을 나눌 때, “우리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2)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십자가 사건을 다시 묵상하면 할수록 우리 심령 깊은 곳에서 감격과 감사가 솟아나야 합니다. 예수님이 단지 위대한 스승이나 철학자가 아니라, “나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신 구주”라는 사실을 더욱 온전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 깨달음이야말로 우리 일상에 파급력을 가지며, 이기심과 탐욕, 분노와 미움, 두려움과 염려를 대속의 사랑으로 녹여 내는 원동력이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십자가를 붙든 자는 결코 예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며, “그리스도인이라면 십자가의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스스로의 십자가를 지고 죽음까지 감당하신 것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결정적 구원 행위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 날에 예수님의 죽음을 조롱하고, 서로 이득을 챙기며, 혹은 외면했지만, 소수의 여인들과 사랑하는 제자 요한은 끝까지 주님의 곁에서 그 고통과 슬픔을 함께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조차 자신을 못 박는 자들을 용서하시고, 어머니를 제자에게 부탁하시며, “다 이루었다”는 선포로 모든 대속의 사역을 완수하셨습니다. 십자가는 한 인간이 처참하게 죽어 간 사건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죄인을 다시 품으시는 사랑의 시작이며, 부활의 문을 여는 열쇠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 19장에 기록된 십자가 사건을 단순히 고통스러운 역사적 비극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는 우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거룩한 작정이 있고, 하나님의 공의가 있고, 무엇보다도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 있습니다. 교회가 붙들어야 할 핵심 진리는 바로 여기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이 십자가 위에서 완벽히 구현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한다면, 삶의 방향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탐욕과 물질주의, 무관심과 분노가 가득한 세상 속에서, 기꺼이 자신을 드리며 이웃을 섬기고 진리의 길을 걷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기억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길을 따라갈 때,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과 기쁨, 그리고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고, 십자가 없이는 생명이 없다”는 바울의 고백(갈 6:14)을 자주 인용하면서, “십자가가 교회의 모든 기초이며, 또한 모든 생명의 원천”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그 말대로, 교회와 성도의 참된 능력과 영광은 화려한 외형이나 세속적 부유함에 있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죽음과 고난을 끊임없이 기억하며, 그 사랑을 실천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죄인인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었고, 그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오늘도 회개하고 돌아서며, 은혜 안에서 새 생명을 누립니다. 이것이 없으면 기독교 신앙은 공허한 껍데기에 불과할 것입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 생명이 있고, 거기서 비로소 부활의 영광도 열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길을 따라가며, 다른 이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요한복음19장 17-27절에서 시작된 이 십자가 이야기는, 결국 부활의 아침까지 이어져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어젖히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성도들이 이 복음의 빛 속에 살아가며, 십자가의 사랑과 진리를 전파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요약하자면,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라는 위대한 사건은 죄인 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가장 극단적이며 결정적인 사랑의 표현이며, 동시에 죄와 사망의 세력을 영원히 파멸시키는 승리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두고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설의 현장”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죽음과 패배, 치욕과 모욕이 난무한 현장 같았지만, 사실은 그곳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 그리고 극진한 구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교만과 욕심, 불의와 잔혹함이 낱낱이 폭로되지만, 동시에 무한한 사랑과 은혜, 그리고 부활의 소망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대속의 현장인 십자가를 붙들고, 나 자신과 교회 공동체, 그리고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 ‘살아 있는 복음’으로 적용되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죄 용서와 구원이 임했다는 이 진리를 다시금 가슴에 새긴다면, 우리의 예배와 기도, 그리고 이웃 사랑과 봉사, 복음 전파가 모두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어둠에 속한 자들이 아니며, 탐욕과 이기심에 사로잡혀 살 존재들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자기를 버리는 사랑”을 삶 속에서 재현하고, 골고다 언덕에서 흘려주신 보혈의 의미를 붙들고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 각자의 인생과 교회가 참된 능력과 기쁨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정체성이요 사명입니다. 그리고 장재형목사는 이 사실을 언제나 가르쳐 왔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문턱마다, 십자가가 가장 앞서며, 십자가가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해야 한다.” 십자가 없이는 어느 것도 온전할 수 없음을 깊이 인식하면서, 매일의 걸음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묵상하고, 그 사랑을 이웃과 세상에 흘려보내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종교적 상징이나 형식적 장식물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마음 그 자체입니다. 성자 예수님의 순종과 희생, 성부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리고 성령님의 능력이 한꺼번에 결집된 사건이 곧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죄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감히 “주님,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고백이 우리의 입술에만 머무르지 않고 실제 삶이 되려면, 매일 십자가를 붙들고 예수님의 심장을 닮아 가는 꾸준한 영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 훈련 속에서 탐욕과 교만이 녹아지고, 무관심이 사랑으로 변화되며, 갈등이 화해로 이어지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따라서 요한복음 19장 17절부터 27절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역사상 가장 처절한 비극이면서 동시에 가장 찬란한 희망의 순간입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묵상할 때마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했듯 “십자가가 우리의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름받은 이상, 우린 다시금 결단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비웃던 군중이나, 십자가 아래서 마지막 옷까지 가져가려던 군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레네 사람 시몬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같이 지고, 여인들과 요한처럼 끝까지 주님 곁을 지키며, 그 사랑에 감사하고 자발적 헌신으로 답하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베풀어진 용서를 힘입어, 어떤 원수라도 사랑하고, 서로 짐을 져 주며,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는 일에 열정을 쏟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그분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보혈이 우리의 죄와 상처를 정결케 하고, 우리의 교회와 공동체, 사회와 열방까지도 회복시키는 능력이 됨을 믿음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라는 주제는 신앙의 본질을 압축해 놓은 결정체이자, 우리 신앙 여정의 출발점이자 목표 지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는 교회도, 구원도, 제자도도, 부활과 영생도 없습니다. 장재형목사가 여러 설교를 통해 거듭 강조해 온 바와 같이, 우리는 이 십자가를 늘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의 풍조가 바뀌고, 역사의 물결이 거세도, 십자가 위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 겸손히 엎드려 회개하고, 감격과 감사로 주님을 예배하며, 우리의 작은 삶 속에서라도 십자가의 은혜를 나누는 것이 우리가 지녀야 할 최고의 기쁨이자 특권입니다. 이 은혜를 날마다 기억한다면, 세상에 줄 수 없는 평강과 위로, 능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요한복음 19장 17-27절”이라는 짧은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더욱 깊이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길은 단지 1세기 예루살렘의 역사적 사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믿는 자의 심령과 공동체 안에 다시 살아나는 ‘현재진행형 은혜’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은혜가 교회와 성도를 계속해서 깨우고, 세상의 구석구석에까지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동력이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과해야만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 있으며,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진정한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십자가의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우리도 각자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결단을 새롭게 다지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참된 왕이시고, 대제사장이시며, 구원자이십니다. 그리고 그 왕의 백성으로, 그 대제사장의 맡긴 사역을 이어받는 자로, 그 구원자의 은혜를 세상에 선포하는 자로 살 때, 우리 역시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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